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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信)

등록일 2022-10-23 17:13 게재일 2022-10-2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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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옛말에 ‘갖바치 내일 모레’라는 말이 있다. 갖바치들이 흔히 물건은 제 날짜에 만들지 않으면서, 약속한 날에 찾으러 가면 내일 오라 모레 오라 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이다. 오래전 친척 어른 한 분이 하는 말이 고향 친구 하나가 사업을 했는데, 돈을 크게 빌려주었단다. 근데 이제 갚겠다며 전화 와서는 계좌번호를 불러달라 해서 기꺼이 계좌를 알려주고 반갑게 전화를 끊었는데 이제나저제나 소식이 없더니 얼마 지나 또 전화 와서는 계좌번호가 맞냐며 다시 불러달라더란다. 그제야 아, 이 사기꾼! 애초부터 갚을 생각 없으면서 괜히 주려는 척하는, 또 ‘척’하는 인생 하나 여기 있구나 했단다.

인도의 정신적, 정치적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는 ‘사람의 동기를 의심하는 순간, 그의 모든 행동이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다’라고 한 적이 있다. 물론 타인의 순수한 동기를 괜히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왠지 대화하면서 찝찝한 느낌이 들면 십중팔구 그 동기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마음의 불편함은 바로 상대방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나오는 행동이나 말투 때문에 발생한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속는 자나 속이는 자나 모두 부정적인 심리 현상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한다. 즉, 사람의 뇌는 상대를 속일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감정 담당 부위가 반사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상대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정서적 인지적 갈등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상대를 속이려는 것은 이러한 내적 갈등보다도 속임으로 인해 얻는 이득이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곧 부정적인 정서를 담당하는 뇌와 보상 중추 뇌가 함께 활성화될 때, 후자가 더 크게 작동되면 그러한 행동이 자행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두 영역을 관장하는 뇌가 동시에 활성화될 때 보상 중추 뇌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바로 철저한 자기 인식과 관리가 필요하다. 즉 타인에게 해로운 불의는 절대 행하지 않고 내가 한 말은 꼭 지키려는 강한 의지 말이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래서,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신뢰할 수 있다”고 했고, 공자도 논어에서 “오랜 약속을 평생 잊지 않고 지킨다면 완성된 사람”이라 했던 것이다. 그만큼 자기 확신에 바탕을 두고 타자와의 신의를 지켜나가는 사람이라야 믿음직스럽고 달콤한 유혹도 단호히 거절할 수 있다.

한곳에 오래 터 닦아 장사하려면 한순간 눈속임이 과연 통할까. 하물며 평생을 같이할 사람에게라면 그것이 비록 작은 거짓이라도 한번 잃은 신뢰를 어찌 회복할 수 있을까. 어느덧 가을도 중순을 넘어서고 있다. 울긋불긋 단풍들로 온 천지가 절경인 요즘, 멋지게 차려입고 단풍놀이 가는 것도 좋지만 국화차 한 잔에 가을 독서하며 그동안 곁에 있던 소중한 이들에게 과연 내가 얼마나 신의 있었던가를 한번 곱씹어보면 어떨까. 가을이 한층 더 풍성하게 다가올 테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한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홍수도 안 피하고 기다리다 마침내 익사한, 춘추 시대 미생처럼 되어선 안 될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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