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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가을배추와 겨울나기

겨울은 기다림이 있기에 지루하지 않다. /언스플래쉬 겨울 냉장고에 절대 떨어지지 않는 식재료가 있다. 바로 가을,겨울 대표 채소인 배추다. 배추의 어원은 중국에서의 ‘백채’가 변하여 배추가 된 것인데, 추운 겨울을 견뎌내는 소나무의 기운을 닮은 채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11~12월에 출하되는 가을배추는 잎 부분이 더 달고 아삭하단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 겹씩 뜯어 생으로 아삭아삭 베어 먹는 맛도 훌륭하지만 찌개나 무침, 전, 볶음 등 다채로운 재료와 함께 무한으로 활용하여 먹을 수 있는 재미가 큰 식재료다.배추는 겹겹이 쌓여 하나의 덩어리 진 둥근 형태를 띠고 있다. 추위로부터 바짝 웅크린 자세나 개어둔 겨울 이불의 모양 같기도 하다. 무게는 잎으로 속이 꽉 차 있기 때문에 한 손으로 들었을 때엔 제법 묵직하다.배추를 칼로 반을 가르면 구수한 향이 퍼지며 숲을 닮은 노란 잎이 빽빽이 드러낸다. 손금 마냥 쭉 뻗어 있는 잎맥은 얇고 가늘수록 맛이 좋다. 노란 잎을 손으로 하나씩 뜯어 물로 씻어낼 때엔 부드럽게 흔들리지만, 반대로 배추의 밑동과 뿌리는 무척 하얗고 단단하다는 점도 재밌다.배추는 따로 손질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손질이 편리하고 요리할 때 손이 적게 가서 좋다. 또한 배추는 뿌리부터 잎까지 버릴 부분 없이 먹을 수 있는 알뜰한 재료다. 칼륨, 칼슘, 철분 등을 풍부히 지니고 있으며 특히 칼슘은 밥이나 고기 등의 산성 식품을 빠르게 중화시키어 혈압을 낮추는 데에 도움을 준다. 바깥 부분의 푸른 잎엔 비타민 C가 풍부히 분포되어 있어, 겨울날 면역력 강화와 감기 예방에도 좋다. 특히 배추의 비타민C는 불을 사용하여 열을 가해도 손실률이 낮기 때문에 끓이거나 튀겨도 충분히 비타민C를 섭취할 수 있단 이점이 있다.찬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배추를 넣은 된장국을 만든다. 멸치 육수와 된장, 두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재료인 배추만 있다면 빠른 시간 안에 간단히 끓여 낼 수 있다.익숙한 된장국에 배추를 넣으면 더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난다. 배춧국은 입에서 부드럽게 넘어가 속을 금방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헛헛한 겨울의 계절을 포근히 감싸는, 수수하면서도 투박한 배추의 맛은 다른 계절보다 특히 겨울에 잘 어울린다.2022년 겨울이 찾아왔다.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 탓에 잔뜩 몸을 움츠리곤 빠르게 걷고 하지만, 집 근처 나무들을 마주할 때엔 걸음을 멈추고선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곤 한다. 겨울철 나뭇가지를 잘 살펴보면 동그란 봉오리가 작게 맺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흔히 겨울눈이라 불리는데 나무가 다음해의 봄의 삶을 대비하여 만들어놓는 일종의 예비 꽃과 잎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나무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의 겨울눈을 만든다는 것인데, 목련나무는 여러 겹의 껍질을 쌓아 튤립 모양 형태고 두르고 바깥 부분엔 털을 이용하여 겨울눈이 상하지 않도록 보호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칠엽수는 끈적한 진액을 통해 겨울눈을 감싸 매서운 찬바람으로부터 겨울눈을 보호하며 겨울을 보낸다. 얼핏 보면 가지 위로 작은 알배추가 피어난 듯한 모양이다. 이듬해를 바라보는 겨울의 눈이라니, 씩씩하게 맺힌 겨울눈을 마주하다 보면 겨울의 찬바람을 뚫고선 집을 향해 갈 수 있는 굳센 기운을 얻을 수 있다.잔뜩 움츠린 겨울은 생장을 멈추고선 나 자신을 보호하며 잠시 잠들지만, 봄이 오면 기다렸다는 듯 겨울눈 속에 꽁꽁 잠들었던 꽃과 이파리를 크게 펼쳐낼 것이다. 이듬해의 찬란한 봄을 위한 겨울의 기다림은 충분히 유의미하며 가치 있기에 지루하지 않다. 키 큰 나무들이 즐비한 가로수를 걷다보면 나무의 몸통 주위로 뜨개로 만든 겨울옷이 둘러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래피니 니팅(Graffiti Knitting)’이라는 용어로 털실로 뜨개옷을 짜서 나무나 동상 등에 입히는 작업이다. 그렇게 겨울옷을 입은 나무들은 겨울 내내 얼지 않고 온기를 품고선 살아간다. 형형색색 뜨개 옷을 입은 나무들이 거리를 지키고 서 있을 때,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걸으면 무언가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든다.어둡고 추운 막막한 겨울이므로 무언가를 자꾸만 나눌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되고 나눔과 함께의 가치가 실현되었을 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정말 더는 춥지 않다.

2022-12-27

당신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꽃같이 젊디젊은 나이에 하늘로 간 영혼들을 두 번 죽이는 유족들”, “#우려먹기_장인들”, “자식팔아_장사한단소리_나온다”, “#나라구하다_죽었냐”. 지난 12일 국민의힘 소속의 창원시 의원 김미나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내용이다. 아마도 그는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과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생각되는 자들을 향해 쓴소리를 하려던 것이겠지만, 그 소리는 쓰지도 않았고 달지도 않았다. 그건 단지 인신공격에 불과했을 뿐이다. 감정적으로 가장 약해져 있는 사람을 향한, 불필요한 인신공격.심지어 김 의원은 지난 달 말에도 방송사 인터뷰에 참여한 한 유족의 발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망언을 하기도 하였다. “지 XX를 두 번 죽이는 무지몽매한 XX”라며 “자식 팔아 한 몫 챙기자는 수작”, “당신은 그 시간이 무얼 했길래 누구에게 책임을 떠넘기는가! 자식 앞세운 죄인이 양심이란 것이 있는가”. 엄연히 “지 XX”, “자식 팔이” 등의 원색적이고 악의적인 워딩이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 의원의 해명은 다음과 같았다. “유족들을 이용하는 단체를 향한 발언이지 유족들을 향한 발언이 아니다. (중략) 유족들이 들었을 때 부적절한 내용이 있다고 하면 죄송하다”.아마도 김 의원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으리라. 참사를 정치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사건은 불의에 벌어진 참사일 뿐, 어떤 의도가 개입되어 벌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계기 삼아 정권을 공격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김 의원의 생각이 이와 같다면, 이건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생각이다. 그것이 불의에 벌어진 참사이며 어떤 의도가 개입되어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와 같은 참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었을 기회가 우리에게는 여러 번 있었다.예컨대,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다. 다스린다는 말은 어떤 누군가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사익을 축적하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살피고 관리하는 일, 정리하고 수습하고 바로 잡는 일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그 다스림의 자리는 특정한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선출된 국민의 대표가 그 자리에 위치하더라도, 그것은 법이 정한 기간 내에서의 점유일 뿐,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이렇게 잠시 ‘다스림’의 자리를 점유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것, 그리하여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막는 것에 있다.김 의원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슬퍼진다. 그와 같은 ‘정치’의 의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모두 망각한 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자기보전적인 말하기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자신이 행해야 할 정치와 다스림의 근본에 대한 고민을 망각하고, 자신을 그 자리와 동일시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고 여겨지는 정치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능력과 책임에 대한 고민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과 거짓에 대한 판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동일시한 것에 대한 공격과 그것에 대한 방어만이 존재할 뿐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인문학 강사로서 그의 말이 한층 더 처참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와 같은 정치적 방어의 언어가 어떠한 논리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시의원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으로서, 유가족의 말에 자리하고 있는 논리에 대해 논리로서 이야기해야 했다. 하지만 김 의원이 택한 것은 논리적으로 유가족의 말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 자체를 공격하고, 그들을 부도덕한 정치적 악의를 가진 사람으로 규정하고자 했다. 그것도, 아주 원색적인 표현들을 남용하면서.진실과 거짓에 대한 판단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김 의원을 비롯해 막말을 쏟아내는 여러 의원들을 바라보며 그것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진실은 단순히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이 연루된, 그렇기에 자신의 양심을 걸고 지켜야 하는 거짓 없는 사실, 그것이 바로 진실이다. 막말을 일삼는 의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어떤 것을 진실로 여기며 살아가는가. 어떤 진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그러한 말을 쏟아내는가. 그리하여, 당신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당신이 원하는 국가란 정녕 어떤 모습인 것인가.

