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전 무렵 전북 완주군에 사는 친구가 오랜만에 연락을 해왔다. 가까웠던 후배 2주기 행사로 울산에 간다는 것이다. 그동안 소원(疏遠)했던 터라, 비록 전화상이지만 매우 반갑고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면서 인문 강연을 해보면 어떨지 넌지시 묻는다. 아주 적은 액수의 강연료를 걱정하기에 우리가 만나는 일이 중요하지, 강연료가 대수냐고 대답한다.
그렇게 창졸간에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철쭉 작은 도서관에서 니체의 명저 ‘비극의 탄생’을 강연하게 되었다. 대학원 시절 읽으려고 무던히 애썼건만 완독하지 못했던 서책 가운데 하나가 ‘비극의 탄생’이다. 난삽하기로 유명한 니체의 첫 번째 저작이기도 했지만, 역자들의 역량 부족이 큰 문제였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篇意自見)’이 도통 불가능했던 터였다.
지금까지 10명의 역자가 ‘비극의 탄생’ 번역에 도전했으며, 그 가운데 이젠 읽을만한 번역서가 나오기도 했다. 역시 세월이 명약(名藥)인 모양이다. 소양면의 근면한 독서인들이 모여서 니체의 난해한 책을 중간 정도까지 읽었으며, 그 방면의 전문가를 초빙해서 인문 강연을 요청했고, 내가 그것을 수락하는 형식으로 ‘비극의 탄생’ 강연회가 이뤄졌다.
청도에서 대략 3시간 남짓 걸리는 철쭉 작은 도서관에서 2시간 정도 소요되는 강연을 위해 나는 꼬박 사흘을 바쳤다. 재차 독서하고, 내용을 정리하여, 파워포인트 형태로 재구성한 다음 서너 번 반복하면서 내용을 재삼재사 점검했다. 전문적인 독자들이 아니라는 말을 염두에 두면서 가능하면 이해하기 쉬운 방향으로 강연을 인도하기로 작심(作心)한다.
어려운 내용을 전달하려면 우선 연사가 전체 내용을 숙지하고,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편안하고 평이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완주로 떠나는 시각까지 강연에 최대한 신경을 썼다. 강연장에는 스무 명 남짓 되는 청중이 자리하고 있었다. 20대부터 70대까지 다채로운 연령대지만, 주력은 60대 이상으로 보였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효율적으로 독서하려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야’,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와 ‘일과 나날’,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이것에 기초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로마의 호라티우스의 ‘시학’, 프랑스 신고전주의 시기의 부알로가 남긴 ‘시학’과 1980년 움베르토 에코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까지는 읽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인간이 나다.
그런데 소양면 주민들의 학구열과 독서 의욕은 하늘을 찔렀고, 별로 재미도 없을 강연에 몰입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졸거나 딴전 피우는 사람 하나 없이 집중하는 그들 모습이 몹시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강연 직후 질의응답 시간, 그 후에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화기애애하게 이어져 멀리서 온 나그네의 마음을 흡족하게 인도하는 것이다.
또 와주겠느냐는 질문에 응당 그리하겠노라고 답하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높고 크게 울려 나와 나도 내심 놀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인문 강연을 다시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