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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경북메세나협회’ 창립과 예술인의 삶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 며칠 전 경북도청 화랑실에서 도내의 여러 기업체 대표와 예술단체 대표들이 모여 경북메세나협회를 설립하고 창립총회를 열었다. ‘기업과 문화예술의 아름다운 만남’을 표방하며 출범한 이 협회의 창립은 경북도가 적극적인 지원 의지를 보였고, 지역상공회의소와 경북문화재단 간 협의를 통해 설립의 뜻을 모았다. 경북문화재단 대표는 인사말에서 “도내의 기업과 문화예술이 상생협력 발전 및 글로벌화를 위한 긴 여정의 첫걸음을 떼는데 큰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이날 창립총회에서 상주시에 사업장을 두고 환경사업을 하는 기업체의 대표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그는 “경북메세나협회 설립을 통해 경북이 문화예술의 도시로 거듭나는데 기업이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라며 적극적인 활동을 약속했다.메세나는 문화예술 활동에 자금이나 시설을 지원하는 것이다. 수익의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투자’와 달리 이타적인 성격의 ‘지원’이므로 자선사업이나 공공사업의 기부와 결이 비슷한 숭고한 행위이다. 특별히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이 절실한 까닭은 예술 활동이 행복한 삶의 영위를 위하여 꼭 필요한 분야이긴 하지만 그 활동이 소득과 직접 연결되는 고리는 매우 허약한 것이 현실이라 예술가들의 삶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 활동은 장르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많은 비용이 발생하기도 하고 예술적인 기량의 연마를 위하여 긴 시간,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므로 활성화를 위해서는 각별한 지원이 필요한 것이다.그렇지만 메세나가 단순히 어려운 예술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선행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축적된 문화예술의 힘은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다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니 말이다. 메세나의 원조가 된 마에케나스의 후원이 라틴문학의 황금기를 일구었고, 메디치 가문의 지원으로 르네상스의 꽃이 피렌체에서 만개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 이를 웅변해주고 있다. 당시의 유물인 궁전과 교회 등의 건축물과 이를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미술품의 존재가 오늘날 유럽이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며 소중한 경제적 자산이니.우리나라는 1994년에 한국메세나협회가 발족하였고, 현재까지 경남, 제주, 세종, 부산, 대구 등의 지자체에서 메세나협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경북은 일곱 번째라 한다. 몇 번째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대로 기능하여 지역예술인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수준 높은 예술문화의 향유 기회가 확대되어야 한다. 기업의 아름다운 후원, 세제 혜택 등 행정지원시스템의 구축, 예술가들의 뼈를 깎는 노력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기업이 문화예술을 지원함으로써 기업의 이미지 제고에 보탬이 되고 예술가의 창의적 상상력이 기업의 홍보나 경영에 접목될 수 있다면 ‘기업과 문화예술의 아름다운 동행’이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기온으로 더위도 추위도 예측이 어려운 요즘, 올겨울 최강의 한파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사계절이 늘 추운 예술인들의 시린 가슴에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진정한 메세나를 기대해 본다.

2022-12-25

‘문화 지체’와 ‘성장의 한계’

이정희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최근 ‘문화 지체’와 ‘성장의 한계’라는 개념 탐구에 빠져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용어가 완전히 신개념의 새로운 용어가 아니다. ‘문화 지체’는 미국의 사회학자 W.F.오그번의 1922년 저서 ‘사회변동론’에서 처음 언급한 이론이다. 설명을 살펴보면, 비물질문화가 물질문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여기서 물질문화는 주로 과학 기술의 발달을 말하고, 비물질문화는 인간의 생활방식에서부터 각종 제도적인 면, 그리고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까지 아우른다. 쉽게 말하자면, 예를 들어 자동차의 개발과 보급은 자동차공업의 발달과 함께 빠른 속도로 발전해나가는 반면, 자동차와 관련된 우리의 교통 질서의식이나 그에 따른 제도 확립 등이 갖추어지기까지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이러한 문화 지체로 인해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은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파트라는 주거형태의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층간 소음 분쟁도 문화 지체 현상으로 볼 수 있으며, 이태원참사 역시 문화 지체 현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문화 지체 현상은 인간의 존엄성을 경시하기에 이른 것이다.‘성장의 한계’는 1990년대 일본 유학시절에 읽었던 책으로 당시에는 빗나간 예측에 우울한 예언서 정도로 일축해 버려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최근 원폭문학이나 재난문학 등의 생태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성장의 한계’책을 구입해서 다시 읽어보았다. ‘성장의 한계’는 1972년 로마클럽이라는 민간단체가 당시 전 세계를 감싸고 있는 여러 우려되는 상황들을 문제 제기해서 연구한 것으로,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다. 인구 폭발, 식량 생산, 공업화, 환경 문제, 천연자원의 고갈 등의 주제로 인류 위기에 관한 프로젝트 보고서이다.다시 읽어본 ‘성장의 한계’는 놀라울 정도로 이 시대를 예견하고 있어서 나는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더군다나 책이 나온 지 50여 년이 된 이 시점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 사회와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던 팬데믹을 생각해보면 책의 내용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성장의 한계’의 기준에는 인간의 생태발자국을 측정해서 그것을 지구의 수용능력과 비교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태발자국은 인간에게 자원(곡물, 사료, 목재, 물고기, 도시로 수용된 토지)을 제공하고 지구촌이 배출하는 배기가스(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위해 필요한 토지 면적을 이른다. 그리고 현재 지구의 사용 가능한 면적을 비교했을 때, 인간의 자원 사용량은 지구의 수용 능력보다 20퍼센트를 초과한 상태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너무 많이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즉, 앞으로 인류가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려면 인간 전체의 생태발자국을 줄여야만 하는 것이다. 문화 지체에서 오는 불평등과 갈등을 서서히 해소하고, 지구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뿐인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갈 동반자로 생각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2022-12-18

외롭던 이야기방

강길수 수필가 허전하다. 출퇴근 때마다 모서리를 돌며 안을 쳐다보던 작은 방이 사라졌다. 사라진 바닥엔 정사각형 새 보도블록이 어설프게 깔렸다.작은 방은 이따금 풋풋함이 넘쳤다. 중학생들이 한두 명 혹은, 두세 명 붙어서서 손에 든 것에 귀를 들이대며 얘기꽃 피우던 방이다. 때론 깔깔대고, 때로는 희죽거리거나 히죽대고, 어떤 날은 어두운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옆엔 아파트 모델하우스와 은행도 있지만, 내가 본 이야기방은 중학생들을 빼면 거의 비어있었다. 하여, 운동장 밖 모퉁이에 홀로 섰던 이야기방은 외로워 보였다. 외로움 못 이겨 떠났을까.시대 변화가 잘 드러나는 곳의 하나가 된 이야기방, 이름하여 ‘공중전화 부스’다. 공중전화는 통신수단의 발전 단계에서, 아날로그 시대의 한 획을 그은 존재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공중전화는 사람들의 소유하지 않은 생활필수품이었다. 즉시성, 신속성, 편리성에다 익명성까지 제공해 주었으니 말이다. 하나, 사람들의 애환 담긴 이야기방도, 혹독한 경쟁력 시장환경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있다.휴대폰이 없었던 젊은 날, 타지나 외국에 출장을 가면 공중전화를 많이 사용했다. 한 번은 LA공항에서 공장장이 공중전화를 하는 사이, 007가방 하나를 들치기 당하는 일도 있었다. 나도 그 곁에 서 있었는데, 어느새 훔쳐 갔는지 내가 어안이 더 벙벙했었다. 다행히 출장서류는 내 가방에 있어서 무사했다. 이처럼 공중전화 부스 이야기방은 사람 삶이 그대로 서린 현장이다.내 기억엔 휴대폰이 나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간 생활의 온갖 기능이 탑재된 스마트폰을 통해, 5세대 이동통신 디지털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즉,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자율주행, 사물인터넷 기술’ 등을 구현한다니 말이다. 스마트폰 하나로 삶의 모든 부문에 바라는 것을 실시간 이룰 수 있다 한다. 가히, 우리 삶의 근본적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그러나, 사라진 공중전화부스 자리에 깔린 보도블록을 밟고 선 내 마음은 허전하고, 불안하며, 무엇에 홀린 듯하다. 인간은 과학기술의 편리성에 중독되며, 자기도 모르게 ‘과학기술’이란 ‘냄비 안의 개구리’가 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운전하여 여행 갈 수 있는데 시내버스, 시외버스, 완행열차를 갈아타고 고생고생하며 여행 다니던 때가 왜 더 행복하게 느껴질까. 내가 구세대 꼰대이기 때문일까.이제, 이야기방에서 풋풋한 중학생들을 더 만날 수 없다. 그들에게 스마트폰으로 예전 같은 얘기꽃들을 피울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지난여름, 직장의 법정 교육 참가차 오랜만에 서울 지하철을 탔었다. 대부분 젊은이와 일부 나이 든 이들도, 객차 안에서 모두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이 과연, 공중전화 부스의 전화처럼 고맙고 요긴한 마음으로 스마트폰을 쓰고 있었을까. 내 마음의 대답은 ‘아니다’이다.오늘 퇴근길에도, 이야기방이 외롭게 서 있던 자리에 내 마음은 머뭇거린다.

