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오면하루종일 발을 물고 놓아주지 않던가죽 구두를 벗고살껍질처럼 발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던검정 양말을 벗고발가락 신발숨 쉬는 살색 신발투명한 바람 신발벌거벗은 임금님 신발맨발을 신는다하루 종일 신발에 갇혀 있던 발, 집에 들어와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나면 홀가분한 맨발이 된다는 표현을 하는 시인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음을 느낀다. 종일 자신을 옮아 매었던 삶의 굴레들을 벗고 그 막중한 무게들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하게 자유를 누리는 시인을 느낄 수 있다. 시인
2019-09-26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 때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그대를 환영하며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다시 떠날 때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알고 간다면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초록빛과 사랑, 이거우주 기적(奇績) 아녀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고운 초록색의 작은 행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별이 인간의 문명에 의해 오염되고 파괴되어 이제는 거기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혐오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것을 안타까워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9-25
지상과의 인연더 차가워져야 한다활시위처럼 몸 당겨겨울로 간다작살 같은 대오로하늘을 끌고 간다몸 비트는 하늘깃털처럼, 백설(白雪) 쏟아진다하얗게 눈 내리는 하늘을 날아 북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모습이 사뭇 장엄하다. 기러기들의 비행 대오는 작살 모양인데 그 맨 앞에는 가장 힘세고 연륜이 있는 기러기가 선도하고 그 뒤를 따르는 동료들이 울음소리로 그를 격려하며 편대를 이루어 그 먼 거리를 날아가는 것이다. 시인은 기러기들이 날아가는 겨울 하늘의 장엄한 그림 한 장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09-24
돌이 울고 있었다울고 있는 돌을 먹었다돌을 먹은 나는펭귄이 되었다배가 너무 무거워바닥에 쓰러졌다뱃속에서 돌이 울고 있었다돌과 펭귄을 연결한 시인의 상상력이 재미있고 진지하다. 돌은 삶 속에서 꺾이고 고통당하며 상처 입어 쉬 지워지지 않는 슬픔을 품고 있다. 슬픔은 펭귄의 뱃속에서 울고 있는 돌처럼 우리를 그늘지게 하며 우리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 속성을 품고 있는 것이라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9-23
마음 스치고 간 칼날들이 그믐달로 뜬다일생 땅에 집을 짓지 못하는 칼새의 짧은 다리,긴 날개 허공에 알을 놓고 허공을 박차고 허공에서 낫을 갈고허공만이 그의 허파였던가파르고 높은 벼랑 끝에 집을 짓고 사는 칼새는 거의 모든 시간을 허공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다리는 짧고 날개는 긴 것이리라. 허공에 집을 짓고 허공에서 사랑하며 허공에서 잠자는 칼새는 낫 같은 날카로운 발톱을 가졌고 오랜 시간 날 수 있는 긴 날개와 튼튼한 허파를 가졌다는 얘기를 하며 자연이든 인간이든 험난하고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적응해가는 신체 구조와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는 시인의 긍정적인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9-22
빗방울 하나가창틀에 터억걸터앉는다잠시나의 집이휘청-한다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는 삼라만상, 그 무한한 여백 속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는 집 한 채만 한 크기일 수도 있고, 집을 흔들 만큼의 무게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바라보는 시인의 혜안(慧眼)이 깊고 밝다. 시인
2019-09-19
