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행 에세이 작가 박시윤의 ‘경주는 흐른다’ <5-2> 경주개동경이 (하)
■살갑지만 본능은 사냥개의 후예
동경이를 마주한 순간이 선명하다. 녀석들과 처음 만난 곳은 경주개 동경이보존협회 개방형 마당 한가운데다. 공격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혹여 달려들지는 않을까, 잔뜩 긴장하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짧은 꼬리·선한 눈망울·예민한 후각
순하지만 단단한 내면의 전통 사냥개
잘 짖지않고 차분해 ‘바보 개’라 불려
‘천연기념물’ 경주시 대표 토종개로
신라시대 역사 함께한 충직한 성품
현재 약 530마리 지역 곳곳서 보호
희고 까만 털이 햇살에 반짝인다. 나를 보자 녀석들이 일제히 달려온다. 낯을 가릴 거라는 말,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댈 거라는 상상은 무의미하다. 녀석들은 마치 오랜 친구를 알아보듯 주저 없이 달려왔고, ‘물지 않을 거야’라는 무언의 눈빛을 건넨다. 믿음이 생긴 걸까. 나도 모르게 몸을 낮추어 손을 먼저 내민다.
그런데 동경이는 내게 코를 먼저 들이민다. 씰룩씰룩 냄새를 맡더니 잔뜩 긴장한 내게 혀를 쑤욱 내민다. 순식간에 내 얼굴을 핥은 거다. 미끄덩하고 축축한 녀석의 침이 얼굴에 묻었다. ‘앗!’ 그러나 따뜻하다. 살아있는 날것의 따뜻함이다.
녀석은 사진을 찍으려는 나를 방해할 만큼 격한 반가움을 표현한다. 짧디짧은 꼬리를 힘껏 흔들며 말이다. 꼬리가 까딱까딱 움직일 때마다 환한 감정 하나가 함께 전해지는 듯하다.
동경이는 쉽게 흥분하지 않고, 잘 짖지도 않는다. 과거에는 이런 성격 때문에 ‘바보 개’라 불리기도 했다. 낯선 사람에게 경계하다가도 금세 마음을 여니, 순하다는 이유로 얕잡아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동경이만의 품성이자 장점이다. 무던하고 착한 성정은 수천 년 이어진 특별한 유산이다.
하지만 동경이의 태생은 어디까지나 사냥개다. 순한 겉모습과는 달리 속내는 제법 단단하다. 짧은 꼬리와 선한 눈망울에는 오랜 세월 축적된 뛰어난 후각과 날렵한 몸놀림을 자랑하는 사냥개의 피가 흐른다. 사냥감으로 인식되면 순한 태도는 단박에 돌변한다. 새끼 때는 겁 없이 성견에게 덤비다 다치기도 한다. 개들 사이에서 흔히 보이는 ‘배를 뒤집는 항복의 제스처’를 잘 하지 않는다. 우열을 가리는 싸움은 치열하지만, 반면 서열이 정해지면 더는 다투지 않는 깔끔한 성격이기도 하다.
동경이는 단지 ‘순한 개’, ‘희귀한 개’만이 아니다. 유순함과 야성, 귀여움과 기품을 함께 품은 매력적인 개다. 내가 만난 동경이는 온순함 그 자체다. 손을 내밀자 머리를 비비고, 엉덩이를 들이밀며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이윽고 나의 무릎에 턱을 얹고는 조용히 눈을 감기도 하고, 때론 귀를 쫑긋 세우며 이야기라도 듣겠다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주인을 따라 죽은 동경이
조선 성종 때 의로운 동경이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신 이승소(李承召)의 문집 ‘삼탄집(三灘集)’에는 ‘의구(義狗)’ 동경이에 관한 전설이 실려 있다. 지금의 충북 괴산군 연풍면, 험한 고갯마루 길가에는 쌍분(雙墳)이 있다고 전해진다. 하나는 주인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곁을 지키다 생을 다한 개의 무덤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경주, 곧 동경의 한 아전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개와 함께 한양으로 길을 나섰다. 고개를 넘고 산을 지나는 고된 여정 끝에, 주인은 연풍 고개에서 병을 얻어 숨졌다. 곁을 따르던 개는 주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홀로 경주 집으로 달려갔다. 개다 밤낮으로 짖자 이상함을 느낀 아들이 개를 따라나섰고, 연풍 고개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도 주인 곁에서 숨을 거뒀다. 아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경주로 모시지 못하고, 개와 함께 고갯마루에 나란히 묻었다.