2022-12-11

시대, 헷갈리다

강길수 수필가 ‘날더러 어찌 살라고 이리도 갑자기 불어닥칩니까. 야속해요. 헷갈려요!’…. 학교 담장에서 들려 오는 소리다. 소리 내는 장미꽃 붉은 볼에 냉기가 스며있다.듬성듬성하게 아직도 푸른 잎 사이로, 네댓 송이 장미꽃 붉은 볼이 초겨울을 밝힌다. 11월 마지막 날부터 밀어닥친 한파를 담장에 매달린 채, 장미꽃은 무방비로 사흘째 견뎌내고 있다. 더 매서운 칼바람 덮쳐오면, 저 장미꽃과 잎은 산 채로 얼어버릴 것이다. 그리곤 마른 미라가 되었다가 스러져 갈 테지. 운 좋아 장미 뿌리 사는 땅에 떨어지면 훗날, 장미꽃으로 환생할 수도 있으리라.장미뿐만 아니라 아직 잎 푸른 나무와 많은 풀, 꽃을 피워낸 화초들도 높바람에 헷갈리다 산 채로 얼어 생을 다할 터. 자연은 늘 그래왔고, 그럴 것이다라고 누가 말할지 모른다. 아니다. 한 세기도 못 산 내 눈에 비친 자연은, 어릴 때와는 너무 달라졌다. 기후변화 시대라 해도 요즈음의 자연은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사계절이 한눈에 보이고, 몸으로 느꼈던 게 엊그제 같다. 한데, 하루에 기온이 초가을에서 한겨울로 간 것처럼 변하니 사람도, 식물도 헷갈리고 어지러운 것이리라.그래서일까. 한 주 전쯤 제자리 돌기라도 한 듯, 몇 시간 약한 어지럼증이 왔었다. 빈혈 증세거니 했는데, 아내의 성화로 이튿날 난생처음 신경과에 가 검진을 받았다. 다행히 ‘이상소견 없음’으로 나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나이 들며 기력이 쇠하기 때문일 수 있겠지만,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자연환경 요인과 정치 사회적 요인, 심리적 요인이 그렇게 했을 수 있다.다른 나라에서 바닷물이 상승하여 육지를 삼키는데도, 우리는 강 건너 불 보듯 한다. 제주도를 비롯한 동해안 등 국토의 해안선에 해수면이 오르며 심각한 변화를 일으켜도, 언론과 정치권과 정책당국은 미온적이다. 꿀벌개체수나 곤충이 줄어들어 농민들이 작물 재배에 수분(受粉)용 벌을 키우거나, 사람이 수분 작업을 하는 사태에 이르러도 사회는 무관심하다.헷갈린다. 나와 너, 우리나라와 지구촌도 헷갈린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일어난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구촌을 헷갈리게 한다. 민생을 버린 채 핵폭탄을 생명줄로 삼아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도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간이 부었는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정치권의 행태가 침묵하는 다수 국민을 헷갈리고, 분노케 한다. 명분 없는 파업으로, 나라 경제를 볼모 잡는 소위 귀족노조들이 우리를 헷갈리고 허탈하게 한다.우리나라 나아가 지구촌은, 헷갈리는 시대를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46억 년이라는 지구촌 역사에서 ‘자칭 만물의 영장 인간’이란 종이 등장한 것은, 길게 잡아 800만 년 전이라 한다. 현생인류와 가까운 계통은 역사가 300만 년 정도라고 본다. 하여, 인간이 지성체라면, 지구와 다른 생명체의 입장도 헤아리며 살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인간은 자연을 헷갈리게 하는 악질변종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이제 인간은, 자기 욕망과 욕구를 극복하며 이 헷갈리는 세상과 자연을 치유하는 길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 길이 비록, 탈 문명을 요구한다 해도….

2022-12-04

만남, 20221124

강길수 수필가 눈길이 저절로 멈추었다. 늦가을, 그것도 11월 하순에 이런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평소 출근보다 1시간 빠른 출장길이다. 북향 7번 국도가 제법 붐빈다. 벌어먹으려고 직장가는 차들이 꼬리를 문다. 알게 모르게 이 근교에도 일자리들이 생긴 결과이리라. 송라를 벗어나자 차량이 줄었다. 저지난밤 100mm 안팎의 많은 가을비가 내렸던 흔적이 도롯가나 들녘에 드러나도 생각만큼 심해 보이지 않는다.일찍 집을 나선 덕인가, 경고인가, 깨우침인가. 눈길 멈춘 곳 앞 도로 가드레일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원자력 발전소의 한 건물 녹지 곁 도로다. 찬찬히 살펴본다. 저쪽 크지 않은 앙상한 모과나무 밑에, 노란 모과 한 개가 낙엽과 섞인 푸른 풀들을 베고 누워있다. 그 오른편에 낮은 관목 두 그루가 마지막 잎새 몇 개를 달고 떤다.나무 앞 제법 넓은 면적에 어린 클로버가 밭을 이뤘다. 6월의 클로버만큼이나 많은 흰 꽃을 피워냈다. 그 밭 가장자리엔 노란 민들레꽃 하나 해님이다. 곁에 서 있는 민들레 관모 서너 송이는 작은 솜사탕이다. 솜사탕 뒤로 나지막한 옥향나무들이 가드레일을 따라 줄지어 섰다. 용케도 무시무시한 예초기 날을 피했을 개망초 한 포기가, 두 옥향나무 사이에서 계란프라이 모양 꽃 일고여덟을 달고 늦가을을 노래한다.6일만 지나면 12월인데, 꽃 피운 클로버와 민들레와 개망초 그리고 푸른 풀들, 낙엽과 앙상한 나무들은 어떤 메시지를 사람에게 보내고 있을까. ‘당신들 때문에 우리는 지금 봄이라고 착각한 채 살고 있어요’라고 할까. ‘우리는 속이지 못해요. 이 발전소 근로자들처럼 정직하게 살아낼 뿐입니다’라 말할까. 또는 ‘지구촌 아니, 우주 공동운명체 안에서 우리는 설계된 디엔에이대로 살잖아요’라고 할까.땅거미 내리는 7번 국도를 따라 돌아오는 차창 밖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올 11월 24일 만난 클로버꽃과 민들레꽃, 개망초꽃, 누운 모과, 앙상한 가지, 팔랑이는 마지막 잎새는 정직하고, 진실했던 거다. 기후변화에 따라 살며, 꽃피우고, 열매 맺으며, 주어진 삶을 그대로 주위에 보여주고 있다. 마지 발전소 현장 근로자들처럼’….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 어떤 성직자들은 대통령이 죽기를 바랐다. 제1야당 대표는 개발사업 비리 의혹에 사업 시행 지자체 최종결재자이면서도 ‘모르쇠’가 되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는 오만으로 일관한다. 어떤 정치권은 자기편의 일방적 안을 ‘정의’라고 우기며 왜곡을 일삼는 언론을 무기로 선동하고 강요한다. 북핵이 국민을 위협해도 정치권은 걱정이 없다. 일군의 선각자들이, 부정선거 문제를 복음처럼 외쳐도 응답하는 정치권은 없다.한마디로, 우리 사회는 진실과 정직을 버린 맛이 간 사회다. 국민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모름지기 정치인은 국민 목소리를 찾아 듣고, 그 해결의 길에 나서야만 한다. 정치권이 변화에 정직한 식물과 자기 일에 정직한 근로자들의 숨은 진실을 본받는 길…. 그 길이,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살리고 더 꽃피워 열매 맺을 테니까.

