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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바닷가에서 한가히 살고자 했던 영성의 담지자

등록일 2022-11-21 19:57 게재일 2022-11-22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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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포항 <19> 한흑구와 송도②
송도 해변을 걷고 있는 한흑구 선생.

1945년 9월 초하루 한흑구는 38선을 넘었다. ‘조선의 간디’ 조만식 선생을 모시고 월남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만식은 죽어도 북의 동포들과 함께 죽겠다고 굳게 결심한 터였다. 조만식은 산정현교회의 장로였고,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해서 한승곤, 한흑구 부자(父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한흑구는 조만식 선생이 주선한 트럭을 타고 남쪽으로 향하는데, 그와 함께 월남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한흑구는 미군정에서 일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1947년 3월부터 1년간 『문화일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1949년에는 『현대미국시선』(선문사)을 발간했는데, 다음의 글에서 당시 그의 작품 활동이 우리 문학계에 미친 영향을 가늠할 수 있다.

그의 작품 활동은 그 시대의 신문이나 잡지에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매우 활발했으며, 그것도 문학 전반에 걸쳐진 것으로 보이나, 특히 1930년대에서 비롯되는 미국 시 및 그 밖의 역시(譯詩) 활동은 8·15해방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휘트먼과 흑인 시의 번역 소개는 물론, 미국 문학 및 작가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걸쳐져 있음은 당시의 다른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 김학동, 『한국 근대시의 비교문학적 연구』, 일조각, 1981, 206∼207쪽.

 

1945년 ‘조선의 간디’라 불리는

조만식과 함께 월남하려 했으나 뜻 못 이뤄

1948년 포항 정착 1979년 숨 거둘 때까지 생활

美 번역시 소개 등 문학 전반 작품 활동과 함께

6·25 전쟁 때 고아·미혼모 넘쳐나자

미 해병 기념소아진료소 설치에 도움의 손길

불타버린 포항여고 교사 복구 힘보태기도

‘흐름회’ 만들어 포항문화예술에 향기 불어넣고

1979년 포항문인협회 창립 빼놓을 수 없는 역할

청림초 개교 때 노랫말 써주며학생들에 꿈 심어

하루같이 바닷가를 걸었던 사람

한흑구는 서울을 떠나려 했다. 동해안과 서해안, 남해안을 다니며 거처를 물색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폐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걸 치료하려면 바닷가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신선한 해산물을 먹으면 좋다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다. 또 하나는 머지않아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마침 동료 문인들과 경주에 고적지 순례차 왔다가 포항 바다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는 포항에 잠깐 들렀다. 그 직후 식구를 데리고 포항으로 향했다. 1948년 가을이었다. 그는 가족에게 포항 송도 모래는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보다 좋다고 했을 정도로 포항 바다에 매료되었다. 한흑구는 거의 매일 포항 바닷가를 걸었는데 그때 심정은 그의 첫 수필집에 실려 있다.

 

항상 푸르고, 맑고, 볼륨이 넓고, 거센 바닷가에서 한가히 살고자 동해변으로 온 지가 꼭 20년이 되었다.

거의 하루같이 바닷가를 걸어 보았다. 인생 자체를 항해에 비하지만, 나는 바닷가에 혼자 서서, 나의 존재의 미미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한흑구, 「책머리에」, 『동해산문』, 일지사, 1971, 8쪽.

 

어떤 이유인지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한흑구는 바닷가에서 ‘한가히’ 살고자 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포항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그때 포항 인구 5만. 토착민은 2천 명 정도 될까, 라고 했다. 일본·만주 등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섞여 살기가 힘들지 않은 것 같았다. 한국 속의 ‘뉴욕’과 같았다고 당시 포항 분위기를 살폈다. (중략) 서울 생활은 신의도 없고 거짓 생활이 많아서 마음에 들지 않다가 편안한 보금자리를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작년 경북문화상 받은 한흑구 씨, 『영남일보』, 1973. 1월.

그의 예견대로 전쟁이 터지자 온 식구가 7일간 걸어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다행히 포항 집이 무사해 1950년 가을에 포항으로 돌아왔다. 당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포항 도심은 초토화되었는데 한흑구의 집은 장독 하나 깨지지 않았다. 만약 집이 파손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흑구와 포항의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그 후로 그는 화려한 학력과 경력, 인맥을 거의 접다시피 하고 1979년 11월 7일 숨을 거둘 때까지 포항을 떠나지 않았다.

 

포항 남빈동 자택에서 한흑구·방정분 부부.
포항 남빈동 자택에서 한흑구·방정분 부부.

신사였고 베풀 줄 아는 사람

한흑구는 포항에서 수필을 주로 썼고 소설도 발표했으나 과거에 비하면 과작(寡作)이었다. 수필 「나무」, 「보리」, 「닭울음」은 국어 교과서에 실리며 수필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시를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늘 모래밭에, 또는 바다 물결 위에 시를 써 보았다”는 수필(「동해산문」)의 한 구절처럼 시심(詩心)으로 살았다. 책을 낸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나 문인으로서 책은 꼭 발간해야 한다는 아동문학가 손춘익(孫春翼, 1940~2000)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환갑이 지나 『동해산문』과 『인생산문』(1974)을 냈다.