2022-12-20

말랑말랑하면서 단단한 것

예리하지 못한 사람에겐 그만큼의 말랑말랑한 구석이 있다. /언스플래쉬 누군가와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상대의 말에 관해 곱씹고 생각해보기도 전에 고개부터 끄덕인다. 고치고 싶은 나의 오래된 습관 중 하나다. 상대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대하는 나름의 배려일까. 혹은 생각의 편협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방어적으로 취하는 행동이 아닐까. 무엇이 됐든 나는 상대의 의견에 긍정하는 형태를 자주 취하고 돌아서면 매번 후회하기 일쑤다.특히 그것이 고개를 끄덕여서는 안 될 내용이었을 때, 상대의 생각에 힘을 실어주면 안 되었을 때,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취한 단순한 행동이었을 때, 나는 나의 나약함에 무너지고 만다. 왜 면전에 대고 말하지 못하지? 그건 틀렸다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고. 무분별한 긍정과 무책임한 승낙 사이에 있는 건 불편한 상황을 회피하려는 얄궂은 태도다.모두와 다 잘 지내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다.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자꾸 행동하는 게으른 관성이다.글을 쓸 때는 살짝 용감해진다. 몇 번이고 숙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면서 내 생각을 가장 가깝게 표현해낼 수 있는 언어를 찾을 수 있다. 거칠고 뾰족한 마음을 가지런하게 정리한다. 그러나 나는 당연하게도 내 마음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것에 실패하고 만다. 내가 뱉어내는 이야기는 오해를 사기 쉽고 가장 싫어하는 나의 부분까지 들키고야 만다.글이란 참 이상한 것이라서 교묘하게 돌려서 보여주려고 해도 결국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은근히 탓하는 마음까지도 드러나게 된다. 내가 적은 문장은 수정될 수 없으며 끝끝내 내 뒤를 따라다닌다.어쩌면 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가닿은 언어는, 그것이 고약한 내용일수록,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모르는 것이 많고 미래의 나 역시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아서 나는 매일같이 나의 언어를 의심한다.정말 그렇다. 말이든 글이든 행동이든 쉬운 것이 없다.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데… 좀 더 뻔뻔해져도 될 텐데… 그게 어렵다. 긍정도 부정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노라면 한숨부터 나온다. 의도적으로 딱 잘라 선을 그어보아도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다. 그건 내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자기혐오의 일종일 수도 있고 흔한 자기 검열의 발현일지도 모른다.언젠가 그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분명한 태도를 해명하고 싶다는 욕구와 내 입장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을 이불처럼 덮었다. 어느 순간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관계를 맺는다는 건 어떤 면에선 필연적인 오독이 필요하니까. 단 하나의 오해도 없이 타인을 안다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누군가에게 나는 우유부단함으로 점철된 사람일 수 있고 불편하리만큼 내면을 보이지 않는 사람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사실이다.어떤 면에서는 예리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또 그만큼의 말랑말랑한 구석이 있다. 냉철하고 적확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을 잘하는 부류가 있다. 딱 잘라 표현하는 사람은 그만큼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운용한다. 어떤 것도 완전한 답이 될 순 없다. 자기 태도가 옳다고 믿어버리는 순간 찾아오는 자만을 경계해야 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적의 손을 동시에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답을 내리는 것을 유보하고 현상을 찬찬히 마주하려고 하지만 누구보다 성급하고 저돌적인 면이 있다. 모순으로 똘똘 뭉쳐있으나 그것이야말로 나라는 사람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첨예하면서도 여유로운. 말랑말랑하면서도 단단한. 그런 것이 어디에 있겠나 싶으면서도 또 아주 없을까, 골똘히 생각해본다.그러니까 그것은 복숭아의 성질과 비슷하다. 복숭아라는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각각 고유의 특질을 지닌 맛 좋은 과일. 물복과 딱복이 섞인, 어떤 부분은 말랑하고 또 어느 부분은 단단한 그런 복숭아를 만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그래, 이런 형태도 있는 거지. 중요한 것은 나라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은지 깨닫는 것. 반성하고 후회하면서도 ‘나’라는 구심점을 잃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것. 그뿐이다.

2022-12-20

공 차는 소년들이 돌아온다

중학교 때 매년마다 ‘교내 구기대회’라는 학급대항 축구대회가 열렸다. 한 2주간 치러지는데 각 학년 결승전은 전교생이 다 나와서 관람하는 대형 이벤트였다. 구기대회 시즌이 되면 축구공의 PVC 냄새가 대기 중에 떠다녔다.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져 텅 빈 운동장에 가 혼자 연습하고 등교했다. 아직도 코끝에 희미하게 남은 축구공 냄새를 감각하면 가슴이 뛴다.1997년, 1학년11반 대표로 첫 출전한 구기대회 1라운드 경기에서 나는 승부차기 실축이라는 대굴욕을 맛봐야 했다. 나 때문에 우리 반 탈락했다. 이를 갈고 칼을 갈고 발을 갈며 와신상담, 겨울방학 내내 볼만 찼다.이듬해 우리 2학년3반은 플레이메이커 정찬범, 포워드 오조원, 라이트윙어 박찬영, 풀백 윤상호, 그리고 중원과 사이드를 오가며 중앙 침투도 하는 윙어 겸 새도우 스트라이커 이병철까지, 전력이 꽤 탄탄했다.12강 1라운드, 5반과 붙었다. 수비 후 속공 상황에서 오조원이 중앙선 위로 치고 나가는데, 정찬범이 “병철아 같이 올라가줘” 외쳤다. 질풍처럼 달려 어느새 나란히 침투하는 중에 오조원이 내게 패스했고, 그걸 받아서는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으로 드리블해 골키퍼 키를 살짝 넘기는 아웃사이드 칩킥으로 골을 넣었다. 구기대회 첫 골이었고, 2002년 안정환이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한 것보다 4년 앞선 감각적 플레이였다.다음 6강 라운드에서는 1반의 내 친구 박진형과 공격수와 골키퍼로 마주하는 운명의 장난에 괴로웠으나 승부 앞에 우정 따위는 없었다. 문전 혼전 중 수비 맞고 굴러 나온 세컨드 볼을 박진형 가랑이 사이로 넣으며 친구에게는 굴욕을, 우리 반에는 승리를 안기는 결승골을 기록했다.4강전, 아침부터 설사를 심하게 해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연장전 끝에 0대 0으로 비겼고, ‘신이 만든 단두대’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1년 전 실축의 대굴욕이 PTSD가 될 법도 한데, 자신 있었다. 겨울방학 동안 수없이 연습한 그 슛을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라. 1번 키커로 나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발 인사이드킥으로 오른쪽 골망을 갈랐다.대망의 결승전. 8반의 이홍규는 별명이 ‘야신’이었다. 인류가 축구를 시작한 이래 최고의 골키퍼라는 러시아의 전설 레프 야신을 방불케 했다. 오직 골키퍼 덕분에 결승까지 올라온 8반이었다.전반전에 우리 반이 선제골을 넣었다. 아슬아슬한 살얼음 리드를 지키던 후반전 중반, 상대진영 오른쪽 코너에서 박찬영이 땅볼 패스를 했다. 페널티 에어리어 외곽 20미터 지점, 굴러온 공을 힘차게 찬 내 오른발이 불을 뿜었다.로켓처럼 날아간 공은 몸을 날린 야신의 장갑 위로 솟아 크로스바 밑동을 때리고는 그대로 골망을 흔들었다. 구기대회에 푸스카스상이 있다면 무조건 수상했을 골이었다.그해 가을,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대표로 내가 상장을 받았는데 상장에 내 이름이 적힌 걸로 보아 아마도 내가 대회 MVP인 게 분명했다. 이듬해 3학년 대회에서도 두 골을 넣었는데, 한 골은 중앙선 부근에서 상대 골키퍼가 나온 걸 보고 롱슛을 한 게 들어갔고, 또 한 골은 후방에서부터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폭풍 드리블을 해 강력한 땅볼슛으로 왼쪽 골망을 갈랐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요즘 손흥민이 그걸 좀 비슷하게 찬다. 그때 인근의 봉천여중 애들이 내가 축구하는 걸 보러 왔다. 남녀공학을 다녔라면 90년대 농구대잔치 연세대 우지원 인기는 그냥 능가했을 것이다.그 시절 축구는 우리들의 ‘세계’였고, 구기대회는 월드컵이었다. 나는 봉천중학교 구기대회에 통산 3회 출전해 7경기에서 5골을 기록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스트라이커였다. 그 모든 골 장면들이 24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우리나라가 1998 월드컵 네덜란드에게 5대0으로 진 새벽, 운동장에 가 울면서 공을 찼다. IMF의 설움과 겹쳐 더 서러웠다. 2002 월드컵에서 그 눈물은 환희로 바뀌었다.지난 한 10년은 동네 학교 운동장이 썰렁했다. 그 많던 공 차는 소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했다.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우리에게 짜릿한 감동과 환희를 줬다. 이제 공 차는 소년들 다시 돌아올 것이다. 손흥민과 황희찬, 이강인을 흉내 내느라 밥도 거르고 운동장을 뛰어다닐 것이다. 모두들 먼 훗날 추억할 골 하나씩 넣었으면 한다.

