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포항에 산다는 것, 외국인의 하루
◇ 새벽 6시, 부추밭의 습기 속에서 하루를 견디는 사람
새벽 6시, 포항시 북구 기계면의 한 부추 농장. 공기는 차갑지만, 비닐하우스 안은 이미 묵직한 습기가 차오른다. 이 시간, 베트남 출신 노동자 티 항 탄항씨(33)가 조용히 몸을 일으킨다. 씻고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금세 땀이 맺힌다. 오전 7시, 사장님의 트럭이 골목에 들어서면 그는 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짐칸에 오른다. 모두 고향을 떠나온 같은 베트남 사람들이다. 하루 종일 말을 섞을 수 있는 이들도 결국 서로뿐이다.
부추밭의 일은 단순해 보이지만 몸은 단순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부추를 베고, 골라내고, 상자에 담고, 버릴 잎을 정리한 뒤 다음 모종을 심기 위해 흙과 비닐을 다시 다듬는 일은 허리와 손끝을 끊임없이 소모한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도 매번 조금씩 다른 힘과 집중을 요구하는 일이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점점 무거워진다. 흙과 땀은 어느새 뒤섞여 손바닥에 달라붙는다.
점심 무렵 작업이 잠시 멈출 때면 손끝은 얼얼하다. 하루 일정은 정해져 있지만, 실제 노동은 그날 배정된 작업량에 맞춰 흘러간다. 오후 1시 30분 다시 비닐하우스로 들어서면 열기가 갇혀 바깥보다 더 뜨겁다. 티 항 탄항 씨는 말없이 몸을 움직이다가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가 한국을 찾은 것은 올해로 세 번째다. 계절근로자 제도는 최대 8개월만 머무를 수 있어 매년 다시 신청해야 하고 장기 체류나 직장 이동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는 “언니와 동생, 이렇게 셋이 같은 농가에서 일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벌어들이는 임금이 곧 가족의 생계이기 때문이다. 티 항 탄항씨는 월급 약 190만 원 중 20만 원만 쓰고 “나머지는 모두 본가로 보낸다”고 했다.
언어는 여전히 높은 벽이다. 하루 노동을 마치고 나면 한국어를 공부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 한국 사회와 연결되는 통로는 거의 없고, 일터와 숙소, 가족이라는 좁은 세계만이 반복된다. 병원 방문은 특히 두렵다. 그는 “말을 잘못하면 오해가 생길까 걱정돼 사장님을 따라간다”고 털어놨다.
티 항 탄항씨는 “사장님이 잘해주셔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짧은 문장에는 고단함과 삶의 무게가 스며 있었다.
◇ 오전 8시 30분, 연구실의 불을 켜는 사람
아침 햇빛이 포항공대 캠퍼스에 비스듬히 내려앉을 때 첨단원자력공학과 건물 한편에서 불이 먼저 켜진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는 인도네시아 출신 유학생 주마로(27)다. 2021년 9월 포항에 온 뒤 그의 하루는 줄곧 이 시간에 시작됐다. 그는 정규 학위과정 외국인에게 발급되는 D-2 유학비자로 체류하고 있으며 학업 성적과 재학 요건을 충족해야 비자를 연장할 수 있다. 생활비는 대학에서 제공하는 연구 급여로 해결한다. 주마로는 “생활비와 숙박비, 보험료까지 감당돼 큰 불편은 없다”고 설명했다.
연구실의 아침은 언제나 고요하다. 그는 장비를 점검하고 실험 데이터를 확인하며 하루의 흐름을 만들어간다. 점심 후 잠시 눈을 붙인 뒤 다시 자리에 앉는다. 일정은 반복적이지만 그는 “금요일은 주간 세미나 때문에 가장 분주하다”고 말했다. 연구실 밖에서는 운동으로 마음을 다독인다.
포항의 조용함은 그에게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학식 근처 연못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공간이 됐다. 다만 도시의 말투는 처음엔 낯설었다. 그는 “사투리를 처음 들었을 때 사람들이 화난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풍경이 익숙해질수록 도시가 안고 있는 현실도 조금씩 드러났다. 한국의 근무 문화는 그에게 가장 큰 낯섦이었다. 그는 “연구실에 오래 남아 있을수록 성실하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놨다. 이어 “저녁이 되면 집중력이 떨어져 효율이 낮아진다”는 이야기도 보탰다. 위계가 명확한 연구 문화도 적응이 필요했다.
언어 장벽은 일상 곳곳에서 드러났다. 행정 업무는 처리할 수 있었지만, 병원 진료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는 “증상을 설명하고 진료 내용을 이해해야 해서 종종 친구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기숙사의 공동 화장실과 샤워실도 불편한 요소였다.
포항시의 무료 한국어 교육 과정에도 참여했지만, 수업 난도는 그와 맞지 않았다. 반대로 언어교류 활동과 독서 모임은 외로움을 견디는 데 더 큰 도움이 됐다. 그는 “그런 모임이 한국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접점이었다”고 강조했다.
한국 체류를 위해 필요한 TOPIK 시험도 넘어야 했다. 그는 기준인 3급을 넘어 4급, 최근에는 6급까지 취득했다. 시험 방식에 대해 그는 “실제 실력보다 문제 풀이 요령에 비중이 크다”고 평가했다.
졸업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1년 남짓. 그는 판교의 기술기업과 대기업 여러 곳에 지원한 상태다. 이는 개인의 선호라기보다 구조가 만든 선택지였다. 첨단 실험 기반 연구 인력을 필요로 하는 기업, 외국인이 E-7 전문직 비자로 전환해 장기 체류할 수 있는 고용 요건을 갖춘 기업은 대부분 수도권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포항은 연구하기에는 충분히 좋은 도시였지만 그는 이곳에서 미래를 이어갈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이 모순은 주마로 개인을 넘어 포항이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또렷하게 드러낸다. 지역 대학은 세계에서 인재를 불러들이지만, 그 인재가 도시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받쳐주는 산업 기반은 부족하다. 포항이 길러낸 인재가 결국 도시 밖에서만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지방 대도시가 직면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는 포항에 대해 따뜻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며 “포항은 행복과 고독이 함께 있는 숨은 보물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 두 개의 하루가 포항에 던지는 질문
비닐하우스에서 하루를 견디는 계절근로자와, 연구실에서 데이터를 들여다보는 유학생의 하루는 서로 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두 하루는 포항이라는 공간 위에서 겹치며 우리가 숫자로만 읽어온 외국인의 존재를 구체적인 얼굴로 바꾼다.
티 항 탄항씨에게 포항은 생계를 붙드는 노동의 자리이고, 주마로에게 포항은 학문과 미래를 시험하는 공간이다. 서로 다른 언어와 이유로 이 도시에 왔지만, 두 사람은 ‘고립’과 ‘관계’라는 공통된 감정을 겪으며 포항을 살아낸다.
그들의 하루는 결국 같은 질문을 향한다. 포항은 외국인이 일하러 오는 도시를 넘어, 살아갈 수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는가. 비자, 언어, 노동, 제도, 관계망이라는 구조적 조건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이 질문은 계속해서 도시의 미래를 흔들 것이다.
글·사진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