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이 하릴없이 들이치는 날이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국화원이 소슬히 떨고 있다. 오늘 떠나는 망자의 삶에도 비바람이 많았는지, 국화원이 슬픔을 응축한 채 웅크리고 있다.
작년, 신축 아파트 담장 너머에 이층 건물이 들어섰다. 세련된 외벽에 국화꽃 한 송이와 국화원이라는 글자만 간판으로 걸려있어 몇몇 사람들은 미술관인줄 착각하지만, 이곳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례식장이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심 한가운데에 존재와 부재의 형체가 장례를 치르는 동안 서로 껴안고 이별하는 공간이다.
나는 조문객의 움직임을 가만히 응시하며 가늠해 본다. 가까운 이와의 별리가 주는 슬픔의 깊이를. 가슴을 쥐어뜯으며 흐느끼는 사람, 땅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 울음을 삼킨 채 눈물을 훔치는 사람 등 죽음 앞에서는 같은 상실의 무게를 지닌 것 같아도, 톺아보면 모두가 제각각의 농도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공무원이셨던 친정아버지는 출장을 떠난 길 위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나는 비보를 접하고 황망히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서 보았던 안내판에 쓰인 망자의 이름이 낯설었다. 내 아버지지만, 더는 부를 수 없는, 손을 내밀어도 잡을 수 없는 공허감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영정사진을 쳐다보면 짙은 슬픔의 농도로 무거워진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 날의 장면들이 오버랩 될 때면 장맛비에 봇물 터지듯 가슴속에 눈물이 쏟아져 차오른다. 먹먹하게 온몸을 짓누르는 강렬한 슬픔이 상실감으로 변주되어 내 마음속으로 재빨리 휘감아 흘러 들어온다.
며칠 전, 지인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죽음을 대하는 장례식장의 분위기가 무겁고 엄숙하지만은 않았다. 고인은 삼 년 동안 요양병원에서 생활했다. 죽음의 유예기간 동안 아흔여섯 살의 고인과 가족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고, 서로 따뜻하게 감싸 안는 시간이 많았단다. 그런 연유로 현실을 받아들인다고 지인은 평온하게 전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완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서아프리카 가나에서는 댄싱 장례식이 유행이라고 한다. 상여꾼들이 관을 어깨에 짊어지고 박자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춘다. 바닥에 앉거나 드러눕는 등의 다양한 퍼포먼스로 장례식장을 흥겹게 축제 분위기로 이끈다. 망자를 절차에 따라 추모하는 엄숙하고 차분한 진행이 아니라 템포 빠른 음악과 경쾌한 춤을 통해 고인과 작별하고 유가족과 조문객을 위로한다고 한다.
나에게는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 풍경이지만, 고인의 생전 삶을 따뜻한 마음으로 돌이켜보는 것은 좋은 의미인 것 같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준비가 필요한 일은 각자의 죽음을 잘 대비하는 일임에랴.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현재에 남겨진 사람에게도, 서로가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도록 이별 연습을 미리 해보면 좋을 성 싶다.
웰다잉(Well-Dying)! 가족들이 덕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는, 훈훈한 내 장례식 풍경을 만들려면 평소에 자주 떠올려야 될 단어다. 죽음을 기억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금기(禁忌)를 상기(想起)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 성찰을 통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뚜렷하게 돋을새김으로 각인된 의미 있는 장례에 대한 나만의 인식을 바람결에 날려 보내고 싶지 않다.
어느덧 나도 계절을 알리는 인생시계의 시침이 가을로 접어들었다. 오늘, 나의 장례식 장면을 두 눈 감고 상상해 본다.
향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드는 듯하더니 울컥, 미세한 애잔함이 눈물로 변해 뚝뚝 흘러내린다. 장례식장의 차가운 공기, 껴안고 흐느끼는 가족들, 문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허가 온몸을 감싸고돈다. 삶의 종점, 먼 것 같지만 언젠가는 내가 닿을 곳이다.
나는 지금, 나의 장례식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국화원을 내려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