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만 쳐다보고 있다. 배추농사만 짓지 않았다면, 올해는 남이 해 놓은 것을 사서 먹고 싶다. 절임배추를 사서 한다면 밤에라도 어찌 해 보겠는데, 절이는 일까지 하자니 마음이 부대낀다. 아파트에서 절이는 일도 쉽지 않지만, 내겐 시간이 없다.
남편이 텃밭에 배추를 100포기나 심었다. 한 포기가 얼마나 큰지 아름이다. 그 배추를 친구가 50포기나 사갔다. ‘김장을 50포기씩이나 한다고? 두 식구에? 아들, 딸도 안 가져간다며?’ 나는 친구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친구는 친정엄마의 숙제를 한다고 했다. ‘돌아가신 엄마 숙제? 그걸 왜?’ 되묻는 내게 그녀는 처음엔 하지 않으려고 해봤다고 한다. 숙제란 것이 하지 않으면 마음에 항상 불편함이 따라다닌다.
솜씨 좋은 그녀의 엄마는 해마다 김장을 해서 자식들에게 보냈다. 받아먹은 입들이 엄마김치가 최고라고 하는 말에 행복해 했다. 엄마의 행복이 친구에게는 숙제였다. 엄마와 가까이 사는 그녀는 김장철이 돌아오면 다른 일정을 잡을 수 없었다. 날씨가 따뜻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추워도 안 된다. 김장하기 적당한 엄마만의 날씨에 따라 진행되기에 혹여 약속이 겹칠까 해마다 김장철만 되면 불안했다.
연로해진 엄마는 큰 집이 불편해서 작은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좁은 공간에서 김장하기가 힘이 들어 맏딸인 친구 집에서 김장을 해야 했다. 친구는 자기 김장 하는 김에 같이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매번 동생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화가 났다. ‘난 이제 맏딸 그만 하고 싶어.’라고 한 번도 말로 내 뱉지 못하고 표정으로만 보인 날이 몇 번인가 있었다.
엄마가 아팠다. 아파도 김장철은 어김없이 왔다. 항암치료를 하고, 방에 누워만 있던 엄마가 김장을 하겠다고 일어났다. ‘당신 몸도 못 추스르면서 뭘 하겠다고?’ 친구는 말문이 막혔다. 친구가 승강기가 없는 4층으로 이사를 했기에 많은 양의 김장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엄마를 거역할 수 없었다. 배추장수 아저씨는 1층 입구에 한 무더기 내려놓고 가버렸다. 4층을 오르내리며 날라야 하는 것은 친구의 몫이었다. 김장을 하기도 전에 이미 파김치가 되었다. 배추를 절여놓고, 시장에 갔다. 양념 재료들을 양 손에 들고, 계단에서 몇 번을 쉬어가며 집에 올라갔다. 머리카락이 다 빠져 벙거지 모자를 쓴 엄마를 보는 순간,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엄마가 못 하면 그만이지, 왜 나한테 하라고 그래! 내가 맏이로 태어나고 싶어서 나왔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나는 왜 매번 양보해야 하고 참아야 하고 줘야 하느냐고!”
말문이 열린 그녀는 엄마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맏이의 서러움을 토해냈다. 미안하다는 말만 하던 엄마는 당신이 자식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김장김치뿐이라 했다. 한바탕의 눈물바람 뒤에 김장이 마무리되고, 동생들에게 택배 부치는 것까지 끝이 났다. 엄마는 남은 양념을 가져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도 전에 엄마는 돌아가셨다. 한동안 친구는 김장을 하지 않았다. 해방된 느낌이었다.
여동생과 통화할 때였다. 동생은 엄마의 김치 이야기를 했다. 삐뚤빼뚤하게 쓴 엄마의 글씨가 택배박스에 붙어 있었다고 했다. 친구는 의아했다. 엄마의 글씨? 택배는 김장을 다 해 놓으면 남편이 보냈는데 엄마의 글씨라고? 동생은 그 김치가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남은 양념을 가져가도 되겠냐고 했던 그날, 둘째 딸에게 조금 덜 넣은 것 같았나보다. 아픈 몸으로 배추를 사서 절여 버물려 박스를 만들고 택배를 부치고. 엄마는 마음이 편안해졌을까. 자매는 전화기를 붙들고 눈물을 훔쳤다.
이제 친구는 김장할 때마다 돌아가신 엄마와 함께 한다. 겨우내 나눠먹으며 추억하는 친구를 보며, 나는 엄마와 김장을 했던 기억이 아스라해 마음이 저리다. 10포기만 할까 했던 마음에 몇 포기 더 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