2022-12-13

후회를 포기하지 않는 방법

요즘 아주 작은 문제에도 많은 고민을 하는 편이다. 후회하기 싫어 평소 심사숙고 선택을 하는 편이지만 늘 옳은 선택을 할 순 없는 법이다. 가끔 잘못된 선택을 하는 바람에 후회가 크게 남을 때가 있다. 결국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몰입하며 너무 많은 시간을 고민만 하며 살고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최근 아주 사소한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어려움을 마주했다.오늘 점심은 가볍게 샐러드를 먹을 것인지, 냉장고에 남은 채소들을 꺼내어 된장찌개를 요리해 먹을 건지 냉장고 앞에 서서 점심시간이 지날 정도로 메뉴 고민을 한다. 또는 깔끔한 흰색 운동화를 살 건지 아님 겨울에 어울리는 블랙 색상 신발을 고를 것인지 쇼핑몰 상세페이지 화면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오래 고민한다. 붕어빵 트럭 앞에서 슈크림을 먹을 것인지 팥을 먹을 것인지 필요 이상의 시간을 쏟으며 서성이는 등 아주 사소하고 단순한 선택에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마음이 불편하다.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는 것도 어렵지만, 무언가를 택하기도 전에 혹시 후회가 남으면 어쩌지 하는 초조함은 결국 나의 마음을 좁고 초라하게 만든다.어느 때엔 인생에서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중대한 선택지가 다가온다. 동시에 무엇을 선택하든 후회가 남을 것이라는, 지레 겁먹은 아이가 내 안에서 스멀스멀 일어나는 걸 직감으로 느낄 수 있다. 또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면 또 다른 한쪽을 잃게 된다는 두려움과 욕심 때문에 더욱이 선택의 기로에 서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고 만다. 그렇게 끝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가장 쉬운 포기라는 방법으로 도망을 친 적도 무수히 많다.햄릿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햄릿 증후군이란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며 선택을 결정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대사에서 나온 신조어다. 쉽게 말하면 선택 장애 또는 결정 장애라 보면 된다. 햄릿 증후군의 원인으로 많은 심리학자들은 부모의 선택과 결정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유년기를 보낸 경우나 과도한 정보 속에서 결정을 미루는 습관이 버릇이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우연히 유튜브 속에서 뇌를 연구하는 물리학자인 정재승 박사님의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정재승 박사님은 후회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선택을 하는 과정을 통해 만족이나 실패감을 많이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이어 후회를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후회는 고등한 생물이 가지는 능력으로 뇌의 전전두엽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때문에 인간이 후회하는 이유에는 다음에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뇌가 설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왠지 영상을 보며 안심이 됐다. 그러니 후회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뇌의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해 보려 한다. 뇌의 신호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이다 보면 결국 후회를 수용하고 받아들여 더 나은 삶과 목표를 영유하는 성숙한 자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게임 슈퍼마리오에는 콧수염에 멜빵바지를 입은 배관공 마리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악당인 쿠파에게서 납치된 피치공주를 구하기 위해 낯선 땅으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다. 높은 스테이지로 갈수록 더욱 어려운 난이도의 맵이 존재하고, 마리오가 가진 목숨 또한 한정되어 있어 늘 스테이지 초반엔 자주 배드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마리오 앞에는 어떠한 장애물이 있는지 캐릭터가 나아가기 전까진 알 수 없지만 단순히 몇 번의 시도와 실패의 과정을 겪는다면 캐릭터가 어느 곳으로 건너가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실패의 과정에서 후회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오히려 후회로부터 파생된 경험의 노하우를 통해 결국 최종 목표인 공주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수많은 시도와 실패로 거듭된 경험으로 얻어낸 해피 엔딩은 무척 값지고 벅차다. 게임을 하는 것처럼 가볍고 흥미롭게, 가끔은 대범하게 나아갈 줄 아는 지혜와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그러니 또다시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다른 하나의 선택지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내겐 시행착오로 인한 경험이 있고 후회를 딛고 나아가려는 발돋움이 있음을 안다. 후회로 인해 계속 과거를 향해 마음이 기운다면 유쾌하면서도 씩씩한 슈퍼마리오를 떠올려 본다.

2022-12-13

즐거웠으면 좋겠어

누구든 그렇다. 즐겁던 일들이 하나도 즐겁지 않은 일이 되고, 너무나 기다려온 순간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순간이 된다. 아무런 생각 없이 즐기듯 하면 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부담감에 치를 떨게 된다.일을 처음 시작하게 되는 순간을 떠올려보라. 어떻게든 취직을 하려고 했던 순간이 무색하게도, 실수에 대한 부담이 스스로를 짓누른다.등단을 준비하던 20대 때에는 등단만 하게 된다면,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쓰며 작가라는 직업을 즐기며 살 줄 알았다.하지만 정작 등단을 하고 나서 느낀 가장 큰 감정은 즐거움이 아니었다.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과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긴장감이 매순간 나를 압박했다.글의 내용이 구설수에 휘말릴까봐 두려웠고, 이번 청탁을 끝으로 더 이상 일이 들어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고민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쓰고 싶은 글보다 남들이 좋아할 글이 뭘까에 대한 고민을 훨씬 많이 했던 것 같다.타인이 좋아하는 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 그게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에 빠져있다 보면 나 자신이 사라져버린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매순간 보이지 않는 타인에게 자신을 평가받는 기분.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그 평가에 자신을 점점 더 규격화해나가는 것 같은 기분. 그땐 이 기분이 작가의 중압감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대중에게 글을 보여주고 평가 받는 직업이 가진 고충 같은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반 정도만 맞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사실 우리가 살면서 저지르는 실수라는 건, 혹은 일을 처음 시작하면서 저지르는 실수라는 건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리 큰일들이 아니다. 단지 일을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가 자신의 일생을 좌지우지할 것만 같은 중압감에 그 크기를 더욱 크게 느끼는 것뿐이다.물론 가끔은 그런 거대한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르지만, 어떤 일이든 신입에게는 그렇게 크고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는다. 실수를 마음껏 저지르라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벌벌 떨 필요까지는 없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하지만 우리는 일을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면 늘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사소한 실수가 나에 대한 누군가의 평가로 이어질 것만 같고, 그 실수가 나를 평생 따라다니며 짓누를 것만 같다고 느낀다. 순간의 판단과 사소한 말실수가 나의 평생을 망가뜨릴 것만 같은 기분. 늘 긴장하게 되고, 그래서 더 위축되고, 그 탓에 다시금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고, 실수를 들키지 않으려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고, 이 일에 적성이 맞지 않는 걸까 고민하게 된다.생각해보면 허송세월 같은 건 없다. 조금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일이 조금만 손에 익고 나면, 영영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던 마음의 여유가 조금씩 차오른다. 그 즈음에 다시금 옛 일들을 떠올리자면 괜한 불안과 걱정을 한껏 부풀려 상상하며 살아온 것만 같아 실소가 나오곤 한다. 어쩌면 내가 사회 초년생으로써 느낀 불안과 걱정이라는 건 단지 내가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얼마 전 ‘베개’라는 독립문예지의 낭송회에 다녀왔다. 그날도 원고 작업에 한껏 지쳐있었다. 그날 내가 쓴 글이 자기 복제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글을 썼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였다. 그러던 찰나에 내가 본 낭송회의 풍경이란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런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각기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기 위해 시를 쓰고, 그걸 최선을 다해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하는 장면은 분명 감동적인 것이었다. 타인을 위해 쓴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쓴 글을 읽는 것. 어쩌면 그게 문학이라는 문화의 본질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청탁과 원고료에 목을 매는 나 자신이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던 하루였다.사실 생각해보면 작가라는 건 꽤 즐겁고 재밌는 직업인데.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하고 사색하고 무언가를 목격하기 위해 끊임없이 세상을 돌아다닌다는 건 생각보다 낭만적인 직업인데, 나는 이 직업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하나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즐거워지고 싶다. 즐거워지기 위해 다른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하면서 즐거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2022-12-06