한흑구를 기억하는 포항의 원로들은 그가 신사였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서울 시절과 부산 피난 시절 동료 문인들을 만나면 밥값과 술값을 도맡아 냈고 용돈도 나누어주었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필라델피아로 찾아온 친구 안익태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포항 오천 미군부대에 근무할 때는 지역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 전쟁 때 길거리에 고아와 미혼모가 넘쳐나자 그들을 품어주기 위한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가 포항 시내에 설치되었는데 그때도 한흑구의 손길이 닿았다. 전쟁 때 불타버린 포항여고 교사(校舍)를 복구할 때도 그는 어김없이 달려가 힘을 보탰다. ‘흐름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포항 문화예술에 향기를 불어넣었고, 1979년 포항문인협회 창립도 한흑구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아내 방정분 여사의 헌신적인 내조

그는 허름한 선술집에서 자식뻘 후배들과 스스럼없이 술잔을 주고받았으며, 심야에 담배가 떨어지면 아들의 담배를 얻어 필 정도로 부자간에 격의가 없었다. 가장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 성실한 생활인이었고 가족에게 자애로웠다. 낡은 집에 살았지만 1950년대에 아내를 위해 싱크대를 직접 만들어주었고, 어린 자식들과 나룻배를 타고 영일만에서 낚시를 즐겼다. 1968년 포항 청림초등학교가 개교할 때 “동해같이 배우고 태양같이 빛내자”는 노랫말을 써주며 어린 학생들에게 아름다운 꿈을 심어주었다.

 

포구숲 둘러싸인 청림초등학교

앞에는 푸른 동해 태양이 솟는다

우리도 동해같이 끝없이 배우고

우리도 태양같이 배워서 빛내자

자유와 인권의 정신 드높여

지덕체 함양해 나라를 빛내자

- 한흑구 작사, 포항 청림초등학교 교가 1절.

한흑구를 얘기하면서 그의 아내 방정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황해도 안악군(安岳郡)의 부잣집 딸이었던 방정분은 이화여전 음악과 재학 시절 동기였던 한흑구 여동생의 소개로 한흑구와 결혼했다. 홍난파(洪蘭坡, 1898∼1941)한테 배우고 음악 활동도 함께했다고 한다. 방정분은 결혼 직후부터 역사의 거센 바람을 남편과 함께 견뎌낸 반려자였다. 포항에 정착한 후 셋째 아들의 죽음을 겪은 슬픔을 삼키며 중·고등학교 음악교사로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한흑구의 장남 한동웅은 “어머니는 아버지를 존중했고 헌신적으로 내조했다. 어머니 없는 아버지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흐름회’ 회원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한흑구 선생. 박영달 사진점은 현재 중앙상가 뱅뱅어패럴 자리에 있었다.
‘흐름회’ 회원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한흑구 선생. 박영달 사진점은 현재 중앙상가 뱅뱅어패럴 자리에 있었다.

맑고 깊은 영성의 담지자

한흑구는 무엇보다 맑고 깊은 영성의 담지자였다. 배금주의를 배격했고 거짓말하는 것을 혐오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종교의 핵인 영성을 깊이 체현했다. 시의 운율이 흐르는 수필 한 편 한 편은 영성의 결정체이자 기도문에 가깝다.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아침에는 떠오르는 해를 온 얼굴에 맞으며, 동산 위에 홀로 서서, 성자인 양 조용히 머리를 수그리고 기도하는 나무.

낮에는 노래하는 새들을 품안에 품고, 잎마다 잎마다 햇볕과 속삭이는 성장(盛裝)한 여인과 같은 나무.

저녁에는 엷어가는 놀이 머리끝에 머물러 날아드는 새들과 돌아오는 목동들을 부르고 서 있는 사랑스런 젊은 어머니와 같은 나무.

밤에는 잎마다 맑은 이슬을 머금고, 흘러가는 달빛과 별 밝은 밤을 이야기하고, 떨어지는 별똥들을 헤아리면서 한두 마디 역사의 기록을 암송하는 시인과 같은 나무.

- 한흑구, 「나무」, 『동해산문』, 일지사, 1974, 9∼10쪽.

미국에 망명 중이던 한승곤은 중학생인 외아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너는 십일홍(十日紅)의 들꽃이 되지 말고, 송림(松林)이 되었다가 후일에 나라의 큰 재목(材木)이 되어라”고 썼다. 공교롭게도 한흑구는 송림이 울창한 포항 바닷가에 와서 반평생을 살았지만 스스로 재목이 되기를 포기하고 바닷가에 혼자 서서 존재의 미미함을 느낄 뿐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한흑구의 작품을 읽고 그의 삶을 숙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 : 김도형 작가, 사진 : 한동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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