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힐링 피서지 ‘옥산서원’ <하>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폭염과 폭우가 지루하게 반복되는 여름날의 더위를 피할 수 없다.
그 옛날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봉건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왕도 움직임을 자제하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약해진 기력을 보충할 보양음식을 먹었을 뿐 별다른 피서법이 없었다. 왜냐? 1902년 전엔 에어컨이라는 게 없었으니까. 존재하지 않는 걸 왕과 고관대작의 방에 설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많은 이들이 에어컨의 혜택(?)을 누리는 21세기가 됐지만, 더위가 가져오는 불쾌지수의 상승을 온전히 막을 수는 없다. 24시간 내내 에어컨 밑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요즘처럼 그칠 줄 모르는 무더위가 장기간 지속되면 누구나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고, 그럴 일이 아닌데도 다툼은 잦아진다.
이럴 때면 조용한 활엽수 그늘 아래서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시 한 편을 읽는 것도 효율적인 피서법이 아닐까?
백석문학상 수상자인 박철(62) 시인의 ‘그대에게 물 한 잔’은 힘겹게 2022년 여름을 지나고 있는 우리들에게 작지만 맑은 힘을 준다. 이런 노래다.
우리가 기쁜 일이
한두 가지이겠냐마는
그중의 제일은
맑은 물 한 잔 마시는 일
맑은 물 한 잔 따라주는 일
그리고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불쾌지수 상승과 폭발하는 스트레스를 잠시잠깐이나마 잠재우는 짧고도 편안한 시다. 나도 한 잔 마시고, 사랑하고 아끼는 이에게 시원한 물 한 잔 따라주고 싶어지는.
이언적이 이름 짓고 이황이 새긴
‘세심대' 바위 아래로 계곡물 흘러
작은 폭포 용추 위엔 외나무다리가
회재 은신처로 만들어진 '독락당'
낮은 담장 사이로 시냇물과 만나
학문과 사색 즐겼을 옛 정취 만끽
□ 옥산서원 계곡서 만나는 퇴계 이황 글씨
인격의 도야와 학문의 완성을 삶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았던 조선의 선비들 역시 겉으로 엄살을 떨지는 않았겠지만, 힘들게 여름을 났음이 분명하다. 그들 역시 더위와 추위를 느끼는 인간이었을 테니.
하지만, 세상에 이름을 떨친 조선 유학자들의 피서법은 오늘날 보통 사람들과 달리 호들갑스럽진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주 옥산서원 뒤편 넓고 평평한 바위엔 회재 이언적이 이름을 짓고, 퇴계 이황이 쓴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세심대(洗心臺)’다. 이름 그대로 마음을 씻는 공간. ‘대한민국 여행사전’은 세심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옥산서원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 사람인 회재 이언적을 모신 서원이다. 선조 5년(1572) 사당을 세우고 그 후 선조 7년(1574)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서원 앞으로는 계류가 흐르는데 작은 폭포 용추 위로 걸린 외나무다리가 서원으로 드는 제 길이고 용추 위 백여 명도 앉을 만한 너른 바위가 세심대다.”
옥산서원 세심대 주변엔 시원한 물이 흐른다. 더위를 식히고자 이곳을 찾은 경주시민과 여행객들에겐 최상의 피서지.
아이들은 물장구를 치거나 물총을 쏘며 놀고, 어른들도 체면 불구하고 양말을 벗은 채 뜨겁게 달아오른 맨발을 계곡물에 담근다.
그렇다면 조선의 선비들은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이른바 ‘양반 체면’에 옷을 벗고 물에 뛰어들었리는 만무했을 테고, 방이나 정자에서 유교 경전을 읽다가 하루에 한두 번쯤 세심대에 서서 세상사와는 무관하게 오랜 세월 흘러온 물을 보며 시상(詩想)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 회재 이언적은 독락당에서 어떤 여름을
왕에게 권위를 인정받은 옥산서원은 서원 자체의 아름다움과 주변 풍광의 시원스러움이 한국의 어느 서원에도 빠지지 않는다.
서원을 거닐던 70대 어르신 한 명은 “안동을 비롯해 경상북도의 서원을 여러 군데 가봤지만, 옥산서원만큼 자연과 잘 어우러진 풍경을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곳은 보기 드물다”고 했다.
