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가을이면 러시아학 전공자들은 공동 학술대회를 기다린다. 6·25 사변과 냉전, 베트남 파병과 1·21사건 그리고 10월 유신 같은 사건을 경험한 한국에서 러시아 관련 연구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990년 9월 30일 한국과 소련이 외교관계를 맺고, 1992년 11월 19일 문화협정을 체결하기 전까지 러시아 연구는 난맥상 자체였다. 연구를 위한 도서(圖書)를 구하는 게 불가능했고, 전문가 양성은 언감생심이었으니 말이다.
1990년대 이전 러시아 관련 분야 연구자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그 하나는 국내에서 연구하면서 해외의 지인을 통해 서적을 구하는 것이고, 그 둘은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일본이나 미국, 프랑스나 분단 도이칠란트 혹은 영국이 선호된 나라들이었다. 러시아학 전문가들은 크게는 국내파와 유학파, 유학파 가운데서도 미국파와 유럽파로 나뉜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33년 전 한러 수교로 오늘날 러시아학 전공자들 상당수는 러시아 유학파다. 얼마나 심도 있는 연구를 했는지, 하는 문제는 논문이나 학회에서 판가름 난다. 글이나 말은 연구자를 가장 잘 알려주는 도구다. 셰익스피어가 장막 비극 ‘햄릿’(1601)에서 일갈한 것처럼 “간결함은 지혜의 요체”이기 때문에 말하려는 핵심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전달하는 능력은 연구자의 기본적인 덕목 가운데 첫 번째일 것이다.
10월 14일 러시아학 관련 4개 공동 학술대회에 참석했다. ‘격변의 러시아-유라시아와 한국’이란 제목 아래 ‘러시아 어문학’과 ‘문화-역사’ 그리고 ‘사회과학’의 네 분야에서 온종일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러시아 희곡 연구자인 나는 생소한 ‘사회과학’ 분과 발표를 신청했다. 그리고 발표를 위해서 특별히 파워포인트 자료도 준비하여 열차 편으로 상경했다.
‘동북아시아평화경제공동체 구상’이 나의 발표 제목이다. 21세기 대표적인 세계주의자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2004)과 임마누엘 월러스틴의 ‘유럽적 보편주의’ 그리고 그들의 사상적 지주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80) 같은 서책에서 단서를 얻은 발표문이다. 요약하자면, 남북한이 평화를 매개로 공존하여 마침내 통일 한국을 만들고, 이것에 기초하여 동북아에 새로운 평화경제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구상이다. (노무현의 참여정부 시절 나온 ‘동북아 허브’를 떠올리는 독자는 복 많이 받으시길!)
유럽연합(유럽), 아프리카연합(아프리카), 아세안(동남아시아), 나프타(북미), 메로코수르(남미)가 입증하는 것처럼 블록화는 세계적인 추세다. 그런데 미-중-일-러 4강이 충돌하는 위험지대 동북아에는 이런 공동체가 없다. 그리고 공동체를 추동할 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신과 의혹으로 얼룩진 중-러, 중-일, 러-일 관계 때문이다. 또한 남북한의 적대적 공존 역시 지역의 불화와 대립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나의 구상이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몽환적이라 비웃는 사람에게 나는 말한다. “세계를 바꾸는 것은 현실주의자가 아니라 몽상가나 낭만주의자”라고. 별을 찾아 밤하늘을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