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가야산 홍류동 계곡 농산정 건너편 바위에는 신라시대 문장가 최치원의 둔세시가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때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선비들이 그의 글을 보러 찾아왔다고 소문난 시다.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란 제목의 이 시의 내용은 이렇다.
“돌 사이 흐르는 세찬 물에 온 산에 울리니/ 곁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 분간하기 어려워라/ 옳으니 그르니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 늘 두려웠으나/흐르는 물로 온 산을 에워쌌다네”
최치원이 조정의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가야산으로 은퇴한 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평화로운 심경을 노래한 시다.
조선시대 한강 정구(1543-1620)가 쓴‘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는 “최 고운(崔孤雲)의 시 한 수가 폭포 곁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장마철이면 물이 불어나 소용돌이치며 바위를 깎아 내는 바람에 지금은 더 이상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1725년 정식이 쓴 ‘가야산록(伽耶山錄)’에는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승려가 “돌에 최치원의 친필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가 마모되었다. 그래서 그가 이곳에 옮겨와 다시 새긴 것”이라 했다.
선비들의 유람록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최치원의 시는 처음 홍류동 계곡 바위에 새겨져 있던 것이 오랜 장마와 폭우로 글씨 대부분이 마모된 것을 우암 송시열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농산정 맞은편 바위에다 자신의 글씨로 다시 새겨 넣은 것이다.
최치원은 신라시대에 살았던 학자이자 문장가이며 사상가다. 말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가야산에 들어와 해인사와 관련한 많은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해인사와 최치원의 인연은 해인사에 친형인 현준스님이 있었던 것과 불교 관련 책들을 그가 많이 썼던 것 때문이다.
가야산에 은거하며 쓴 최고의 작품으로 ‘법장화상전’이 있으며, 해인사 창건과 중창에 힘쓴 스님들의 기록인 ‘순응화상찬’, ‘이정화상찬’ 등 수도 없이 많은 최치원의 기록이 남아 있다.
최치원과 가야산의 인연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계곡 바위에는 시대를 떠나 많은 조정의 인물들이 찾아와 크고 작은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새긴 석문을 살펴보면 당시 조정 인물의 반은 홍류동 계곡에 다녀갔다고 해도 거짓이 아닐 듯하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는 그의 은둔 생활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면서 친형인 현준 스님과 도우를 맺고 한가히 은거하다 노년을 마쳤다.”
가야산과 해인사는 최치원과 뗄 수 없는 인연의 장소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석벽은 홍류동 계곡의 노상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돼 있다. 바위에 새긴 글씨는 풍랑으로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찾는 많은 이들이 이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최치원 둔세시의 역사성과 문화재적 가치를 잘 살펴 지금이라도 이를 문화재로 등록하는 절차를 밟았으면 좋겠다. 문화재의 훼손도 막고 후손으로서도 부끄럽지 않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성두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