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밀양 ‘위양지’에 펼쳐진 군락지 ‘그림같은 풍경’ 연출 전북 전주 철길과 어우러진 순백의 꽃길 인생사진 명소로
벚꽃이 진자리에 밥풀처럼 하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전에는 미처 몰랐다. 이팝나무가 그토록 아름다운 줄은. 벚꽃처럼 화사하지도 않고, 수국이나 유채처럼 눈부시지 않은데도 이팝나무는 볼 수록 가슴을 설레게 한다. 봄과 여름의 중간기를 화려하게 수놓는 이팝나무 군락지를 찾아 설레는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꽃을 치렁치렁 피워 내는 이팝나무 꽃은 화려하기가 벚꽃 못지않다. 만개한 이팝나무 꽃은 가지마다 소복하게 쌓인 눈처럼, 둥실 뜬 흰 구름처럼 화려하다. 이팝나무에는 여러 가지 유래가 붙어 있다. 잔 꽃송이가 한꺼번에 피어나는 것이 사발에 소복이 얹힌 흰 쌀밥처럼 보여서 이밥나무라고 했다가 이밥이 ‘이팝’으로 변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때문일까? 조상들은 꽃의 개화 상태를 보고 그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기도 했다.
농부들에게는 이팝나무를 살피는 것이 꽃 구경이 아니라 한해의 양식을 걱정해 가슴 졸이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이야기는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인 (入夏)에 꽃이 피어 입하목(入夏木)이라 불렀고, 입하가 ‘이파’를 거쳐 ‘이팝’으로 되었다고 한다.
수없이 많은 곳에 이팝나무가 피었지만 이팝나무 꽃이 가장 화사한 곳을 꼽으라면 경남 밀양이 으뜸일 것이다.
밀양 도처에 피어있는 이팝나무는 때로는 모여서 아름답고 혹은 따로 떨어져서 빛을 낸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사한 이팝나무는 부북면 화악산 아래 연못 위량지(位良池)다. 원래 이름은 양량지. 이 연못은 ‘선량한 백성들을 위해 축조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때 축조했다는 위양지는 논에 물을 대던 수리 저수지였지만 인근에 거대한 가산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쓸모를 잃었다. 논에 물을 대는 대신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으니 ‘쓸모가 바뀌었다’라고 하는 쪽이 맞겠다.
저수지 주변의 수 백년 된 이팝나무가 물속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은 이색적이면서도 경이롭다. 특히 위양지의 절정을 보려면 새벽에 나서야 한다. 아침에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저수지에 깔리면 몽환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아름드리 왕버드나무와 소나무들로 울창한 숲을 두르는 모습을 담기 위해 수 많은 사진작가가 새벽부터 저수지 주변에 진을 치고 기다린다.
위양지는 사철 모두 아름답지만, 특히 봄의 풍경이 압도적이다. 저수지 둘레의 오래된 이팝나무들이 일제히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위양지의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정자다. 연못에 떠 있는 섬 하나에 1900년에 지어진 안동 권씨 문중 소유의 정자 ‘완재정’이 있다. 당시에는 배로 드나들었다는데 지금은 정자로 건너가는 다리가 놓였다. 가수 아이유가 주연으로 나온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완재정 담 너머에는 밀양 제일의 이팝나무가 자란다. 정자 담장을 끼고 있는 아름드리 이팝나무가 꽃을 피우면 실가닥 같은 순백의 꽃들이 가지마다 터져 세상이 온통 환하다. 정자로 건너가는 다리 주변에도 이팝나무 몇 그루가 더 있고, 담장 한쪽에는 이팝나무에 질세라 찔레꽃이 흰 꽃을 화려하게 피워낸다. 이팝나무와 찔레꽃이 고요한 수면에 거울처럼 비치는 모습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단장면 아불 삼거리에서 밀양댐 아래로 이어지는 1051번 지방도로는 밀양의 또 다른 이팝나무 명소다. 길가에 세워진 이팝나무로 꽃 터널이 만들어진다. 나무가 늘어진 거리만 5km 나 된다. 단장천의 물길을 끼고 밀양댐 아래까지 이팝나무의 흰 꽃이 구불구불 긴 띠를 이룬다. 나무마다 만개한 꽃의 모습이 마치 설경(雪景)을 연상케 한다.
이팝나무 가로수는 밀양댐을 완공한 2001년 무렵 심어졌다고 한다. 헤아려보면 수령은 25년 정도인데도 성장이 빨라서인지 이팝나무 철이면 가지가 길 양옆을 가득 덮는다.
