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복장으로 집 가까이 호텔영일대 주변을 산책하다 무심히 생각난 듯 갤러리 웰로 향한다. 이번 주에는 또 어떤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호텔영일대 갤러리 웰은 포항예술진흥원에서 공모를 통해 일 년간 다양한 작가들의 전시가 순차적으로 예약되어 있다. 어느 날 불쑥 찾아가도 언제든 좋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이곳에 가면 항상 느끼는 것이 세상에는 재주 넘치는 사람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 테마는 ‘설악의 서정(抒情)’이다. 그런데 그 느낌의 강도가 예전과 좀 다르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을 심호흡으로 진정시키며 그림들을 둘러본다. 이 그림들 뭐지? 정말 그림 맞아?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그럼에도 사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설악산 사계 모습을 ‘화선지 위에 먹’으로 은은하게 표현했다는 게 보고도 믿겨지지 않는다.
작가의 혼이 깃든 듯하다. 아니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으로 전시장 공간이 빈틈없이 가득 채워진 듯하다. 묵향으로 채워진 설악산의 사계를 어느새 몰입해서 향유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무(無), 즉 공(空·해탈)으로 이끄는 예술예찬론이 이런 몰입의 두근거림을 두고 한 말인가.
이화우 화백은 포항에서 개인전은 처음이다. 직장생활을 하며 취미로 서예를 시작했고 서예에 웬만큼 빠져있을 때 우연히 진성수 화백의 진경산수화에 심취하게 된다. 25년 전이다. 직접 그를 찾아가 16년 동안 포항에서 대구를 오가며 먹의 농담(濃淡)과 선을 표현하는 기법을 사사 받는다. 어느 순간, 그는 베끼기에 열중했던 자신의 그림들을 과감히 불태우고, ‘화선지 위에 먹’으로 극사실화 기법을 연구한다. 3년 동안은 작품 없이 극사실화를 위한 먹의 농담만을 연구한 후 다시 그리기 시작한지 8년째다. 이번 전시를 위해 4년을 준비했다. 그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적어도 두 달이 소요된다. 한 번의 실수에도 그림을 버려야하므로 정신집중은 기본이다.
화선지 위에 먹물의 세밀한 농담으로 밑그림을 그린 후 색을 입힌다. 흰색 물감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햇빛에 반짝이는 가늘고 디테일한 윤슬의 흰 선마저 화선지의 ‘여백’이다.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워 두는 것이다. 화선지에 은은히 젖어든 먹물이 빚어 낸 그림은 우리 전통문화의 정서와 기운, 그리고 채움과 비움이 적절히 서려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더 안온함을 준다.
북송의 소식이 왕유의 시와 그림을 보고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畵中有詩 詩中有畵)”라 평했다. 이화우 화백은 화중유시(畵中有詩)를 꿈꾼다.
예술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아름답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기술’을 비유적으로 이른다. 따지면 운전이나 음식도 경지에 이르면 예술이 된다. 그러나 예술은 그것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에게서 생명력을 얻어 생동한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향유해 줄 사람이 없다면 생명을 잃게 된다. 예술문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지만 여전히 작품전시나 미술관에 가는 것은 특별한 느낌으로 일상적이지 않다.
앞으로의 바람을 묻는 시민기자에게 이화우 화백은 “건강하게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전시의 홍수 속에서 보는 순간 절로 탄성이 나오는 작품은 흔치않다. 다음 전시는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하며 향유 객들이 뿜어내는 생명력으로 그의 전시장에 생동감이 넘쳐나길 바라본다. /박귀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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