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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화

등록일 2022-08-28 18:19 게재일 2022-08-29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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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누구에게나 타인과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내가 전하고 싶은 지식과 정보 혹은 정서의 교감을 바라기 때문이다. 대화가 잘 되는 사람에게 우리는 친밀감과 신뢰감을 가진다. 그럴 때 우리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야 하고 중얼거린다. 주변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 인간관계의 질적인 차이가 확연해진다. 인간은 식주의(食住衣) 세 가지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전화를 받았다. 정치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젊은이의 전화였다. 나는 몇 번이고 거절했다. 정치와 정치가에 대한 믿음을 접은 지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이는 막무가내였다. 일단 만나서 자신의 말을 들어줬으면 한다는 것이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전화로 나눈다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다. 상대의 눈과 표정을 보면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답답한 심경은 진보와 보수, 개인과 집단을 넘어서 우리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현안에 관한 집단적 무의식 혹은 일방적인 편 가르기였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화나 토론이 아니라, 일방의 주장이나 욕망을 여과 없이 분출하는 한국인 특유의 집단적 무의식이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적이고, 생각이 같거나 비슷하면 친구가 되는 케케묵은 구시대의 이분법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비교적 젊은 그였지만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의 면면은 상당히 다채로웠다. 자기 생각을 명확하게 밝히고 내 의중을 묻는 정중함도 갖추고 있었다.

다만, 내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불쑥 끼어드는 말버릇은 조금 거슬렸다. 아마도 그런 습관은 지금까지 그가 대면한 개인이나 집단이 그의 말을 끝까지 경청해주지 않은 결과일 것이다. 존중받지 못한 사람은 조급해지기 쉬우며, 상대방의 말허리를 자르고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고요하고도 바닥 모를 심연으로 침잠하는 나의 내면세계를 본다. 젊었을 때 나 역시 정치와 정치가가 세상을 구원하고 민중을 구제하리라는 삿된 희망을 품었기에 청년을 향한 안타까운 맘이 적지 않았다. 그러하되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수는 없었고, 때마침 대구로 귀환한 젊고 패기만만한 정치인을 소개했다. 나처럼 늦가을 물든 단풍잎처럼 고요해진 사람에게는 바랄 것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뭔가 새롭고 활기찬 대화와 출구를 기대하고 찾아온 젊은이를 보내고 나서 잠시 회억(回憶)에 잠긴다. 40년 세월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소리쳤던 인간이 이토록 고요하게 자신의 지나간 시간과 공간과 관계와 시대를 돌아본다는 게 낯설게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가 아니고,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또한 없다. 그 시절의 내가 갈구했던 변혁과 새로운 시대정신은 이미 오늘날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나눈 대화가 그에게 어떤 감상을 불러왔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은 그만이 알 수 있고, 오직 그의 몫이므로. 하지만 우리의 미래(未來)는 희망적이라는 소회는 생생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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