건조함을 경계하기

날이 부쩍 차가워졌다. 집 밖의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뻗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두껍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겨울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다. 서늘한 공기에 입술도 손끝도 바싹바싹 마르는 것이 느껴진다. 이맘때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건조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감정의 폭이 유난히 큰 사람이 있다. 사소한 일에 크게 웃고 우는 이들과는 반대로 냉철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흔히 감정적, 이성적으로 나누는 이러한 특질은 사람의 본질을 결정짓는 부분은 아니다. 그러나 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는 다를 것이며 옳고 그름을 떠나 삶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상반된 관점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나는 스스로가 굉장히 감정적인 편이라 생각했지만 최근엔 어떤 부분이 완전히 메말라버렸다고 느낀다. 그건 겨울이라는 계절이 주는 특이성과는 또 다른 것이다. 출퇴근하고 여러 사람과 부대끼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자꾸만 생겨난다. 단조롭고 고요한 시간을 살았을 때는 알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인물과 사건이 현실을 사는 내 앞에 나타난 순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고민으로 나타난다.그러니 자유와 사랑, 낭만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날이 점점 줄어든다. 이상을 꿈꾸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믿는 일이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좋게 보자면 현실적으로 되었다고 할까? 낙관적인 내일을 상상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늦지 않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처리해야 하는 업무의 양. 문득 눈이 떠진 이른 새벽 소복이 쌓인 첫눈을 마주하고서는 탄성보다 탄식을 뱉어냈다. 내면 깊은 곳에서 언제나 퐁퐁 솟아오르던 감정이 말라서 어떤 면에서는 마음이 완전히 늙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감수성이야말로 우리가 획득해야 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감수성이 높다는 것은 타고난 것이기도 하지만 노력으로도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동시에 경계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금방 휘발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면면을 가지고 있으며 개인에게도 여러 면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모두가 같지 않음을 인정하고 모든 일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다고 여기는 순간부터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는 감수성은 시작된다. 삶은 수학 공식처럼 정확한 숫자를 대입하면 맞아떨어지는 답이 나오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투명한 답을 획득하기 위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여전히 나는 누군가의 문장을 읽고 눈물을 흘린다. 좋은 노래를 들으면 숨이 쉬어지는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찬찬히 헤아리면 어김없이 슬퍼지고 만다. 그것은 내 안에 아직 살아있는 감정의 불씨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증거다. 현실을 살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건조함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감정 또한 세계를 돌파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이 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월드컵으로 모두의 마음이 들썩일 때 한 연예인이 대한민국의 16강 진출과 관련하여 ‘어차피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왜 희망을 품느냐’는 식의 이야기를 꺼내어 빈축을 샀다. 누군가는 그것을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리와 패배를 계산하며 가능성이 적은 쪽을 믿는 이들을 조롱하는 것은 패배주의에 빠지기 쉬운 일이다. 그럴 때 우리는 허무적이고 냉소적인 사람으로 전락한다. 감정을 누르고 오직 머리로만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순간 모든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희망을 믿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 아니다. 낙관적인 가능성만을 열어놓는 것도 아니다. 부정적인 영역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알다시피 그가 불신했던 미래는 현실이 됐다. 포르투갈과의 경기 끝에 대한민국의 16강 진출이 확정됐을 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손에 땀을 쥐고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는지 모른다. 꺾이지 않는 마음. 분투의 마음. 다음을 꿈꾸고 해낼 수 있다고 믿는 일. 행여 그 믿음이 실패로 돌아올지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무조건적인 승리를 바라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가 뭔가를 함께 바라고 간절히 호흡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손을 잡을 수 있는 곁의 누군가가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 건조하게 느껴졌던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온다. 어떤 일이 찾아와도 절대 메마른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이 겨울을 시작한다.

2022-12-06

‘아들’이 아닌 ‘이정후’

키움 히어로즈의 이정후가 2022 한국프로야구 MVP에 등극했다. 타격 5관왕에 오르면서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진출시켰으니 올해 한국프로야구는 이정후가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만 잘한 게 아니라서 더 경악스럽다. 데뷔 첫해 신인왕을 차지하더니 6년 연속 3할, 최소경기 1천 안타 등 놀라운 기록을 여럿 달성했다.실력만 좋은 게 아니다. 치열한 승부욕과 근성, 철저한 자기관리, 겸손한 성품, 잘생긴 외모까지 갖췄다. 이정후만큼 팬서비스를 잘하는 선수도 없다. “이정후 여기로 공 날려줘” 팻말을 든 관중에게 정확하게 홈런 공을 날린 ‘홈런 배달’은 만화에서나 볼 법한, 가슴 설레는 낭만이었다. 행운을 차지한 두 여성팬에게 사인은 물론 좌석 업그레이드에 야구 배트까지 선물했는데, 그 팬서비스로 인해 야구팬이 적어도 10만 명은 늘었을 것이다.이정후가 MVP에 오른 건 그의 아버지이자 한국 야구의 전설, ‘바람의 아들’ 이종범을 이어 부자(父子)가 MVP를 수상한 유일한 사례로 세계 야구사에 기록됐다. 아버지는 데뷔 2년차인 1994년, 한국야구의 영원한 전율로 감각될 신화를 썼는데, 4할 200안타 100도루 20홈런에 도전하면서 타격 5관왕에 올랐다. 28년이 지난 후 아들 역시 25세 시즌에 신화를 썼다.“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이다. 이름이 곧 ‘야구’인 전설적인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운동을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아버지는 야구만큼은 절대 시키지 않으려 했다. 아버지 몰래 엄마 손을 잡고 초등 야구부에 등록한 날부터 이정후의 야구는 ‘홀로서기’이자 ‘아버지 넘기’라는 험난한 여정이 됐다. 스스로 이기지 못하면 평생 ‘이종범 아들’로 남을 것을 알기에, 아버지는 그 어떤 기술적 조언도 해주지 않았다. 야구부 감독에게 전화 한 통도 안 했다. 그런 아버지가 야속하기도 했겠지만, 어린 소년은 ‘이종범’이라는 짙은 그림자를 혼자 힘으로 벗어나서 ‘아들’이 아닌 ‘이정후’가 됐다. 시를 빌리자면, 이정후의 야구 인생은 “나는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가 되겠다”(이경교, ‘에게해’)는 대서사시를 지나온 셈이다. 가난 극복이라는 뚜렷한 동기가 있던 이종범보다 세상의 주목과 기대를 넘어서야 했던 이정후의 싸움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지젝은 오늘날 부성적 권위의 쇠락에 대해 “아버지는 더 이상 자아 이상으로서 지각되지 않으며, 그 결과 주체는 결코 성장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로 표상되는 근대의 수직적 가부장제, 거대담론, 근대적 제도들이 힘을 잃어버린 오늘날엔 ‘아버지’라는 대상 자체가 상징적 위엄을 가지지 못하므로, 깨뜨리고 넘어서야 하는 기성의 체제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근대적 자아 이상을 지각할 수 없는 주체들은 ‘아버지 극복’을 통한 성장을 이룰 수 없다는 게 지젝의 견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제 아들이 교수가 됐습니다. 의대를 졸업하고, 제 도움으로 의학박사를 받았습니다. 만31살에 조교수가 된 셈입니다. 이제 집안에서 O교수라고 부르면 두 사람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모 교수가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자랑하려다가 혹 붙였는데, 아버지의 논문 다수에 아들이 제1저자로 등재된 것이 알려지며 특혜를 의심받았다. 오늘날 아버지다운 아버지, 아들다운 아들이 있긴 한가? 아버지들은 아들을 하룻강아지로 키운다. 아버지를 넘지 않아도 아버지가 가진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세습과 상속의 시대다. 고슴도치 아버지들, 또 아빠 찬스에 기대는 정신적 젖먹이들은 이정후의 성장서사를 학습해야 한다.글을 맺으며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이정후가 거둔 성공은 스스로 알을 깨려는 부단한 노력과 아버지의 무심한 듯 세심한 훈육이 줄탁동시(5550啄同時)를 이룬 결과이지만, 이 놀라운 신화에는 ‘바람의 며느리’ 정연희 씨의 헌신과 기도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이 아들과 아버지만 주목할 때, 정연희 씨는 소유격 조사 ‘의’에 스스로를 질끈 동여매고 ‘이정후의 어머니’로, ‘이종범의 아내’로 살았다. 그 덕분에 아들은 ‘이종범의 아들’이 아닌 ‘이정후’가 될 수 있었다. 부모는 결국 자녀에 의해 완성된다면, 정연희 씨는 위대한 어머니다. ‘아들’을 벗고 마침내 진정한 자기 이름을 얻은 이정후가 이제는 ‘정연희의 아들’로 불려도 된다.

