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중반, 헝가리는 몽골의 침략에 노출되면서,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기세를 올렸다. 반대로 억압이 가중된 계층도 있었다. 봉건왕조 압제가 농민을 괴롭혔고, 설상가상 전염병이 돌면서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자 농민항쟁을 불러왔다.
교회 개혁을 약속했던 프라하 카를대학 학장 얀 후스가 오히려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화형을 당하고 만다. 권력에서 한 발자국도 내려오지 않으려는 봉건영주 반들의 승리였다. 교회가 부패하면서 수도원은 물론 수사들까지 탐욕에 물들자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취급했던 보고밀교에 심취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설상가상, ‘검은새의 들녘’ 코소보에서 승리한 오스만트루크제국은 비잔티움제국을 점령하면서 파죽지세로 서진을 이어갔다. 1463년 보스니아 점령에 이어 세르비아 마지막 수도 스메데레보를 차지하고 크로아티아를 넘보았다. 헝가리와 함께 힘을 합친 크로아티아의 귀족들은 요새를 만들어 최후의 방어막을 치면서 버티기에 들어갔으나, 오스만제국은 마을을 약탈하는 등 주변을 공격하면서 이들의 힘을 소진시켰다.
1493년부터 대치상태로 수십 년간 장기전에 돌입하면서 크로아티아는 그야말로 황폐해져갔다. 주민이 떠난 자리엔 잡풀만 무성하게 자랐고, 일부 수비병력 역시 의욕을 상실했다. 결국 미르코 데렌친을 중심으로 한 크로아티아방위군은 ‘피의 평원’, 즉 크르바브스코평원(지금의 우드비나Udbina) 전투에서 8천 여 오스만제국의 기병들에 의해 도륙 당한다.
훗날 세르비아에 코소보 ‘검은 새의 들녘’이 있다면, 크로아티아 사람들 가슴에 ‘피의 평원’이 대크로아티아 민족주의로 살아나 가슴을 쿵쿵 두드리게 된 것이다.
뒤이어 1526년 8월 29일 헝가리 러요시 2세가 오스만제국 쉴레이만 대제와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목숨을 잃었다. 헝가리 왕조 대가 끊어지자 러요시 2세의 여동생(신성로마제국으로 시집간)을 빌미로 신성로마제국황제이자 합스부르크왕가 카를 5세에게 흡수된다. 이는 헝가리로서는 불감청고소원이었다.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위협을 합스부르크왕가 우산 속에 몸을 숨기며 살아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크로아티아 역시 합스부르크왕가에 편입되면서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드 1세가 헝가리 왕과 크로아티아 왕으로 추대된다.
헝가리가 합스부르크제국에 들어가면서 크로아티아도 따라들어 갈 수밖에 없었지만, 세르비아나 보스니아처럼 오스만트루크제국 하에서 암울한 세기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유럽의 르네상스를 함께 경험할 수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할 수 있을 법하다.
이로써 합스부르크왕가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 보헤미아, 북이탈리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내륙까지 지배하면서 거대제국을 형성했다. 이때부터 서방정벌을 이어가던 오스만트루크제국과 본격적인 양대 산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발칸반도 지도를 펼쳐놓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히 대각선 그으면, 위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제국, 아래는 오스만트루크제국에 편입이 되면서 앞서 거듭 언급한 것처럼 20세기 폭력의 경계가 그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크로아티아는 점차 합스부르크왕가 아래에 놓이게 되고, 가톨릭문화권에 자연스럽게 흡수된다.
크로아티아 땅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왕가는 오스만트루크제국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지금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사이에 최전방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때 이슬람제국을 피해 북쪽으로 이동한 세르비아인을 강제로 이주시켜 ‘남슬라브민족정착촌’을 형성하면서 국경 수비대를 만들어 실전에 배치했다.
세르비아인들은 일거리를 찾아 방황하던 중이라 몸 바쳐 충성을 다했다. 오스트리아제국이 오스만트루크와의 잦은 충돌 속에 세르비아인은 최전선에서 인간방어벽이 되어주었다. 또한 헝가리 봉건 영주에게 반기를 드는 토착세력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이들 세르비아인들을 ‘하이두끄(Hajduk)’라고 불렀는데 이를 직역하면 ‘산적’, 좋은 말로는 ‘의적’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합스부르크제국은 세르비아 용병들이 승리를 거두면 토지로 보상해 주었다.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 영주 반들이 토지를 빼앗을까 오스트리아에 충성해야 했다.
이 일로 인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 국경에 몰려 살게 된 것이다. 중간 방어선은 18세기까지 이어지면서 대략 10만 여명의 군인들이 주둔했던 적도 있었다.
오스트리아에 가톨릭 열기가 급격히 퍼지면서 정교회 세르비아인에 대해 반감이 고조됐고, 정교도 세르비아인을 개종키 위한 정책을 폈다. 따라서 세르비아 용병들 지위가 하락하고, 숫자가 줄어들게 된다.
그런데도 세르비아인은 낙후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훗날 이들의 후손들이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대부분 크로아티아 괴뢰정부 우스타샤에게 학살을 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