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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사에서 고백을 하면 사랑도 쉽게 잉태되겠지”

등록일 2024-10-01 18:50 게재일 2024-10-02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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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신성한 보고(寶庫) 선도산<br/>&lt;9&gt; 단편소설 ˝두고온 마음˝   (下)
김도일의 단편소설 내용을 인식시켜 Chat GPT로 작업한 그림.

선도산과 서악마을 일대는 신라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수많은 설화와 흥미로운 전설이 깃들어있다. 그 이야기들은 소설의 소재로도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할 터. 부침을 거듭했던 한 국가의 역사 이상으로 개인의 기억도 귀하고 소중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김도일 작가의 단편소설을 2회에 걸쳐 분재(分載)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선도산과 서악마을이다. /편집자주

“거기에 성모사라는 사당이 있는데 신라를 세운 이의 어머니를 모신 곳이거든. 한 나라를 세운 아이를 잉태한 분의 사당이라는데, 거기서 고백을 하면 사랑의 감정쯤은 쉽게 잉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지만 사랑을 앓고 있는 스무 살의 간절한 바람이라 생각한다. 첫 데이트 날(물론 엄마만의 생각이다), 점심을 먹은 후 두근거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써가며 고백의 장소를 향해 올랐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는 중에 사람들이 오며 가며 하나씩 쌓은 돌이 탑을 이루고 있었다. 엄마는 뒤따라오던 남자가 거기에 돌을 하나 보태는 것을 보았다.

“정상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 앞에서 걔가 그러더라. 자기랑 Y가 사귀다가 헤어졌는데 자기가 모난 구석이 많은 게 이유였다고. 자기는 앞으로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타이밍 참 기가 참 기가 막히지 않냐? 고백도 못 해보고 차인 거지,”

책방은 열한 시에 문을 열어 여섯 시에 닫는다. 영업시간을 가급적 지키는 편이지만 상황에 따라 조금 빨라지기도 하고 반대가 되기도 한다. 오늘도 마당 가장자리에 심어 놓은 봉선화와 백일홍에 물을 주고 호두가 헤집어놓은 잔디를 손보느라 십 분 정도 늦게 문을 열었다. 책방을 방문하려면 마을 중간에 있는 경로당 마당에 주차를 하고 안쪽으로 이삼 분쯤 더 걸어야 한다. 대문을 열고 잔디 마당을 가로질러 한옥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화를 갈아 신어야 들어올 수 있는 책방은 주로 독립 출판사에서 낸 소설과 에세이, 그리고 경주에 관련된 엽서와 기념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책방의 식구는 나와 엄마 그리고 열두 살 강아지 호두까지 셋이다.

커다란 무덤들을 품고 있는 마을 한가운데 있는 책방은 원래 아빠가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던 집이었다. 요양원에 계시던 할머니가 삼 년 전에 돌아가시면서 집의 상속인이 독자였던 아빠의 외동딸인 내가 되었다. 아빠는 내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시절부터 살던 집은 낡기도 했거니와 할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면서는 사람이 살지 않아 폐가나 다름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일본으로 가 살던 엄마와 나는 처음에 집을 처분하려 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코로나에 걸린 내가 제때 치료받지 못해 패혈증으로 진행되어 죽기 직전까지 간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왠지 고국이 그리워졌다고 할까. 거기에다 이국에서 딸을 잃을 뻔했던 엄마가 외국살이에 대한 염증이 깊어져 계획이 바뀌게 된 것이다.

할머니와 아빠의 유산과 엄마가 모은 돈으로 집을 새로 짓다시피 고친 후 카페와 책방 중 뭘 할까 고민을 했는데 큰 병을 앓은 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카페 일은 무리일 것 같아 책방으로 결정했다.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일했던 엄마의 영향도 컸다. 책방 옆에 딸린 조그만 밭은 엄마를 위한 것이다. 지금도 엄마는 꽤 유명한 소설 전문 번역가이다.

부모님은 일본에서 처음 만났다. 엄마가 그곳에 산 지 일 년 정도 지났을 때쯤 아빠는 막 유학을 와 한인 학생들 모임에 처음으로 나갔는데 고향 사투리가 정겨워 둘이 자연스럽게 친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가 외국살이 선배로서 도움이 되는 정보도 주고 이것저것 챙겨주다 보니 아빠가 엄마에게 빠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 엄마는 아빠에게 언제 관심이 갔던 거야?”

“이성으로? 음, 글쎄? 아빠 고향을 들었을 때?”

“같은 경상도인 것은 처음부터 알았다며?”

