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을 깨고 나온 누에의 몸털처럼 갓 우화한 어린 날개의 깃털처럼 대숲을 빠져나온 바람처럼 자유롭게 한바탕 울음을 쏟은 구름처럼 홀가분하게 별들의 소리가 선명해지는 자정의 몽유처럼 꿈꾸며 노닐자 육신의 틀을 벗은 혼령처럼 입자의 틀을 벗은 파동처럼 시공의 틀을 벗은 양자처럼 달을 품은 백학의 날개처럼 춤추며 노닐자. … ‘소요유’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경지를 뜻하는 장자의 말. 위의 시는 이 ‘소요유’ 사상을 시적 이미지로 제시한다. 갓 태어난 이들처럼 자유로운 존재로 돌아가자는, 바람을 타고 날개를 흔들며 날아가는 백학처럼 “춤추며 노닐자”는 시인의 제안은 눈물 날 정도로 마음에 박힌다. 우리는 여전히 무엇인가에 갇혀 살아가고 있기에. 하나 시의 도움으로 ‘소요유’의 마음만은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문학평론가>
2025-09-04
레스토랑에서/ 나와 함께/ 수프를 먹은 건/ 새들입니다 투명한 부리를 훔치며/ 일어서더니/ 차례차례/ 박쥐우산을 펼쳐/ 석양 속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홰 위에서 홀로/ 비 소식을 듣는 건/ 나입니다 웨이터가 / 새장 문을 열고/ 발자국을 모두/ 어둠 쪽으로 쓸어냅니다 ….. 일본의 현역시인 루리코의 시. 직접 꾼 꿈을 환상적인 시로 변환하여 발표했다고. 위의 시도 꿈과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시인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새들이 식사를 하고 식사를 마친 새들은 석양 속으로 들어간다. 시인도 조류가 된 걸까, “홰 위에서” “비 소식을 듣는”다니. 발자국을 “어둠 쪽으로 쓸어”내는 웨이터는 ‘시간’의 화신일까. 의미 해석의 정답은 없어서, 여러 가지로 읽어볼 수 있는 재미를 주는 시. <문학평론가>
2025-09-03
개가 죽어/ 개 없는 개집 앞에 개가 죽어/ 개 없는 주인이 서 있다 잎사귀 하나 없는 백목련 가지 위에 주먹만 한/ 백골들이/ 허공을 찢어 발기며 불거져 나오는 4월 어떤 구녕이 아이는 발라 먹고 백골만 뱉는 것일까 번번이 새끼를 죽여서 낳던 개는/ 이 나무 아래서/ 맞아 죽었다 어서 맞고/ 자고 싶던 개 … 제목이 ‘봄밤’이지만 참혹한 이미지가 펼쳐지는 시. 자연은 삶과 죽음이 중첩되면서 유지된다. 자연 속의 죽음을 조명하는 것 역시 진실의 일면, 시인은 아름다움 뒤에 죽음이 있음을 끔찍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피어난 하얀 목련꽃을 살이 다 발라지고 남은 아기의 백골로 나타내고 있으니. 맞으면서 어서 죽기만 바라며 죽은 개의 모습은 어떤가. 죽음의 자연에 더한 인간의 잔혹한 폭력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문학평론가>
2025-09-02
사람이 죽는 순간 몸 바깥으로 빠져나온 영혼은 광속光速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요 그 사람 다음 세상이 결정되기 전까지 빠르게 우주 속으로 돌아간다 해요 사람들은 사십구제祭로 망자를 위로하지만 이미 떠난 사람, 그 사람은 여기 없어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이면 동물, 식물이면 식물, 생명을 가진 모든 만물도 그러하대요 생명들이 무수히 사라지는 속도를 느껴보세요 살아가면서 문득 오싹한 바람을 느껴보신 적 있으신지요 나이 드신 사람은 더 자주 느낀답니다 … 죽은 이의 영혼은 죽은 후 49일 동안 삶에 대한 미련으로 이승을 떠돈다는 통념을 뒤집는 시. 그 영혼은 죽자마자 “광속보다 더 빠르게” “우주 속으로 돌아간다”는 것. 사람만이 아니라 생명체 모두가 그렇다고. 우리가 “문득 오싹한 바람을/느”끼는 것은 그 영혼의 귀환 속도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의 영혼은 사는 동안에도 이 세상을 떠나 고향인 저 세상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학평론가>