이팝나무 군락지로 꼽히는 또 다른 명소는 전북 전주시 팔복동에 있다. 팔복동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주를 뛰게 한 공장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기린대로에서 신복로까지 철길 양옆 620m 구간에 늘어선 이팝나무 군락은 화사하기 이를 데 없다. ‘이팝나무 철길’로 알려진 이곳은 매년 이맘때 이팝나무가 철길을 따라 만개해 봄철 명소로 자리 잡았다.
이팝나무 철길이 개방된 것은 지난해부터다. 시민과 관광객이 이팝나무와 어우러진 철길 경관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도록 전주시와 코레일 전북본부가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개방하게 됐다.
전주시는 올해 이팝나무 철길을 더 다양하게 즐길 수 있도록, 철길 주변에 먹거리 부스(이팝나무 장터)와 판매 부스, 체험 부스 등을 운영한다. 이 밖에도 플리마켓, 먹거리 장터, 마술·버블쇼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또 철길 개방 기간 팔복예술공장에서는 ‘앙리 마티스&라울 뒤피’ 전시도 열려 관광객들에게 복합 문화예술공간으로서 다양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팔복예술공장은 1990년대 초반까지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하던 곳으로 지금은 문화 예술 플랫폼으로 재탄생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이곳은 실내외 전시와 카페 등이 있는 A동, 꿈꾸는 예술 터와 다목적 야외광장 등이 있는 B동으로 나누어져 있다. 휴식과 문화 그리고 예술을 경험하며 낭만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다.
이팝나무 철길은 5월 3~6일 개방된다. 오전 10시~오후 6시까지는 기린대로에서 신복로 630m 구간이 오후 6~9시까지는 금학교부터 신복로 400m 구간이 개방된다.
낮에는 따뜻한 봄 햇살 속에서 순백의 꽃길이 펼쳐지고 밤에는 철길 개방 구간에 설치된 경관 조명이 철길과 꽃잎을 비추며 교교한 봄밤의 정취를 무르익게 한다.
한편 이팝나무 철길을 개방 시기에만 해당 구간 철길 내부에서 이팝나무 감상과 촬영할 수 있으며, 안전을 위해 개방 기간 및 구간 외 출입은 금지된다.
경북도의 이팝나무 명소
포항 흥해·경주 오릉·달성 세청숲까지 ‘힐링 포인트’
경북의 대표적인 이팝나무 군락지는 포항 흥해읍에 있다. 일명 ‘포항 흥해향교 이팝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561호)로도 지정됐다. 이팝나무의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향교의 풍경은 고아하면서도 화사하다.
포항 흥해향교 이팝나무 군락은 고려시대 충숙왕 때인 14세기 초 이곳에 흥해향교를 세우면서 기념으로 심은 나무에서 종자가 떨어져서 번식한 것으로 추정된다. 향교 주변에 자라는 이팝나무 노거수 20여 그루는 평균 가슴높이 둘레가 2m 넘고, 평균 높이는 12m 이상이다. 옛날 주역을 습득한 선비들이 전쟁을 예측하고 급할 때 무기를 만들기 위해 심었다는 설(說)도 같이 전해지고 있다.
김해에는 주촌면 천곡리와 한림면 신천리에 국내 최고령 이팝나무 2그루가 있다. 수령은 650년이나 된다.
경주 오릉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을 비롯해 남해차차웅(2대), 유리이사금(3대), 파사 이사금(5대)의 능이 자리한 역사적 장소다. 해마다 5월이면 하얗게 만개한 이팝나무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
입구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울창한 이팝나무 군집이 펼쳐진다. 거대한 나무들이 하얀 꽃으로 뒤덮이며 장관을 이루고 뒤편의 하얀 담장이 화사한 봄 풍경을 완성한다.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의 이팝나무 군락지는 대구경북지방에서 유일하게 집단 자생하는 이팝나무 숲이다. 일명 ‘세청숲’이라 불리는 이곳의 이팝나무는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 중구 동산의 제일교회 마당 북쪽에 있는 수령 200년이 넘는 이팝나무 두 그루는 이른바 ‘현제명 나무’로도 알려진 곳이다. 대구시가 보호수로 지정하고 현제명 선생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현제명 나무로 명명했다.
대구 동구에 있는 동촌유원지 해맞이 동산 별빛 산책로도 이팝나무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새하얀 눈송이처럼 핀 이팝나무꽃이 나들이객들에게 따스한 봄날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듯한 느낌을 준다. 봄날의 청량함과 산뜻함을 느끼게 하는 이팝나무 아래를 거닐며 힐링할 수 있는 장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최병일 기자 skycbi@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