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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향 따라 맨발로 걷는 북천수

등록일 2025-06-11 18:29 게재일 2025-06-1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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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영 수필가

포항 북송리 북천수(北川藪)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숲 중 3번째로 긴 숲이다. 조선 철종 때 조성된 북천수는 오래된 지명의 향기를 지닌다. 북천의 숲이라는 뜻으로 곡강천의 다른 이름인 북천에서 유래했다. 예로부터 주민들은 북천의 물길을 따라 논과 밭을 일구었다. 가물어도 북천수가 마르지 않으니 생명의 젖줄이라 불렀다. 그 세월을 말하듯 지금도 그 옆길을 걷다 보면 시간이 잠시 숨결을 고르는 듯하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그 길에 들어선다. 소나무가 드리운 그늘 아래여서 햇살도 새소리도 부드럽다. 북천수 산책로는 잔돌과 흙이 동시에 밟혀 나 같은 맨발 걷기 초보자에게는 발걸음을 떼기가 조심스럽다. 그러나 맨발로 걷는 경험은 눈이 아닌 발로 세상을 다시 읽어내는 일이 아닌가. 흙의 온도, 잔돌의 감촉, 마른 솔잎의 간지러움까지, 나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발바닥이 전달하는 감각으로 주변을 인식하기 위해 노력해 본다. 세상과 나 사이에 있던 어지러운 고민들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 같다.

문득 김훈 소설가의 ‘자전거 여행’ 책 속 문장이 떠오른다.

“나는 걷는다. 걷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이다.”

걸음을 옮기며 시공간을 통과하는 행위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유의 흐름에 빠지게 된다는 의미인 것 같다. 작가의 표현처럼 나는 북천수 솔숲 길을 맨발로 걷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 생각을 많이 한다.

나는 왜 늘 빠르게 걸었을까. 무엇을 향해 그리 바삐 살아왔던 걸까. 내 이마에 땀 한 줄기 흐르고, 저녁노을이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 스며들기 시작할 즈음, 나는 한동안 생활하면서 천천히, 여유롭게, 걷는 법을 잊고 지냈던 일상을 회상한다. 북천수를 거닐 때처럼 느리게 걸어야 바람의 결을 느낄 수 있고, 나무 향을 맡을 수 있으며, 풍경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에 솔향이 섞여온다. 곧게 뻗은 소나무 숲은 바람을 타고 진한 송진 냄새를 풀어낸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시간, 마음속 깊이 잠들었던 유년시절 고향의 뒷산 소나무 숲에서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기억의 편린이 불쑥 되살아나 잠시 그리움에 젖어든다. 솔방울을 던지다가 다람쥐나 청설모를 만나면 그 뒤를 쫓아 내달리던 추억이 생각나서 웃어본다.

소나무 우듬지 사이로 새가 날고 있다. 이름을 모르는 작은 새가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옮겨 다니며 노래한다. 어떤 날은 곤충이 지나가며 흔적을 남기는 것을 보고, 또 어떤 날은 반려견이 가족과 발자국을 흙 위에 찍고 지나가는 것을 본다. 이 숲길은 사람만의 길이 아니다. 새와 곤충, 동물이 함께 다니는 생명의 오솔길이다.

산책로 중간쯤에는 오래된 정자가 있다. 사람들이 앉거나 누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편안한 자리다. 나도 그곳에서 고요히 눈을 감는다. 그러면 햇살이 내 무릎 위에 가만히 내려앉고 나뭇잎 그림자가 내 등에 업힌다. 포근하다. 그 순간부터 정자는 나에게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마음이 한 뼘 자라는 공간이 된다.

때마침 북천수 소나무가 노래를 들려준다. 솔바람과 새와 더불어 나지막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마치 시간이 흐르는 소리 같다. 어릴 적 외할머니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할 때였다. 맑은 물소리와 한데 어우러져 하얀 비누 거품이 떠내려가던 그 장면처럼, 북천수도 지금 그렇게 시간을 씻어 내며 흐르고 있는 듯하다.

나는 다시 걷는다. 맨발로 조심조심 한 발자국씩 내딛는다. 발바닥이 말해주는 촉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며, 소나무 향기를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발끝으로 세상을 느끼고, 차분한 숨결로 시간을 받아들인다. 그 단순한 행위가 지금 내 마음을 맑게 비운다. 내가 걷는 북천수 길이 곧 생각의 자리이자 삶의 중심이 되는 것 같다. 나의 두 눈 가득 맺히는 북천수 길이 정겹다. 앞으로도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소나무 향기를 따라 맨발로 걸으리라.

북천수에서의 저녁, 붉은 노을이 숲에 번지면 새들이 날아든다. 그 풍경을 눈에 담으니, 소나무 숲에서 위로받은 나의 하루가 조금은 더 단단해진 느낌이다.

/정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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