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들어갈 무렵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던 나는 중대한 결론에 도달한다. 공자보다 10년을 더 살기로 한 것이다. 중니(仲尼)는 생애주기별로 자신의 성취나 경지를 낱낱이 밝혔다.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홀로 섰으며, 40세에 불혹에 이르렀으며, 50세에는 천명을 알았고, 60세에는 이순, 70세에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에 도달했다.
공자보다 10년 늦게 학문을 뜻을 둔 나는 공자보다 10년 늦게, 하지만 그가 도달한 경지에 확실하게 이르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어언 세월이 물처럼 흘러 오늘에 이르렀다. 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나는 설정한 목표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문제는 노력한 것보다 내가 도달한 학문과 인품의 경지였다. 가령 40세에 나는 홀로서기에 성공했는지, 그것이 중요했다는 말이다. 결론 먼저 말하면, 그러지 못했다.
첫 번째 단추를 빼놓으면, 그사이 내가 이룩하거나 도달한 지점은 아주 미욱하거나 미미한 것이었다. 그 이유를 깊이 사유하기보다는 더 멀리 더 높이 가려고 노력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언제부턴가 그가 말하는 ‘일이관지(一以貫之)’ 개념은 이해할 수 있었고, 지식의 상호 연관과 연결에는 눈이 떠졌다. 문제는 지식보다 다른 영역과 분야에서 발단한 걸림돌이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격의 없는 유대관계의 실종이었다.
춘추 말기의 혼란한 세파를 겪은 공자였지만, 그에게는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중니에만 고유한 학문과 인품과 미래기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나의 길을 가리라는 고집스러움, 가던 길이 틀렸을 경우 그것을 고칠 줄 아는 용기와 담대함, 어려움을 당해서도 꺾이지 않는 의연함 같은 덕목이 공자에게는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시대와 역사에 대한 공자의 남다른 확신과 강렬한 바람이 바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순이 목전에 다가온 나를 돌이켜보건대, 중니의 그런 장점이 내게는 없다. 살면서 부딪치는 숱한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극복해가는 의지와 끈기 그리고 앞날에 대한 확실한 믿음 같은 것이 내게는 없다. 문제에 봉착할 경우,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하기보다는 에둘러 피하는 쪽이 더 편하고 빠른 해결책이었다. 천성적으로 남들과 다투기를 싫어하기에 변명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도 꺼리는 본성이 내게 있다.
사태의 본질을 논구하는 정교한 분석(分析)에 필요한 칼과 도끼가 없음이 나의 결함 가운데 하나다. 더 쪼갤 수 없을 데까지 나아가고, 그것에 기초하여 다시 종합으로 귀환하는 자유자재함 역시 내게는 없다. 예상했던 결론과 달리 창대한 결론이 나왔을 때, 그것을 논리적인 비약으로 묶어내는 장쾌한 시야 또한 나와 무관했다. 더욱이 세상은 하루가 멀다 않고 수많은 지식과 정보를 쏟아내서 발길을 붙잡기 일쑤였다.
이제 나는 안다. 10년을 더 살아도 이순의 경지나 그보다 높은 지경에 이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그렇다면 어떤 방도로 생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겨울 초입 마당에 햇살이 봄날처럼 따사롭고 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