2025-09-01
한 뼘이나 남았을까 오후의 겨울 햇살 내 목숨 한 뼘이나 남았을까 너를 향한 그리움 그리고 풀꽃 사랑 무궁이라 믿었거늘 갈수록 야위어가는 내 마음 이제 한 뼘 혹은 두 뼘 아니면 아예 어둠 어둠 속에서 부스스 일어나 창을 열고 우주로 떠난다 풀꽃에게로 떠난다. ….. 시인은 예전엔 “무궁이라 믿었”던 “내 마음”의 활력이 소진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마치 지고 있는 겨울 햇살이 “한 뼘이나 남았을” 정도처럼, 어둠을 향해 사라지고 있는 활력. 결국 마음은 어둠으로 빨려들었으나, 시인은 “부스스 일어나” 다시 창 밖 “우주로 떠”날 수 있었다. 이 반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창 밖 저기 피어있는 ‘풀꽃’이 바로 우주의 일부이자 무궁한 우주 자체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문학평론가>
2025-08-31
바닥에 버려진 꽃들, 납작하다 뿌리가 없고 줄기가 없는 저 꽃들은 밟혀도 결코 지는 법 없다 한때 누군가의 입안에서 다듬어지고 둥글어지던, 달콤함과 향기는 모두 내어주고 딱딱하게 굳어간 때가 새까맣게 묻은 저 검은 꽃 누군가를 버린 적 있다 납작 바닥에 엎드려 우는 걸 보았다 방금 버려진 듯한 꽃 하나 내 신발에 질척하게 달라붙는다 끈적한 꽃, 한 번만 더 꽃을 피워보잔다 … 나도 어떤 무심함으로, 별 의식 없이 “누군가를 버린 적 있”지 않던가. 시인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한다. 하나 시인은 한 발 더 나아간다. 납작하게 “바닥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힌 꽃, 하여 “달콤함과 향기는” 사라지고 “딱딱하게 굳어간” 그 꽃은 “결코 지는 법 없”다는 시적 인식으로 말이다. 그 인식은 시인이 버린 ‘누군가’가 그의 마음 바닥에 있는 “신발에 질척하게 달라붙”기에 가질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문학평론가>
2025-08-28
창밖이 일시에 소리들로 와글와글 활짝 성능 좋은 스피커 열어놓은 듯 비 온 뒤 짱짱 귀가 열리는 저 아이들 소리, 온갖 새소리들···. 우중충 하늘의 장막 걷힌 날은 너나없이 반짝 우울을 걷어내듯 소리가 소리를 물고 꽃처럼 활짝, 빗속에 숨었다 놀러 나온 소리들 동네가 한바탕 말잔치 벌였다 더욱이 여기는 소리들로 넘쳐 나는 하늘과 땅이 열린 한적한 시골, 그럴수록 듣지 못하는 소리 더 잘 들려 사방 하느님과 독대하는 소리 귀 먹먹 대낮에도 장닭이 홰를 치고 우는 봄날도 환한 봄날! … 비 개인 봄날 아침, 화창해진 세상이 주는 환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위의 시는 소리로 표현했다. 아침 창밖에 들리는 ‘아이들 소리’와 ‘온갖 새소리들’로. “빗속에 숨었다 놀러 나온”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들도 시인을 우울로부터 벗어나게 이끈다. 이러한 환한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것은 시인이 시골에 있어서다. 이곳은 “하늘과 땅이 열린 한적한” 곳, 하여 “하느님과 독대”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5-08-26