2022-11-29

시지프스의 돌 그리기

최근 각종 취미개발 플랫폼에서 오일파스텔을 활용한 수업들이 많이 보인다. 미술 재료 도구 중 하나인 오일파스텔은 파스텔의 한 종류로, 크레용과 파스텔의 중간 정도 질감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파스텔에 왁스나 기름을 섞어 만들기 때문에 기존 파스텔보단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그려지며 특유의 촉촉하면서도 매끄러운 질감 표현 덕분에 그리는 재미가 크다. 또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분의 공간이 크게 필요치 않고, 물이나 팔레트 등의 도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장소든 간편하게 그릴 수 있단 장점이 있다. 덕분에 전문가뿐만 아니라 많은 미술 입문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재료기도 하다.오일파스텔은 기존 파스텔보다 단단하고 가루가 없으며, 입자가 두껍기 때문에 굵거나 두터운 굵기 표현이 가능하다. 오일파스텔에서 가장 재미있는 특징은 색 위에 색을 얹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다. 가장 손쉬운 재료인 손가락부터 압지나 얇은 가죽으로 말아 만든 찰필 또는 티슈나 스틱, 면봉 등의 재료로 세밀한 색 섞기가 가능하다.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 효과를 자연스럽게 줄 수 있을뿐더러, 치즈나 빵 등의 덩어리지는 느낌이나 쌀의 고슬거리는 질감 같은 섬세한 그리기 또한 가능하다.오일파스텔이 생소해서 다소 역사가 짧은 듯싶지만 사실 오래 전 입체파를 대표하는 화가인 피카소도 즐겨 쓴 재료 중 하나다. 오일파스텔은 평면상에 여러 선이나 색채로 형상을 그려내는 회화의 표현이 충분히 가능하면서도, 명암 위주로 그림을 그리는 소묘의 성격까지 모두 가졌다. 목탄에서 시작하여 파스텔, 그리고 오일파스텔까지 오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 흥미로운 미술 도구다.오일파스텔은 단순히 흰 도화지에 색을 가득 채워 넣는다거나 스케치 안에 색을 칠하는 방법도 있지만 긁어내기, 찍기, 덮어씌우기, 혼합하기 등 다채로운 기법을 사용하여 그림을 표현할 때에 재미가 더해진다.오일파스텔은 무른 성질 때문에 종이 위로 미끄러지듯 그려진다. 힘을 얼마나 주는냐에 따라 색이 다르게 나오기도 한다. 때문에 생각했던 색과는 전혀 다르게 나올 때가 있다. 색을 많이 써보고 힘을 얼마만큼 주어야 하는지 시도와 실패를 거듭하며 더 나은 그림이 나올 수 있도록 나아가는 과정은 무척 흥미롭기까지 하다.나는 주로 러닝을 한 뒤에 그 날 본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그림을 그린다. 가만히 배경을 들여다보면 자연은 정확한 틀이나 일정한 규칙을 가진 모양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각기 다른 본질이 섞여 있고 그것이 모두 일정치 않고 다양한 선과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에 더욱 자연스럽고 경이롭다는 걸 알게 된다.구름은 단순히 흰색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하늘색, 분홍색, 보라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이 자연스레 섞여 있다. 생각하지도 못한 색상이 겹쳐 서로를 물들이고 있을 때에 대상이 더욱 구체적으로 보인다. 색과 색이 자연스레 연결되어 섞일 때의 즐거움은 배가 되고 그리기의 행위는 더욱 자유로워진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스케치를 한 뒤에 작은 디테일을 잡아가는 과정을 유유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가득 채워진 색을 마주하면 걱정이 조금씩 녹아 물러지는 기분이 든다. 명암이나 색감, 형태 등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여러 색이 겹쳐 하나의 존재로 다가올 때면 종이 위로 생명력이 느껴지며 활기가 돈다. 마음이 무너지려고 할 때마다 날카롭게 깎곤 했던 다짐이 조금씩 누그러져선 끝내 안정이 찾아온다.근래 들어선 돌을 자주 그리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가장 맨 아래서부터 올린 바위는 산꼭대기에 다다르자마자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무한으로 돌을 굴러야 하는 시지프스의 벌은 영원히 끝나지 않기에 의미가 없다. 하지만 독일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니체는 이를 두고 인생은 허무한 것이니 이 허무주의를 받아들이되, 오히려 나 스스로 중심을 정하여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원한 허무 속에서의 초인의 모습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무언가 덧없다거나 중심이 흔들리는 날엔 크고 작은 바위를 그린다. 신기하게도 그릴 때마다 다른 모양, 다른 색을 지닌 각각의 돌이 탄생한다. 그렇게 나의 중심은 부드럽게 그려지고 수많은 색을 띠고 있다. 그렇게 눈으로 확인하면 퍽 안심이 된다.

2022-11-29

상대평가라는 허상

어느새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날이 추워졌고,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한 학기가 끝나간다는 신호다. 학기 내내 얼른 종강만 했으면 좋겠다고, 하루라도 좀 맘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종강이 가까워지자 괜시리 마음이 바빠진다. 편치 않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평가할 방법들을 점검한다. 내가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내가 맡은 수업은 말하기 수업과 글쓰기 수업인데, 객관적인 평가가 다소 어려운 과목이다 보니 어떤 기준으로 평가를 하는 게 좋은 방법인지 항상 궁금해진다. 사실 말하기와 글쓰기는 개인의 노력 여하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부분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라 결과물을 중심으로 평가를 하는 것이 옳은지 늘 고민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의 말하기와 글쓰기를 성취도로 평가를 하자니, 객관적인 결과물이 눈앞에 놓여있어 그 또한 석연찮기는 마찬가지이다.그래서 일종의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 상호평가였다. 평가 점수의 절반은 내가 책정하고, 나머지 절반은 같은 반의 학생들이 책정하도록 했다. 단순히 점수만이 아니라 피드백 또한 해줄 것을 부탁했다. 생각보다 학생들이 성실하게 평가를 해주었던 덕분에, 1학기 때에는 성적 평가를 하기 꽤 수월했던 것 같다. 또, 해당 성적에 대해서 이의가 들어온 경우에도 이를 해명하고 설득하기에 꽤 도움이 되었다. 어쨌든 자신 또한 평가의 주체였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하지만 이렇게 학생들을 각각의 점수에 따라 줄을 세우더라도 여전히 의구심이 남곤 한다. 나는 정말 아이들을 잘 가르친 걸까? 아이들은 내가 가르친 걸 잘 흡수한 걸까? 막상 이런 방식으로 평가를 하다보면 매 수업 성실하게 임했던 학생들이 항상 좋은 결과를 받는 것은 아니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수업을 성실하게 들은 학생이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재능이든 뭐든 좋은 결과물을 내놓는 학생이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맞는 것인지 늘 헷갈리곤 한다. 어쨌든 둘을 절충하는 방식으로 성적을 내곤 하지만, 그렇다고 의구심이 사라지지는 않는 것 같다.사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상대평가 방식을 썩 신뢰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성취도가 아닌 상대적인 결과를 가지고 평가를 하는 것이다 보니 그다지 성취도가 높지 않더라도 한 반 안에서 상대적으로 잘하기만 한다면 A+를 받을 수 있다. 반면에 운이 안 좋게 학업 집중력이 높은 학생들이 많은 학과에서는 비슷한 성취도를 보이더라도 같은 성적을 받으리라 보장할 수 없다. 예컨대, 수업 반마다 성적을 책정하다보니, 한 반 내에서는 큰 문제가 없지만 그걸 학교 전체의 규모로 놓고 보게 되면, 어쩔 수 없는 결과적인 불평등이 생기곤 한다.그리고 또 한 가지, 반 전체의 분위기가 다 같이 열심히 하지 않는 방향으로 갈 때면 정말 걷잡을 수 없어진다. 어차피 성적은 상대적으로 결정 나는 것이다 보니, 다른 아이들보다 약간만 열심히 하면 될 뿐, 교강사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대학 내 상대평가 비중의 강화가 경쟁력 강화를 위함이었다는 것을 떠올려보자면, 이건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폐해가 아닐까 싶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학교의 목적이 지식의 습득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면, 이처럼 지식의 습득 여부가 아닌 상대적인 결과에 따라 성적을 매기는 건 어쩐지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입사를 비롯한 여러 과정에 있어 대학에서의 성적이 공신력과 변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상대평가의 비중을 늘렸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지식의 습득에 도움이 되는 결정인지에 대해서는 왠지 고민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인문학 교사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면, 아무래도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거기에 골몰하는 것보다는 수업 시간을 통해 이후에는 해볼 수 없는 고민을 해봤으면 싶다. 사실 입사를 비롯한 이후의 과정들에 대학에서의 성적이 그렇게 큰 변별력을 갖지도 못하는데, 왜 학생들이 오직 좋은 성적을 받는 것에만 골몰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대학교육의 실패란, 단지 사람들이 상식이 부족해진다거나 하는 지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사람들을 점점 더 아무런 사유도 질문도 하지 않도록 만들어가는 그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하지만 어쨌든, 이번 학기에도 나는 학생들을 평가하고 제도와 규칙에 따라 성적을 배분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고민들을 학생들에 대한 평가에 녹여낼 수 있을지, 과연 이런 고민이 언젠가 끝나기는 할지. 어쨌든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삶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좋은 평가방법을 고민해보는 수밖에 없겠다.

