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울진이다. 겨울만 되면 자석에 끌리듯 울진으로 향한다. 경북 울진의 바다는 동해안에 연해 있는 어떤 바다보다 짙푸른 것 같다. 해안선을 따라 드라이브를 떠나도 좋고, 삶의 활력이 넘치는 후포항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것도 좋다. 등기산스카이워크에서 바다를 돌아보는 것도 또다른 즐거움이다. 울진은 맛의 고장이기도 하다. 쫄깃하고 향긋한 대게를 한입 베어 물면 바다의 향기가 가슴까지 밀려온다.
△ 울진의 명물 등기산 스카이워크
울진이 품은 다채로움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곳, 바로 등기산 스카이워크다. 지난 2018년에 첫선을 보인 등기산 스카이워크는 총 길이 135m로, 당시 국내 최장 스카이워크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지자체의 스카이워크 설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타이틀을 빼앗긴 지 오래다. 등기산스카이워크를 찾아가는 길, 멀리서 존재감을 뽐내는 구조물은 높이 20m로 우뚝 솟아 올려다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해안선을 따라 걷다가 일부 구간이 바다를 향해 돌출한 여타 스카이워크와 달리, 시작부터 바다를 향해 쭉 뻗은 구조라 스릴은 배가 된다.
등기산 스카이워크는 바닥 오염을 방지하는 덧신을 신어야 입장할 수 있다. 발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강화유리의 선명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입구 목재 바닥을 지나면 길이 57m 강화유리 구간이 시작된다. 투명한 바닥으로 넘실거리는 파도가 그대로 비쳐 이 길이 바닷속으로 들어가는지, 하늘 위로 오르는지 헷갈릴 정도다. 스카이워크 너비도 2m 정도라 바닷바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풍속 9m/s 이상 강풍이 불면 입장을 제한하는 이유다.
스카이워크 중간쯤 이르면 후포 갓바위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육지에 팔공산 갓바위가 있다면 바다에는 후포 갓바위가 있다.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뤄준다’는 설명이다. 오랜 세월 마을 사람들의 크고 작은 소원을 들어주던 바위는 한때 전망대와 정자까지 갖춘 번듯한 관광지였다. 바로 곁에 스카이워크가 들어서면서 오히려 본 모습을 찾은 것. 눈부신 윤슬에 둘러싸인 갓바위를 내려다보니 저 아름다운 바위처럼, 그저 나답게 살게 해달라는 바람이 일렁인다.
등기산스카이워크 끝자락에 신비로운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의상대사를 사모한 선묘 낭자를 표현한 작품이다. 전설에 따르면 선묘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된다. 의상대사가 무사히 신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바닷길을 살피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 도움을 준다. 동해의 힘찬 물줄기 사이로 반은 용이고 반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인 선묘 낭자가 전설 속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등기산스카이워크 운영 시간은 동절기(11~2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연중무휴), 입장료는 없다.
등기산스카이워크 출구는 구름다리(출렁다리)로 이어진다. 출렁이는 구름다리를 건너면 예부터 낮에는 깃발을 꽂아 위치를 알리고 밤에는 봉화로 뱃길을 안내했다고 이름 붙은 등기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등기산(64m)은 나지막하지만, 뱃길을 지나는 이들에게 더없이 중요한 위치였다. 1968년 이곳 등기산에서 첫 불을 밝힌 후포등대는 불빛이 35km에 이른다. 울릉도와 제일 가까운 등대이기도 하다.
등기산에서 만나는 등대는 후포등대뿐만 아니다. 후포등기산(등대)공원에 세계 각국의 대표적인 등대를 모형으로 제작·설치했다. 1611년에 세워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코르두앙, 세계 최초의 등대로 알려진 이집트 파로스, 중세 고딕 교회가 떠오르는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독일의 브레머하펜, 악명 높은 암초에서 뱃길을 밝히는 별로 다시 태어난 스코틀랜드의 벨록 등을 한자리에서 만난다. 전망대로 활용하는 벨록등대에 올라 탁 트인 울진 앞바다를 눈에 담아보자.
