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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세상읽기 ④ 치지-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근본적으로 깨달아야

등록일 2025-02-09 18:32 게재일 2025-02-1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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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c².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서 도출되는 원리.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격물(格物)’은 ‘단지 하나의 사물에 다가가 그 한 사물의 이치를 극진히 궁구하는 것’이고, ‘치지(致知)’는 곧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궁구해 얻음으로써 나의 지식이 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

격물이 ‘사물 하나 하나’(예, 철수네 집 대나무, 영희네 집 대나무)에 다가가 그 사물들의 이치를 직접 살피는 것’이라면, 치지는 ‘자신의 생각을 통해 그 각각의 사물을 관통하는 하나(‘대나무’라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지식 축적과 함께 이성의 힘을 키우는 구체적 방법인 ‘생각하기’의 ‘치지’에 대해 알아봅니다. 알아보는 순서는 첫째, ‘생각- 생각하는 존재, 인간’, 둘째, ‘추리- 생각은 추리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이성의 날’입니다.

◇사고실험을 통해 발견된 생각

상대성 이론은 실험실에서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특허국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버는 돈은 저녁때나 일요일에 선술집에 들러 썼으며 한가로운 산책을 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많은 시간을 생각하는 데 보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가끔씩 쉬는 시간이 생길 때면 사무실 책상 서랍 안에 있는 종이를 꺼내서는 뭔가 갈겨쓰곤 했습니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그 서랍을 자신의 ‘이론 물리학과’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늘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들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풀릴 듯하면서도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는 뭔가가 있어서 답답했다. 그날 밤도 여전히 그걸 알아내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그는 매우 흥분되어 있었다. ”고 했습니다. 이후 그는 대여섯 주 만에 38장의 논문 초안을 완성했습니다. 그 논문이 바로 상대성 이론의 시작이었습니다. 상대성이론(Theory of relativity)은 실험실에서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머릿속 ‘생각’에서 탄생했습니다. 사무실에서 짬이 날 때마다 그리고 자신의 집 침대에서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결론이 날 때까지 끝까지 파고든 끝에 마침내 찾아낸 것이 ‘E=mc²’입니다.

머릿속 ‘생각’으로 하는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을 통한 자연과학의 위대한 발견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많은 원리와 이론들이 순수한 ‘생각’인 사고실험에서 시작되거나 사고실험을 통해 발견되었습니다.

인문학, 사회과학의 발전은 말할 것도 없이 실험실이 아닌 ‘사고실험’, 즉 ‘생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유의 출발인 공자와 플라톤의 주장들이 ‘생각’으로부터 나왔고, 중세 주희의 신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생각’에서 나왔고, 근대를 선도한 홉스, 로크, 루소의 자유주의 사상들이 당연히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주희는 ‘대학’의 ‘경문1장’ 해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지(知至)는 내 마음의 아는 바가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의 아는 바가 다하지 않음이 없는’ 상태는 어떤 의문이나 문제가 생겼을 때 답이 나올 때까지 그 이상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생각’을 거기에 집중한 결과입니다. 물론 그 ‘생각’에는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핵심은 ‘생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료를 찾아봐야 할지, 무엇을 먼저 알아봐야 할지 등에 대한 답도 모두 스스로의 ‘생각’으로부터 나옵니다.

◇생각은 인간의 본질적인 행위

작가인 한 지인은 오래전 자신이 쓴 글을 읽고 한 번씩 놀랄 때가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흥미로운 관점을 생각해 낼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멋진 표현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아무리 봐도 자신이 쓴 글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특별한 관점, 그런 멋진 표현을 생각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글을 쓸 때 그는 그 이상의 새로운 관점, 그 이상의 멋진 표현을 또 생각해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일단 글쓰기에 들어가면 작가는 해당 주제에 자신의 에너지와 모든 생각을 집중합니다. 운동하면서도 그 주제를 떠올리고, 식사하면서도 그 주제를 새기고, TV를 시청하면서도 마음 한쪽은 여전히 그 주제로 꽉 차 있습니다. 들리는 것, 보이는 것, 느끼는 것, 주위의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그 주제로 연결됩니다. 당연히 평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기발한 아이디어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고, 또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과정에서 놀라운 아이디어 확장이 일어납니다. 글 쓰는 것만이 아닌 다른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심코 지나칠 때와 집중적으로 ‘생각’할 때의 결과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사서삼경 중 하나인 ‘서경’ ‘다방’ 편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성인(聖人)이라 할지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바보가 되고, 어리석은 이라 할지라도 생각을 하게 되면 성인(聖人)이 된다.”

