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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

등록일 2023-05-14 18:50 게재일 2023-05-1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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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아침 아홉 시 반에 시작한 여정(旅程)이 자정 넘어서야 끝난다. 학회의 정례 학술논문 발표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것이다. 나는 학회 활동에 열렬한 연구자가 아니다. 공부를 혼자 해 버릇한 이유로 독야청청 독불장군의 길을 허위단신 달려온 세월이 30년 가까우니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청해서 발표를 결정하여 서울에 다녀왔다.

정년을 불과 석 달 앞둔 백발의 연구자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희곡 ‘시골에서 한 달’ 연구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를 가진 것이다. 19세기 90년대 안톤 체호프의 극문학 성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극작가 투르게네프의 장막극을 여러 각도에서 천착하고 러시아 최초의 심리 드라마로 언급되는 ‘시골에서 한 달’을 곡진하게 들여다보았다.

청도역에서 동대구역으로, 동대구역에서 다시 서울역으로, 서울역에서 지하철 1호선으로, 그리고 다시 6호선으로 갈아타고 도보로 학술논문 발표회장에 도착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봄날의 환희가 약동하는 토요일 한나절을 거리에서 거리로 떠돈 셈이다. 세대교체가 완연하게 느껴지는 자리에서 뭔가 아쉬움과 쓸쓸함 같은 게 감촉된다.

불꽃처럼 뜨겁고 여름 햇살처럼 찬연(燦然)하게 빛났던 아름다운 시절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구나, 하는 아쉬움이 찾아들었다. 추석이고 설이고 연말연시고 다 팽개치고 연구실에 처박혀 논문과 작품을 읽으며 깊은 한숨과 탄식으로 늦도록 끙끙댔던 시절이 어느새 자취도 없이 스러져 버렸구나, 하는 깨달음에 문득 주변이 쓸쓸한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곁을 영원히 사라져간 그 시공간은 학문 후속세대의 눈과 영혼과 가슴으로 다시 채워지고 있지 아니한가, 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리도 없이 그들은, 낯선 모습의 청년들은 각자에게 허여된 문학과 언어학과 연극학과 역사와 세상과 만나고 있었다. 서울에서 대구에서 러시아 곳곳에서!

4시간의 긴 발표를 마치고 몰려간 뒤풀이 자리는 실로 은성(殷盛)하여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절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기실 나의 서울행은 그들에게 따스한 저녁을 대접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은퇴하고 나면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울 것 같은 연구자들에게 맛난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오던 참이다.

대략 20여 명의 러시아 어문학 연구자들의 뒤풀이 자리에서 오가는 정담(情談)과 웃음소리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약동하는 곳이라는 확신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학회장의 권고에 따라 짧고 간명하게 인사말을 한다. 나는 그들에게 불운했지만, 불멸의 이름을 간직한 피렌체의 시인 알리기에리 단테가 남긴 말을 전했다.

“사람들이 떠들게 내버려 두어라. 그리고 그대에게 주어진 길을 가라. 그리하면 그대는 영광의 항구에 다다를 것이니!”

학문하는 자의 배포와 당당함을 촉구하고 싶었던 게다.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하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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