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교수서 화가·갤러리 운영까지<br/>취미생활로 인생 2막 김정란 대표
황리단길에 무료 관람이 가능한 갤러리가 있다. 그곳에서 김정란 대표를 만났다. 그녀를 처음 본 건 모 협회 단체 전시에서였다. 시종일관 밝은 미소와 긍정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조금 늦게 그림을 시작한 서양화가. 이 정도가 그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리단길에서 갤러리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협회 전시나 행사에서 간간히 인사 정도를 나누는 사이었는데 10년이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처음 본 그날과 다름이 없었다.
은은한 빛이 나는 사람. 바닷가 조약돌처럼 오래 세월을 통해야 만들어지는 빛. 그녀에겐 그런 빛이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인생 2회차를 멋지게 살고 있는 특별함. 궁금해졌다. 그래서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이른 시간임에도 황리단길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초인종을 누르자 김 작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따듯한 차를 마시며 일상 담화를 나누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올해 71세로 부산에서 나고 자란 김 작가는 이화여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동국대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재임하다 정년을 마치고 현재 명예교수 신분. 그런 그녀가 어떻게 서양화가가 되었을까?
교육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필요한 도움은 주시되 간섭이나 ‘먼저’가 없는 분이셨다. 맏딸인 김 작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형제들을 불러 모으시더니 장래를 정해주셨다. 뜻밖이었다. 그 중 김 작가에게는 의사가 되라 하셨다.
그렇게 김 작가의 첫 번째 인생진로가 정해졌다. 그녀는 별 거부감 없이 부모님의 뜻을 따라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입학 후 학업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취미활동을 찾아야 했다. 음악과 글엔 재능이 없었던 터라 그림이 남았다. 학교 앞 입시학원에 등록 후 틈틈이 취미 생활을 즐겼다.
그렇게 시작된 취미 생활은 전공 수업도 종종 빼먹을 만큼 재미 있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할 게 늘어나다 보니 취미활동을 계속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다시 그림 생활이 시작 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교수로 재직 중이던 무렵 지인의 소개로 지역문화센터에 다니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나 수업이 사라지고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과 다시 시작한 수업에서 뿌리를 내려 지금 자리에까지 오게 되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런 흐름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않았다면 작가로서의 자신은 없었을 거라 했다. 단, 경험의 중요성은 강조했다. 자신 또한 학창 시절 그림에 대한 경험이 있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정년퇴직 후 아파트 생활을 벗어나 마당 있는 집에서의 생활을 꿈꾸던 그녀에게 누군가 말했다. 황남동엔 경주 사람은 없고 왜 외지 사람들만 가득하지? 당시 황남동 땅값은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었는데 대부분 외지인들이 매입 중이었다. 그 이야기에 자극을 받은 김 작가는 지금 갤러리 란이 위치한 건물을 매입하게 된다.
시간이 좀 지났을 무렵 김 작가의 남편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관광객들의 왕래가 많은 좋은 위치에 있는데 이 공간을 사람들과 나누는 건 어떨까? 그냥 두긴 아깝지 않냐는 의견에 갤러리 란이 생겨났다. 실제 갤러리 란은 대부분 초대전이며 대관을 하더라도 전기세 정도의 무료에 가까운 대관료로 운영 중이다. 방문한 날에도 젊은 작가들의 단체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작하는 작가에게 첫 개인전은 매우 중요하다. 종자씨를 만드는 단계라고 할까. 이후 많은 작가들이 종자씨를 만들어 떠나갔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꿈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가능한 꿈인가, 가치가 있는가? 사회적 기준에서 한차례 걸러진다. 이후 삶이라는 좁고 험한 터널을 통과하기에 앞서 함께 갈 수 없는 많은 꿈들이 터널 입구에 버려진다.
100세 시대는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며 그 긴 세월 동안 꿈은 어린 시절의 전유물이 아니다. 꿈이 하나일 필요도 없다. 유년 시절의 꿈을 놓쳤는가? 언젠가 우연히 내 옆으로 지나가는 꿈을 다시 만난다면 이번엔 놓치지 말고 꼭 잡을 수 있길 바란다.
/박선유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