2022-11-27

착한 목자

강길수 수필가 안도의 숨을 쉰다. 기사를 자세히 보니 가톨릭 신부가 쓴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신부란 사람이, SNS에 대통령이 탄 “전용기가 추락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온 국민이 ‘추락을 위한 염원’을 모았으면 좋겠다”라고 했을까.하지만 그 안도의 숨이 멎기도 전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신부는 대통령 부부가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이미지와 함께 추락을 기원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 어안이 벙벙하고, 소름 돋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도대체 어찌 된 사람들일까. 성직자는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택한 이가 아닌가. 내 편과 상대편은 물론, 지구촌과 삼라만상을 품어내는 인생길,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제직을 선택한 사람들이기에 믿으며 존경했다. 한데, 이 두 사건으로 존경심이 싹 사라진다.‘착한 목자’란 말이 성경에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성당에 다니며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만 해도 우리나라는 농가에서 소규모의 닭, 돼지, 소를 키울 뿐이었다. 하여,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땐 생경했다. 사진, 영화 같은 데서 서구 목장의 모습을 본 게 전부였다. 때문에, ‘착한 목자’는 낭만이 물씬 풍기는 동화 같은 나라의 목동으로 마음에 자리 잡았다.군에 다녀와 가정을 이루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착한 목자’란 말이 새롭게 와닿았다. 예수가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 희생 제사를 바쳐, 제물과 사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래야만 하는가’하는 의문도 들었다. 예수는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라고 말했다. 그의 ‘착한 목자’ 자각을 성경에서 읽으면서, 공감도 하였다. 양을 치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헤아리면, ‘착한 목자’는 생존 자체였을 터다.예수가 사람에게 주는 메시지는 ‘그리스도인은 착한 목자로 살아야 한다’는 명제다. 하면, 사제는 두말할 나위 없이 더 진실하고 큰 ‘착한 목자’가 되어야 할 당위성이 주어진다. 생존은, 좌파도 우파도 뛰어넘는 절대 명제다. 따라서 종교의 정치적 중립이 요구되고, 성직자인 사제는 그 중심에 서 있다.이 일로, 처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홈페이지를 방문했다. 사제단 소개란에, ‘정의를 기초로 인간의 존엄, 인권, 민주화, 평화, 통일 등의 가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정의’가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 기반이라는 건데, 어떤 정의인지 밝히지 않고 있다. 메뉴 전체를 둘러본 결과 반정부, 반미 정치활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소개란에서 ‘인권’을 언급하면서 북한 인권에 대한 말은 찾을 수 없고, 사업의 ‘반전 평화’ 메뉴에도 북핵 문제 언급은 없다. 또 단체명에 ‘정의 구현’이란 말이 있음에도, 작금 우리 사회에서 정의가 짓밟힌 본질적 첫 번째 문제인 ‘부정선거’ 의혹과 송사에 대한 언급은 찾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정치 ‘좌파 신부, 좌파 사제’란 말을 듣는다 싶었다.부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착한 목자’로 새로 태어나기를 빈다.

2022-11-20

땅 밟고 걷기

강길수 수필가 웬일인지 요즘은 저쪽 길로 발길이 향한다. 보도를 마다하고 간다. 개방된 녹지에 저절로 난 오솔길이다. 늦가을이다.오솔길은 잔디밭과 나무들로 이루어진 학교 녹지에 있다. 없던 길이 언제부턴가 생겨났다. 느티나무잎, 플라타너스잎, 은행나무잎, 이름 모르는 나뭇잎도 떨어져 있다. 그 곁 스테인리스 파이프 담장엔 장미 덩굴이 아직 푸르다. 세월이 아쉬운가 보다. 낙엽 깔린 땅을 밟는 느낌은 맨땅의 그것과는 다르다. ‘구르몽의 숲’으로 가지 않아도, 긴 시간 없어도, 일부러 안 와도 출퇴근길에 늦가을 정취를 만끽한다.집에서 사무실까지 걸어가는 거리는 아스팔트나 보도블록, 시멘트 마당으로 이루어져 땅을 밟지 못한다. 도시인은 다 그럴 것이다. 요즈음엔 시골에 살아도 웬만한 길은 다 포장되어 있으니, 마음먹으면 땅을 밟지 않고 걸을 수 있으리라. 하긴 포장길이나 블록 보도도 다 자연 재료로 만든 것이니, 땅과 같다고 우긴다면 결정적 반박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땅에 난 길과 포장된 길은 다르다는 점을 누구나 본능으로 알리라.산골 농가에서 땅과 함께 유년을 보냈다. 그 경험은, 사람이 땅을 떠나서는 제대로 살 수 없음을 체득하기에 충분했다. 땅따먹기, 구슬치기, 자치기, 굴렁쇠 굴리기, 학교에서의 놀이나 경기, 등하교 때 걷기 등 모든 일상생활이 땅 위에서 이루어졌다. 더욱이 들일 돕기, 소먹이기, 꼴 뜯기 같은 일은 땅과 더불어 숨 쉬는 시간이었다.봄날, 어른들이 들에 가고 나면 아이들은 마당에서 땅따먹기 놀이를 했다. 조그만 납작한 돌이나 사금파리 하나 주워들면 망 준비 끝이다. 마당 안 맞은편 구석을 각각 시작점으로 하고 손뼘 한 바퀴 돌려 기본 땅을 마련한다. 선, 후공을 정한 다음 검지나 중지로 망을 튕기며 간 길을 따라 줄을 긋는다. 세 번 만에 자기 땅에 안착하면 줄 안이 다 제 땅이 된다. 마칠 때 더 큰 땅을 차지한 사람이 이긴다.‘땅과 사람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라고 묻는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리라. 땅과 사람 아니, 지구촌 모든 생명과 땅은 불가분의 관계이지 않은가. 그래도 또 낙엽의 계절 늦가을이 되니, 저절로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 봄엔 뭇 생명이 땅에서 용솟음치고, 여름엔 자라나, 가을엔 열매 맺고 낙엽 져, 마침내 땅으로 되돌아간다. 땅은 생명을 내어주고, 키우고, 명 다하면 다시 받아들이는 어머니다.어린 시절 땅따먹기 놀이를 하며 양손으로 느끼던 땅과 흙이 주는 촉감과 교감이, 지금도 양손에 살아있다. ‘신토불이!’ 그랬다. 땅은 내 생명, 나아가 온갖 생명과 하나였다. 우리의 전통 삼재(三才) 사상도, 땅이 만물을 창조하고 운행하는 하늘 일에 인간을 동참시키는 주체로 본다고 이해하고 싶다. 현대는 인간이 땅을 잃는 시대이지 않을까. 지구촌의 갈등, 전쟁, 불행도 외면하는 땅 때문이란 마음이 여울진다.출퇴근길, 학교 녹지 오솔길을 100여 걸음 땅을 밟으며 걷는다. 그때, ‘시몬의 낙엽 밟는 소리’도 덤으로 들을 수 있으니….복도 많다.

