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송소고택(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250호)은 청송군 청송읍 덕천마을에 위치한 청송 심씨 집성촌이다. 조선 영조 때 만석꾼이었던 심처대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이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리에 옮겨 와 지은 집으로 모두 7동 99칸의 전통 한옥으로 9대간 만석의 부를 지녔던 집이다. 민가로서 최대 규모로 지은 고택은 우리나라의 강릉 선교장, 보은 선병국 가옥과 함께 3대 99칸 집으로 손꼽힌다.
청송 심씨는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를 비롯하여 조선 시대 4명의 왕비와 13명의 정승과 4명의 부마까지 배출한 가문이다. 9대에 걸쳐 만석꾼이었던 청송 심씨는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청송에서 대구까지 가려면 심부자 땅을 밟지 않고는 못 간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청송군은 산이 높고 논은 많지 않은 깊고 깊은 산골인데 외진 곳에 만석꾼이 살았다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아 더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고택 이곳저곳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다.
송소고택의 시작은 솟을대문부터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먼저 마주치는 것은 헛담이다. 안채 내부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하게 하는 배려인데 헛담을 기준으로 해서 사랑채와 안채로 가는 손님의 발길이 달라진다. 남자와 여자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었는데 사랑채로 가려면 헛담과 나무와 꽃이 자라는 정원을 지나가야하고 사랑채 대청마루에서는 솟을대문을 통해 들어오는 이를 정확히 알 수 없도록 했다. 이런 건물의 배치는 경북의 북부 민가 양식으로 건물에 독립된 마당이 있으며 사람 공간, 생활공간, 작업 공간으로 구분이 되어 있어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특징을 비교적 잘 보여준다. 특히 대가족제도 하에서 4대 이상의 제사를 모실 수 있는 별묘 등은 민속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고택의 크기는 담으로 둘러친 대지만 7천603㎡(2천300평)에 이른다.
송소고택이 조금 더 매력적인 건 현재도 사람이 살면서 정갈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제라도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은 고택은 천천히 들러보며 숙박 체험도 가능하고 문화해설사의 설명도 곁들일 수 있다.
/허명화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