광주리에 담긴 사과 새들새들 곯았다 더 작아져 쪼글쪼글해진 사과는 굳은살처럼 각질이 두터워 칼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쪼글쪼글해진다는 것은 팽팽히 잡고 있던 끈 놓치지 않고 더 깊어져 제 속으로 들어가 밑바닥에 닿아 보겠다는 것 아닌가 사람도 오래되면 내장에 구김이 지고 눈동자에도 주름이 잡힌다지 그 주름의 힘으로 비록 말라비틀어져도 더 깊이 생의 바닥에 닿을 수 있다지 새금새금 단내를 짙게 풍긴다지 …. “작아져 쪼글쪼글해진 사과”처럼 사람도 나이 들면 몸-‘내장’-에 주름이 잡히리라. 영혼과 정신-‘눈동자’-에도. 시에 따르면 이 주름은 팽팽함의 포기가 아니다. 다만 자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밑바닥에 닿아 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의지는 힘을 발산시킨다. 힘이 응축된 주름은, “비록 말라비틀어져도” “생의 바닥에 닿을 수 있”도록 힘쓴다. 주름진 사과가 더 삶의 단내를 풍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5-08-25
해안 절벽 아래서 어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성난 야수 소리가 들린다 불안을 열고 바라보니 절벽 밑은 하얀 눈 수북이 쌓여 아무것도 찾을 수 없고 수평선 끝에서 바람 등에 올라 달려오는 시커먼 흑등고래가 사정없이 바위에 부딪쳐 피를 눈처럼 쏟아내고 있다 폭설 속에서 뽀얗고 까만 사나운 꼬리로 용오름 피워내며 포효하는 굶주린 백호 한 마리 바다의 목덜미 앙칼지게 물고 솟아올라 새가슴을 가진 나에게로 뛰어든다 스무 살의 내가 살아나고 있다 ….. 어떤 풍경은 삶을 다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북돋는다. 위의 시의 풍경이 그렇다. 파도 소리일까, “성난 야수 소리”는. 이 소리를 듣고 수평선 끝을 바라다보니 바위에 부딪쳐 피를 쏟는 ‘흑등고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 흑등고래는 파도에 대한 환시 아니겠는가. 또한 시인은 용오름을 백호의 꼬리로 비유하고 있기도 하다. 이 맹렬한 동물들의 풍경이 “새가슴을 가진 나”에게 팔팔한 젊음의 피를 수혈한다. <문학평론가>
2025-08-24
당신은 내 머리에 초록 잎사귀를 꽂아 주세요 나는 붉은 열매를 당신 재킷 주머니에 꽂을게요 저 눈부신 첫눈의 아침을 우리가 나란히 손잡고 걸어가다니요 오랜 전생부터 꿈꿔 온 이 삶, 얼마나 슬프고 아름다웠던지 이미 잊었지만 당신의 미소와 목소리로 모든 걸 알아챘답니다 거친 들판 찬비를 맞더라도 이제, 초록 잎 붉은 열매 총총한 한 그루 나무가 되기로 해요 … 연시를 만나기 힘든 시대다. ‘나’를 ‘당신’에게 주는 사랑이 이해되지 않기 때문, 그래서 위의 시와 같은 연시를 보면 더 반가운 마음이 든다. 당신이 “내 머리에 초록 잎사귀를 꽂아 주”고, ‘나는’ “당신 재킷 주머니에” “붉은 열매를” 꽂아 주면서, 둘은 같이 “찬비를 맞더라도” 하나의 나무가 되어 완성된다. 시인은 이 완성이 “전생부터 꿈꿔 온” 것이라고. 지금 만난 당신이 전생의 연인이었음을 직감했나 보다. <문학평론가>
2025-08-21
내가 사랑하는 방법은 단순하다네 당신을 나에게 밀착시키는 것 정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는 듯 그 정의를 당신에게 몸으로 줄 수 있다는 듯 당신의 머리칼을 뒤적이며 쓰다듬을 때 내 손에 아름다운 무언가가 만들어지네 더는 알지 못하네 오직 당신과 편히 있고 싶고 가끔은 내 마음을 누르는 알 수 없는 의무감 그리고 평안히 있고 싶을 뿐 … 가모네다는 현재 생존하는 스페인 시인. 많은 시인이 사랑에 관해 새로운 통찰을 보여주듯이, 위의 시도 사랑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이끈다. ‘사랑하는 방법’이란 몸을 밀착시키는 것이며, 이 밀착을 통해 ‘정의’를 몸으로 주는 거란 생각은 새롭다. 또한 애인의 머리칼을 쓰다듬을 때 “아름다운 무언가가 만들어”진다는 생각도. 사랑하는 이와 같이 있으면 의무감과 평안함의 신비로운 공존이 가능해진다는 것도. <문학평론가>
2025-08-20
