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에서, 걷는 길마다 해가 뜬다.
해는 늘 같은 자리에서 떠오르지만, 사람에게는 늘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한 해의 끝에서 맞는 일출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하고, 새해의 첫 해는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2026년의 문턱에서 동해의 끝자락 영덕은 그런 마음을 가장 조용히 받아주는 곳이다. 이곳에서의 아침은 요란하지 않다. 어둠이 물러나고 수평선 위로 빛이 번지면, 하루는 그렇게 시작된다.
영덕의 포구에서는 새해에도 어김없이 어선들이 시동을 건다. 파도는 늘 같은 자리에서 부서지고,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나아간다. 반복되는 장면이지만 새해의 아침만큼은 다르게 느껴진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한 줄기 빛으로 이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덕의 일출은 ‘보는 풍경’이 아니라 ‘마주하는 시간’에 가깝다. 새해를 맞는 가장 담담한 방식이다.
이 시간을 가장 천천히, 가장 깊게 만날 수 있는 길이 영덕 블루로드다. 동해 해안선을 따라 마을과 역사, 자연을 잇는 이 길은 단순한 트레킹 코스를 넘어 한 해의 시작을 걷는 길이 된다. 총 65㎞에 이르는 블루로드 전 구간에서는 어디에 서든 해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 해는 늘 다르게 다가온다. 걷는 이의 마음과 삶의 자리만큼이나 표정이 다르다.
남정면 장사해수욕장 앞바다에 자리한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은 새해의 해를 역사 위로 떠올린다. 한국전쟁 당시 나라의 운명을 걸고 바다로 나섰던 젊은 이들의 이야기를 품은 문산호 뒤로 해가 떠오르는 순간, 새해는 가볍지 않다. 오늘의 평화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아침이다. 새해의 첫 빛은 기억을 비추며 시작된다.
창포 풍력 발전단지 별차랑 공원에서는 전혀 다른 새해가 열린다. 바람을 가르며 회전하는 거대한 풍력발전기 사이로 해가 오른다. 자연과 기술, 현재와 미래가 한 장면에 겹친다. 이곳에서 맞는 일출은 과거를 돌아보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묵묵히 보여주는 아침이다. 영덕이 그려가는 내일이 이 풍경 속에 담겨 있다.
죽도산 전망대는 절벽 위에서 동해를 내려다보는 자리다. 해가 떠오르기 전, 바다와 하늘의 경계는 흐릿하다. 하지만 빛이 번지는 순간 세상은 다시 또렷해진다. 절벽 아래로 부서지는 파도와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맞는 새해는 한 해를 살아갈 마음의 간격을 다시 조율하게 한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해발 183m 상대 산 관여 대에서는 산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첫 해를 만난다. 붉은빛이 영해 평야와 고래불 해변까지 번져가는 순간, 풍경은 하나의 화면처럼 펼쳐진다. 고려 말 학자 목은 이색이 사랑했던 자리에서 맞는 새해는 시간의 깊이를 더한다. 수백 년 전의 아침과 오늘의 아침이 겹쳐지는 순간, 사람은 자신이 시간 속에 서 있음을 실감한다.
쉼과 회복을 원하는 이들에게 영덕의 새해는 더욱 느리다. 대진해수욕장 웰니스자연치유센터와 고래불해수욕장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내려놓게 하는 공간이다. 송림으로 둘러싸인 백사장 위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맞는 새해는 다짐보다 호흡에 가깝다. 잘 살아야겠다는 결심보다,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는 안도가 먼저 찾아온다.
영덕의 일출은 하나의 명소로 끝나지 않는다. 블루로드를 따라 이어진 일출들은 서로 다른 얼굴로 한 해를 채운다. 기억의 해, 미래의 해, 쉼의 해, 다짐의 해. 영덕군이 해안과 지질, 길과 마을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길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의 인정을 받았다. 자연과 시간이 만들어낸 길 위에서 사람들은 새해를 맞는다.
2026년 새해, 우리는 다시 출발선에 선다. 더 잘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 조금은 덜 흔들리고 싶다는 바람을 안고 해를 기다린다. 그 첫 빛을 어디에서 맞을 것인지는, 그 해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도 닮아 있다.
영덕에서 떠오르는 해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매일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떠올라, 다시 한 해를 살아가라고 등을 밀어준다.
2026년의 첫 아침, 그 빛은 영덕에서 시작된다.
/박윤식기자 newsyd@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