“그땐 그냥 고향 사람이라 반가웠던 거고. 아빠 집이 어딘지 알았을 때,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곳곳에 널린 커다란 무덤들, 높이 올라 하늘을 가리는 나이 많은 소나무, 아주 옛날엔 글 읽는 소리가 담 밖으로 들렸을 서원과 이것들을 아우르는 마을, 그리고 마을을 안고 있는 뒷산까지… 아빠를 보면 모든 것들이 뚜렷하게 떠올랐어. 그러다 보니 아빠를 한 번 더 보게 되고, 그러면서 또 정이 들고.”

“뭐야? 뭔 말인지 도통 모르겠네.”

“그러니까 아빠가 살던 동네가…. 엄마가 첫사랑과 처음으로 데이트를 한 곳이거든.”

엄마의 첫사랑이라는 남자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책장 서랍 속에서 종이봉투 안에 있는 사진 뭉치들을 발견했었다. 요즘 유행과는 많이 다른 머리 모양과 화장들이 신기하고 재밌는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들이었다. 지금의 나보다 서너 살이나 어린 엄마와 친구들은 하나같이 앞머리를 봉긋하게 말아 고정했고 진한 자주색 립스틱으로 입술을 굵게 칠했었다. 우리는 정리를 잠시 멈추고 사진을 앞에 두고 웃었는데 엄마의 웃음에는 반가움과 회상이, 내 웃음에는 신기함과 촌스러움에 대한 놀림이 들어있었다. 한 장씩 넘기던 사진 중간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있는 엄마가 있었다.

“어머나, 이게 여기 있었네. 잃어버리거나 버린 줄 알았는데.”

사진마다 언제 찍었고 옆에는 누구누구라는 걸 어린애처럼 알려주던 엄마가 여기에서는 말을 잊은 채 한참을 사진 속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어릴 때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 듯한 표정으로.

“엄마, 엄마? 누구야? 누구냐니까?”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골판지박스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오랜만에 엄마와 한 이불을 덮고 누웠다. 온전치 않은 몸으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움직이고 자정이 넘어 겨우 몸을 누였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옛날얘기 해줘.”

“엄마도 옛날얘기 잘 몰라.”

“아니, 엄마 첫사랑 이야기 말이야. 언제 만났어? 얼마나 사귄 거야? 왜 헤어진 건데?”

“야, 헤어지긴… 시작도 안 했는데.”

짝사랑이었던 것이다.

학교와 과를 정해 원서를 내고 시험을 쳐서 대학을 가던 시절, 시험장에서 앞뒤로 앉았던 엄마와 Y는 오리엔테이션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금세 친해졌다. 마치 오래된 친구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엄마의 눈에 누가 봐도 낯선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불편해 보이는 옆자리의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누가 봐도’라고는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감정을 알아채고 먼저 다가가 챙기는 것은 엄마의 타고난 능력이다. 엄마가 그 남자에게 말을 붙인 것을 계기로 엄마와 Y, 그와 옆에 J까지 네 사람은 친해져 한동안 붙어 다녔다. 사랑의 감정을 우정으로 덮은 채로.

“근데 왜 그 남자한테 마음이 갔던 거야? 잘 생기지도 않았고, 엄마 스타일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왜 끌렸을까? 그 친구가 좀 어두운 구석이 있었거든. ‘나 우울한 사람이요’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게 아니라, 평소에 농담도 하고 웃기도 잘하다가 긴장이 살짝 풀릴 때 보이는 어둠 같은 거 이해해?”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아 저 사람의 어둠은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저 사람의 어둠을 없애줘야겠다, 그런 연민 같은 거였어?”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어둠까지는 맞아. 근데 연민은 아니었어. 그냥 그 어둠에 공감한 거지. 일종의 동질감이랄까?”

남들 앞에서는 언제나 밝은 얼굴의 엄마였다. 엄마의 마음 안에 어둠이 없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엄마한테 직접 얘기를 들으니 이상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두 달쯤 지났을까, 한밤중에 목이 말라 방문을 열었다가 식탁에 엎드려 있는 엄마를 보고는 문을 다시 닫았던 때가 있었다. 일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든 건지, 울고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엄마가 안고 있는 슬픔에 대해 자각하는, 처음으로 엄마가 불쌍하다고 생각되는 시간이었다. 아빠는 엄마의 어둠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 이해를 표현하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아빠는, 무덤덤하고 푸근한 모습으로 엄마 옆에 가만히 있어 주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비바람에 떨어진 벚꽃잎이 거리에 떨어져 대책 없이 젖던 날, 엄마는 무슨 이유인지 우울해하는 Y를 데리고 술을 마셨다. 시장 안 분식집에서 막걸리를 평소보다 많이 마신 둘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한 엄마가 숨겨 왔던 짝사랑에 관해 Y에게 털어놓았다. 다음 날 술이 깬 엄마는 부끄러움에 잠시 몸부림을 쳤지만 한 편으로는 후련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기회를 봐서 직접 고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Y에게는 남자에 대한 이런저런 감정들을 솔직하게 얘기를 했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는데 신통할 정도로 상대방의 감정을 읽을 수 있던 엄마의 능력이 그때 왜 Y에게는 통하지 않았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