2022-11-14

은행나무 유감

강길수 수필가 가로수 은행나무잎들이 황록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머지않아 은행잎들은 노랗게 변신할 것이다. 샛노란 얼굴로, 새봄처럼 가을을 밝힐 은행잎…. 불어오는 하늬바람에 은행나무낙엽이 노랑나비 되어 팔랑팔랑 추는 군무를 바라보는 가슴은 기쁨이자 슬픔이며, 멀고도 가까운 저 너머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자, 기대이기도 하다.은행 종자 떨어진 가을 보도(步道)엔 아슬아슬 인생길 곡예가 공연된다. 떨어진 은행을 요리조리 피하며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공연이다. 실수로 은행을 밟으면, 신발 밑창에 그 외종피의 고약한 냄새가 착 달라붙는다. 한 번 뭍은 냄새는 그냥 두면 오래 가 사람 기분을 언짢게 한다. 악취를 없애려면, 신발 바닥을 꼼꼼히 씻어내야 하는 고역을 치러내야만 한다.수년 전 한 가을날, 아내가 비닐봉지에 껍질을 까지 않은 은행 두어 줌을 담아왔다. ‘가로수 은행은 중금속 오염으로 먹으면 안 될 거’라는 말에, 시골에 사는 이로부터 은행을 얻은 친구가 그 일부를 나눠준 것이란다. ‘냄새나서 어쩌려고’ 하는 내 걱정에, 다음 날 남편 출근 뒤 혼자 펜치로 작업하였단다.며칠 후, 펜치를 쓰려고 봉지에서 꺼내는데, 은행 악취가 장난이 아니었다. 펜치의 손잡이 수지(樹脂) 부분에 은행 냄새가 밴 것이다. 아내가 은행 외종피를 벗긴 고무장갑을 끼고 펜치로 중종피를 제거했나 보다. 펜치와 함께 들어있던 공구들의 손잡이에도 냄새가 났다. 퐁퐁 탄 물로 공구들을 꼼꼼히 씻었다. 냄새가 조금 줄었을 뿐, 없어지지 않았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펜치 손잡이는 은행 냄새가 제법 난다.은행나무를 ‘살아있는 화석’이라 한단다. 신생대에 번성했는데, 고생대인 2억 7천만 년 전 화석도 발견되었다니 말이다. 긴 세월, 많은 기후환경의 변화에도 살아남은 은행나무의 비결은 무엇일까. 연구자가 아니기에 과학적 추론은 어렵지만, 환경 적응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리라. 외종피의 악취나, 몸체에 다른 나무들보다 해충이 없는 점 등을 보면 은행나무는 자기 보호력 강화 쪽으로 진화한 지혜로운 나무다.인간이 개체로는 약하지만, 공동체가 되면 지구의 어떤 생물 종보다 강한 것은 은행나무를 닮아서가 아닐까. 천부적 지능으로 도구 만들고, 집 지으며, 옷 짓고, 문화와 과학기술문명을 이루었으니 말이다. 인간의 지능을 다른 생명이 본다면 은행의 외종피 같지 않을까. 그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인간 문명’이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맘대로 온갖 생명을 주무르고 재미로 죽이기도 하니까.사람은 떨어진 은행을 피할 수 있고, 줍거나 따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생명은 인간을 그리할 수가 없다. 이성(理性)보다 지능을 앞세워 물질문명에 치중한 인간의 생활 행태는, 기후변화를 불러와 지구촌 뭇 생명이 생존 위협을 받기에 이르렀다. 은행나무는 생존에 필요한 진화만 한다. 반면 인간은, 생존을 넘어 욕망만 채우려 자연의 하소연을 외면해왔다. 이는, 인간이 지구촌을 공멸의 길로 떠밀고 있음이다.인간이 은행나무의 지혜라도 좀 닮아가면 좋겠다.

2022-11-06

‘파친코’ 읽기를 권유함

이정희 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으로, 최근 TV에서도 책 소개로 흘러나오고 있다.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주는 문장이지만 곰곰이 되새겨보면 어려운 문장이다.역사는 우리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사의 흐름의 방향이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다르게 흘러갔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해 역사의 방향이 틀어졌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파친코’의 첫 문장 번역은 처음에는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였다. 이 문장은 원문을 보지 않더라도 틀린 문장이다. 역사가 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 이상, 역사가 우리를 망칠 수는 없지 않은가.원문은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이다. ‘fail’은 타동사로 ‘망치다’라는 의미로 번역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의 의견이다. 번역자는 독자들에게 좀 더 강한 인상을 주고자 ‘망쳐놨다’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해석이다.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잘 보여주는 예인 것이다.올 7월 말에 한국에서 두 번째로 출판한 ‘파친코’에는 처음 번역한 문장을 수정해서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했다. 우리말의 ‘저버리다’가 이렇게 무게감 있게 다가오기는 처음이다.올 여름 나는 ‘파친코’를 미리 출판 예약으로 구입해서 그날로 다 읽어버렸다. 완독까지 며칠 걸릴 거라고 예상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다 읽고 말았다.책은 ‘파친코1’, ‘파친코2’로 700쪽이 넘는 장편소설이지만, 비교적 술술 읽혔다. 내용이 쉬워서가 아니다. 책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책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리의 이야기인 것이다.소설 속 시간적 배경은 1910년부터 1989년까지로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소설 속 공간적 배경은 한국, 일본, 그리고 미국이 등장한다. 올 해 읽은 책으로는 가장 울림이 컸다.‘파친코’는 우리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보다 먼저 미국에서 출판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고, ‘뉴욕타임즈’, ‘USA투데이’, 아마존, BBC 등 75개가 넘는 주요 매체에서 ‘올 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또한 애플TV에서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해서 전세계에 동시 공개되었다. 그리고 전세계 사람들이 ‘파친코’ 드라마를 보고 한국과 일본과의 역사적 관계를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 지닌 파급력인 것이다.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가 직시해야 한다. 먼저 소설 ‘파친코’ 읽기를 권유하고 싶다. ‘파친코’가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전세계 독자들의 반응이 더 뜨거워질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 ‘파친코’도 하루 빨리 우리의 TV를 통해 쉽게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2022-10-30

신(信)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옛말에 ‘갖바치 내일 모레’라는 말이 있다. 갖바치들이 흔히 물건은 제 날짜에 만들지 않으면서, 약속한 날에 찾으러 가면 내일 오라 모레 오라 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이다. 오래전 친척 어른 한 분이 하는 말이 고향 친구 하나가 사업을 했는데, 돈을 크게 빌려주었단다. 근데 이제 갚겠다며 전화 와서는 계좌번호를 불러달라 해서 기꺼이 계좌를 알려주고 반갑게 전화를 끊었는데 이제나저제나 소식이 없더니 얼마 지나 또 전화 와서는 계좌번호가 맞냐며 다시 불러달라더란다. 그제야 아, 이 사기꾼! 애초부터 갚을 생각 없으면서 괜히 주려는 척하는, 또 ‘척’하는 인생 하나 여기 있구나 했단다.인도의 정신적, 정치적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는 ‘사람의 동기를 의심하는 순간, 그의 모든 행동이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다’라고 한 적이 있다. 물론 타인의 순수한 동기를 괜히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왠지 대화하면서 찝찝한 느낌이 들면 십중팔구 그 동기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마음의 불편함은 바로 상대방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나오는 행동이나 말투 때문에 발생한다.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속는 자나 속이는 자나 모두 부정적인 심리 현상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한다. 즉, 사람의 뇌는 상대를 속일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감정 담당 부위가 반사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상대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정서적 인지적 갈등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상대를 속이려는 것은 이러한 내적 갈등보다도 속임으로 인해 얻는 이득이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곧 부정적인 정서를 담당하는 뇌와 보상 중추 뇌가 함께 활성화될 때, 후자가 더 크게 작동되면 그러한 행동이 자행된다는 것이다.이렇게 다른 두 영역을 관장하는 뇌가 동시에 활성화될 때 보상 중추 뇌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바로 철저한 자기 인식과 관리가 필요하다. 즉 타인에게 해로운 불의는 절대 행하지 않고 내가 한 말은 꼭 지키려는 강한 의지 말이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래서,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신뢰할 수 있다”고 했고, 공자도 논어에서 “오랜 약속을 평생 잊지 않고 지킨다면 완성된 사람”이라 했던 것이다. 그만큼 자기 확신에 바탕을 두고 타자와의 신의를 지켜나가는 사람이라야 믿음직스럽고 달콤한 유혹도 단호히 거절할 수 있다.한곳에 오래 터 닦아 장사하려면 한순간 눈속임이 과연 통할까. 하물며 평생을 같이할 사람에게라면 그것이 비록 작은 거짓이라도 한번 잃은 신뢰를 어찌 회복할 수 있을까. 어느덧 가을도 중순을 넘어서고 있다. 울긋불긋 단풍들로 온 천지가 절경인 요즘, 멋지게 차려입고 단풍놀이 가는 것도 좋지만 국화차 한 잔에 가을 독서하며 그동안 곁에 있던 소중한 이들에게 과연 내가 얼마나 신의 있었던가를 한번 곱씹어보면 어떨까. 가을이 한층 더 풍성하게 다가올 테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한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홍수도 안 피하고 기다리다 마침내 익사한, 춘추 시대 미생처럼 되어선 안 될 일이지만.