그 두 무덤은 오늘날까지도 ‘의구총(義狗塚)’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경주의 신화전설집성’에는 “동경견(東京犬)은 꼬리가 없는 개로, 됭경견, 됭견, 댕견이라 불리는 경주 토종개다. 이 개는 충직하고 용맹하며 영리하기로 유명하다.”라고 기록했다.
누군가는 개의 ‘충성’이라 부르겠지만, 나는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학습과 훈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간절함에서 생긴 교감과 본능 말이다.
■기품 있는 개, 절도 있는 애교
기품 있는 개다. 꼬리가 거의 없는 녀석들이지만, 그 짧은 꼬리뼈를 이리저리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은 한없이 사랑스럽다. 경주 개 동경이는 2012년 11월 6일, 천연기념물 제540호로 지정되었다. 경주시의 시견(市犬)이기도 하다. 현재 경주시 전역에서 약 530마리 정도가 혈통을 유지하며 관리되고 있다. 생후 60일이 지나면 절차에 따라 일반인에게도 분양이 가능하다.
저들끼리만 있을 때는 뛰고 구르며 그야말로 천진난만 자체다. 마치 통제성을 잃어버린 천방지축 어린아이들 같다.
운동장을 쉴 새 없이 뛰어다니다가도, 이따금 가만히 멈춰 서로의 냄새를 맡거나 서로를 탐닉한다. 그러다가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면 저들만의 세계를 뒤로하고 와르르 달려온다.
이럴 땐 속이 다 들여다보일 것 같은 선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동경이는 본디 그런 개다.
사양관리팀의 정하원 팀장과 이영솔 주임은 말하자면 이 개들의 가족이자 벗이다. 정 팀장과 이주임이 운동장으로 들어서자, 난만하게 놀던 동경이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나 좀 봐줘요’하며 몸을 낮추며 꼬리를 흔든다.
혹은 날뛰면, 혹은 얼굴을 들이대며 갖은 애교를 부린다. 자신을 보듬어주는 사람에게 한껏 잘 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마음이 다 보인다.
하지만 녀석들의 애교가 마냥 무질서하고 방정맞은 건 아니다. “이리와.” “악수” “앉아.” 기다려.” “엎드려.” “안돼!” 이영솔 주임의 짧은 명령에 놀랍도록 절도 있는 자세를 취한다. 몸은 꼿꼿이 하고, 행동은 절제하며, 사람과 눈빛을 맞추는 모습에서 묘한 질서와 위엄마저 느껴진다.
행정팀 이정원 팀장과 정승락 주임, 이혜인 주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관리인을 넘어 동경이들을 위한 세심한 벗이자 부모인 셈이다.
■짧은 꼬리 너머, 살아 있는 신라의 혼
누군가는 개에게서 ‘품격’을 논한다는 걸 의아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동경이는 다르다. 귀한 대접을 받아서가 아니라, 이 개체들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기품과 절도가 사람의 마음을 저절로 조심스럽게 한다.
스스로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듯한 몸짓, 그런 개를 아끼며 길들이는 동경이보존회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이 더욱 품격을 더한다.
한때 동경이에게 행해진 시대의 상처는 크다. 그러나 동경이의 등줄기에는 천 년을 넘어서는 시간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동경이는 살아남은 신라의 영혼이며, 수많은 생명이 감내해 낸 민족의 고통과 희망이 깃든 존재의 살아있음이다.
신라를 살고 경주로 건너온 개, 왕가의 삶과 민가의 생을 본능으로 기억하는 개, 죽어서도 토우가 되어 주인을 따라간 충직한 벗. 동경이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문화다.
이 땅의 숨결과 그 땅을 거닐며 살아온 민족의 이야기를 천진난만한 눈빛 속에서 마주한다. 녀석들의 눈빛에는 수백 년의 지혜와 고통이, 그리고 민족의 부활을 향한 끊임없는 의지가 담겨 있다. 어떤 개체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경주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다, 동경이는.
*취재에 협조해 주신 경주개 동경이보존협회 직원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