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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조국 위해 희생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홍성식기자
등록일 2022-04-12 20:20 게재일 2022-04-13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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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세 노병의 잃어버린 훈장     < 2 >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도움을 준 장사상륙작전이 펼쳐지고 있다.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 종군기자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사상륙작전기념사업회 제공

훈장(勳章)이란 ‘국가나 사회에 공로가 뚜렷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그 공적을 표창하기 위해 수여하는 기장(記章·기념장)’을 뜻한다.

범위를 좁혀 볼 때 무공훈장은 ‘전쟁 혹은, 그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때 전투에 참가해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을 의미하는 것.

72년 전. 한국은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처해 있었다. 소비에트연방의 지원을 받은 북한 조선인민군은 단 3개월 만에 남한 땅 거의 대부분을 집어삼켰다. 국군과 UN군의 최후 방어선이 낙동강 일대에 구축됐다.

숫자나 화력 모두에서 조선인민군의 위세에 눌렸던 국군 수뇌부는 젊은이들의 애국심에 호소해 적지 않은 학도병과 청년지원병을 모았고, 이들은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급하게 전선으로 투입됐다.

한국전쟁 초기. 10대 후반 학도병과 20대 초중반 청년지원병이 주축이 돼 눈에 띄는 전과를 올린 전투가 적지 않았다. 1950년 9월 15일 장사상륙작전도 그런 사례의 하나다.

 

99세 배수용 고문 생명 걸고 지키던 조국 이젠 육군소령 외손자가

류병추 회장, 죽을 고비 수없이 넘겼지만 ‘조국 위해 작은 몫’ 자부심

장사작전 772명 학도병, 북 전력 약화로 인천상륙작전 성공 기여

국방부 군사편찬연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 전과 높은 평가에도

육군본부, “이름·공적 명백해야 무공훈장 추서 가능” 원칙적 답변만

▲조선인민군 2군단과 전투 과정서 적지않은 이들 생명 잃어

미국이 제공한 상륙선 LST문산호에 오른 772명의 학도병(청년지원병 포함)은 목숨을 건 전투를 조선인민군 2군단과 벌였고, 작전 수행과 퇴각 과정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양영조 책임연구원은 논문 ‘6·25전쟁 초기 장사상륙작전의 전개과정과 성격’에서 아래 3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는 문산호의 좌초와 태풍으로 인한 파고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부대장의 지휘 아래 피해를 최소하고,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둘째 “낙동강선 일대의 북한군 주력의 전력을 약화시킴으로써 한국군 제1군단 작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셋째 “아군의 유격부대가 적의 후방인 영덕지구에 상륙하여 적의 판단을 흐리게 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간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었다.”

배수용(99·한국전쟁 참전 유공자회 경북도지부 고문), 류병추(91·장사상륙작전기념사업회장), 이영희(91·전 옥천군 교육장)씨는 앞서 언급된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의 전우다. 72년 전 포탄이 바로 눈앞에서 떨어지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싸웠던.

18세 학도병과 26세 청년지원병이던 그들은 이제 모두 아흔을 넘겼다. 애써 말을 참지만 그때 죽어간 139명의 전우와 장사해변에 남겨졌던 50명 가까운 친구들이 피로 세운 전공을 국가가 모른 척하는 것 같아 내심 서운하다.

‘전쟁 혹은, 그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때 전투에 참가해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하는 무공훈장’을 아직 장사상륙작전 참전 학도병들에게 추서하거나 수여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육군본부는 “한국전쟁 관련 문서에 이름과 공적이 명백하게 남아 있는 사람에 한해 서훈 추천을 할 수 있다”는 원칙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육본측의 입장도 일면 이해가 가지만, 생존 학도병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아래 배수용, 류병추, 이영희 씨가 학도병과 청년지원병으로 참전하게 된 이유와 장사상륙작전 당시의 경험을 요약하는 것으로 이 답답함이 기자만의 것인지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장사상륙작전의 현장인 영덕 장사해변을 찾은 90대 노병들. 좌측부터 배수용, 류병추, 이영희 옹.  /이용선 기자1950년 대구 대건중학교 재학 시절의 청년 류병추(왼쪽 위 원내).
장사상륙작전의 현장인 영덕 장사해변을 찾은 90대 노병들. 좌측부터 배수용, 류병추, 이영희 옹. /이용선 기자1950년 대구 대건중학교 재학 시절의 청년 류병추(왼쪽 위 원내).

▲진로 고민하는 외손자에게 “투철한 국가관을 가진 군인이 되라”

경북 경산시 백천동에 거주하는 배수용 고문은 거의 한 세기를 살아낸 사람이다. 그 나이면 육체가 쇠할 때가 됐다고 생각되지만, 천만에다.

