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국립대 교수들은 학생 면담이 의무가 되었다. 한 학기에 1회, 1년에 두 차례는 반드시 지도학생 면담이 필수적인 과제로 부과된 것이다. 이른바 학생 지도비라는 명목의 수당이 예전의 봉급에서 차감 지급된다. 학생들과 대면하기를 꺼리는 교수는 거의 없다. 가르침이라는 것이 학문의 전수에 그치지 않는 것이 우리 대학사회의 풍토이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면담하노라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그들의 내부에 깊이 각인된 수동성과 흐느적거림이다. 젊은 시절의 담대한 패기와 무모할 정도의 배짱과 오기, 무엇인가를 향해 달려가는 저돌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학생을 대학에서 찾을 수 없다. 예전에는 완전히 멸종되지 않아서 드문드문 만날 수 있었기로, 커다란 기쁨이었건만, 이제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영리한 학생들은 그들의 향방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난 연후에 가장 안전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전무(全無)한 길을 택한다. 그러하되 그 길의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를 나한테 검증받으려 한다. 그러면 나는 속이 짠하다! 학부 3년 동안 그가 들여다본 21세기 20년대 대한민국 사회의 국립대 졸업반 학생의 함축적인 선택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저토록 범속한 소시민으로 만들어버렸을까?!
꿈이 없는, 아예 처음부터 꿈이라고는 꿔본 적 없는 청춘이 나날이 늘어간다. 그들에게 꿈이 뭐야, 하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공무원이라 답한다. 그들은 꿈이 미래에 가질 직장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앞으로 희망하는 직업이고, 내가 묻는 것은 꿈이야, 하고 말해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위대한 축복을 받아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가 찬란한 20대에 아스라한 창공으로 비상하는 꿈을 꾸지 않는 세상이 찾아온 것이다.
언젠가 서른 명 남짓한 학생들과 꿈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꿈 아닌 꿈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듣던 중 유일하게 어느 학생이 꿈을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40대가 오면 저만의 고유한 카페를 차리고 싶고요. 그 전에 제힘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해보고 싶습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잘 들었지?! 내가 듣고 싶은 꿈 이야기가 바로 저거다.”
꿈을 꾸는 젊은이들이 멸종단계에 이른 우리 사회는 중증의 질환을 앓고 있다. 그것은 아파트와 승용차와 안정적인 공무원 일자리를 지향하는 젊은이들의 ‘꿈’으로 집약된다. 그들이 말하는 공무원은 9급이고, 따라서 굳이 대학에 들어오지도 않아도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면 그들과 그들의 부모가 굳이 아들딸을 대학에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이 이쯤 되면 대학이 특히 국가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국립대학이 이 땅에 존립할 근거가 무엇인지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대학의 강단 역시 허다한 소시민 교수들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연구비, 프로젝트, 빈곤한 화제와 얄팍한 지적-정신적 풍토가 대학의 주류문화로 떠오른 지 오래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에게 대학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