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행 에세이 작가 박시윤의 ‘경주는 흐른다’ <14 - 2> 석굴암 (하)
■ ‘신라로 돌아왔다’는 그들의 착각
일제는 유독 신라 문화유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석굴암, 불국사, 금관총 등은 집착의 중심에 있었다. 그들에게 신라의 유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정복의 증거였고, 제국의 조선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과시할 수단이었다. 신라를 조선과 분리하여 특별한 문명으로 포장했다. 조선은 무능한 나라였고, 신라는 자신들의 옛 속국이라 믿으며 착각에 빠져 있었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신화가 바로 그들이 내세운 허상의 출발이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고구려와 백제까지 복속시켰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일본 고대사 속 가장 중요한 정복 신화였다. 메이지 정부는 신공황후 삼한정벌설을 국가 역사로 편입했고, 교과서와 지폐, 그림과 엽서에 반복해 새겼다. 신공황후의 후예라 자부하던 일본은 조선을 ‘잃었던 고토(古土)’라 칭하며 환호했다.
그들의 신화는 허구였다. ‘삼국유사’에도 ‘삼국사기’에도 신공황후는 등장하지 않는다. 임나일본부설과 마찬가지로 날조된 정복담이었다. 그럼에도 일제는 이 신화를 철석같이 믿었다. 역사를 도구 삼아 침략을 합리화하며, 식민교육에 깊이 새겨 넣었다.
그들에게 경주는 허위의 신화를 구현할 무대였다. 대한제국 말, 통일신라의 왕경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초라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폐허를 보며 감격했다.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는 경주를 보고 외쳤다. “경주여, 경주여! 나는 우리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신라를 일본의 옛 땅으로 착각했고, 제국의 기원으로 떠받들었다. 신라는 그들에게 과거의 속국이었고, 조선 병합은 과거의 회복이라 믿었다. 환상은 그렇게 확신으로, 확신은 침략으로 이어졌다.
허구의 신화 믿고 역사 왜곡한 일제
신라를 식민 지배, 정당화 수단으로
불국사·석굴암 등 문화유산에 집착
1915년 전후 경주의 새 명소로 각광
일제가 덧씌운 콘크리트 제거 작업
전통 목조 전각 건립 등 석굴암 복원
■석굴암, 경성으로 이송하라
석굴암은 숨겨진 것이 아니었다. 불국사 인근 사람들은 석굴암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석굴은 인근 사람들에게 이미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마치 자신들이 찾아낸 것처럼 ‘발견’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1907년 무렵, ‘토함산 동쪽 사면에 커다란 석불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우체부 김 씨가 우편을 배달하던 중 범곡 근처에서 무너진 천장을 목격하고 전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우체국장에게 석굴 안에 흙이 가득 차 있고, 돌부처들이 가득 묻혀 있다는 말을 전했다. 기무라 시즈오(木村靜雄), 모로가 히사오(諸鹿央雄) 등 일본인 관리와 사진사, 문화재 협잡꾼들이 뒤늦게 현장을 답사한 뒤 확산된 것뿐이었다. 세상을 등지고 조용히 존속하던 불전은, 그렇게 입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1909년, 조선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제2대 조선통감)가 경주를 방문했다. 그는 경주의 고적을 둘러본 뒤 석굴암으로 향했다. 당시 의병 활동으로 나라가 요동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경성 최고 권력이 지방으로 내려온 것이다. 석굴암은 그들에게 그만큼 중요했다.
소네는 석굴암을 경성으로 옮기고자 했다. 경상도 관찰사에게 해체와 이송에 필요한 예산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석굴암은 그에게 탐욕의 대상이자 대단한 전리품이었다. 그는 땅속에 묻혀 있던 대리석 소탑을 가져갔다.
뒤이어 문화재 전문가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경주로 파견되었다. 그는 석굴암을 둘러보고 ‘동양에서 비교할 수 없는 걸작’이라 평했다. 그의 평가는 제국의 확신을 더했다. 기무라 시즈오는 석굴불을 경성으로 옮기라는 소네 통감의 명령을 받고 고민했다. 그는 이송비 계산서를 끝내 올리지 않았다.
경술국치가 다가오고 정세는 복잡했다. 경성 이송 계획은 결국 무산되었다. 현지 일본인 관리들의 소극적 태도도 작용했다. 조선을 병합한 후에는 서두를 이유가 사라졌다. 그리하여 석굴암은 토함산에 남게 되었다.