동백의 꽃말은 투신죽을 날을 알아버린 이모처럼눈 소복하게 내린 날을 골라떨어진다 멀리로도 아니고바람 없는 날, 툭뿌리께로 곤두박질한다이모부 발치에 쓰러지신이모 때문에 당신은 발등이아프셨고 동백꽃 철마다 밟혀서그 집에서 오래홀로 늙으셨다동백의 꽃말은 투신(投身)이다. 시인은 짙붉은 동백꽃이 툭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픈 가족사 하나를 들려주고 있다. 자살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이모부 발치에 쓰러져 죽은 이모와 그 후 재혼을 하지 않고 오래 홀로 살아간 이모부의 깊은 사랑의 신의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09-18
그대 내 농담에 까르르 웃다그만 차를 옆질렀군요… 미안해 하지 말아요지나온 내 인생은 거의 농담에 가까웠지만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생이었지만이 순간, 그대 쟈스민 향기 같은 웃음에내 마음 온통 그대 쪽으로 옆질러졌으니까요고백하건대 이건 진실이에요마주 앉은 남녀가 차를 마시다 상대의 농담에 웃다 찻잔을 엎지른 재미난 장면을 보여주며 시인은 쏟아진 것은 차가 아니라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의 혜안에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다. 시인
2019-09-17
멕시코인들은 말하지우리에게 하느님은 너무 멀리 있고미국은 너무나 가까이 있다세상의 여자들은 말하네우리에게 하느님은 너무 멀리 있고남자는 너무나 가까이 있다시인이 말하는 멕시코와 여자는 약하고 피학적인 위치에 놓인 약자에 해당되고 미국이나 남자는 강하고 가학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본다. 이런 남성 중심, 서구 중심의 세상을 야유하며 강요되고 폭력적인 것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음을 고발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9-16
항아리를 할머니로항아리 뚜껑을 할아버지로항아리 뚜껑 위에 쌓인 눈을 백발로항아리 옆의 감나무를 세월의 몽둥이로꺾어보는 사이에 저녁이 되었다반찬도 없는데 전신이 아프다백발과 할아버지를 젖히고할머니 속의 된장이뚝배기 안에서펄펄 끓는다시인은 저물녘 된장을 끓이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한 생을 떠올리고 있다. 한평생 항아리 뚜껑 같은 영감을 덮고, 아니 할아버지에게 덮여 살아온 할머니의 삶을 힘겹고 답답한 세월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프고 갑갑할 때는 그 뚜껑을 젖히고 싶었을 거라는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도 하는 것을 시인의 말에 잔잔한 감동이 묻어남을 느낀다. 시인
2019-09-15
하얀 입김이나뭇가지에 걸리어,내 목이 아프다.몽텡이가 목 속에서 미끈미끈 미끄러져,내 목이 뜨끔거린다.팥죽이 뿔럭뿔럭 끊는 기인 밤,나는 생각한다동지 무렵이면 뜨끈뜨끈하게아궁지에 군불을 지피시던 어머니를몽텡이는 팥죽 속에 넣어 끓이는 수수단자를 일컫는 말이다. 시인은 감기를 그 몽텡이가 몸속에 미끄러지듯 목이 뜨끔거리는 것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뜨겁게 몸을 데워오며 몽텡이처럼 끓어오르는 감기를 앓으며 동짓날 팥죽 끓이는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지피던 그리운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그립고 눈물겨운 그림 한 장을 우리에게 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09-10
처마에서 다좇치듯 떨어들지는눈석임물 소리에 잠을 깨고는웬일인지 한여름 툇마루에서다듬이질하시던 어머님 생각이른 봄 고드름에 대한 생각도다른 어떤 생각도 아니라 바로무더운 한여름 툇마루에서다듬이질하시던 어머님 생각리진은 함흥 출생으로 구 소련으로 망명한 시인이다. 이른 봄 눈 녹은 물이 섞인 차가운 물이 눈석임 물인데 이것은 소멸의 흔적이다. 시인은 툇마루에서 다듬이질을 하시며 자식과 가정을 위해 한 생을 바치고 허물어지고 녹아서 소멸해가는 빛나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음을 본다. 그 어머니를 햇빛에 녹아내리는 눈석임 물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09-09
어머니가 식탁에서 수저를 떨어뜨리면어머니가 그것을 주워드신다내가 식탁에서 수저를 떨어뜨리면어머니가 다시 그것을 주워 주신다내가 부주의하게 떨어뜨린 수저의 개수만큼허리를 굽히신 어머니어머니가 떨어뜨린 수저뿐만 아니라 슬하의 자식들이 떨어뜨린 수저들을 어머니는 허리 굽혀 주워주신다는 사소한 모티브에서 시인은 어머니를, 그 위대한 모성을 얘기하고 있다. 어쩌면 어머니는 세상의 바닥에 가장 가까이 있는 분이 아닐까. 어머니는 연약하지만, 그 정신은 강하다. 끊임없이 허리를 구부려 떨어뜨린 수저를 주워올 리는 세상의 어머니들은 위대하고 강한 존재가 아닐까.시인
