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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죽어가는 세상에서

등록일 2022-11-13 17:48 게재일 2022-11-1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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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마쓰오 바쇼(1644∼1694)는 하이쿠(俳句)를 배우의 유희에서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평생을 가난과 방랑으로 일관한 그는 돈이 지배하는 시대에 당당하게 맞선 인물이다.

에도 막부(1603∼1868) 초기를 살아간 그는 자본주의의 광풍에 휘둘리는 군중과 시류에 온몸으로 저항한다. 그가 남긴 하이쿠 한 수는 이렇다.

“두견새 운다 / 지금은 시인이 없는 세상”

봄의 서정이 피를 토하며 우는 두견새의 울음소리로 단출하게 구상화된다. 그런 봄날에 에도의 시인들은 시를 버리고 돈을 찾은 지 오래다.

서정주는 ‘귀촉도’에서 먼저 세상 버린 낭군을 그리워하며 고요히 절규하는 여인의 형상을 두견새로 그려낸다. 하지만 마쓰오 바쇼는 봄의 절정에서 울어대는 두견새와 시인의 부재를 나란히 세운다.

하지만 일본에는 예나 지금이나 시인이 살았고 살고 있다. 그들의 시문학 전통과 창작자 그리고 독서층이 강고하되 문득 도타운 정황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서정주가 ‘귀촉도’ 시집(詩集)을 출간한 때가 해방공간인 1948년이었다. 수많은 정치적 이념과 노선이 엇갈려 불꽃처럼 각축하고 항쟁했던 때에도 사람들은 시를 읽었다. 6·25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6월 대투쟁의 시기에도 그러했다.

국제통화기금 사태로 촉발된 노숙자들이 거리를 헤매던 때에도 시인들은 시를 썼고, 독자는 여전히 시를 읽었다. 그러나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이 도래하면서 모든 것이 전복된다. 시인은 아직도 꿈처럼 추억처럼 시를 쓰지만, 시를 읽고 나직하게 암송하며 거리를 걸어가는 청춘은 완전히 소멸했다. 아침햇살에 간밤의 보름달이 빛을 잃고 시나브로 사위어가는 것처럼 시를 읽는 청춘들은 소리도 흔적도 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대학에 들어와서 제 돈을 주고 시집을 사서 읽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손드는 학생은 하나도 없다. 시가 죽고 소설이 절멸하는 판국에 희곡을 읽는 학생은 진즉에 깔끔하게 사라졌다. 문학의 종말, 문학의 소거(消去), 문학의 죽음이 당연시되는 시간대가 우리 곁에서 고요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누구 하나 아쉬워하거나 조종(弔鐘)을 울리거나 손을 들어 무언가를 표시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얼굴이며 진면목(眞面目)이다.

시가 어려워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 너무나 한가로운 일이어서, 시를 읽는 시간이 아까워서 젊은이들은 시를 버리고 현실로 도주한다. 학점, 알바, 취직에 목매야 하는 판국에 시와 시인과 시집은 한가로운 옛노래라는 게 그들의 합리적인 변명이다. 우리 사회에서 시가 이렇게 완벽하게 죽어 나가고, 시인이 이토록 위축된 적은 없었던 듯하다. 모두 과학기술과 생활의 편리와 이기, 눈앞의 이익과 돈벌이로 질주하는데, 어떻게 저항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가 죽어버린 참혹한 세상에 살면서 새벽녘 된서리 맞은 머위와 루드베키아와 민들레 이파리를 본다. 죽었으되 다시 살아나는 생명이 시와 시인에게도 허여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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