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越南) 작가 이범선(1920∼1982)의 단편소설 ‘오발탄’(1959)을 읽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요즘엔 상상하기도 힘든 새빨간 가난이 등장인물들을 날로 먹어 치우기 때문이다. 가장인 철호의 모친은 해방이 되었다고 곱게 차려입고 만세까지 불렀지만, 토지개혁으로 집과 땅을 빼앗긴 채 남한으로 내려온다. 6·25 한국동란 와중에 폭격으로 실성한 그녀 입에서는 ‘가자, 가자’하는 소리만 흘러나온다.
계리사(공인회계사) 사무실 서기로 일하는 철호에게는 이대를 졸업한 아내와 다섯 살 먹은 딸아이, 남동생 영호와 여동생 명숙이 있다. 10년 전 음대 졸업식장에서 싱싱하고 어여뻤던 아내는 가난에 찌든 만삭의 몸이고, 딸아이는 철호의 셔츠를 잘라 만든 치마를 입고 있다. 영호는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다가 제대한 후 일자리도 구하지 못한 채 2년 넘게 무직이다. ‘양공주’ 노릇을 하는 명숙에게 철호는 말을 섞지 않은 지 오래다.
“해방촌 고개를 추어 오르기엔 속이 너무나 허전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 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재가 군데군데 헌 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
처절한 빈곤으로 시달리는 철호에게 영호가 양심이고 윤리고 관습이고 법률이고 다 벗어던지자고 말한다. 양심은 손끝의 가시, 윤리는 나일론 팬티, 관습은 리본, 법률은 허수아비라는 것이다. 가시는 빼내면 그뿐이고, 나일론 팬티는 입으나 마나 하며, 리본은 없어도 그만이고, 허수아비에 참새는 놀라지만, 까마귀는 그것을 비웃는다는 명석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양심적인 지식인이자 선량한 인간 철호는 영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법과 정의 그리고 윤리와 도덕은 철호가 금과옥조로 지키는 신념이자 철칙이다. 생활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해도 철호는 금지의 선(線)을 넘어서지 않는다. 하지만 영호의 생각과 행동은 철호와 다르다. 법과 정의가 무너진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살아남는 극단적인 수단 가운데 하나인 은행강도 짓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발탄’의 결말을 알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선택한 그들을 찾아오는 것은 죽음과 감옥과 처절을 극한 완벽한 절망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철호의 선택과 영호의 선택을 사유해야 한다. 국민의 가난을 해결하지 못하는 국가에 대하여 영호는 격렬한 저항의 방식을 택하지만, 철호는 순응 일변도로 나아간다. 현대사회에서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하는 심각한 문제를 이범선은 제기한 셈이다.
이승만 치하에서도 적잖은 인간들은 호의호식했고, 일부는 권력의 호사마저 누렸다. 그러나 허다한 철호와 영호는 가족은커녕 개인 하나도 구원하지 못한 국가의 희생양으로 전락한다.
그 가난뱅이들의 뼈아픈 삶의 질곡을 외면하고 그 같은 참상에 침묵하는 국가를 어찌할 것인지, 그런 정황에 처한 개인의 선택은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 ‘오발탄’은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