2019-09-08
그대 곁에 다가오는따뜻한 슬픔 기억하라생의 한가운데불현듯 찾아온 외로움해일(海溢)처럼 두려울 때기억하라그대 가슴 헤집고 들어오는어린아이 같은 따뜻한 슬픔을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정결하고 용기 있는 삶의 자세를 다져온 시인은 불현듯 가슴 한가운데로 치고 드는 외로움이랄까. 깨끗한 슬픔, 따뜻한 슬픔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따뜻한 슬픔이야말로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해주고, 참된 삶의 길로 이끌어 주는 순수한 에너지가 될 거라는 확신에 찬 시인 정신을 본다. 시인
2019-09-05
그곳에 가면 네가 있을 것만 같다바람에 부서지는 섬들과 모래톱 사이로 스며드는따스한 물방울들, 그곳에 꼭 네가 있을 것만 같다어젯밤에는 바람 속으로 망명하는 꿈을 꾸었다붉게 물들어 가는 단풍잎들이 밤새도록 내려서럽도록 그리운 너의 안부를 덮어주었다시인은 왜 새들은 목포에 가서 죽는다고 말했을까.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처럼 황량하고 낯선 도시와 산하를 날며 살다가 죽을 땐 가장 그리워하는 곳을 찾아가는 것을 시인은 떠올리고 있다. 우리도 그곳에 가면 꼭 그리워하는 네가 있을 것만 같은 곳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어떤 서러움 같은 것이 차오르는 아침이다. 시인
2019-09-04
밤비에 씻긴 눈에새벽별로 뜨지 말고천둥번개 울고 간 기슭에산나리 꽃대궁으로 고개 숙여 피지도 말고꽃도 별도 아닌 이대로가 좋아요이 모양 초라한 대로 우리이 세상에서 자주 만나요앓는 것도 자랑거리 삼아나이 만큼씩 늙어가자요아픈 친구의 문병 길에서 느낀 소회를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고 있다. 병이 더 깊어져 이승을 떠나 샛별로 뜨지도 말고, 산나리 꽃대궁으로도 피어나지 말고 병을 받아들이고 병과 함께 이승의 남은 시간을 건너가자고, 나이 만큼씩 늙어가자고 아픈 친구에게 보내는 위안의 편지 한 장을 읽는다. 시인
2019-09-03
적요 가운데 돌이 박혀 있다적요로도 모자라 몸을 비틀며항해사의 만 곱 아승지 저쪽그곳에서 날아온 빗방울을 얼싸안고입 맞추고 있다 입 맞추고 있다오 내 사랑이여‘만 곱 아승지 저쪽’이라는 공간적 거리는 무한한 시간적 거리다. 시인은 고요한 사랑과 그 속에 깊이 박혀있는 돌처럼 깊이 스며 있는 사랑의 슬픔을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09-02
무슨 고민이 저리 많은지민들레는 빡빡머리가 되어 담장 밑 양지쪽에 쭈그리고 있습니다가끔씩 머리통이 박살 나도록 담장을 치고받으며기구한 사연 더 들어달라는 듯 앙탈을 부립니다제 자식들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길마저 끊긴 막막한 땅에서도란도란 웃음꽃 필 가정을 꾸미고 살 곳은 어디입니까하소연이라는 제목을 유추해볼 때 민들레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을 모티프로 삼아 쓴 시로 여겨진다. 자식 키우며 살아온 기구한 어머니의 한 생의 목소리가 쟁쟁하다. 길마저 끊긴 막막한 땅 같은 험난한 세상 길을 가야 하는 어머니, 그 어머니의 절절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09-01
난을 기르듯여자를 기른다면오지게 귀 밝은요즘 여자가 와서내 뺨을 치고서파르르르 떨겠지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되는 짧은 시다. 난을 기르듯 여자를 기른다면 뺨을 맞는다는 표현이 재밌다. 정성을 다해 난을 기르듯, 사랑하는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창가에 가만두고 눈빛만 주고 방관하여도 뺨을 맞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유쾌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시인
2019-08-29
풀꽃 한 송이도 피어날 때소리를 낸다그건 어른들만 모르는 일일 뿐다섯 살 아이의 눈에도 보이는 일이다짧은 몇 행의 시에서 시인이 뜻하고자 하는 것은 깊고 오묘하기 이를 데 없다. ‘풀꽃 한 송이도 피어날 때 소리를 낸다’는 표현에서 소리는 일반적이고 물리적인 소리를 의미하진 않는다. 감각적인 소리를 넘어 존재하는 가슴속의 소리가 아닐까. 초월적이고 신기한 소리다.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들은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형태나 소리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내면에는 깊이 스며 있는 진정한 모습과 소리가 있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08-28