사라지는 것들이 도착하는 곳이 분명 있다 수북해진 그곳은 하나의 세계다 불리지 않아서 잃어버린 이름들을 기다린다 이름이 꼭 없어도 좋다고 생각해 이 세상은 당연히 외로운 거야 잃어버린 것들을 버려진 것들이라 할 때 버려진 것들끼리의 유대에서 악마가 태어난다 (중략) 목덜미가 뻐근해지거나 어깨가 무거워지거나 무릎이 휘청대거나 팔다리가 묵직해진다거나 아예 흘러 버릴 것만 같아 바닥이 될 것 같다면 내 몸의 바깥에서 사라졌던 사람들이 돌아오겠다고 이 세계의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둬 …. ‘나’ 안에서 사라진 이들이 있다. 이름마저 잊은 사람들. 하나 그들은 정말로 사라진 걸까, “잃어버린 이름들을” 가진 이들은 어딘가에 모여 유대를 맺고 있는 것 아닐까. “바닥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 그것은 ‘나’에게서 버려진 자들이 나를 짓누르는 복수를 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하나 그것은 복수가 아니라 내 몸 안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어 “이 세계의 바깥에서/문을 두드리고 있는 거”일지도 모른다. <문학평론가>
2025-08-19
우산은 접었다 다시 펼치는 추억 같은 것 망가진 살대 밑에서 어쩌면 살짝 은밀한 어쩌면 살짝 부끄러운 젊은 그때를 펼쳤다 다시 접는 참 사소한 슬픔 같은 것 …. 위의 시에 따르면 추억은 우산과 같다. 쓸쓸함을 불러일으키는 비가 올 때, 그 추억은 펼쳐진다. 그 우산은 망가져 있다. 우리가 떠올리는 ‘젊은 그때’의 추억은, 이제는 잃어버린 것,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상기되는 것이어서, ‘사소한 슬픔’을 불러일으키기에. 또한 펼쳐진 추억의 ‘망가진 살대’ 밑에는 ‘은밀’하거나 ‘부끄러운’ 비밀도 ‘살짝’ 드러나지 않는가. 우리가 우산을 다시 접는 것은 그 때문이겠다. <문학평론가>
2025-08-18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나이의 연인아! 생각해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나이가 젊은 날을 싸움에 보내든 그 손으로 지금은 젊은 피로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그리고 이 추운 밤 가느다란 그 다리가 피아노줄 같이 떨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나이도 네 커다란 오빠를···. 남은 것이라고는 때 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트럭처럼 길거리를 달아나는구나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같이 손을 잡고, 또 다음 일을 계획하러 또 남은 동무와 함께 검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나이를 찾고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인 용감한 청년을 찾으러···. 그리하여 끝나지 않은 새로운 용의와 계획으로 젊은 날을 보내라 … 임화 시인은 일제강점기 이름을 날린 저항적인 시인. 1929년에 발표된 위의 시는 당시 일제 권력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을 그려냈다. 화자와 그의 누이동생, 그녀의 애인, 세 명이 등장한다. 애인은 감옥에서 추위에 떨며 나갈 날을 기다리고, 오빠와 누이동생은 권력의 감시망을 피하며 검은 골목으로 들어가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이란 조선의 해방을 도모하는, 그리하여 애인을 되찾기 위한 계획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8-17