2022-10-23

살아있는 우스개

강길수 수필가 내 차례가 되었다.아주머니는 비닐봉지에 땅콩 한 됫박을 부어 넣었다. 앞서 샀던 여자분처럼 내게도 한 움큼 더 주기 위해 좌판의 땅콩을 집는 순간,“며칠 전 집사람이 사 왔었는데 무게가 모자라던데요.”라고 말하자, 아주머니는 두말 안 하고 두 움큼을 더 주었다. 이에 먼저 샀던 여자분이,“왜 이분에겐 더 줘요?” 하고 불평했다. 단박에 아주머니는, ‘살아있는 우스개’를 한 방 날리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나도, 여자분도 폭소가 터져 나왔다. 기분이 뛸 듯이 상쾌해졌다. 우스개의 요술에 빠졌나 보다. 발걸음 가볍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땅콩 봉지가 보무도 당당하게 갈바람에 나붓거렸다.우스개 한 마다가 이렇게 사람 기분을 좋게 하다니 신기했다. 서구인들이 유머를 기리며 사는 연유가 이해됐다. 일상에서 어떤 일로 좋아지는 기분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론적 기쁨 혹은, 심연의 환희라고나 해야 할 즐거움이었다. 그러고 보니,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하늘을 날듯 기분 좋은 일은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있어도, 사회적 분위기로 오늘 그 순간처럼 활짝 웃어보지 못했다.우리 사회는 ‘살아있는 우스개’를 잃어가는 게 아닐까. 대통령의 사적 우스개를 일부러 왜곡, 침소봉대 보도하여 국제적 물의를 일으켰던 언론과 같은 심보를 내가 가졌다면, 아주머니의 우스개를 어떻게 받아들여 처신했을까.“당신 꽃뱀이야? 언제 봤다고 날 좋다는 거야? 별 미친 여자 다 보겠네!” 하며 땅콩 봉지를 던지고, 난리 피우지 않았겠는가. 농담을 농담으로 듣지 않고, 우스개를 우스개로 주고받지 않는 자화상이 우리 사회라면, 중병이 든 게 분명하다. 나와 뜻이 다른 사람도, 이웃으로 함께 살아야 할 국가사회공동체의 한사람이다. 지난 수년간 우리는 이웃에게 ‘적폐란 올가미’를 씌워, 억지 단죄나 갈라치기를 일삼는 망국 정치를 경험했다.도대체 정치적 신념이 무엇이고, 정당이 뭐며, 좌파와 우파는 또 무엇들이란 말인가. 그것들이 함께 살고, 살아내야 할 가족과 이웃, 나라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정치 이데올로기 전에 아니, 모든 인위적 가치에 앞서 천부적이자 본원적인 양심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지 않은가. 창에 때가 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창엔 지독한 때가 낀 게 분명하다. 나도, 너도, 그도 마음의 창에 덕지덕지 때가 붙어 있음이다.국본(國本)을 무너뜨릴 부정선거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 송사에도, 우리 사회는 무심하다. 피부로 느끼는 현실과 동떨어진 여론조사 결과로 왜곡해도, 공정성을 따지자는 소리가 없다. 선관위와 여론조사기관이 신이란 말인가. 양심과 이성을 별주부전 토끼의 간처럼 꺼내 두고 사는 사회가 우리의 자화상일까. 하긴, 우스개를 삼류정치 도구로 만드는 희한한 사회이니까. 우스개를 우스개로 주고받는 참 사회가 그립다.입가에 웃음꽃이 다시 피어난다. 땅콩 덤 주기의 불평을 한마디로 훅 날려버린 아주머니의 ‘살아있는 우스개’가, 지금도 귓바퀴를 맴도니까.“내는 남자가 더 좋니더!…”

2022-10-16

자투리 미리 남기기

강길수 수필가 ‘자투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사전적 뜻은, 필요한 것을 ‘쓰거나 팔고 남은 작은 부분’ 또는, ‘기준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작거나 적은 조각’을 말한다. 그런데 미리 남기는 자투리를 뜻하는 단어는 생각나지 않고, 웹상에 찾아보아도 없다. 왜일까.필요한 것을 쓰기 전에 조금 떼어놓는 일은, 예나 이제나 있을 것이다. 우리 선인들과 국어 연구자들은 왜 이 경우의 말을 만들지 않았을까. 그 말을 알지도, 찾지도 못하니 답답하다. 옷, 이부자리 등 천 제품을 공정(工程)에서, 불량품 방지를 위해 재단 전 일부러 자투리를 남기는 경우가 있다. 또, 성당에서는 사순절에 이웃을 돕기 위해, 밥 짓기 전 쌀 한 숟갈 모으기 운동을 ‘사순절 성미(誠米)’란 이름으로 한다. 천 자투리 남기기는 용어를 못 찾았고, ‘사순절 성미’는 표현 적절성이 떨어진다.수년 전,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배운 것이 있다. 한 나이 지긋하신 분이, 소변을 본 후 주머니에서 휴지 쪼가리를 꺼내 뒤처리하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남자의 소변 뒤처리는 상상도 하지 않았었다. 남자도 소변 뒤처리를 하면, 위생 면이나 대인 관계상에도 좋겠다고 생각이 바뀌어 따라 하였다. 뗀 대변용 휴지에서, 소변용 작은 자투리 쪼가리를 미리 남기는 버릇도 이어 생겼다. 그 후, 일상생활에서 사전 절약, 용도 늘리기, 물, 공기 오염 줄이기 같은데 더 관심을 가지게 됐다.생각을 바꾸고 보니, 연쇄 반응처럼 다른 것들이 보였다. 저절로 이것저것 자투리 미리 남기기 거리를 찾게 되었다. 어떤 화장실엔 손 씻은 후 닦는 제법 큰 크기의 1회 용 휴지가 있다. 씻어 깨끗한 손의 물기만 닦고 아까운 종이를 버리는 것은 자원 낭비이자, 자연 훼손과 기후 악화와도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손 닦은 휴지를 가져 와 다른 용도로 더 쓰고 버린다. 아이들이 한번 사용하고 버리는 물티슈도 우리 부부는 씻어 몇 번 재사용 한다.자투리 미리 남기기의 마음은 ‘아나바다 운동’의 정신과 궤를 같이한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간 정신일 것이다. 아나바다운동은 외환위기를 맞은 다음 해인 1998년 등장했다. 정부 주도의 이 운동은 소비지출 줄이기가 요체였다.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구호를 내건 아나바다 운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다.‘아나바다’가 소비 줄이기에 역점을 둔 개념인 반면, ‘자투리 미리 남기기’는 소비를 줄일 뿐만 아니라, 새 용도를 창출하고 나아가 생태계보호까지 염두에 둔 개념이 된다. 물론, 소비를 줄이면 생태계보호에 이바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새 용도가 창출되지는 않는다.지구의 환경과 자원은 유한하다. 이는 지구가 부양할 수 있는 생명체도, 감당할 수 있는 오염물도 유한하다는 증거다. 지구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다. 우리 어머니다. 인간이 일으킨 환경오염으로 지구 어머니는 중병에 걸렸다. 중병을 낫게 하는 처방의 하나로 ‘자투리 미리 남기기 운동’이라도 제안하고 싶은 마음이다.자투리 미리 남기기가 온 지구촌에 퍼지면 좋겠다.