오늘날의 일상적 표현으로 바꾸어보면, ‘일류대를 졸업하고 초일류 회사에 들어간 이라 할지라도 오랫동안 시키는 일만 하면서 깊이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간판밖에 내세울 것 없는 일류 바보가 되고, 초등학교만 졸업한 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일을 하면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끝까지 고민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이 쌓여 지혜를 갖춘 현명한 이가 된다’ 정도 내용이 되겠습니다. 어떤 다른 것도 아닌, ‘생각’하는 습관 여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을 지혜로운 이로 변화시키기도 하고 어리석은 이로 퇴보시키기도 합니다.

그대가 이 꽃을 보았을 때 꽃은 비로소 그 모습을 환하게 드러내었으니 사실 ‘생각’을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위대한 발견이나 현명한 사람이 되기 위한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행위입니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매우 ‘인간적’입니다.

시인 김춘수는 시 ‘꽃’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이하 생략)

시인이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그’는 그냥 의미 없는 몸짓에 불과했습니다. 시인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꽃’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관심, 사람의 생각이 무의미를 의미로 바꿉니다.

주희의 성리학과 대립해 ‘마음(心·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왕양명도 일찍이 ‘꽃’으로 생각의 의미를 나타냈습니다. ‘전습록’ ‘황성증의 기록’ 편에서 한 사람이 왕양명에게 묻습니다.

“선생께서는 천하에 마음 밖의 사물이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 깊은 산 속에서 저 홀로 피고 지는 꽃은 제 마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왕양명이 답합니다.

“그대가 이 꽃을 보지 않았을 때 이 꽃은 그대 마음과 같이 그냥 적막 그 자체였다. 그대가 이 꽃을 보았을 때 꽃은 비로소 그 모습을 환하게 드러내었으니, 곧 이 꽃은 그대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산속에 그냥 저 혼자 피고 지는 꽃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와 인식되었을 때 비로소 꽃은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으로 존재합니다. 앞의, 시인이 관심을 가지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가 비로소 ‘꽃’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인간의 생각이 무엇인가를 향할 때 그것은 존재하고, 인간이 생각을 거두면 그 존재 역시 거두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하는 인간’ 또는 ‘인간의 생각’이 없다면 이 세상에 존재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지혜가 있는 사람),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은 무의미를 의미로 바꾼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새롭게 내놓은 자신의 인식론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Kopernikanische Wendung)’으로 표현합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천문학 관점을 바꾼 것처럼, 자신은 사물에 대한 사람의 인식 관점을 기존의 ‘사물 중심(객관)’에서 ‘인간 중심(주관)’으로 전환시키는 ‘사고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사물은 사람의 오감(五感)에 닿아 저절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성’과 ‘지성(또는 오성, Verstand)’의 주도적인 역할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인간의 ‘감성’과 ‘지성’이 작동하지 않으면 사물 자체가 실제 존재하더라도 인식될 수 없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동기 작가(경영학 박사) 신동기인문경영연구소 대표
신동기 작가(경영학 박사) 신동기인문경영연구소 대표

칸트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감성’은 인간에게 선험적(Transcendental)으로 주어진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개의 주관적 직관 형식’으로 대상 사물의 ‘현상(現象·사물 자체가 아닌 사물의 바깥 모양·Erscheinung)’을 수용합니다. 이어 ‘지성’은 이 수용된 ‘현상’에 선험적으로 주어진 12가지의 범주를 적용해, 그 현상을 하나의 ‘개념’으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감각 경험적 인식의 ‘개념화’ 과정에서 ‘지성’은 ‘판단’을 합니다. ‘사물 현상의 개념화를 위한 사고 형식’인 12가지 ‘범주’는 ①양과 관련된 3가지, ②질과 관련된 3가지, ③관계와 관련된 3가지 그리고 ④양태와 관련된 3가지, 총 12가지입니다.

“내용 없는 사상들은 공허하고, 개념들 없는 직관들은 맹목적이다”라는 칸트 본인의 주장대로, 칸트에게 있어 사람의 ‘인식’은 언제나 ‘감성’을 통해 수용된 ‘현상’과 ‘지성’을 통해 판단된 ‘개념’, 이 둘의 종합을 거쳐 완성됩니다.

사람의 ‘생각’은 무의미를 의미로 바꿉니다.

이 세상에 사람이 없다면 만물은 그냥 적막 그 자체일 뿐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생각하는 능력인 이성을 가진 인간이 존재하더라도 그들이 ‘생각’하기를 게을리한다면 이때 역시 만물은 그 존재 의미를 제대로 드러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치열하게 궁구해, 끝 모를 심연 저 깊은 곳까지 그 생각이 이를 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자신의 자리를 찾고 자신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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