석굴암의 존재는 제국에도 알려졌다. 일제는 석굴암을 조선에서 발견한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여겼다. 수백 개의 석재를 조립해 만든 인공 석굴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중국과 인도의 불교 석굴과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경주로 온 사람들
1912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석굴암 방문 이후, 석굴은 더 이상 조용한 산속의 불전이 아니었다. 수리를 거친 뒤 점차 외지인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1차 수리 공사가 마무리된 1915년을 기점으로 경주는 새로운 여행지로 떠올랐다. 서울과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까지 온 뒤, 자동차로 갈아타고 경주로 향했다. 불국사까지는 차로 이동했지만, 석굴암은 여전히 토함산의 산길을 올라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불편함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1920년대 들어 수학여행단의 발길도 이어졌다. 울산의 불교소년단, 경주의 계남학교, 서울의 보성고보까지 다양한 곳에서 학생들이 경주를 찾았다. 이들은 하루 동안 불국사와 석굴암을 참관하고, 절에서 숙박하거나 고물진열관을 둘러보며 일정을 마쳤다. 석굴암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배움의 현장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일제의 관광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제국은 석굴암을 조선 병합의 상징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석굴은 사진엽서에 담아 문화정책의 선전물로 기능했다. 그러나 경주로 온 조선인의 걸음에는 조용한 저항이 담겨 있었다. 조선 선각자들은 그 흐름을 이용해 학생들에게 조선의 정신을 전하고자 했다. 석굴암은 우리 조상이 남긴 위대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나라를 잃은 시대에도 조국의 자취가 뚜렷한 곳에 학생들을 데려가 깨우치려는 마음이 있었다. 선조의 숨결을 직접 느끼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무언의 교육이었고, 말 없는 위로였다. 비록 외세의 감시 아래 이루어진 여정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깊고 분명했다.
경주는 우리에게는 민족의 뿌리가 살아 있는 성지였다. 학생들에게 우리 민족의 정신과 예술을 새기려는 선각자들의 마음이 석굴암을 지켜냈다.
■우리 손으로 되살려낸 문화유산
1960년대, 석굴암 복원은 우리 손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일제가 훼손한 것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학자들과 기술자들이 머리를 맞댔다. 백 년의 상처를 지우는 일은 고되고 지난했다. 일제가 덧씌운 콘크리트를 걷고, 내부의 숨결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는 신중했다. 본존불 머리 위에 그들이 새겨 놓은 ‘일본(日本)’을 지웠다.
훼손이 심했던 만큼 복구는 더뎠다. 곰팡이와 석태는 본존불의 어깨를 타고 자랐고, 구조는 뒤섞인 채 회복이 어려웠다.
첫 번째 복원은 전실 공간에 전통 목조전각을 짓는 일이었다. 법당의 격이 다시 세워지고, 조각상들은 비와 눈, 바람으로부터 보호받게 되었다. 침묵 속의 불사는 그제야 제 자리를 찾았다.
두 번째는 콘크리트 돔 문제였다. 조각상과 얽힌 구조물은 쉽게 뜯을 수 없었다. 대신 그 위에 또 하나의 돔을 씌웠다. 시멘트 독성의 침투를 막기 위한, 정교하고 조심스러운 선택이었다.
세 번째는 진입로 양쪽의 시멘트 옹벽 철거였다. 흉물 같은 콘크리트 제방이 사라지고, 석굴암은 비로소 법당의 모습을 되찾았다. 기이했던 전경은 사라지고, 신라의 숨결이 되살아났다.
또 하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팔부신중의 완성이다. 일제는 여섯 상만을 세웠고, 나머지 둘은 진입로 옹벽에 비틀려 놓았다. 아수라와 금시조는 오랜 세월 동떨어져 고립되어 있었다.
이 둘은 우리의 기술로 제자리를 되찾았다. 일렬로 늘어선 신중의 행렬에 합류했고, 전실 공간의 구성은 균형을 회복했다. 조화와 위엄,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야차 상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공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존재였다. 장마와 폭설, 폭염과 한파를 고스란히 맞아야 했던 상처 위에 복원의 손길이 닿았다.
신중상의 재배치와 전각의 건립은 단순한 보수가 아니었다. 문화유산을 바로 세우고 민족의 정신을 되찾는 일이었다. 우리는 침탈된 문화유산을 되살려, 박제된 전리품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성전으로 되돌렸다.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존엄과 자긍심의 선언이었다.
비가 그쳤다. 전각을 빠져나오니, 100년을 훌쩍 돌아 나온 듯 눈앞이 사뭇 낯설다. 어디를 떠돌다 온 것인가. 전각 위 빗방울에 씻긴 잔디가 한층 더 선명하게 빛난다. 둥근 형상은 마치 위대한 것을 꼭꼭 품고 있는 왕릉 같다. 음지를 덮은 이끼처럼 고요한 산기슭, 물기 어린 공기 속을 가만가만 걷는다.
우리 조상이 남긴 찬란한 문화유산, 그 안에 새겨진 사유가 불쑥 솟아 마음 한구석을 울린다. 오랜 굴곡과 상처를 딛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켜낸 시간이 위대하게 다가온다.
함께 걷는 외국인 소녀가 조용히 돔을 올려다본다. 이국의 낯선 문화유산을 바라보며 눈빛 가득 경외가 스며 있는 듯하다. 한 인류의 유산을 마주한 이방인의 떨림과 놀라움은 어떤 것일까. 젖은 숲길에 접어들 무렵, 그녀의 감탄이 가만가만 미소로 번진다.
“Oh my gosh. Korean cultural heritage, Seokguram, so magnificent and great!” (맙소사, 한국의 문화유산 석굴암, 정말 장엄하고 위대해!)
그녀의 눈빛 속에서, 나는 우리의 것을 다시 본다. 내가 가진 것이 곧 세상과 나눌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임을, 이국 소녀의 눈빛에서 비로소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