2022-09-25

세대간 교류를 위해

이정희 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옛날이야기를 보면 “옛날 옛날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습니다”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아마 이것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주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화자가 할아버지나 할머니일 가능성이 크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주들을 무릎 위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정겹다. 그만큼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교류가 빈번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어른들이 “요즘 애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또한, “내가 어렸을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내가 자랐을 때와 달라도 너무 달라”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뒤따라 나온다.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대면 커뮤니케이션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또래간의 대면 커뮤니케이션도 서툴고, 세대간 커뮤니케이션은 더더욱 힘들어 한다. 굳이 집 밖에서 인간관계를 맺지 않아도 집안에서 비대면 교류가 가능해 지게 되었다.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서로 이야기 하면서 미묘한 감정 변화나 표정의 변화 등에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과도 익명으로 얼마든지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고, 의견이 맞지 않는 다거나 가치관이 다를 경우에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으면 되고, 상대가 싫어지면 관계를 끊으면 된다. 이런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성립된 것이다.게다가 요즘 아이들은 같은 또래, 같은 나이의 동급생끼리만 접할 기회가 대부분이고, 다른 연령층과의 교류는 놀라울 정도로 적다. 예를 들어 노인들과 중고등학생들과의 교류, 또는 노인들과 초등학생, 유치원생들과의 교류는 생각보다 훨씬 적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나이의 동급생끼리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세대간의 관계가 결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러한 사회 환경 속에서 의도적으로 세대간 교류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미 미국을 비롯해 유럽에서는 세대간 교류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활성화 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대간 교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도 있지만, 너무 부족하다.먼저, 곳곳에 있는 경로당과 노인정 등은 명칭을 바꾸고 세대간 교류의 장으로 마련했으면 좋겠다.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과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활성화 되어야 하겠다. 여기에 대학교육에서 세대간 교류를 위한 새로운 강의가 개설되면 좋겠다.세대간 교류가 활발해지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해소하고, 해결하거나, 예방하여 살기 좋은 건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022-09-18

누이이며 어머니인 지구

강길수 수필가 8월 마지막 주일. 주보(週報)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가 요약, 게재되어 있다.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재개된 주일미사 때부터 미사 전 주보를 읽는 버릇이 생겼다. 빨리 와야 성당 내에 앉을 수 있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유행 전에는, 주보를 공지 사항 위주로 대강 보고 넘어갔다. 신문도 관심 가는 기사 이외에는 제목으로 대충 흐름만 파악하곤 했다.담화를 읽는다. 둘째 단락 첫 문장이 가슴에 와 박힌다. “우리의 ‘누이’이며 ‘어머니’인 지구가 울부짖습니다.”라는 구절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회칙 ‘찬미 받으소서’를 발표했다는 사실은 가톨릭신문을 통해 전에 본 적이 있으나, 그 내용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다. 환경 분야에서 일해 왔고, 자칭 생태론자로 믿기에 내용은 비슷하리라 여겼었다.한데, 주보의 담화문은 내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자신의 안일과 타성을 질책하고, 깨부수는 마음이 뒤따른다. 지구가 바로 우리의 ‘누이’라는 말 때문이다. 전에 ‘가이아 이론’이나 ‘아메리카 인디언 추장의 편지’ 등을 읽으면서, 대지와 지구가 ‘우리들의 어머니’란 비유는 보았으나 ‘누이’란 은유는 오늘 처음 만난 것이다.웹사이트를 검색해보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7년 전 발표한 회칙 이름 ‘찬미 받으소서’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에서 따온 것이었다. 자연과 소통하며 동물들과 대화했다는 성 프란치스코는, 9세기나 앞선 생태주의 선각자였으리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할 인간의 삶을 몸소 실천하여, 본으로 살아낸 성자 프란치스코…. 그가 새 떼들과 말하며 함께 사는 옛 영화의 한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누이’와 ‘어머니’란 두 말에서 어떤 어감의 차이를 느끼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차이는 ‘누이’가 ‘어머니’보다 더 곱고, 아련하며, 가련하다. 어머니는 약하지만, 누구보다 강한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이는 어머니가 되기 위해, 커가는 여린 나무이지 않은가. 지금 우리 지구는, ‘가련한 누이의 처지’일 것이다. 때문에 ‘누이’란 말이 가슴을 파고든다.기후변화로, 북극의 빙하와 영구동토가 녹는 현장을 답사한 방송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영구동토 해동은, 지구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이라 했다. 해동에 따라 동토층에 묻힌 메탄 등 가스가 분출되고, 모르는 미생물들이 유출된다. 이런 현상들이 기후와 생태계에 미칠 영향은, 미증유의 재난이 될 것이란 결론이었다.슬프게도 우리의 누이 지구는, 중병이 들었다. 제 몸에서 난 게 아니라, 인간에 의해 큰 병에 걸렸다. 개발을 앞세워 무분별한 환경훼손을 일삼고, 온실가스 과량 배출 등으로, 인간은 지구 누이에게 코로나19보다 더한 악성 바이러스가 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교황이 말씀하는 ‘지구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면서’ ‘생태적 회개’를 하고, 그 개선 내용을 실천해야 한다.‘우리 누이 지구’가, 하루빨리 중병에서 일어나 해맑게 웃을 수 있도록….

2022-09-04

숨은 사회 카르텔

강길수 수필가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숨은 무엇이 그 저변에 꿈틀거리는 것만 같다. 온갖 일에 참견하고 비난하며, 편 가르고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는 존재인 듯하다.도대체 어떤 것이 내게 이러한 느낌을 들게 하는 걸까. 취임한 지 1분기밖에 안 된 대통령에게,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졌다고 언론마다 난리굿이다. 신났는지 야당 의원이 ‘대통령 탄핵’이란 망발까지 말한 바 있다. 반면, 어떤 유튜브가 생방송으로 거리에서 조사한 대통령 지지율은 80~90%는 되어 보였다. 왜 이럴까. 여론조사기관의 발표 수치는 내가 피부로 느끼는 그것과는 왜 천양지차인가.지난달 말, 대법원은 2건의 총선 무효소송을 늑장 기각판결을 했다. 사람들과 단체들이 재작년 4·15총선 이후, 줄기차게 ‘부정선거’를 주장하고 있다. 수많은 증거를 제시하고, 선거 데이터 조작을 외치며, 120건이 넘는 부정선거 소송을 제기했다. 그래도 우리 사회는 무덤덤했다. 아니, 애써 외면했다. 왜 주류언론과 법조계, 정치계, 학계,‘민주주의’를 주절대던 시민단체들은 침묵해 왔을까. 대법관과 지방 법관이 중앙 및 지방의 선거관리 위원장이기에, 팔이 안으로 굽을 수도 있는 선거조직의 구조적 결함을 정치권은 왜 수수방관만 할까.이런 의문들 때문에, 3·9 대선 직후 중앙선관위가 발표한 대선과 총선의 선거 결과 데이터를 조회해 보았다. 사전투표 결과를 보는 순간, ‘이럴 수가!’하고 저절로 속말이 튀어나왔다. 멍해졌다. 수치가 진실을 웅변하였기 때문이다. 전 지역이 한쪽으로 치우친 선거 데이터는, 통계적 검토도 필요 없이 비정상 수치임이 한눈에 드러났다. 어떤 개입이 없는 한, 나올 수 없는 수치였다. 사람은 진실을 감출 수 있어도, 수치는 진실을 숨길 수 없는 법이다.우리 사회는, 해결하지 않으면 체제가 바뀔지도 모를 근본적 문제를 안고 산다는 마음이 짙어진다. 자유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 공정성이 의심받고, 객관적으로 조사 발표해야 할 대통령 지지율을 국민이 못 믿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사회 카르텔이라고 해야만 할 음습한 힘이, 사회 전 분야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다. 그 카르텔이 정부와 국민을 이간시키고, 나라에 큰 해악을 주고 있지는 않을까.어떤 공동체가 체제 유지와 관련된 근본적 문제가 생겼는데, 그 해결을 외면한다면 공동체가 유지 발전할 수 있을까. 단연코 없다. 가정, 단체, 나라도 마찬가지다. 만일, 우리 사회 온 분야에 숨은 카르텔이 작동하고 있다면, 우선 그 카르텔을 백일하에 밝혀내야 한다. 존재 목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반사회적 반국가적 카르텔이라면 필연코 국민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 자멸할 것이다.‘민주’ 또는 ‘민주주의’란 이름이나 슬로건을 내걸고, 극히 반민주적 활동 행태를 보이는 정치권이나 기관, 언론, 노조, 시민단체를 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이런 현상들이 숨은 사회 카르텔과 이어지고, 수년 전 언론에 보도되었던 어느 정당인의 20년, 50년 집권론과도 연계되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부디, 내 느낌이 착각이면 좋겠다.

