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가 중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병의 원인은 ‘제도’에도 있지만 ‘사람’이 더 큰 문제다. 확증편향과 선택적 정의에 갇힌 중환자들이 자신은 병이 없다고 하니 ‘웃픈’ 현실이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분노와 적대가 만연해서 독선과 편견, 오만과 아집이 온 나라를 흔들고 있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레비츠키(S. Levitsky)와 지블랫(D. Ziblatt)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의 핵심규범은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인데, 이것이 무너지면 민주주의도 무너진다고 했다.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이 서로의 견해 차이를 존중하고 자기의 절대성을 고집하지 않아야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일방적으로 법안을 통과시키고, 집행권을 가진 대통령은 주저 없이 거부권을 행사한다. 외관상 각자의 권한을 행사한 것이니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대화·관용·타협이라는 절차규범을 어긴 것이다. 입법 권력과 집행 권력의 ‘힘의 대결은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다. 정치가 전쟁과 다른 점은 상대를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협력해야 할 경쟁자’로 인식하는데 있다.
민주주의는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를 토대로 한다. 하지만 견리망의(見利忘義)하는 정치인들의 적반하장(賊反荷杖)은 한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이기적이며 부족적인가를 말해준다. 부족주의 정치는 국가이익보다 당파이익을 중시한다. 철학의 빈곤과 이기심으로 확증편향에 갇힌 정치인들의 선동과 매도의 정치가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두 기둥은 공정과 정의다. 롤즈(J. Rawls)가 말한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절차적 공정’을 통한 ‘결과적 정의’를 의미한다. ‘정의가 힘’이 되어야지 ‘힘이 정의’가 되는 정치로서는 정의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재명과 조국의 경우처럼 힘으로 공당을 사당화하거나 범죄혐의를 정치적으로 덮으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의 지배’를 부정하고, 권력으로 ‘법에 의한 지배’를 기도하는 것은 정의에 대한 배신이다.
언론자유는 민주주의의 처음이자 끝이다. 모든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에 언론의 비판기능이 죽으면 민주주의도 죽는다.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는 ‘민주주의 리포트 2024’에서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언론통제와 사정기관을 통한 공포정치로 “한국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다”고 했다. 법을 적용하는 공권력의 남용이 민주주의를 위기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는 시민의 주권을, 그리고 ‘공화’는 공공선을 말한다. 우리의 미래는 ‘너와 내가 만나서 우리’가 되는 ‘공화정(共和政) 정신’에 달려 있다.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서 너와 내가 함께하려면 관용·대화·타협의 정신이 필수다. 우리가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진정한 공화주의자로 거듭날 때 비로소 한국 민주주의는 회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