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는 우울하거나, 쓸쓸하거나, 어쨌든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석양을 본다고 했다. 어느 날엔 의자를 44번이나 옮기며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노을은 사람을 위로하기에 좋은 소재다. 그래서 해넘이가 아름다운 곳을 자주 찾는다. 오늘 찾아간 곳은 고래가 넘실대던 장생포항이다.
울산 장생포초등학교 맞은편, 외벽에 거대한 고래가 헤엄친다. 1층 로비에는 어린왕자를 등에 태운 고래가 엎드려서 손님들이 인증샷을 찍도록 마련했다. 뒤로 태화강의 수로가 고래처럼 구불거리며 흐른다. 곧 바다와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강물이 속도를 조절한다. 도착한 시간이 4시쯤이라 일몰까지는 한 시간여 남았다.
1층에 푸드코트인 ‘어울림마당’이 자리 잡았다. 창가에 앉으면 정박한 선박들과 눈높이가 나란해 크루즈를 탄 것처럼 식사를 즐길 수 있다. 김밥과 돈가스뿐 아니라 숙성 카레, 해산물 덮밥, 코다리 밀면 등 특별식도 있다. 입점한 업체 3곳 모두 점심 식사 시간인 오후 2~3시까지만 영업하니 참고하는 게 좋겠다.
2층엔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1962년 우리나라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울산공업센터 특정공업지구 기공식’이 장생포문화창고 인근에서 열렸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꾸민 기념관이다. 로비에 놓인 ‘한국공업입국출발지 기념비’는 1992년 기공식 30주년을 기념해 현장에 세운 것을 장생포문화창고 개관 후 옮겨왔다.
3층 미디어아트 전시관에선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활용한 미디어아트 전시를 상시로 볼 수 있다. 3월까지는 고갱의 작품이 살아서 움직인다. 좋은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이 적어 전시가 한 바퀴 돌아 다시 처음으로 올 때까지 우리뿐이었다. 그래서 그림이 바뀔 때마다 그림 속 소녀들과 손을 잡아보고, 그림 속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전시장이 온통 우리 것이다. 4층엔 인근의 5개 대학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 중이었다. 빛의 마당에서는 작은 불빛이 모여 개나리가 핀 듯, 바다 위에 반영된 별빛인 듯 황홀했다. 물론 여기도 오롯이 우리만 즐겼다.
장생포문화창고는 수산물 가공 및 냉동 창고로 쓰이던 ‘세창냉동’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되살렸다. ‘제19회 대한민국 지방자치경영대전 문화관광분야 최우수상 수상’했고 로컬100에도 선정되었다. 2022년 개관 후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상설공연을 하고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음악 아카데미 등 체험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진행한다. 장생포문화창고라는 이름도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 최종 선택된 것이며 “장생포의 지역명에 새로운 문화의 보물창고라는 뜻을 더했다”고 한다.
공유 작업실과 공연 연습실로 쓰는 5층을 지나 6층은 오늘의 하이라이트 바다가 펼쳐진다. ‘사유의 바다’로 불리는 북카페 ‘지관서가(止觀書架) 장생포’다. 지관서가라는 이름엔 ‘내 안의 소리를 멈추는 곳, 나와 세상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곳’이란 뜻이 담겨 있다. ‘인문과 예술과 산업의 이질적인 사상과 관점들이 서로 만나고 대결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재탄생하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한다’라는 소개 글처럼 책을 통해 지혜를 더하고 독서와 낭독 모임을 통해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 여기에 매달 수준 높은 인문학 강연을 이어오며 복합문화공간으로 뿌리를 내렸다.
카페라떼 한 잔을 받아 들고 공장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붉은 기운을 남기려 애쓰며 하루를 마감하는 햇살의 그림자가 태화강 위에 드러눕는다. 물결과 함께 일렁이는 새들은 저녁을 준비하느라 잠수하기를 반복한다. 그 태화강을 천천히 배 한 척이 거슬러 오른다. 그림 같은 풍경이다. /김순희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