2022-08-28

Empty Heart, Empty Hands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얼마 전의 일이다. 대기업을 다니다가 일찌감치 그만두고 귀농을 한 대학 동창 P가 있었는데, 이전 직장 동료 R 때문에 속상한 일이 있었단다. P가 회사에 다닐 때는, 시골에서 가져온 농산물들을 R에게 주면, R도 매우 감사해하며 소소한 것들을 주곤 했었다나.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 오가는 정, 참 이것이 사람살이 맛이구나 하는 그런 게 있었는데, 직장을 그만두고 완전 귀농을 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턴가, R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는 것이다.하루는 대형마트 앞에서, 직접 재배한 싱싱한 유기농 야채를 주고자 R을 불렀더니, 그냥 받기만 하고 휙 가버렸다는 것이다. 마트 앞이었던 만큼, 빵 하나 그냥 사서 줄 법도 했는데, 본인 볼일만 보고선 휙 가던 모습이란. 그땐 바빠 그런가 했는데, 얼마 후 다시 나눔할 게 생겨 R을 불렀더니, R은 잽싸게 달려와서는, 또 받아 갈 것만 딱 받아가고 감사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훌쩍 가버리더란다. 직장 다닐 땐 그렇게 살갑더니, 나오니 별 볼일 없다 싶었는지 태도가 돌변한 것을 보고, 마음이 비면, 손도 비워지나 보다 싶어 씁쓸했다고.이 얘기를 들으면서, 송대의 주자가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에서 ‘盡己之謂忠, 以實之謂信’이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여기서 ‘충(忠)’은 자기에게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신(信)’은 그 충을 타인에게 실현함을 의미한다. 충(忠)은 가운데 중(中) 자에 마음 심(心) 자가 합쳐진 글로, 충(忠)이 가득한 사람은 곧 마음의 중심, 심지가 굳어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며 타인에겐 신뢰를 주는 한결같은 사람을 의미한다.한편, 필요할 땐 간, 쓸개라도 줄 듯하다 더이상 별 볼 일 없거나 관계가 소원하다 싶음 언제든 손해 보지 않고 빈손으로 받아 가기만 하려는 이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심지가 굳지 못한 이들이다. 충(忠)이 없기에 얍삽하고 충(忠)을 바탕으로 한 신뢰 또한 없다. 이들은 스스로에게도 솔직하지 못하며, 시류에 따라 흔들리는 갈대같은 인생들이자 또 어떤 면에서는 ‘개만도 못한 사람들’이기도 하다.‘개’는 ‘충(忠)’의 상징적 동물이다. 우리 옛 문헌에는, 개가 글이나 옷자락을 물고 와 주인의 죽음을 알리거나 주인의 시체를 지키거나 몸에 물을 묻혀 불을 끄고 주인을 살린 이야기 등 다양한 의구담(義狗談)이 전한다. 모두 비천하게 인식되었던 개가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한 모습을 형상화한 것들로, 이를 통해 우리 조상들은 각박해져 가는 세태 속, 인간으로서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이들을 경계하는 자료로 삼곤 하였다.이제 벌써 8월도 중순을 지나고 있다. 새롭게 정권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여기저기서 잡음이 많이 들린다. 한 자리 잡기 전에는 간이라도 빼줄 듯 세상 다정하다가 다들 권좌에 오르고 나서는 권리만 생각하고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아닌지. 다들 초심의 마음으로 충(忠)과 신(信)을 가슴에 새기면서, ‘개보다 못한 사람’이 아닌 적어도 ‘개(義狗) 같은 사람’이 되어 국정 운영을 해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2022-08-21

단테의 ‘신곡(神曲)’ 열풍

이정희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최근 더운 여름을 더 뜨겁게 달군 것은 피아니스트 임윤찬 신드롬에 이어 그가 애독했다는 단테의 ‘신곡(神曲)’열풍이다. 올해 반 클라이번 콩쿠르 역사상 최연소 우승자인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스승들의 가르침으로 ‘신곡’등 인문 고전을 읽고 리포트를 쓰고, 신문 등을 읽고 스크랩 하는 것을 의무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즉, 훌륭한 피아니스트는 곡을 완벽하게 안 틀리고 치는 기교보다는 인문학적 소양을 더 중요시 한 것이다.내가 20대에 처음 단테의 ‘신곡’을 읽고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것은 ‘지옥편’에 나오는 괴조 하르피아 이야기와 단테가 사랑한 베아트리체이다. 하르피아는 죽은 자를 다스리는데, 자살한 사람들이 받는 형벌로 죽은 사람을 식물로 변신시킨다. 이때 하르피아는 자살자가 변신한 식물에 둥지를 틀고 밤마다 잎을 갉아먹고 열매를 따 먹고, 배설물로 식물을 더럽히는 괴물이다. 그 식물이 낮 동안 새순이 싹트고 열매를 맺으면 밤바다 그것을 갉아먹는다. 식물로서 이 보다 더 괴로운 형벌은 없을 것이다. 그 당시, 절대로 자살을 하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이러한 생각을 떠올리면서 다시 한 번‘신곡’을 읽어보았다. 재미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신곡’을 제대로 감상하게 된 느낌이다. 어쩌면 그동안 그리스 로마신화를 비롯하여, 그리스 철학, 로마제국, 기독교 역사 등에 대한 기본 지식이 쌓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단테의 ‘신곡’의 원제를 그대로 한국어로 번역하면 ‘단테의 코미디(희극)’이다. ‘단테의 코미디’가 ‘신곡’이 된 것은 일본의 영향이 크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신곡’이라고 번역한 사람은 근대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모리 오가이(森鷗外)이다. 1892년 안데르센의 소설 ‘즉흥시인’을 번역할 때 작품 속에 나오는 단테의 ‘단테의 코미디’를 ‘신곡(神曲)’으로 번역한 데에서 비롯되어 지금까지 정착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1957년에 처음 번역한 ‘신곡’도 일본어판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바이다.‘신곡’은 단테가 스승으로 여기는 고대 로마 최고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면서 실존했던 인물들이나 신화 속 인물들을 만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지옥에 떨어진 많은 사람들은 비록 세상에서 훌륭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지 않았거나 우러러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신곡’에 대한 평가는 기독교권에서는 매우 높다. 특히, 거의 동시대에 활약한 작가 보카치오는 단테의 영향을 받아 최초의 단테 숭배자가 되어, ‘신곡’을 강연하면서 널리 알렸다.반면, 이슬람권에서 ‘신곡’은 악마의 시로 취급되어 금서가 되었다. 또한, 단테에 의해 지옥으로 추락한 사람들의 자손이나 관계자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단테를 비판하기도 하였다.연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생전에 좋은 일인 줄 알면서도 처음부터 자진해서 행하지 않은 게으른 사람들이다. 이 구분 역시 어딘가 묘한 설득력이 있다.적어도 단테의 ‘신곡’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길라잡이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2022-08-07

우리 사회의 한 수준

강길수 수필가 걸어 출퇴근한다. 일터에 오가는 일과 걷기운동을 겸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다. 사무실 가는 길은 여러 거리를 지난다. 간선도로 서너 곳, 학교 곁 두세 곳, 지선도로 두어 곳, 이면도로가 열 곳이 넘는다. 이렇게 따지니 먼 것 같지만, 약 반 시간 정도 걸린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의 출퇴근 거리(距離)가 흔히 말하는 하루 운동량 만 보에는 미치지 못하나 내겐 족한 거리다.거리마다 같거나 다른 광경들을 만나며 걷는다. 어떤 곳은 담배꽁초 하나 없이 깨끗하다. 반면, 어느 길모퉁이나 바람 모이는 자리엔 많은 쓰레기가 있다. 심지어 식당의 이면도로 앞에도 다량의 쓰레기가 있다. 짧은 시간 걷는 동안 깨끗하거나 지저분한 각기 서로 다른 모습의 거리를 만나는 것은, 생각거리를 만들어 주어서 좋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우리의 사회 수준 하나를 들킨 것 같아 씁쓸한 때가 더 많다.그럴 땐 젊은 날 일본 출장길에 쓰레기 하나 없는 거리에 많이 놀랐던 기억이 저절로 떠올라 우리와 비교되곤 한다. 서툰 일본어 실력으로 좌충우돌하면서 도착한 숙소에서 선잠을 자고 일어나 내다 본 이른 아침 소도시의 거리 풍경….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에 고운 동영상으로 살아 있다. 집집에 한 사람씩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갖고 나와, 자기 집 앞과 거리를 청소하는 멋진 모습이 부러움과 시샘으로도 다가왔었다.편도 십 리도 안 되는 길이 거리마다 다른 모양을 보여주는 현상은 우리 사회의 어떤 면을 말하는 걸까. 어떤 이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의 다양성 때문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나, 내가 본 깨끗한 거리에는 숨은 보석들이 살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침마다 보았던 어떤 할아버지의 묵묵한 공원 청소, 부부로 보이는 어느 시니어 봉사자들의 꼼꼼한 쓰레기 줍기, 땀을 흘리며 아침마다 자기 사는 지역 쓰레기를 말없이 치우던 중년 남자 등이 그들이다.깨끗한 거리는 정부의 일자리 사업 청소가 큰 몫을 차지한다고 본다. 출근길에 만나는 쓰레기 줍는 노인만 해도 족히 스무 명은 된다. 그분들은 정한 구역만 일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소외된 지역의 길은 숨은 봉사자가 없는 한 깨끗하지 못하다. 일자별로 다른 지역을 배정한다든가 하면 효과가 더 높아질 텐데, 그 많은 공무원과 시·도·국회의원 등 국민의 머슴들은 어디서 무얼 보고 살피는 걸까.삶터의 쓰레기 유무를 그 사회 수준의 한 척도로 삼을 수 있다고 본다. 오토바이를 타고 깨끗한 거리에 황야의 무법자처럼, 쓰레기로 될 명함전단지를 휙휙 뿌려대도 누구도 제지하지 않는다. 잘못된 우리 사회 수준의 사례이리라. 쓰레기는 도시뿐 아니라 시골, 산과 들, 하천과 바다, 하늘에 이르기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없을수록 좋은 게 쓰레기다. 온 나라가 합심하면 쓰레기 없애기가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이다.우리는 쓰레기로 버린 담배꽁초가 커다란 산불로 변해 엄청난 피해를 주고 인명도 앗아가는 불행을 겪었다. 이는 우리가 사회 수준을 높여야만 할 반면교사가 아닐까.