2022-11-22

나의 결핍이 자랑이 될 때

낙엽이 진 자리는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질 것이다. /언스플래쉬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늦가을,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지금 나는 잘살고 있는 걸까?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이상하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생각은 오후의 그림자처럼 자꾸만 길어진다. 그간 내가 이뤄온 성취와 다짐, 소망, 꿈꾸는 미래의 방향성이나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나의 단점까지 떠오른다. 스스로가 대견하다가도 한없이 작고 연약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콧잔등 위로 눅진한 빛이 내려앉으면 불현듯 하나의 깨달음이 밀려온다. 아, 가을이구나. 그래서 이렇게 감상적이구나.그런 날들이다. 달력을 한 장 넘기면 한 해의 끝이 다가오고, 몇 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해가 밝아있을 것이다. 올해의 나는 어땠던가. 이번 해는 제대로 살아냈는가. 뭔가에 쫓기듯 바쁘게 살았지만 매일같이 실수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었고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 발걸음이 중심이 아닌 언저리를 돌고 있다는 감각. 오랜 시간 동안 내 안에 끈덕지게 붙어있는 우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요즘에는 잠이 부쩍 많아졌다. 온종일 잠자는 것도 가능하겠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가끔은 잠자는 행위가 최후의 도피처럼 느껴진다. 마음이 훼손되었다고 느끼는 날, 절망이나 고통과 같은 불행의 감정들이 내 안으로 썰물처럼 밀려드는 순간이 오면 나는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감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향함을 상상한다. 거기에서 나는 단 하나의 부족함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 된다. 통장에 돈이 넘치도록 가득하고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근심이라곤 없는 하루를 보내는, 비극적 사건은 절대 찾아오지 않으며 주변 이들에게 자신의 것을 기쁘게 내어주는 그런 사람.그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걸 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정말 있는 줄만 알았다. 그들이 세상의 다수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낙관적인 세계에서 산다고 여겼으며 웃는 얼굴의 사람들 사이를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헤집고 다녔다. 그러면 어떤 상실감이 찾아왔다. 인생을 운용하는 데 있어 중요한 하나의 조각, 그것을 이미 획득한 자들에게 질투를 느꼈으며 그 열등감이야말로 내 삶을 추동하는 원동력이었다.동시에 그런 내 마음이 들킬까 봐 두려웠던 적도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나를 두고 결핍이 많은 아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 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영영 들키고 싶지 않던 비밀을 폭로 당한 사람처럼 마음이 홧홧해졌다. 그렇지만 친구 앞에서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씩씩하게 웃었다. 내 안에서 자꾸만 떠오르는 어떤 부정성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슬픔, 모자람, 추하고 가끔은 천박하다고 느껴지는 내 모습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나는 나를 지킬 수 있었다.손에 쥔 것에 별로 없다고 느껴질 때 나는 내 안에서 솟아오르는 우울을 본다. 그것이 없다면 나는 메마르고 텅 빈 몸이 되는 것이다. 늦가을의 책상 앞에 앉아 삶에 대해 몇 시간이고 고민하는 날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문장으로 적어내려는 시도도 없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고 세상을 불신하고 얼굴도 모르는 타인을 질투하고 연민하는 일. 세상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고 평온한 일상에 목말라하는 일. 이것은 모두 살아서 역동적으로 꿈틀대는 감정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이제 나는 나의 결핍을 자랑으로 여긴다. 내 안에 비루하고 나약한 것들이 있다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주지 않지만 인간으로 남게끔 해준다. 쓸모없고 형편없는 것이 위대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나의 영원한 한계이면서 동시에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주는 요소라는 것을 안다.나는 나의 결핍으로 나를 증명할 수 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흩어지는 시간 속에서 혼자만 아는 어떤 표식을 남겨놓는 행위를 하는 일은 모두 나의 결핍 덕분이다. 나는 나의 결핍으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소통하며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어떤 방에서 울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다. 버석버석한 낙엽이 차곡차곡 쌓인 거리를 바라본다. 이제 곧 긴긴 겨울이 온다. 늘 같은 자리에 굳건히 서 있는 나무는 다가올 추위를 견디고 다시 싹을 틔울 것이다. 황망하리만치 텅 빈 자리는 더욱 빼곡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런 순환과 믿음을 떠올리는 가을이다.

2022-11-22

이태원, 환상과 현실

이태원 참사 이틀 뒤 월요일, 오전 수업에서 출석 확인을 위해 학생들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다가 목이 멨다. 안녕을 묻기조차 죄스러운 아침에 학생들에게 “무사하게 여기 앉아 있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50명 정도가 수강하는 수업이라 매주 네다섯 명쯤은 결석하는데, 이날은 이름을 불러 대답이 없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수업 마치고 조교를 통해 연락했더니 다행히 모두 별 일 없었다. 요 며칠 보도블록 위에 떨어진 플라타너스 낙엽 위로 늦가을 햇살이 부드럽기만 하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그런 나날이다.참사 직후에는 슬픔보다 분노가 더 컸다. 주체할 수 없어서, 학생들에게 다소 격한 목소리로 거친 생각을 토해냈다. 아니다. 감정을 토해냈다. “먹고 놀고 마냥 웃고 즐기는 티브이 예능프로그램들 몇 개만 남겨두고 싹 다 없애면 좋겠다”고 운을 뗀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갔다. 학생들에게 말한 내용 그대로 옮긴다.티브이도 SNS도 환상만 주입하지 현실은 말하지 않는다. 이태원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만 보게 하지 가파르고 비좁은 골목, 차와 사람이 마구 뒤엉켜 복잡한 도로, 마약과 성범죄 등 어두운 그늘은 은폐한다. 여행지의 아름다움만 노래하고 강도나 인종 혐오 등 치안 위험에 대해선 함구하는 여행상품이나 마찬가지다. 미디어와 SNS는 환상을 부추기면서 현실을 망각시킨다. 잊어야 할 괴롭고 팍팍한 현실이 얼마나 많으면, 다 잊고서 먹고 마시고 즐기라 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까지 잊게 하니 문제다. 현장에 출동한 구급차와 경찰차를 보고 핼로윈 코스튬인 줄 알았다고 한다. 사이렌 소리에 맞춰 음악을 틀고 노래 부르며 뛰었다. 환상에 취해 현실감이 마비된 것이다.축제의 주말을 즐기러 이태원에 간 사람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사람들에게 환상을 선물하면서 현실을 빼앗아간 미디어의 잘못이다. 도시 인프라의 몸피보다 몇 배는 큰 대중의 욕망을 다 수용도 못하면서 미디어와 함께 방관하고, 환상이 무너졌을 때 추락하는 이들이 무사하도록 완충력 지닌 튼튼한 현실을 만들지 못한 위정자들 잘못이다. 소방관, 경찰, 군인 등 제복에 대한 존경이 없는 사회 풍조도 그렇다. 내가 누리는 자유가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그 사실을 알면 쾌락원리를 위반하는 환상에 속지 않고 절제할 수 있다.쾌락은 아름다운 것이고, 환상 없이 우리는 살 수 없지만, 쾌락은 무책임하다. 환상은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다. 너무 황당해 믿을 수 없는 이 참사가 환상이면 좋겠다.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밤의 비극이 악몽이었다는 듯, 다음날 오후 텅 빈 이태원 거리가 다른 세상 같다. 하지만 현실이다.다른 거 다 차치하고, 참사의 가장 큰 원인은 서울이 초과밀도 사회라는 것이다.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서로 빽빽하게 끼여 숨 막히면서 사는 도시다. 서울이라는 사회는 인구의 밀도를, 자본의 밀도를, 욕망의 밀도를 다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인 서울’을 꿈꾸게 한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제일 안타까운 건, 아직도 대한민국이 타자에 대한 관용, 다름에 대한 존중이 없는 보수적이고 경직된 사회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핼로윈이라 해도 좀비 분장을 하고, 코스프레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타인의 따가운 눈총과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는 곳은 서울에 몇 군데 없다. 대한민국에서 오직 이태원만이 다양한 인종과 문화, 여러 가치, 다채로운 개성, 전위적인 서브컬처, 소수성이 한 데 어우러질 수 있는 곳이다. 이태원밖에 없기 때문에 이태원으로 모여든 거다.“놀다가 죽었다”는 말을 누구도 쉽게 뱉어선 안 된다. 유년기부터 자연스레 핼로윈을 축제로 받아들인 청년들에게 이태원은 타인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들뜰 수 있는 곳이다. 놀다 죽은 게 아니라 그냥 걷다 죽은 사람들이다. 들뜨고 신난 게 잘못인가? 21세기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라면 10만명 아니라 100만명이 모여도 누구 하나 다치지 않아야 한다.더 말을 잇지 못하겠다. 참사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유가족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있길 기도한다.