늦가을 강바람 속으로 매순간 힘없이 메마른 숨결의 손을 놓는 나뭇잎들과 같이 지금 돌연 내가 죽어 없어진다 해도 저 강물은 계속 흐를 것이다 간혹 물 위에 떠가는 낙엽이나 갈대 부스러기처럼 내 죽음이 쓸쓸히 노을의 저편으로 흘러가도 강은 이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바로 눈앞으로 흐르는 강물이란 강물 다 지나가버려도 강의 호흡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듯, 영영 떠내려가버릴 것 같은 죽은 나뭇잎들 푸르름의 기억을 되살려 나무의 뿌리로 되돌아오듯, 내 육신의 죽음이 진정 나를 죽게 할 수 있을까 ….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유하 시인의 1990년대 발표된 시. 위의 시는 삶과 죽음에 대해 아름답게 명상한다. 한 개체의 죽음과 무관하게, 강물이 계속 흐르듯이 세계는 자기 갈 길을 갈 것이다. 이리 보면 우리의 삶은 허망하지 않은가. 하나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나뭇잎이 썩어 다시 뿌리로 되돌아가듯이 인간 역시 그렇지 않을까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죽음이 진정 무로 회귀하는 것일까라고. <문학평론가>
2025-08-13
이 외로운 언덕은 내게 언제나 사랑스러웠지, 아득한 지평선의 이곳저곳을 시야에서 가리는 이 산울타리도 하지만 가만히 앉아 그 너머 끝없는 공간과 초월적인 침묵, 더없이 깊은 고요함을 바라보노라면 나는 상상 속에 잠기고, 심장이 두려움에 떨려 온다. 초목 사이로 속삭이는 바람 소리가 들릴 때면, 저 무한한 침묵을 이 목소리와 비교해 본다. 그러면 영원과 이미 죽은 계절들, 살아 있는 현재의 계절과 그 소리가 마음속에 떠오른다. 그렇게 광활함 속에 나의 상상은 빠져들고 이 바다에서의 난파는 달콤하구나. … 레오파르디는 19세기 초반에 활동한 이탈리아 최초의 근대 시인. 콜레라에 걸려 1837년 3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위의 시는 그의 시 중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는 시라고. 시인은 산울타리 너머의 “끝없는 공간과 초월적인 침묵”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침묵의 영원과 현재의 바람 소리, “이미 죽은 계절들”을 마음속에서 융합하고는, 이 바다 같은 “광활함 속에”서 ‘달콤’하게 난파하는 자신을 한껏 느낀다. <문학평론가>
2025-08-12
나는 바닥에 소복이 쌓이고 나 같은 것들과 휩쓸려 다니면서 철쭉 사이로 빠지고 차도로 뛰어들고 바퀴를 따라 펄럭이다가 즉사하고 아스팔트에 핏자국을 남기고, 바람을 따라 아파트 14층까지 날아오르고 모르는 집 창을 기웃거리고 잠옷 바람의 여자와 마주치고 더 높이 올라갔다가 까마득히 뛰어내리고 가벼운 것들은 춤출 수 있다 나비처럼 새처럼 가벼운 것들은 망가지고 깨지고 산산조각 나고 짓밟히고 죽을 수 있다 비로소 사방으로 내려앉아 꽃이 될 수 있다 … 꽃잎에 대한 인상적인 이미지화다. 시인은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잎이 아니라 땅에 떨어진 이후의 꽃잎이 살아가는 행로에 주목한다. 꽃잎은 가벼운 존재여서 여기저기 흩날리는데, 그 행로는 그야말로 고통이다. “망가지고 깨지고 산산조각 나고 짓밟히”는 삶을 살아야 하니까. 하나 그러한 고난을 통과하면서 “나비처럼 새처럼” 춤을 출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 ‘비로소’ 꽃잎은 “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8-11