엄마의 적절한 고백 기회는 곧 찾아왔다. 전공수업의 조별 과제를 구실로 둘이서 유적지로 답사를 가게 된 것이다. 남자의 불성실한 학업 태도로 인해 대부분 그와 같은 조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기에 둘이 한 조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과제는 여러 유적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무열왕릉과 선도산으로 정한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거기에 성모사라는 사당이 있는데 신라를 세운 이의 어머니를 모신 곳이거든. 한 나라를 세운 아이를 잉태한 분의 사당이라는데, 거기서 고백을 하면 사랑의 감정쯤은 쉽게 잉태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지만 사랑을 앓고 있는 스무 살의 간절한 바람이라 생각한다. 첫 데이트 날(물론 엄마만의 생각이다), 점심을 먹은 후 두근거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써가며 고백의 장소를 향해 올랐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는 중에 사람들이 오며 가며 하나씩 쌓은 돌이 탑을 이루고 있었다. 엄마는 뒤따라오던 남자가 거기에 돌을 하나 보태는 것을 보았다.

“정상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 앞에서 걔가 그러더라. 자기랑 Y가 사귀다가 헤어졌는데 자기가 모난 구석이 많은 게 이유였다고. 자기는 앞으로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타이밍 참 기가 참 기가 막히지 않냐? 고백도 못 해보고 차인 거지,”

그 후 엄마는 두 사람과 마주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Y에게 떠들어 댄 것이 너무 부끄러웠고 두 사람 이별의 이유가 엄마에게 있는 것 같아 미안해 미칠 지경이었다. 매일 학교에 가는 것이 고통이었고 그러다 보니 전공에 대한 회의도 들었기에 다음 해에 휴학을 하고 큰이모가 있는 일본으로 갔다.

“그 후로는 그 아저씨랑 Y를 본 적이 없었던 거야?”

“걔가 군인일 때 누구 결혼식에서 얼굴을 본 것 같고… 아, 자퇴서를 내러 갔을 때가 마지막이었구나. 아빠를 만나고 있었을 땐데 그래도 마음이 좀 이상하더라. 헤어지고 나서 눈물도 좀 흘렸던 것 같고. Y는 한 번도 못 봤어. 연락이 닿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

“그 돌탑 말이야. 거기 가면 아직 그 아저씨의 마음이 있을 수 있겠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쌓인 탑이니까. 비바람에 무너지지 않았으면 돌무더기 아래에서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받치고 있지 않을까? 시시하지?”

“그러게…. 흔한 삼각관계네. 본인들은 심각했겠지만…. 이제 잠 온다.”

한국에 오면 뒷산에 꼭 가 봐야지 생각했는데 지금껏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산을 오를 체력이 될지 겁이 나기도 했고 책방 문을 열고 운영하는 게 예상했건 것 보다 일이 많았다. 엄마는 올라가 봤을까?

오늘도 아침부터 무척 더운 날씨다. 물기를 못 빨아들인 텃밭의 콩과 들깨가 창백해진 이파리들을 땅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엄마는 밭 전체가 충분히 젖을 정도로 물을 준 다음 책방으로 올 것이다. 호두는 잔디 속에서 무얼 봤는지 앞발로 흙을 한 무더기 파헤쳐 놓고 지금은 마루 밑에서 혀를 쑥 내밀고 엎드려 있다. 방금 튼 에어컨이 책방 안을 식히기도 전에 첫 손님이 들어왔다. 귀밑머리가 하얘지기 시작한, 50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큰 눈이 왠지 익숙한 남자였다. 책방을 둘러보는 남자를 신경 쓰며 전날 매출을 정리하고 있는데,

“아이고 무슨 날씨가 이렇게 덥대? 호두야!”

마당을 들어서는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 끝)

김도일 소설가 
김도일 소설가

소설가 김도일(49)은 2017년 ‘포항 소재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자신의 생활 터전인 포항과 경주 등 경상북도 일대를 소설의 무대로 삼는 경우가 많다.

명료한 문장과 곡진한 세계 인식으로 주목받는 그는 소설집 ‘어룡이 놀던 자리’를 썼고, 공동창작집 ‘당신의 가장 중심’ ‘작은 것들’ ‘쓰는 사람’ ‘최소한의 나’ 등에 필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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