배 고문은 혼자서 1시간 30분 버스를 타고 경산에서 포항으로,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영덕군 장사해수욕장으로 왔다.

그곳은 자신이 1950년 9월 쏟아지는 조선인민군의 기관총탄 속에서 두려움 떨쳐내며 싸웠던 장사상륙작전의 현장. LST문산호를 본떠 만든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앞에 선 그가 말했다.

“내년이면 백 살이 된다. 1950년에 지원병으로 참전해 1954년까지 군대에 있었다. 장사상륙작전 이후 육군 2사단에 편입돼 수십 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했다. 두렵지 않았냐고? 청년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진로를 고민하는 외손자에게 “투철한 국가관을 가진 군인이 되라”고 조언한 것도 배수용 고문이었다. 지금은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소령으로 근무하고 있는 외손자는 지난해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린 포항을 찾았다. 한국전쟁 참전 군인으로 행사에 초대받은 할아버지와 함께였다. 외조부가 생명을 걸고 지킨 나라를 이제 손자가 지키고 있는 셈이다.

배 고문은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다가 “국군이 북한군에게 밀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결정해 지원을 결심했다. “그 결심에는 지금도 후회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 장사상륙작전 당시 파도에 휩쓸려 죽을 고비 넘겨

서울 을지로에 자리한 장사상륙작전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난 류병추 회장도 아흔한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청년 이상의 유머감각도 갖추고 있어 놀랐다.

류 회장은 18세에 학도병으로 자원했다. 대구 대건중학교 5학년에 다니던 때다. 집으로 찾아온 모병관이 “나라가 위태롭다. 후방을 지키는 걸 도와주면 좋겠다”는 권유에 망설임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대구역 앞에 가니 나 같은 학도병들이 많았다. 뒤늦게 조부와 아버지에게 인사도 못한 게 생각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저는 잠시 집을 떠납니다. 늦을 수도 있습니다’란 작별 인사를 했다. 두 분은 내가 어딜 가는 줄도 몰랐다.”

류 회장은 그때도 신문을 열심히 읽었는데 징병을 피해 외국으로 도피한 사람들에 관한 기사를 보고는 혀를 찼다고 했다.

“대구역에서도 그렇고, 지원병을 태운 기차 안에서도 그랬고, 훈련장에서도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도망칠 것 같았으면 아예 자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류병추 회장은 함께 학도병이 된 친구 강정관(당시 대구 계성중학교 5학년)씨와 “우리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청년에게 주어진 국방의 의무를 수행할 것”이라 약속했고, 그 약속은 한국전쟁 기간 내내 그대로 지켜졌다.

독립 제1유격대대 3중대 소속 학도병이던 열여덟 살 청년 류병추는 장사상륙작전 당시 파도에 휩쓸려 죽을 고비를 넘겼고, 장사상륙작전에서 퇴각한 이후에도 영천과 홍천, 춘천과 청평에서 생사를 건 전투를 여러 차례 치렀다.

춘천에서는 잠깐이지만 조선인민군의 포로가 됐었고, 총상을 입어 군 병원에 오래 입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류 회장의 태도는 단호하고 명쾌하다.

“나라가 없다면 내가 있을 수 있겠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는데 작은 몫이나마 했다는 자부심이 나를 전쟁 이후에도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줬다.”

장남을 전장으로 보낸 아버지 심정은…

이영희 전 교육장

아버지 뜻에 따라

유서 쓴 후 학도병 지원

옥천군 교육장을 지낸 이영희(91)씨 역시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학도병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장사상륙작전의 군번 없는 학도병’이란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이 전 교육장의 생생한 전쟁 체험을 담고 있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전쟁이 시작됐을 때 충북 영동농업중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 전 교육장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아버지와 함께 대구로 피난을 갔다.

너무 어려 보여 입대를 피할 수 있었으나, 이영희 전 교육장의 아버지는 가문을 이어갈 금쪽같은 장남에게 입대를 권한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조국을 위해 싸우는데 내 아들만 군대에 보내지 않는 것은 정도(正道)가 아니다’라고 생각한 부친의 뜻을 알아챈 이 전 교육장은 유서를 쓴 후 아버지와 함께 대구역 앞으로 가 학도병에 자원한다.

모병된 수백 명 학도병들 사이에 섞여 멀어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 전 교육장 부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장(戰場)으로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 짐작조차 쉽지 않다.

장사상륙작전에서 조선인민군의 고지로 진격하다 포로가 된 이영희 전 교육장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했고, 이후 육군 3사단과 9사단에 소속돼 정전 협정 때까지 학도병으로 위국헌신 했다. 전쟁이 끝난 후 학업을 마친 이 전 교육장은 평생 교육자로 살았다.

그는 말한다.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인간은 결코 희망을 꺾지 않는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다. 나는 그것을 전쟁을 통해 깨달았다”고.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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