2022-11-15

오늘을 위한 달리기

러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 호흡에 맞춰 뛰는 것이다. /언스플래쉬 마음처럼 되지 않는 날이다. 그럴 때엔 몸을 움직여야 한다. 평소 명상이나 요가를 즐겨 했지만 요즘은 달리는 재미에 푹 빠졌다.생각 없이 뛰다 보면 어느덧 숨은 목 끝까지 차고 다리엔 힘이 풀려 후들거린다. 현재 남은 거리를 막연히 계산하다보면, 과연 내가 무사히 완주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과 포기하고 싶은 욕망이 든다. 달리기뿐만 아니라 근래 내가 도전했던 모든 것들이 그랬다. 이게 정말 맞는 건지, 올바른 것인지 계산하느라 나아가는 걸 금방 멈추곤 했다. 하지만 러닝은 그런 불필요한 걱정을 덜어주고, 포기하고 싶을 때 한 발 더 내딛으며 고통을 극복하는 습관을 기를 수 있게 해주었다.나는 아직 러닝 초보라 주로 회복 러닝을 택해서 한다. 회복 러닝은 몸이 러닝에 익숙해질 때까지 편안하고 즐겁게 달리며 몸을 깨운다. 회복 러닝에서 가장 중요히 여기는 건 몸이 달리기에서 익숙해질 때까지 나를 기다리는 일이다.나를 기다리는 여정은 힘들지만 자유롭다. 달리는 동안에는 타인과 나의 러닝 속도를 절대 비교하지 않는다. 오로지 달리기 이전의 나의 모습과 완주한 나의 모습을 비교할 뿐이다. 인내와 통찰의 시간을 견디며 달리다 보면 일상생활에서의 스트레스와 충동에서 멀리 벗어나게 된다. 또한 완주하는 순간까지의 노력은 오롯이 나의 몫이기 때문에 그 시간의 주인공은 내가 된다.러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빠른 속도도 바른 자세도 아닌, 나의 호흡에 맞추어 뛰는 것이다. 너무 힘들다면 스스로 달리는 속도를 조절하고, 앞뒤로 움직이는 팔의 움직임을 강화하거나 물을 마시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또는 현재 나를 압박하는 압박감이나 불안을 멈추고선 달리는 자세에 집중하는 방법도 있다.러닝은 전력질주가 아니다. 무작정 멀리 빠르게 달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같은 속도로 꾸준히 나아가 완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달리다 보면 몸의 일정한 리듬이 생기게 되고, 지금 달리는 속도 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욕심이므로 버려야 한다. 절제와 자신감, 두 가지를 기억하며 적절한 러닝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더 빨리 달리는 것이 아닌, 더 빨리 달릴 수 있단 자신감을 가지고 흐름을 유지한다면 목표 달성은 물론, 기록에 남을 만한 멋진 달리기가 된다.러닝은 출발 전 신발끈을 확실하게 묶는 것에서 시작한다. 스트레칭으로 몸의 긴장을 풀고, 복장 단장을 마쳤다면 그 다음은 런-워크로 시작하여 달리는 몸에 익숙해지기 위해 워밍업을 한다. 심박수가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며 등에선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사실 이 순간이 가장 힘들지만 이는 좋은 신호다. 달릴 수 있는 몸으로 준비가 되었단 뜻이기 때문이다.달릴 때에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달리는 순간이 즐겁고, 더 달릴 수 있다는 확신만을 가진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다 보면 결국 현재에 집중하게 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동시에 너무 멀리 있는 길을 내다보고 가늠하며 걱정 하지도 않는다. 과거에서부터 이어진 후회, 미래로부터 끌어온 불안은 저 멀리 내어두고, 마음을 현재에 놓아 불편함과 불안을 사라지게끔 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중간 휴식은 필수다. 회복은 다음 달리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다. 자연스럽게 러닝호흡에서 회복호흡으로 바꾸어 호흡을 가다듬으며 심박수를 낮춘다. 달리기와 쉼을 반복할 때엔 신기하게도 조금씩 달리기 실력이 향상되는 걸 몸으로도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작은 노력이 모여 전보다 더 큰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단 믿음과 자신감은 오늘을 더욱 즐겁게 살게 한다.영화 ‘블리드 포 디스’에선 복서인 비니 파지엔자가 등장한다. 최고 인기 복서이던 그는 불의의 사고로 의사로부터 다신 걷지 못할 거라는 판정을 받지만, 수많은 재활과 노력 끝에 다시 링 위로 서는 것은 물론 WBA 슈퍼웰터급 챔피언을 차지한다. 그는 우승 인터뷰에서 “불가능해 보이지만 실제로 해보면 어느 순간 끝나고, 얼마나 간단한지 알게 돼요”라 말한 바 있다. 처음부터 불가능은 없으며, 실은 모든 것이 아주 간단하다고 말하는 그의 인터뷰 영상은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 오랜 기간 회자되고 있다. 모든 건 사실 간단하고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을 되새기며 오늘도 가볍게 달려 본다.