공원 한쪽에 울진후포리신석기유적관이 자리한다. 1983년 등기산 꼭대기에서 집단 매장 유적이 발견됐는데, 지름 4m 안팎 자연 구덩이에서 40명이 넘는 사람 뼈가 출토됐다. 부장된 토기는 한 점도 없었으나, 돌도끼 180여 점이 발굴됐다고. 이 돌도끼는 장례 시 사람 뼈를 덮는 용도였는데, 이처럼 장례용으로 추정되는 돌도끼가 발굴된 사례는 드물다고 한다. 유적관 내부는 유적 발굴 과정과 신석기 생활 모습을 복원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요즘 울진에서 가장 ‘핫한’ 즐길 거리를 꼽으라면 죽변해안스카이레일이 아닐까 싶다. 드라마 〈폭풍 속으로〉 촬영지와 ‘하트 해변’으로 유명한 죽변 해안을 따라 달리는 모노레일이다. 최대 높이 11m에 레일이 설치되어 이전에는 눈에 담을 수 없던 옥빛 바다와 기기묘묘한 바위를 감상하기 좋다. 모노레일 운행 속도가 걷는 속도와 비슷해 울진의 온갖 푸른색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 대게잡이로 활력 넘치는 후포항
바다가 슬쩍 몸을 뒤척인다. 울진군 근남면 망양정에서 후포항까지 해안선을 따라 자동차를 타고 내달리면 바다 풍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왔다 멀어진다. 오른쪽 차창으로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어촌의 풍경들이다. 바닷가 마을의 작은 등대, 한가롭게 낚시를 하는 사람들, 조그만 동네 슈퍼마켓, 깃발처럼 바닷가에 걸어 놓은 오징어 같은 일상의 풍경조차 정겹고 따뜻하다.
바다로 이어진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어느새 후포항이다. 국내 최대의 대게잡이 항구인 후포항에는 항구 특유의 정취와 활력이 넘친다. 울진의 또 다른 항구이자 미항으로 소문난 죽변항도 있지만 역시 울진의 대표적인 항구는 후포항이다. 울진대게의 고향은 후포항에서 동쪽으로 23㎞ 떨어진 왕돌초 일대다. 바닷속에 왕돌초로 불리는 거대한 암초가 있는데, 이 부근이 대게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다. 왕돌초의 넓이는 동서 21㎞, 남북 53㎞ 정도 된다. 대게 하면 영덕대게를 치지만 울진대게든 영덕대게든 다 왕돌초 인근에서 잡는 것이기에 원조 논쟁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다. 대게는 커서 붙인 이름이 아니다. 몸통에서 뻗어 나온 8개의 다리 마디가 마른 대나무를 닮아 대게라고 불린다.
△ 용안까지 더럽힌 맛의 제왕 대게
후포항의 진면목을 보려면 이른 아침에 가야 한다. 연근해에서 잡아온 울진대게를 경매하는 풍경은 늘 부산하고 이채롭다. 희망 가격을 백묵으로 적어 경매사에게 내미는 어부들의 거친 손길에 삶의 고단함과 엄숙함이 동시에 묻어 있다. 위판장을 벗어나 횟집촌으로 발길을 돌리면 횟집 앞 찜통에서 고소한 냄새가 가득 풍긴다. 대게 냄새를 맡은 관광객들은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매서운 추위에 맛과 살을 키우는 대게는 2~3월이면 통통하게 살이 올라 가장 맛이 좋다.
울진 대게는 한 번 입맛을 들이면 여간해서 잊지 못할 기억의 잔상으로 남는다. 대게는 찜을 해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뜨거운 대게를 잡고 다리 가운데를 가위로 살짝 흠집 내 쭉 잡아당기면 쫄깃한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입안에 넣으면 씹을 새도 없이 그대로 빨려들어간다. 쫀득하면서도 고소하고 뒷맛까지 개운하다.
예전에 울진대게는 임금님의 수라상에까지 올랐다. 임금은 대게의 맛에 반해 코와 입에 대게 부스러기가 묻은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먹었다고 한다. 맛있게 먹는 것은 좋으나 용안(龍顔)이 추해지는지도 모를 정도로 탐식하게 만드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던지 한동안 대게는 진상물품에서 제외됐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밥도둑’이라는 별명이 붙는 대부분 음식은 맵고 짜지만 울진대게는 고소한 살코기 맛과 향기만으로도 앉은 자리에서 세 끼 양을 먹어치우게 한다. 여기에 소주 한 잔 털어넣으면 다가올 봄의 꽃 내음을 맡는 느낌이 든다.
울진 여행의 또 다른 백미는 온천이다. 온양온천과 함께 한국의 대표 온천으로 손꼽히는 백암온천과 덕구온천이 있기 때문이다. 천연 알칼리성 온천인 백암온천은 조선 광해군 시절 판중추부사 기자헌이 풍질 치료를 위해 찾으면서 유명해졌다.
온천수에는 나트륨, 불소, 칼슘 등 몸에 유익한 성분이 다량 들어 있어 만성 피부염, 자궁내막염, 부인병, 동맥경화 등을 가진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덕구온천은 울진의 명산 가운데 하나인 응봉산 자락에 있다. 약한 알칼리 성분의 43도 온천으로, 대부분의 국내 온천이 지하 온천수를 동력으로 끌어올려 사용하는 것과 달리 이곳은 스스로 솟아오르는 자연용출수다. 노천탕도 운영되고 있는데, 물속에 들어가 있을 때 눈이라도 내려주면 별천지에서 온천욕을 하는 듯 행복한 기분에 빠지게 된다.
/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