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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없는 기 잉가이가

등록일 2018-06-08 20:56 게재일 2018-06-0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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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희<BR>수필가
▲ 김순희 수필가

오래전 일이다. 결혼하기 전이니 이십 년도 훨씬 전의 케케묵은 일이다. 남편(아직은 남자친구였던)이 친구를 소개시켜 준다고 해서 퇴근 후에 만나러 갔다. 대학 동기라며 경주가 집인데 포항 근처대학에서 강의를 한다고 했다. 조용한 말투의 남편과 달리 키가 크고 걸걸한 목소리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다. 헤어스타일은 주변머리만 있는 편이라 친구라기보다는 한참 선배 같았다. 하지만 두런두런 농담도 잘 건네고 식성도 좋은 것이 사람 참 좋아 보였다.

저녁은 무얼 먹었는지 정확한 기억이 없지만 남편이 계산했다. 그러자 커피는 자기가 사겠다며 일어섰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포항시외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로마’라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남편은 녹차를 시켰고 그 친구는 커피를 시킨 것 같다. 그때 난 카페인이 맞지 않는지 커피를 못 마셨다. 마시면 볼은 홍조를 띠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증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물론 티백만 띄워주는 녹차는 돈 주고 마시기 아까워서 파르페를 시켰다.

남편은 자꾸만 파르페는 맛없다며 녹차를 마시란다. 싫다, 난 녹차 싫어해. 파르페 먹고 싶다니까. 아이스크림에 과자도 올려져 있는 파르페 꼭 먹을 거야하며 우겼다. 한숨을 쉬며 종업원에게 녹차와 커피, 파르페를 주문했다. 차가 나오는 동안 두 사람은 학창시절 이야기며 전국에 흩어진 친구들 근황을 늘어놓았다.

잠시 후 화려한 장식의 파르페가 나왔다. 보트모양의 그릇에 아이스크림이 얌전하게 담겼고 작은 초코과자가 흩뿌려졌다. 웨하스가 돛대처럼 꽂혔고 그 옆에 빼빼로는 덤이었다. 작은 스푼으로 예쁜척하며 맛을 보았다. 즐거운 대화가 계속 되는 동안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가끔씩 미소를 지어주며 파르페의 시간을 마음껏 즐겼다.

파르페보트가 바닥을 보일 즈음, 경주로 가는 차시간이 되어 일어서기로 했다. 주섬주섬 일어서는데 남편은 나부터 먼저 밖에 나가 기다리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문밖에서 기다렸다. 한참 후 친구가 터미널을 향해 길을 건너갔고 우리도 차를 타고 출발했다.

집에 바래다주는 남편에게 물었다. 나부터 밖에 나가 있으라 하고 뭐 한 거냐고. 아무것도 아니란다. 뭐가 아무것도 아냐. 뭐했는데, 뭐 있잖아, 어서 말해봐.

“ 마, 그냥 녹차 먹지. ”

남편이 어렵게 입을 뗀다. 으잉? 이게 무슨 말이지. 내가 녹차를 마시지 않은 게 잘 못한 일이란 말인가?

자초지종은 이랬다. 교사발령 기다리다 경력도 쌓고 용돈도 벌 겸 대학에 시간 강사로 나선 친구였다. 대학 강사는 허울만 좋지, 적은 강사비로 포항까지 왔다갔다 차비 빼고 만원도 안 되는 돈이 남는데 내가 녹차 아닌 파르페를 먹는 바람에 경주 갈 차비가 몇 백 원 부족해진 것이다. 남편에게 차비를 빌리지 않으면 경주로 갈 수도 없는 상황. 서른의 어른 남자가 처음 만난 한참 어린 내게 그런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그때의 나 또한 가난한 20대였다. 다 같이 어려운 시기였다. 아르바이트해서 힘겹게 공부하느라 성적장학금을 못 받은 우리는 눈물겨운 FM(Father, Mother)장학금으로 어렵게 졸업했기에 집에서 놀며 공밥을 먹는 다는 것은 죄악이었다. 줄줄이 비엔나처럼 뒤따라오는 동생들을 부모와 함께 돌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런 내가, 눈빛만으로 녹차를 마시라는 남편의 충고를 받아들였어야 하는데도 기어이 먹고야 말았다. 떼써서 파르페 먹었으면 조용히 입 다물고 집에나 가지. 뭘 자꾸 캐물었는지. 눈치 없는 기 인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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