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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가깝고 느리고 우아한 영양의 미학

최병일 기자
등록일 2025-12-09 09:23 게재일 2025-12-09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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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奧地)는 ‘해안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대륙 내부의 땅’을 말한다. 흔히 첩첩산중의 두메산골을 이를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경북 영양군 수비면 죽파리는 오지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작나무와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다. 자연 속에서 온전하게 쉬고 싶다면 죽파리 자작나무 숲으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하얀 자작나무의 황홀한 수피

황홀하게 빛나는 자작나무 숲 

자연 속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멀고 험하다. 영양에서 울진 평해로 이어지는 국도를 타고 가다 면 소재지인 발리리에서 또 한참을 가야 겨우 죽파리에 닿는다. 여기에서 영양 자작나무 숲 입구까지 약 3.2㎞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원래는 차량이 통행할 수 있지만 산림 보호 차원에서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영양 자작나무 숲은 산책로 초입에서 숲 입구까지 이르는 과정이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작나무 숲이 있는 검마산 자락은 자연 생태계의 보고다. 지루할 것만 같던 산길은 초입에 들어서면서부터 청정 자연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다람쥐와 산토끼, 고라니 같은 야생동물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고, 수령이 족히 100년은 넘을 것 같은 금강송 등 아름드리나무가 곳곳에 널려 있다. 그 옆으로는 계곡물이 흐른다. 걷는 내내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을 만큼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청량한 숲길을 한참 걷다 보면 어느 지점부터 휴대폰 전파마저 끊긴다.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의 세 배 크기의 죽파리 자작나무 숲 

그렇게 다리가 뻐근할 정도로 걷다 보면 영양 자작나무 숲이 나타난다. 사실 이곳은 사람이 만든 인공 숲이다. 산림청이 1993년 죽파리 검마산 일대에 나무를 심기 시작해 지금은 높이가 평균 20m에 달하는 자작나무 수만 그루가 30만6000㎡의 숲을 가득 메우고 있다. 국내 자작나무 숲을 대표하는 강원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의 세 배에 달한다고 하니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동안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다가 인근 검마산 자연휴양림을 찾은 여행객들을 통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 연인들의 글귀 걸어두기도 하는 낭만적인 나무 

자작나무는 줄기의 껍질이 하얗게 벗겨지고 얇아서 고급 명함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자작나무 껍질이 떨어지면 연인들이 사랑의 글귀를 남기고 걸어두기도 하는 낭만적인 나무라고 한다. 자작나무는 실용성도 뛰어나다. 널리 알려진 껌, 치약의 재료인 자일리톨도 자작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것이다. 

북유럽에서는 자작나무를 이용한 가구를 최고로 친다. 껍질에 기름기가 많아서 밀초로도 쓰인다. 결혼식을 올렸다는 말을 ‘화촉(華燭)을 밝혔다’고 하는데 여기서 쓰이는 화촉이 바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밀초다. 잘 썩지 않아 신라시대 고분에서 자작나무 껍질에 글자를 새겨놓은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과 머리 위를 뒤덮은 초록 잎 사이로 아담한 오솔길이 열렸다. 오솔길은 약 2㎞ 펼쳐지는데 검마산 정상 부근까지 연결된다. 산등성이 위로 스러져가는 햇볕 사이로 빛나는 하얀 자작나무의 모습은 황홀하다. 숲을 걷다 보면 지저귀는 새소리, 부서지는 햇살, 자작나무의 연초록 잎과 하얀 수피가 어우러진 장면이 비현실적인 감동을 준다.

너럭바위를 기점으로 길이 시작된 지점으로 돌아가거나 임도를 따라 정상 자락에 있는 자연휴양림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도 아니면 자작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온몸으로 느끼며 숲에서 쉬어가도 좋다. 

수비면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별이 하나둘씩 불을 켜기 시작했다. ‘야외 조명의 빛 공해에서 어두운 밤하늘 환경을 보호하자’는 취지로 만든 미국 비영리단체 국제밤하늘협회(IDA)는 2015년 10월 수비면 반딧불이 생태공원 일대(3.9㎢)를 아시아 최초의 국제밤하늘보호공원으로 지정했다.