내가 책을 읽는 동안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바람은 내 어깨 위에자그만 그물침대 하나를 매답니다마침내 곁을 지나가는 시간들이라면누구든지 그 침대에서푹 쉬어갈 수 있지요그 중에 어린 시간 하나는나와 함께 책을 읽다가성급한 마음에 나보다도 먼저책장을 넘기기도 하지요그럴 때 나는잠시 허공을 바라보다바람이 좋은 저녁이군, 라고 말합니다어떤 어린 시간 하나가내 어깨 위에서깔깔대고 웃다가 눈물 한 방울툭 떨구는 줄도 모르고‘사평역에서’라는 서정성 높은 시를 발표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왔던 시인의 동요적인 상상력을 본다. ‘바람은 어깨 위에 그물침대를 매달고, 시간은 그 침대 위에 쉬어간다’는 표현에서 시인은 엄청난 속도에 얹혀가고 떠밀려가는 현대사회의 분주함을 야유하며, 여유롭고 느리게 살아가겠다는 마음의 한 자락을 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19-08-27
봄 바다 아득한 하늘에검은 점 서넛날아가고 있었다날아가는 서넛의 검은 점이날아갈수록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다가하나가 되어언젠가 그날처럼내 가슴으로 돌아와 박혔다사랑의 피묻은 화살로시인이 말하는 봄 바다 아득한 하늘에 날고 있는 검은 점 서넛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인이 어린 시절부터 꿈꿔오던 이루고 싶은 열망이랄까 꿈이랄까 동경해오던 그 무엇이 아닐까. 나이 서른 마흔을 지나며 그 열망과 동경은 성취하지 못하고 아쉬움과 허탈함으로 변하고,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가슴 속으로 날아와 박힌다고 고백하는 시인의 안타까운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8-26
비가 오는 가을국화 옆에서 내 몸도 시드나 보다지상에서 사람을 만나몇은 이별을 하고 몇은 남았다쇠 살로 된 수레바퀴 아래서한철에서 다른 한철로이것이 여행이라면 빨리 다른 곳에 닿고 싶다비가 오나 보다젖은 것들이 내 안에서안개가 되어 피어오른다사람 이전깊은 중력의 물기를 머금고 올라오는푸르고 푸른 감각들깊은 상처 위에 혓바닥을 대본다더 따뜻하게 비를 맞고 서 있지 못해서 미안하다시인의 삶이 얼마나 핍진하고 열악한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수레바퀴처럼 반복적으로 굴러가는 힘든 삶에서 탈출하고 극복해 나가려는 시인의 간절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시인
2019-08-25
만만치가 않은 그녀없으면 허전하고있으면 골치 아프고 때론 짜증난다지구가 네모라고 믿는 그녀아파트, 백화점, 사무실그녀의 공간은 모두 벽과 벽하루 종일 정신없이 돌고 나면 어지럽다각양각색의 사람들오늘도 같은 생각의 무리를 찾고 있다그래서 다들 끼리끼리 모여 산다고 하는 건가세상이 온통 하얀가 싶더니돌아서면 얼룩진 또 다른 골목붉은 벽에 기대고 잠시 쉬고 있을 때나를 보고 꼬마가 중얼거린다알고 보면 무지 쉬운데 라고순리에 맞는 이치가 곧 삶의 공식이겠지나 알고 보면 쉬운 여자야육면체의 네모진 칸칸을 한 면에 같은 색깔로 채우면 완성되는 큐브를 제재로 시인은 현대 문명에 갇혀 사는 우리 시대를 야유하고 있다. 네모의 각진 세상에 경쟁하며 정신없이 사는 것이 오늘의 삶이 아닐까. 이 네모에 갇혀 벽과 벽 사이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체성도, 지향해 가야 할 생의 목표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시인의 시선은 이런 비인간적인 현대 문명의 폐해를 겨냥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9-08-22
아기를 잠재우는조심스럽게 사쁜거리는당신의 발자국 소리가졸음 오는 잠자리의가장자리를지긋지긋 밟아 주시고잠결에도 듣는당신의 속삭임이꿈으로 살아나는어머니저는 잘 익은 레몬 열매로당신의 꿈속에 열리고 싶은아기를 잠재우는 어머니의 자상한 모습이 숭고하리만큼 감동적이다. 지난 시절 어린 자신을 잠재우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어머니의 꿈속에 잘 익은 레몬 열매로 열리고 싶다는 고백을 하며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을 기리고 있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19-08-21
