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허! 하는 소리가 내면에서 울려 퍼진다. 한 해가 잠깐이었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게 되는 연말이다. 황금돼지띠라 해서 요란스레 시작된 기해년이 시나브로 저물어가는 시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커다란 바람과 꿈을 가지고 맞이한 대망의 2019년이 작별을 고하고 있다. 자기 나이만큼의 속도로 세월을 체감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
1월 달력부터 돌아보니 신년벽두부터 분망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부친기일과 중고차 매매, 근대문화동아리와 설날일정까지 달력에 빼곡하다.
그렇게 문을 연 기해년 1년을 광주에서 보내고 어느덧 대구로 귀환할 날짜가 임박해 있다. 조금은 낯설고 설레던 광주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이것저것 배우고 익히느라 발품 팔았던 기억이 훈훈하다. 5월 17일에는 망월동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구 전남도청과 금남로를 누비고 다녔다.
돌이켜보면 지난 5월 3일 오후 5시 무렵 시간대가 기억에 삼삼하다. 전남대 인문대학 1호관에서 ‘김남주 기념홀’ 개관식이 있었다.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그날, 시인의 짧았지만 강렬한 삶의 자취를 돌아보았다. 한쪽 손에 담배를 든 채 환하게 웃는 흑백사진 속의 김남주 시인. 그날 모여든 사람들과 주고받은 시인을 향한 추모의 마음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시인과 문사(文士)를 추모하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다. 나라와 민족과 역사를 성찰하고 미래를 기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정주를 별로 내켜하지 않는 까닭은 그가 지닌 얄팍한 자존심과 턱없이 부족한 역사의식 때문이다. “나는 일제가 4-500년은 갈 줄 알았어!” 어째서 친일시를 썼느냐는 질문에 그가 답한 내용이다.
시 잘 쓰는 기술자이자 장인이기는 했으되, 되돌아선 예언자이자 사가(史家)의 구실을 담당하지 못한 자의 어눌한 변명이니.
김남주는 1960년대 김수영과 70년대 김지하와 더불어 한국 현대시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행동하는 전사(戰士)이자 지식인으로 평생을 살았던 김남주. 그를 영면하게 하는 일은 소박한 가족주의와 부박한 정파주의, 날카로운 이해관계와 권력을 향한 추악한 열망을 내려놓는 일이다. 작은 범주의 나와 우리에서 벗어나 대동의 한마당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라 믿는다. ‘동이불화’와 ‘화이부동’의 선연한 차이를 새기는 일이 긴요한 시점이다. “남의 작은 허물을 마음에 두지 말고, 내가 가진 작은 지혜라도 나누는” 자세를 강조한 수운 최제우 선생의 가르침이 새삼스럽다. 21세기 각박한 현실주의의 수인(囚人)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은 타자의 작은 허물에는 눈이 밝지만, 자신의 큰 잘못에는 아주 관대하다. 다들 ‘내로남불’의 방책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기에 하루도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다.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철저한 자세를 가진다면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될지도 모르겠다.
올해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은 막힌 셈이다. 그러니 잠시 쉬면서 돌아온 길 살피고, 2020년에 밟을 새로운 길, 생각해봄이 어떠한가?! 독자 여러분의 건승과 행운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