수비 별빛 캠핑장 

이곳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에서 별이 얼굴로 쏟아진다’는 말이 실감 난다. 외국의 사막에서 본 것 같은 무수한 별이 밤하늘에 펼쳐져 빛도 없는 깊은 산골짝을 은은하게 밝힌다. IDA의 슬로건처럼 ‘불을 끄고, 별을 켜자’라는 말이 딱 맞는 곳이다.

반딧불이천문대 _한국관광공사 

별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근처의 영양반딧불이 천문대에 들러보자. 주간에는 태양의 흑점과 홍염을, 야간에는 은하와 달을 제대로 관측할 수 있다. 인공의 빛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이곳은 일찌감치 반딧불이 보존구역으로 지정됐다.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맹그로브숲이나 필리핀 레가스피 등에서 봤던 것처럼 반딧불이의 장관이 펼쳐지지는 않지만 어두운 숲속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녹색의 광채는 잊을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 느림의 미학갖춘 두들마을

느림의 미학이 돋보이는 두들마을 입구_한국관광공사 

경북 영양군 석보면. 고속도로를 벗어나 산을 타고 오르는 순간 풍경이 달라진다. 길은 점점 고즈넉해지고, 바람은 느려진다. 그렇게 언덕 하나를 넘어 들어서는 곳에 두들마을이 있다. ‘둔덕’이라는 이름 그대로, 마을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얹힌 듯 자리한다.

첫인상은 단순하다. 여백이 많다. 들판, 낮은 돌담, 그리고 기와의 곡선이 만드는 조용한 호흡. 하지만 몇 걸음만 걸어도 알 수 있다. 이곳은 시간이 눌러쓴 마을이라는 것을.

두들마을은 17세기 석계(石溪)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을 피해 들어와 닦은 터전에서 비롯됐고, 그의 후손인 재령 이씨 일가가 오랜 세월 거주하며 마을을 이뤘다. 전통가옥과 고택, 서당이 곳곳에 남아 있는 이유다.  

두들마을 안에 있는 석재서당 _한국관광공사 제공 

두들마을 여행의 첫걸음은 대개 석계고택 앞에서 시작된다. 고택 특유의 깊숙한 대문, 오래된 기둥의 결, 햇빛이 마당에 들어서는 각도까지 차분하게 마을의 성품을 말해준다.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 이후 자리를 틀며 형성된 곳이기에 마을 곳곳에는 300~400년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고택, 사랑채, 서당, 그리고 뒷동산의 오래된 소나무들. 기와지붕 사이로 스미는 바람은 겉모습보다 ‘살던 사람들의 온기’를 먼저 느끼게 한다.

길은 대부분 완만해 걷기 좋다. 돌담을 따라 움직이다 보면 유우당, 석천서당 같은 작은 명소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관광지라기보다, 누군가의 오래된 일상이 여행자를 잠시 초대하는 느낌에 가깝다.

고즈넉한 고택들이 즐비한 두들마을_한국관광공사 제공 

두들마을이 최근 여행자들에게 주목받는 이유는 ‘보기’보다 ‘머무는 여행’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마을은 더 느려진다. 고택 숙소의 마루에 앉아 있으면 멀리서 풀벌레 소리가 겹겹이 들려오고, 어둠은 도시보다 훨씬 부드럽다. 전통가옥의 골조가 주는 안정감 때문인지, 잠도 깊다.

고택 체험은 단순한 숙박이 아니라 한옥의 호흡을 그대로 느끼는 시간이다. 방과 마루, 대청의 연결 방식, 창호 너머의 빛 그 자체가 여행의 이유가 된다.

두들마을의 또 다른 매력은 ‘음식’이다. 이곳은 한글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남긴 장계향의 고향과 인접해 있어, 그 전통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다. 덕분에 마을에서는 전통 방식의 음식 만들기 체험, 계절 한식 시식 등 음식문화 여행이 가능하다.

관광객 중에는 ‘음식디미방’ 체험을 중심으로 일정을 짜는 이들이 적지 않다. 여행이 단순한 ‘보는 것’에서 ‘배우는 것’으로 확장되는 지점이다.

두들마을은 ‘핫플’과 거리가 멀다. 유행하는 카페도 없고, 시끌한 포토존도 없다. 대신 반복해서 찾는 여행자가 늘고 있다. 언덕의 높이는 낮지만, 마을이 품은 깊이는 의외로 크다. 마을을 걷다 보면 ‘지금 내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보다 ‘얼마나 천천히 걷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된다.

/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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