이제 어지간히 헤맸나 보다. 회귀 본능 같은 것을 자주 느낀다. 예식장 뷔페에서 고급 음식들을 배불리 먹었는데도 허전하다. 뒷맛이 개운치 않다는 이들도 같은 정서일 것이다. 귀소성은 훗날 거개가 느끼는 공통된 감정 같다.
옛날 도장간에서 받았던 잔칫상은 보통 집에서 먹던 밥상하고는 달라 애최 황홀감에 빠져들었다. 윗말 할머니가 부조한 감주가 혀를 감치고는 목구멍으로 꿀꺽해 버렸다. 토종 메밀묵을 젓가락으로 집기가 간지러웠다. 놋젓가락과 메밀묵이 겉도는 것 같다. 메밀묵을 초고추장에 묻히면 입안에서는 침이 곤두박질한다. 쫄깃한 잔치 국수를 빼놓으면 잔칫집에 온 기분이 안 날 것이다. 가마솥에서 우려낸 멸치 다시 물에 국수 한 줌 적시고는 양념간장을 얹어 준다. 비싼 재료도 안 쓰고, 별난 요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국수만의 풍미는 잔칫집의 터줏대감이었다. 요즘 아무리 느껴 보고 싶어도 좀처럼 그 맛을 만나기 어렵다. 옛날의 잔치 국수는 여전히 물음표다.
씩씩거리며 도장을 빠져 나오면 마당에는 교배례가 시작되었다. 사모관대를 두른 신랑이 정중히 엎드리면 신부의 족두리가 땅바닥에 닿으며 백년가약을 다짐한다. 시자가 받쳐 든 모형 기러기가 두 사람의 금슬이 어떠해야 함을 귀띔한다. 초례상 위에서 교배례를 지켜보던 송죽(松竹)이 쪽빛으로 화답한다. 당가 집 떠꺼머리 머슴이 눈알을 반들거리며 침을 삼킨다. 군침이 도는 색다른 눈요기다. 집례의 창홀 소리가 뒤란에까지 무겁게 깔린다.
합근례를 끝으로 상을 물리면 구경꾼들 속에서 폐백이 이어진다. 폐백상에 놓인 삼실과에 윤이 난다. 열매를 주렁주렁 다는 대추는 자손의 흥성을, 밤은 자손에 대한 조상의 내리사랑을, 접을 붙여서 생산되는 감은 혼인을 의미한다는 말씀을 잔칫날 어른들로부터 듣는다.
폐백을 보고나면 어김없이 새신랑 다루기로 접어든다. 얼굴에 숯검정을 바르고는 뒤로 넘어뜨려 발바닥에다 매를 친다. 장모를 불러 감춰 뒀던 음식을 꺼내오게 함이다. 새신랑 입에서 첫 `장모` 소리를 이끌어 내는 것도 이 때다. 사위에게 매를 칠 때 안절부절못하는 장모의 안달을 놀이꾼은 즐긴다. 큰손 치려고 다락방에 숨겨 두었던 등심살, 육회, 문어, 치자로 물들인 갖가지 전들이 쏟아져 나온다. 사위가 맞는데 상객인지 뭔지 장모 눈에는 뵈는 게 없다.
오늘 최신식 고급 예식장에 가서 축의금을 내밀었더니 답례로 봉투를 줬다. 점심 식사로 대체하는 모양이다. 어떤 이는 그것을 받고는 바로 옆 실로 옮겨간다. 그렇다. 또 다른 집의 하객으로 가야 되는 것도, 축의금으로부터 봉투를 건네받는 모습도 이젠 어색하지가 않다. 수모가 안내하는 판에 박힌 폐백은 통과의례에 불과하니 고유한 폐백 문화를 지켜보는 구경꾼도 없어졌다.
갑자기 로비에 와글대는 하객들이 다 축의금으로 보인다. 옛날 정성껏 부조한 감주나 곡주가 지금은 봉투로 해결되는 시대에 나는 서 있다. 정성이나 인정 같은 것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예식장 안은 규격품, 기성품으로 채워져 있다. 뷔페 문화는 이것의 극치다.
옛날 잔칫집은 다양한 문화가 숨 쉬는 날이었다. 유가의 품격이 살아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입체적 풍속을 후손들에게 보여주는 날이기도 했다. 옛 어른들은 말씀으로 가르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합일을 중시했다. 초례상이나 폐백에 담긴 의미를 어른들이 들려주는 것은 이것의 실천적 모습이었다. 손수 담근 술로 신명을 풀었던 잔칫날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날이었다.
예식장에서 볼 일을 마친 나는 주머니 속의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순간, 옛날 잔칫집에서 듣던 집례의 홀기 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부선재배(婦先再拜), 서답일배(壻答一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