알량한 지식이나 생각으로는 진실에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다 진실에 접근한다 하더라도 접근하는 순간 진실은 얼굴을 바꾸고 돌아앉기 십상입니다. 쉽게 논하는 진실은 어쩌면 시대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혹은 인간의 생리적인 우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진실도 역시 살아있는 것이라서 잡으려 들수록 도망가기도 하고 알아볼 수 없도록 위장할지도 모릅니다. 진실은 잡을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맞는 말인지도 모르지요. 진실 붙잡으려고 애쓰지 마십시다. ….. 시인의 말에 동감한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쉽게 믿거나 강변하는 이가 있다. 그 진실이 진실이라는 보증은 자기 자신이 선다. 결국 자기 자신이 믿는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것, 우상이 그러하듯이. 필자도 진실이라는 우상에 포획되곤 했던 사람이다. 곧 그것이 허위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우상. 진실은 붙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 하나 진실을 붙잡으려는 노력까지 포기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문학평론가>
2025-08-10
그대를 꽃이라고 부른다. 불처럼 타는 가슴 여기저기 때리며 큰 못을 박는 이따위 더러운 돈, 진실로 하루 세끼 라면값도 안 되는 몇 푼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비로소 정정당당하게 정정당당하게 한 번쯤 일해 보기 위하여 싸우고 소리높여 죽은 그대를 속삭이듯 꽃이라고 부른다. 침묵 속에서 혹은 저 이름모를 무수한 봉제공장바닥에서 살을 누비듯이 헝겊을 누비고 단추를 달고 눈물을 삼키는 친구들은 그대여, 아직도 부르르 주먹만 살고, 적수공권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피투성이 음침한 거리 먼지 낀 하늘 아래 날마다 다시 살아 그 가슴에 잘 타는 기름을 붓고, 또다시 온몸에 불을 붙이는 그대를 입을 모아 꽃이라고 부른다. ….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과 함께 자신을 불태워 1970년 당시 노동자의 현실을 세상에 알렸던 전태일. 여전히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고 있는 현 한국에서 그 이름은 여전히 울림을 준다. 그를 기리는 위의 시는 1984년 발간된 시집에 실려 있지만 낯설지 않다. 권리를 위해 싸우는 노동자들이 전태일을 꽃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모든 노동자를 위해 자신을 불태운 그가 불꽃처럼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5-08-07
바람 빠져 시든 풍선처럼 가슴에 달고 사는 훈장 하나 삼십 년 지기 기관지 확장증 분필 가루 마시며 지킨 교단 허파 가득 바람 든 욕심 잔기침 대수롭지 않게 여긴 무심 그렇다면 그것도 일종의 직업병 잔뜩 성난 코로나 습격에도 끄떡없이 견뎌준 고마운 내 풍선 다시 빵빵할 일 있을까마는 바람 가득한 날들의 추억은 은퇴선물 너도 풍선 터질 듯 잔뜩 꽃바람 든 적 있니? 가슴에 달고 사는 훈장 하나 있니? 가슴 터져도 좋으니 펌프질하는 사랑은 있니? … ‘기관지 확장증’이라는 병을 처음 알았다. “잔기침 대수롭지 않게 여긴 무심”으로 병이 심화되었다는 것을 보면 시인도 몰랐나 보다. 이 병을 얻게 된 것은 분필 가루 마시며 교단을 지켜왔기 때문, 그래서 시인에게 이 병은 직업병이다. 하나 시인은 생각을 전환시킨다. 병을 얻어 은퇴하지만 “바람 가득한 날들의 추억”이 선물처럼 남았다는 것, “가슴 터”지도록 “펌프질하는 사랑”으로 가득했던 날들의 추억이. <문학평론가>
2025-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