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지만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과 열대야가 간간이 끼어든다. 장마 지나가면 우리는 여름의 기세에 눌려 지낼 수밖에 없다. 장마는 그런 날들이 오기 전의 짧은 축복이리라. 대구에 내리는 비가 영덕과 포항을 비켜나가기 일쑤다. 비구름대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탓이다. 그럼에도 대구와 영덕 포항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분주하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만나는 그들의 얼굴에는 화색(和色)이 없다. 짜증스럽고 화난 표정으로 걸음을 서두르는 인총들을 보노라면 적잖게 우울하다. 용케 아는 얼굴이라도 볼라치면 바쁘다는 말을 이내 내뱉는다.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사람들. 자동화된 일상의 부품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21세기 대중사회의 그늘이 날로 깊어간다. 이런 장마철에 동화 (童話) 같은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까닭은 거기 있다.
`소가 된 게으름뱅이`라는 이야기를 기억하시는가?! 열두어 살 무렵 국어책에서 본 듯하다. 놀기만 좋아하고 빈들거리며 살아가던 게으름뱅이가 어느 날 소가 된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해야 하지만, 그의 말소리는 소 울음소리로 바뀐 지 오래다. 고된 노동과 인간소외로 자살을 결심한 게으름뱅이는 먹지 말라는 무를 먹고 인간으로 환생(還生)한다. 이야기의 교훈은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라는 것이었다.
근면 자조 협동, 새마을운동, 조국근대화 같은 구호로 길들여진 지난 세기에 부지런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한국인들이 가난한 까닭을 게으름에서 본 것은 일제 총독부 관리들이나 해방이후 위정자들이나 동일하다. 부모나 조상 탓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면 먹고살 길이 열린다는 것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흙수저 금수저 따지지 말고 죽어라 노동하면 언젠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그러다가 우연히 마주친 버트란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제목부터 낯설었을 뿐 아니라, 그 내용까지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대목은 공평한 노동이다. 1935년에 집필된 서책에서 러셀은 `누구나` 하루에 3시간만 노동하면 된다고 못을 박는다. 당연히 누구나란 말에 방점이 찍힌다. 왕후장상(王侯將相)도 정신노동자도 육체노동자도 예외 없이 하루 3시간만 노동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3시간 노동하고 남는 시간을 문화와 예술분야로 돌리자는 발상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잉여노동(剩餘動)과 생산을 통한 부의 축적과 극대화한 소비가 아니라, 문화와 예술이라니!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움과 인간성의 발현을 위한 적절한 방책이라는 주장은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 누군가는 땀에 흠씬 젖어 노동할 때 누군가는 골프를 치고 해외여행을 즐기며, 산해진미(山海珍味)로 미각을 충족시키고 있다.
지구전체 차원에서 하루 3시간 노동을 설파한 러셀의 사유는 실현되지 않았다. 저임금 받으며 장시간 노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금수저 물고 나와 노동과 무관하게 일평생을 살아가는 족속(族屬)도 있다. 러셀은 이런 부당하고 불의한 현실에 경종을 울린 것이거니와,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21세기에도 이런 부당성은 개선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이 거리와 광장과 지하철에서 만난 분망(奔忙)한 표정의 인총들 사연 아닐까?!
19살 청년이 지하철 작업장에서 죽고, 시간에 쫓긴 냉방기 기사가 추락해 죽고, 30대 젊은 검사가 상관의 모욕으로 죽어나가는 한국사회! 보도되지도 않는 노동자들의 분노와 절망과 죽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자기실현과 경제적인 독립을 보장하는 노동의 가치는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옥죄는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는 장마철 젖은 대기처럼 끈적이며 달라붙는다. 청량한 한줄기 바람은 언제 어디서 불어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