그래 살아봐야지너도 나도 공이 되어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살아봐야지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공처럼, 탄력의 나라의왕자처럼가볍게 떠올라야지곧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꼴둥근 공이 되어옳지 최선의 꼴지금의 네 모습처럼떨어져도 뛰어오르는 꼴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처럼 탄력 있고 회복력이 강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시인의 다짐을 본다. 떨어져서 쓰러지고 파괴되어 주저앉아버리는 게 아니라 가볍게 튀어 올라 곧 다른 움직임을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으로 환원되는 공처럼 살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인
2019-08-20
난로 위에 머리카락 하나가 떨어진다머리카락은 타면서 액체가 된다액체는 거품을 물고 격렬하게 꿈틀거린다그 꿈틀거림 속에서 고약한 냄새가 뿜어져 나온다뿌리를 뻗으며 식물인 양 얌전하게만 자라던 것이불에 닿자마자 슬픈 몸짓 역한 냄새로제 뜨거운 동물성을 있는 대로 드러내니눈 달린 것 이빨 달린 것 숨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독한 냄새를 지우려고 창문을 열자차고 커다란 겨울바람이 들이닥친다머리카락 속에 용쓰던 힘과 냄새는그 바람 속으로 고분고분하게 빨려들어간다하나씩 죽음이 보태질 때마다바람에도 하나씩 힘이 더 붙는다그 바람이 낡은 집을 붙들고 요란하게 흔들어대니문짝들 창문들은 덜컹거리고 삐걱거리며 밤새 앓는 소리다난로 위에는 이제 더 이상 머리카락이 아닌 것이상처자국처럼 꺼멓게 늘어붙어 있다난로 위에 떨어져 역한 냄새를 풍기며 타들어가는 머리카락은 소멸의 순간을 의미하는데 검고 윤기나던 머리카락이 역한 냄새를 풍기며 소멸되어버리는 상황을 설정한 시인은 삶과 죽음을 떠올리고 있음을 본다. 매우 인상적이고 즉물적인 표현이 이채롭기 그지없다. 시인
2019-08-19
수평선이 축 늘어지게 몰려 앉은 바닷새가 떼를 풀어 흐린 하늘로 날아오른다. 발 헛디딘 새는 발을 잃고, 다시 허공에 떠도는 바닷새, 영원히 앉을 자리를 만들어 허공에 수평선을 이루는 바닷새.인간을 만나고 온 바다,물거품 버릴 데를 찾아 무인도 가고 있다허공에 수평선을 이루며 영원히 앉을 자리를 만든다는 표현에서 인간과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자연의 원형을 지키려는 시인정신을 읽는다. 인간과 문명의 흔적인 물거품을 피해 깨끗한 무인도로 찾아가는 도저한 바다를 시인은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9-08-18
바알간 초록시금치 밑둥아침 산책 나온바알간 오리발 맨발채마밭을 지나바알간 볼의 소년이새 운동화를 신고읍내학교로 간다도시락이 따뜻하다아직은미워할 수 없는 게더 많다아직은바알간 속살로기다리고 있는 게 더 많다시인이 고향에 가서 받은 느낌을 그려내고 있다. 바알간 초록 시금치와 오리들의 맨발, 바알간 볼의 소년이 새 운동화를 신고 읍내 학교로 가는 풍경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어쩌면 그 소년이 그 옛날 자신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소년에게서 희망의 빛살을 보는 백발의 시인은 자기 자신이 새 운동화를 신고 학교로 가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만히 웃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
2019-08-15
거, 앉아보소.늙은 여자가 강물 물 가까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쉰 목소리로 말했다. 다 망가진 채 엉거주춤 돌아온 사내더러 한 번 말했다. 꺼질 듯 낮게 말했다. 키가 껑충한 그래서 그런 건지 낯짝 안 보이는, 아직도 허공에 매달려 떠돌고 있는 건지 낯짝 없는, 낯짝 없는 사내더러 여자가 말했다.여자는 오랜 세월, 장터거리에서 혼자 국밥집을 해왔다. 저녁노을 그 아래 시뻘겋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러나 쿨럭쿨럭 뒤엉키는 물, 지금은 다만 긴 강.이 시를 읽고 나면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는, 어떤 서러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됨은 무슨 까닭일까. 시인이 펼쳐내는 참 기막힌 한 장면을 본다. 다 망가진 채 쿨룩거리며 돌아온 사내와 시장에서 국밥장사로 한 생을 보내는 여인네가 강가에서 해후하는 장면이다. 첫사랑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그들 사이에 놓여 있음을 본다. 그녀의 기다림은 이 잠깐의 만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긴 강처럼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계속될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는 가슴 아픈 해후의 한 장면을 시인은 그려내고 있다. 시인
2019-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