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에는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 존재한다. 이것에는 예외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처음과 마지막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첫사랑이나 첫인상 혹은 마지막 잎새나 마지막 수업 같은 말이 생겨난다. 1871년 알퐁스 도데가 남긴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과 1907년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가 기억에 남아있다.
내게도 그런 일이 있다. 지난 목요일 오전 9시, 10시 반 그리고 오후 3시에 마지막 수업을 한 것이다. ‘동서 고전의 만남’, ‘러시아 어문학의 세계’, ‘명저 읽기와 토론’ 세 과목을 종강한다. 대상포진으로 인해 한 주일을 순연(順延)한 결과다. 시간이 여유 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대단한 안타까움 같은 건 없었다.
사람들의 질문이 오히려 낯설게 다가온다. “정년인데, 기분이 어떠세요?!” 그들이 기대하는 대답은 한결같이 “시원섭섭하시죠!”였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시원합니다!”. 섭섭한 것은 전연 없다. 섭섭할 것이 조금도 없는 종강이기 때문이다. 내가 냉정한 인간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수업을 향한 학생들의 자세가 뜨뜻미지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9년 전 선배 교수가 마지막 수업을 한다길래, 교수 휴게실에서 오후 6시 무렵 만나기로 했다. 그분은 오후 6시 반이 다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리 늦었냐?!”는 나의 지청구에 “마지막 수업이잖아!”하고 응수한다. 하지만 그것은 수업 이후 학생들의 일정을 고려하지 않은 교수의 일방적인 판단이다. 정년을 앞둔 교수의 마지막 열정을 이해하는 학생은 완전히 소멸했다. 그런 학생들을 대상으로 45분을 넘겨 진행한 종강이 어떤 인상을 불러왔을지, 모를 일이다.
지난 세기 86년 가을 학기에 ‘19세기 러시아 소설’ 강의가 나의 첫 번째 수업이었다. 강의를 주면서 학과장 교수는 “자네 선배들은 전부 교양 수업을 했는데, 전공 수업은 자네가 처음이야!”하는 말씀을 하셨다. 박사과정생으로 처음 맡은 강의에 전력투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단편소설 ‘이발사’를 통독한 기억이 생생하다.
1987년 봄 학기에는 학부 4학년 전공과목인 ‘러시아 희곡’을 맡아서 열강했다. 그런 세월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대학과 인연을 마감할 시기가 온 것이다. 누구나 크고 작은 인연과 관계 속에서 생애를 이어가지만,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많은 사람의 보살핌과 조바심 속에서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릴 것인지 궁금하다.
한 가지 저어되는 사실이 있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현저하게 드러나는 사회적 수동성이다. 강의실에 들어갈라치면 군데군데 어둡다. 세 군데의 조명 가운데 두 군데의 조명이 꺼져 있기 일쑤다. 그런 어둠 속에서 학생들은 스마트폰 삼매경에 푹 빠져 있다. 강의가 끝난 강의실이 환하고 에어컨이 돌아간다. 요즘 학생들은 자기 이익과 관심 대상이 아니면, 눈감고 지나간다.
학생들의 사회적 수동성을 지적해도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대학은 지금 마구 흔들리고 있다. 지적-정신적 수준보다 중요한 사회적-윤리적 책무가 사라진 대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