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山南義陣) 기억하고 추모하자<1>
산남의진(山南義陣)은 을사늑약 직후 영일과 영천, 청송 등지의 백성들이 산남(문경새제 이남이란 뜻으로 영남 또는 교남과 같은 말이다)에서 일으킨 민간저항운동 조직의 하나다.
영해 방면의 신돌석 의진, 장기(長䰇) 방면의 장헌문 의진과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면서 일본군 수비대를 교란했다. 의진의 창의소(倡義所)는 영천시 자양면 검단동(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자양면 충효동)에 두었지만, 실질적인 의병본부가 전반기에는 포항 송라면(당시 청하군) 북동대산에, 후반기에는 포항 장기면(당시 장기군) 남동대산에 있었다.
의군 참여자들도 영일군 죽장·상옥 지역의 유림과 산간포수들이 많았다. 산남의진의 대장들이 순국하거나 체포된 장소 또한 모두 포항권역이었다.
제1대 정용기 대장은 죽장면 입암 전투에서 순국하였고, 제2대 정환직 대장은 죽장면 상옥에서, 제3대 최세윤 대장은 장기면 용동에서 체포되었다.
큰 격전지도 흥해와 청하, 장기, 죽장, 상옥 등지였다. 산남의진의 전 활동 기간 포항 영일권은 항상 그 중심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산남의진은 정환직(鄭煥直)이 처음 결성했다. 그는 1887년 44세의 늦은 나이로 벼슬길에 올라 의금부도사·중추원의관 등을 두루 역임했으며 누구보다도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을사늑약 직후인 1905년 12월 5일 고종황제는 그에게 밀지를 내려 창의를 준비하라고 했다. 정환직은 장남 정용기(鄭鏞基)를 불러 그 뜻을 알리고,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켜 경북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05년 12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용기는 절친한 동지 이한구, 손영각, 정순기와 같이 영천 자양면 검단동에 창의소(倡義所)를 마련하고 의병을 모았다.
산남의진: 을사늑약 직후
영일·영천·청송 등지 백성들이
일으킨 민간저항 운동 조직
고종 밀지로 정환직이 처음 결성
영해 신돌석 의진과 협공하며
일본군 수비 교란·서울 침공 작전
아들 정용기 제1대 대장 맡아
1906년 행진 시작해 북상 도중
경주 진위대 속임수로 체포
옥고 치른 후 의진 다시 정비해
항전 펼치던 중 본거지로 알려진
포항 기계면 안국사 日에 소각돼
△아들 정용기(鄭鏞基)가 1대 대장을 맡다
산남의진은 정환직을 총수, 정용기를 대장으로 하고, 그 아래 중군·참모장·소모장·도총장·선봉장·후봉장·좌영장·우영장 등 16개 부서의 부대장(部隊長)을 뒀다. 전체 병력은 약 1천여 명. 각 부 장령은 본영의 지휘에 따라 각기 50~100명의 소부대를 지휘하였다.
그 무렵, 영해(寧海)에서도 신돌석(申乭石)이 의병을 모아 기병했다. 두 의진은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협조해 싸우기로 하였다. 당시 신돌석은 안동 진위대(鎭衛隊)의 공격을 받고 있으므로 산남의진이 남쪽에서 동해안을 따라 공격해 올라가면 견제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산남의진 또한 영일 죽장을 거점으로 하여 북진하면서 영덕 신돌석 장군과 합세한 후, 동해안을 따라 산악유격전을 펼치며 서울로 쳐 올라가기로 작전을 세웠다.
정용기는 1906년 3월 행진을 시작하여 영천· 청송지방을 경유하고, 각 부대를 조종하며 북상했다. 서울에 머물던 정환직도 군대를 탈영한 군인 등 4월 중순에 모집된 의병 100여 명을 강원도 강릉의 남쪽 금광평(金光坪)으로 보내 남으로부터 올라오는 산남의진을 맞이하도록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진이 출진한 지 달포가 지났을 무렵, 정용기를 대장으로 하는 산남의진은 신돌석(申乭石)의진이 영해에서 일본군 수비대에게 패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용기는 이를 돕기 위해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영해 방향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경주 진위대가 이런 움직임을 눈치 채고 저지에 나섰다. 정용기 부대가 1906년 5월 21일, 영일군 신광면 우각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나타나더니, 자신들은 경주 진위대의 병사로서 대장 참령(參領) 신석호(申錫鎬)의 명을 받고 왔다며 인사를 했다.