직접 가서 둘러본 기자로선 그 말에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이 옥산서원의 핵심 중 핵심이자, 가장 근사한 건축물이 독락당(獨樂堂)이다.
“제 아무리 어진 선비라도 삶의 어느 한 순간엔 세속의 일을 잊고 스스로의 즐거움을 찾는다”는 솔직하고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독락당.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이란 책에는 독락당을 그림 그리듯 묘사하는 문장이 나온다. 그 일부를 아래 인용한다.
“회재 이언적의 은신처로 만들어진 독락당은 자연과 어울리는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계정과 함께 가옥의 한 공간을 차지하는 사랑채를 독락당이라 칭하지만 특별한 구분 없이 안채와 사랑채, 별채를 함께 독락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뾰족한 솟을대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것은 나지막한 담장이다. 안채와 사랑채를 가로지르는 담장은 부녀자의 생활공간인 안채를 분리시키고 찾아오는 이방인들을 자연스럽게 사랑채 공간으로 안내한다. 미로를 걷는 듯 복잡한 낮은 담장 길은 양편을 막는 사잇길을 지나 옆을 흐르는 시냇물로 연결된다. 회재가 학문을 연마하고 문학과 예술을 즐겼을 독락당 창살을 열어젖히면 계곡과의 경계를 짓는 담장 사이로 시냇물을 살펴보는 열린 공간이 펼쳐진다.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계곡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후략).”
책의 설명은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만나본 옥산서원, 세심대, 독락당은 비교적 번잡스럽지 않게 삼복더위를 피할 수 있는 맞춤한 여름 여행지였다.
회재와 퇴계 등 조선 성리학의 완성에 작지 않은 역할을 한 선비들의 역사적 흔적, 여기에 짙은 그늘과 차가운 물소리의 시원스러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앞서도 말했지만, 더위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여름 한철의 고통이자 짜증스러움이다. 세상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던 500여 년 전 회재의 여름도 다를 바 없었을 터.
무더위가 주는 고통과 짜증스러움을 현명하게 이겨낸 사람에겐 ‘가을’이라는 자연의 선물이 주어진다. 그 옛날 독락당에서 회재 이언적이 받았던 그 선물을 우리도 기다려보자. 영원히 지속되는 여름은 없으니.
‘숨은 보물' 정혜사지 13층석탑
독락당 인근 ‘신라시대 석탑'
독특한 축조 방식 눈길 끌어
옥산서원과 세심대, 독락당을 돌아보고 물놀이까지 즐겼다면 인근에 ‘숨은그림찾기’처럼 존재하는 정혜사지 13층석탑을 찾아가보면 어떨까?
독락당 지척에 우뚝 선 이 탑은 국보 제40호다. 서원에서 조선 선비의 숨결을 느껴보고, 세심대 인근에서 시원한 계곡의 풍광을 만끽한 후에 주어지는 보너스 같은 게 바로 정혜사지 13층석탑 인근 풍광.
오가는 사람들이 적은 곳에 있지만 이름 그대로 ‘국보’이니 탑에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하면 스피커를 통해 경고방송이 나온다는 걸 알고 가야 놀라지 않는다.
지금은 터만 남은 정혜사는 신라 선덕왕 원년(780)에 중국 당나라에서 온 백우경이란 사람이 살던 집을 절로 고친 것으로 알려졌다.
정혜사지 13층석탑은 1층은 크고 높은데 비해, 2층부터 급격히 작아지는 독특한 형태로 주목받는다. 이 탑은 일반적인 신라시대의 축조 양식에서 벗어난 형태고, 신라 석탑 중 유일한 13층탑이라고 한다.
“옥산서원을 지나 옥산리의 독락당에서 북쪽 700m쯤 되는 곳에 있다. 정혜사지 일대의 경작지에는 기왓장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데 과거 정혜사의 중심을 이루었던 사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13층석탑은 각 부의 양식과 조성수법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특이한 유례를 보이고 있다.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됐다”는 것이 정혜사지 13층석탑에 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
비단 고대 건축과 역사에 큰 관심이 없더라도 어디서도 보기 힘든 특이한 양식의 이 탑을 피해갈 이유는 없다. 게다가 쉽사리 만나기 힘든 ‘국보’ 아닌가.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