2022-07-31

오십견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 십수 년 전에 경험한 일이다. 지하주차장에서 주차 공간을 확인하려고 뒤를 돌아보려는데 목이 돌아가지 않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후진을 위해 오른팔을 들어 올리려니 심한 통증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평소 워낙 부실하던 몸이라 곳곳이 삐걱대는 건 예사였으나 통증과 함께 팔과 목을 움직일 수 없는 경우는 처음이어서 몹시 당황했었다. 이튿날 병원에 가보니 오십견이라 했다. 인체가 기계라면 오십년이나 사용했으니 여기저기 고장이 나게 마련이다. 여러 질병명 중에서 세월의 의미가 담겨있는 대표적인 것이 오십견이 아닌가 싶다. 이는 단순히 오십대의 어깨에 생긴 염증이 아니라 반 백년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세월의 무게를 더한 용어일 것이다.공자는 오십이 되어 천명을 알았다고 한다. 천명은 하늘이 인간에게 맡긴 사명이다. 하늘의 명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것이므로 ‘지천명’은 불가항력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십견은 치료가 어려워 그야말로 세월이 약이다. 병원 처방이 있고 여러 가지 치료 방법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단번에 상처를 도려내듯 깨끗하게 치료하기는 불가능하고 세월이 가야 비로소 조금씩 낫는다. 나도 오십견 진단을 받고는 부지런히 병원 치료를 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어깨 부근에 고인 물을 뽑아내기도 했고 물리치료와 약물치료도 열심히 했다. 별 차도가 없어 한방치료를 겸하기도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온갖 민간요법 정보와 먼저 겪은 자들의 경험담에 의하면 가장 좋은 운동이 수영이란다. 병원 치료를 열심히 받고 수영을 부지런히 하면 일년 만에 완치가 되고,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두면 완치에 열두 달이 걸린다니 그게 그거다. 그러나 오십견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낫는다는 속설을 믿고 방치하면 후유증으로 평생 고생할 수 있으니,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장시간 사용할 경우는 근육이 경직되지 않도록 적절한 스트레칭이 필요함을 명심해야 한다.육십을 훌쩍 넘은 사람이 뜬금없이 무슨 오십견 얘긴가 할 수도 있겠다. 남의 얘기이거나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몇 주 전에 비슷한 증세를 겪었고, 일년도 열두 달도 아닌 몇 주 만에 회복이 되었으니 이건 뭐지? 다행이면서도 어리둥절하다. 뭐 좋은 일이라고 양쪽 어깨를 골고루 다녀갔던 오십견이 육십 중반에 다시 찾아왔으니 황당함과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바쁜 일로 열심히 자판을 두드려대던 중이었으니 큰 낭패였다. 즉시 한의원을 찾았고, 치료에 공을 들였고, 휴식을 일처럼 중요하게 실천했더니 불과 몇 주 만에 호전되었다. 그렇다고 인생 육십의 무게가 오십보다 가벼워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육십을 ‘이순’이라 하여 남의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아 이해하고 관용하는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나잇값을 하자면 자아를 덮고 있는 가면을 벗어야 한다. 이순이 되면 그동안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남기 위해 썼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진짜 자기를 만나야 한다. 스스로 존재 이유를 의심하게 하던 내면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인생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2022-07-24

3일간의 행복

강길수 수필가 ‘우와! 이게 웬 복이야! 나라꽃을 이곳에서 만나다니….’하고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순간, 숙소가 멀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사흘간 오가며 나라꽃 무궁화의 웃음을 보며 오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행복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초등학교 때 배웠던 ‘우리나라 꽃’ 노래가 절로 흥얼거린다.칠월 중순의 둘째 날 아침이다. 숙소가 교육장과 멀어 조금 언짢았던 기분이 되살아나며 모텔 문을 나섰다. 첫 길이라 얼마간 이곳저곳 돌면서 교육장 가는 길을 찾았다. 간선도로에 연결된 주택지 도로다. 노변으로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얼굴, 목, 등에서 땀이 났다.그런데 초입을 들어서자, 보도에서 활짝 웃는 얼굴들이 도열하고 서서 오는 이를 반기고 있는 게 아닌가. 언짢았던 기분도, 흐르는 땀의 불편도 휙 사라졌다. 바로 무궁화의 인사 덕분이다.“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 꽃. 피었네, 피었네, 우리나라 꽃.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 꽃.….”누구나 즉석에서 따라 부르며 배울 수 있는 이 쉽고 아름다운 동요가,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살아있음을 알아채던 기쁜 순간이다. 집에 돌아와 웹사이트에서 가사와 멜로디를 찾아본다.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눈망울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로 동요를 듣는 기분은 ‘나와 너, 우리가 바로 하나’라라는 공동체 의식을 키웠던 그 옛날 기억도 되살렸다.무궁화는 우리 민족과 예로부터 관련이 깊다. 신라의 최치원이 당에 보낸 문서에서 우리나라를 ‘근화향(槿花鄕)’ 즉, ‘무궁화 나라’라고 불렀다. 또, 옛 중국 동진(東晉)의 문인 곽박(郭璞·276~324)이 쓴 지리서(地理書) ‘산해경(山海經)’에서 ‘군자 나라에는 무궁화가 많은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더라(君子之國有薰華草朝生暮死)’라고 하였다.무궁화가 어떻게 나라꽃이 되었는지 공적 선정 자료는 못 찾았다. 다만, 16세기부터 ‘무궁화’란 말이 쓰인 것을 보면, 백성의 삶 속에 먼저 나라꽃으로 자리 잡았다 싶다. 구한말 신문화가 밀려오면서 남궁억, 윤치호 등이 국화의 필요성을 알고 무궁화를 국화로 하자고 한 바 있다. 그때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이 들어가, 무궁화는 나라꽃으로 자리매김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구절은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 때, 배재학당 학생들의 애국가에서 처음 불렀다 한다.대통령 표장(標章)이나 국가 기관 마크 등 많은 데 무궁화무늬를 쓴다. 그러나 정작 무궁화를 심고 가꾸는 일에 우리 사회는 소홀히 해온 게 사실이다. 한데, 이곳엔 누가 무궁화를 심었을까. 주민이든, 지자체든 심은 분들에게 마음의 박수를 보낸다. 인천광역시 남동구 문화서로 23번 길과 89번 길을, 아침저녁 무궁화 웃음 속에 걸었던 3일간의 행복은 내게 나라꽃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고맙고 또, 고맙다.무궁화를 온 나라가 애써 가꾸고 마음에 새겨, 3일간의 행복이 평생 가면 좋겠다.

2022-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