정용기는 본진 군사들을 진정시키고 이들을 만나보니 한 통의 편지를 꺼내 놓았다. 그 내용에는 ‘어느 대관이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하니 존공(尊公)의 아버지(大人)가 아닌가? 이 일을 해결하자면 좋은 기회가 있기에 공을 만나고자 요청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존공의 아버지’는 바로 정환직이었다. 정용기는 이 편지를 진실로 믿고 뒷일을 중군장 이한구에게 맡기고는 혼자 경주로 신석호를 만나러 갔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결국, 경주 진위대의 속임수에 걸려든 것이다. 정용기는 대구에 있는 경북경무서로 이송되어 구속되었다. 이렇게 서울 진공 작전은 출발부터 난관에 봉착하였다.
△의진 재기를 논의해 다시 의병을 모으다
한편, 아들 정용기의 구금 소식을 들은 정환직은 백방 요로에 힘을 써서 5개월 만인 1906년 9월 20일 경북경무서에서 아들을 석방하는 데 성공했다.
정용기는 고향 영천으로 돌아와 옥고의 여독으로 수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몸을 추스른 뒤 1907년 4월에 들어 이한구·손영각·정순기 등과 만나 의진 재기를 의논했다. 이들은 1907년 6월 초순부터 본격적인 의병모집에 들어갔다. 정용기의 구속 등으로 1906년 7월 말 의진 활동이 중단된 지 약 1년 만에 다시 의진이 재결성된 것이었다.
진용을 정비한 산남의진은 1907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때맞춰 일본군 토벌대의 감시와 탄압도 강화됐다. 의진은 정환직으로부터 1907년 5월에 관동으로 들어가 서울로 진공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으나 정용기가 오랫동안 신병을 앓고 있었는데다 군사 모집과 군수물자 확보 또한 여의치 않아 약정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과의 항전은 이어졌고 의진은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특히 무기도 열악했지만 탄약은 극히 부족한 상태였다. 의병들은 탄약과 보급이 떨어지면 산중 사찰이나 동굴을 근거지로 삼아 숨어 있다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접근해 오면 대항하여 싸웠다. 그 결과 수많은 의병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사살됐다.
‘영릉의진(寧陵義陳)’의 신돌석 부대도 전반기에는 울진과 삼척을 공격하여 맹위를 떨쳤지만, 후반기에 일본군이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나서기 시작하면서 관동으로 북상할 수 있는 통로를 열지 못하고 있었다.
정용기는 신돌석 부대를 지원하는 한편, 동해안 쪽으로 척후병을 파견하면서 줄곧 길을 찾았다. 1907년 8월 초에는 청송·신령·의성 등지로 부대를 이동하면서 무기와 군량을 모으고 지역 실정과 적세를 탐지했다.
1907년 8월 25일 의병 약 300명으로 청하 읍내를 공격하여 적 1명을 포살하고 분파소(分派所) 및 관계 건물을 소각했다. 일본군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이동할 때에는 부대를 해산하고 개별적으로 농민이나 상인 등으로 위장하여 약속한 장소로 모이게 하는 식으로 추격을 따돌렸다.
△의병의 본거지 안국사가 불타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일본군 남부수비대장 요다(依田) 소장은 특별 조처를 내렸다.
1907년 9월 5일 일본군 제14연대와 제47연대의 병력을 동원하여 경북지역 의병을 탄압하기 위한 ‘토벌대’(대장: 菊池 대좌)를 편성한 것이다. 기쿠치(菊池) 대좌가 이끄는 토벌대는 조직적으로 의진을 공격했다.
정용기도 물러서지 않았다. 1907년 10월 2일 의병 약 150명으로 고향인 영천 자양(紫陽)을 공격하였다. 이날 일본군인 1명을 생포하여 사살했다. 정용기의 보폭이 넓어지면서 1907년 10월 2일 흥해 분파소 순사들에게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들로부터 통보를 받은 일본군 14연대 소속 영일수비대와 청송수비대는 연합작전으로 정용기 부대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907년 10월 4일 포항 기계면 안국사(安國寺)가 일본군에 의해 소각당했다. 일본 측 보고서에 따르면, 그들이 안국사를 불태운 이유가 의병의 본거지이고 그 절에 있는 승려도 폭도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상준(향토사학자·본지 객원 편집위원)
홍성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