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서울구치소는 서울에 있지 않다. 의왕에서 성남 가는 방향에 있다. 옛날에는 경성감옥이라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서대문형무소라 했다. 8·15 해방 후에 서울형무소라 했다. 1967년에 서울구치소로 바뀌었어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계속 있었다. 1987년 11월 15일에 지금의 의왕시 포일동으로 이전했다.
나는 1984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때는 제5공화국 시절이다. 2학년이던 1985년 11월 18일 아침 8시, 서울 시내 14개 대학 학생 191명의 한 사람으로 민정당 정치 연수원 3층 건물에 들어갔다. 점거농성이었다. 학생들은 건물 안의 책상 등 집기들을 가져다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에 바리케이트를 쳤다. 경찰 진입에 대비한 것이었다.
불이 잠깐 났던 것도 같은데, 위험하다고들 하며 금방 꺼버렸다. 관련 기사는, 소방차 여덟 대가 출동해 옥상의 학생들에게 물을 뿌렸고, 2,100여 명의 정사복 경찰들이 투입되었다고 했다. 옥상 철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여섯 시간 반의 농성은 경찰 ‘백골단’이 옥상 철문을 절단하고, 학생들을 한쪽으로 내몰아 몽둥이로 두드리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그날 하늘에 헬리콥터가 떠 있었다. 부모님들이 걱정한다고, 농성을 풀라고, 선무방송을 했다.
그때 학생들은 ‘점거 농성’을 ‘자살택’이라고 불렀다.‘자살’이란 체포를 면할 길 없음을 의미했다. ‘택’이란 ‘전술’을 뜻하는 ‘tactic’의 앞글자에서 따온 것이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체포, 연행된 학생들은 각기 소속된 대학 근처의 경찰서로 옮겨졌다. 나는 관악경찰서로 옮겨져 조사를 받았다. 저녁 여섯 시가 조금 지났을까, 담당 형사가 “전원 구속”이라며, 손에 수갑을 채웠다.
그 ‘전원 구속’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되었다. 지난번 서부지법 사태가 날 때까지 꼭 그런 줄만 알았다. 서부지법에 진입한 청년들을 “전원 구속”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인터넷을 뒤졌다. 실제 구속자는 82명에 ‘불과’했다. 나는 ‘선별’된 82명 중의 한 사람이었고, 그나마 기소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 3년형인가를 받은, 같은 과 선배의 모습을 지금 가슴 아프게 기억한다.
대학 2학년생, 서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던 때였다. 열흘을 관악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내고, 서울구치소라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곳이 어디에 어떻게 붙어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현저동에 있던, 지금의 의왕으로 옮겨지기 직전의 서울구치소에서 열흘을 보냈다. 나머지 열흘은 의정부교도소로 보내졌다. 이렇게 열흘씩을 법무부 교도 행정을 ‘속성 이수’한 끝에 다시 사회로 내보내졌다.
사십 년이 흐른 지금, 불법체포, 불법구속에 항거한 청년들이 ‘폭력시위’ 죄목으로 ‘전원 구속’이라 한다. 부정선거를 밝히려고 계엄령을 선포한 대통령은 누명을 쓰고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다. 그 청년들의 미래를, 나라의 안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힘겹게 독재와 싸워 얻은 ‘87년 체제’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부정선거’가 ‘87년 체제’의 국민주권 원리를 질식시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