2022-11-15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이유

참담한 마음으로 일상을 보내는 요즘이다. /언스플래쉬 며칠간 참담한 마음으로 일상을 보냈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며칠 전 일어난 참사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유가족의 아픔에 어찌 비할 수 있겠느냐만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죄책감을 끊임없이 느낀다. 책상 앞에 앉아 문장 몇 줄을 쓰는 것이 위선적인 행위처럼 여겨진다. 애도 위로 쏟아지는 혐오와 무분별한 언어폭력에도, 공적으로 책임져야 할 지점을 개인의 영역으로 밀어내는 일에도 완전히 지쳤다. 자꾸만 무너지고 무력해진다.마음이 자꾸 극단적으로 치닫는 이유는 분명하다. 같은 슬픔을 같은 마음으로 몇 번이나 경험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우리는 여러 죽음을 겪었다.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노동자의 죽음과 삽시간에 무너지는 건물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 한 사람들. 우리 사회를 비통함으로 물들게 했던 참사들. 그에 따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비슷한 상황이 또다시 반복되었다.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믿었던 참사 전후의 예방과 대처는 여전히 미흡하다. 세상은 얼마나 더 끔찍해질 수 있을까. 상상의 범주를 넘어선 죽음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터널 안을 헤매는 기분으로 맥없이 고개를 떨어뜨린다.이태원 참사의 사망자와 부상자 수를 본다. 이것은 숫자 이상의 고통과 상실이 우리 주변에 만연하다는 뜻이다. 내게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 하룻밤에 사라져버리는 일. 경험하지 않은 자들이 쉽게 재단할 수 없는 마음에 놓인 이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그러한 아픔을 마주하는 과정에 예의를 지키기는커녕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말이 있다. 춤추고 노래하는 일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일. 자유와 젊음으로 대변되던 공간을 순식간에 부패한 곳으로 만들어버리는 일. 사람 많은 곳에 간 것이 잘못이다. 놀러 나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다. 이러한 말은 상대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절대적으로 근거 없는 힐난의 말이다. 이런 말의 깊은 곳에는 비이성적인 혐오가 뿌리잡고 있으며 개인 존재의 존엄을 축소하는 태도가 내재하여있다.그러니까 이것은 책임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시민과 안전을 책임지는 정부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서는 이 일을 결코 종결지을 수 없다. 쓰러진 친구의 호흡기를 누르며 무릎에 시퍼렇게 멍이 들면서도 자기 탓이라며 울부짖는 청년에게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일. 사고의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생존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공동체가 짊어져야 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민중이 국가권력에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정치적인 영역을 넘어서서 그 무능과 안일함을 질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을 떠넘기는 공직자들의 발언을 보면서도 그랬다. 상실감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지 못한 채로 책임을 절감시키기에 급급한 태도는 국가에 대한 믿음을 지워버리는 것이다.인터넷에 올라오는 사상자를 혐오하는 발언이나 자극적인 영상, 기사들 역시 자기 책임을 내버린 일이다. 타인에 대한 예의를 가져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행해지는 일들이 있다. 한 사람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이런 식의 발화는 엄격한 법적 장치를 통해 통제되어야 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단순한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잘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당연한 일상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지금 발붙이고 있는 이 시간이 언제 꺼질지 모르는 위기로 느껴진다.‘나는’보다 ‘우리는’이라는 주어가 더욱더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명하다. 각자도생을 권유받는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이 모든 참사가 타인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누군가의 고통을 멀리 두는 순간 자기의 삶을 파괴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함께 동시대를 걸어가는 공동체의 일원이며 이 모든 일에는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쓰기까지도 오랜 고민이 필요했다. 쓰고 지우고를 반복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나 역시 아픔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막막한 무력함으로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다가 마음을 다잡는다. 이 발화는 나를 깨우치는 기록이다. 절대 잊지 않기 위함이다. 누군가의 고통이 결국에는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이다.함께 아파하고 슬퍼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이유다.

2022-11-08

당신의 믿음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 근처의 신축 빌라 공사 현장에서 사고가 일어나 인부 여럿이 다치고 죽었다. 어린 나는 내 가까이서 사람이 죽었다는 게 딱히 실감이 나진 않았던 것 같다. 사람이 죽는다는 건, 토요 미스터리 극장이나 이야기 속으로 같은 무서운 TV 프로그램, 혹은 경찰청 사람들이나 공개수배 25시 같은 수사 프로그램에서나 나오던 이야기였기에 그랬던 것 같다.늦은 밤 부모님 몰래 TV를 보는 아이처럼, 나는 한동안 사고가 일어난 주변을 몰래 바라보곤 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사람이 저곳에서 죽었다는 것도 실감나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사고는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당시엔 그런 일들보다 재밌고 신나는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어린 나의 마음은 그 일을 오래도록 담아둘 정도로 크지도 않았다.오래도록 그 일을 잊고 있다가 다시금 떠오른 건 초등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수업 시간에 친구와 장난을 치다가 노년의 담임선생에게 뺨을 맞은 적이 있었다. 아직 국민 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던 때의, 아직은 체벌이 익숙하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이야기. 그날 화가 난 선생님은 9살짜리 아이를 오래도록 혼내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너 같은 애는 나중에 커서도 뻔하다. 저기 공사장에서 사람 죽은 거 아느냐. 선생님 말도 잘 안 듣고, 하느님도 안 믿고, 성경 공부도 안 한 사람들이다. 하느님 안 믿으니까 공부도 안하고, 방탕하게 살다가 공사장에서 험한 일만 하다 천벌 받은 거다. 그게 다 죄다. 너도 커서 똑같이 그렇게 될 거다.누군가에게 뺨을 맞은 건 처음이었기에 많이 놀라고 당황스러웠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무섭고 두려워 나는 큰소리로 오래도록 엉엉 울었다. 결국 소리를 듣고 놀란 옆 반 선생님이 양호실로 데리고 갈 때까지도, 나는 계속 울었다. 죄라는 건 TV에 나오는 험악하고 무서운, 귀신이나 범죄자들이나 저지르는 건 줄 알았던 나에게 담임 선생이 한 말은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뺨을 맞고 펑펑 운 탓에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집에 돌아온 나를 본 할머니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고모와 함께 학교에 쳐들어갔다. 그 담임선생이 고모와 같은 교회의 신자였다는 걸 알게 된 건 내가 중학교에 올라갈 무렵의 일이다.무섭고 두려웠던 그날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건 많이 놀랐던 탓도 있겠지만, 사실 그보단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았던 질문이 해결되었기 때문도 있다. 좀처럼 알 수 없던 사실이 슬며시 “아, 그래서였구나.”로 바뀌는 기억은 좀처럼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왜 죽는 것인지, 왜 누군가의 죽음은 저처럼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미처 알지 못했던 나에게, 그날의 기억은 세상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그렇구나. 죽는다는 건 죄에 대한 벌이구나. 하느님 믿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성경 공부 잘 하지 않으면 죄인인 거구나. 그러면 저렇게 죽는 거구나.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죽게 되겠구나. 무섭도록 유치하고 단순하기에 더 잔인한 이야기. 그래서 오래도록 마음에 새겨지고 마는 상처 같은 이야기.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죽은 건,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이교도의 축제를 즐기러 가서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이 죽은 건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참사는 북한 공작이며, 이게 다 지난 정부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 참사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이 죽은 앞에서 찬송가를 틀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사람들. 신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빌리고는 무엇으로도 갚지 않는 사람들. 무섭도록 유치하고 단순하기에 더 잔인한 이야기. 그래서 더욱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야기. 누군가는 진심으로 믿게 될 그런 이야기. 참사가 벌어질 때면 매번 나오는 이야기.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가 어릴 적 겪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래서 매번 다시금 묻게 된다. 내가 저지른 죄는 정말 그렇게 큰 죄였나요? 그들이 죽은 건 그렇게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인가요? 우리의 가난과 우리의 삶과 우리의 슬픔은 모두 우리가 지은 죄 탓인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들의 죄만을 대속하셨을 뿐, 우리의 죄는 고스란히 우리의 몫으로 남겨졌던 것인가요? 우리를 죄인이라 말하는 당신은 누구인가요.만약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를 향해 말하고 싶다. 예수께서는 누군가의 죄를 짊어지고자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당신은 누군가의 죄를 탓하고 욕하고 벌하기 위해 세상을 살아가는군요. 그건 지옥의 일이에요. 당신은 지옥을 믿는 사람입니다.

2022-11-08

마라탕의 인기는 어디까지?

최근 집근처에서 산책을 하다 깜짝 놀랐다. 최근 2-3년 사이에 마라탕 가게가 부쩍 늘었다는 게 확연히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마라탕은 2010년대 중국인과 유학생을 대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특히 최근 3-4년부터 마라탕 열풍이 지속되며 약 32개의 마라탕 브랜드가 국내에 생겨났다. 그 중 일부는 100개 이상의 프랜차이즈 사업을 펼칠 정도로 활발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마라탕이란 중국 쓰촨을 기반으로 하여 둥베이 지방을 거쳐 만들어진 중국 요리다. 한자로 마(痲)는 저리다 혹은 마비 라는 뜻을 지녔고, 라(辣)는 맵다, 탕(71D9)은 뜨겁다는 뜻을 지녔다. 초피나 팔각, 정향 등 다양한 향신료를 가열해 향을 낸 기름에 육수를 부은 다음 채소나 고기, 버섯, 두부 등의 식재료를 넣고 끓이는 탕요리다.마라탕의 유행은 계속되고 있다. 네이버 기준 검색량 키워드를 조회해보았을 때 ‘마라탕’의 월간 검색량 조회수는 총 40만건으로 나타났다. 연령별 검색 비율은 10대 27.7%로 가장 높게 나왔고, 그 다음은 20대 27.6%로 나왔다. 더 재미있는 건 여성의 비율과 남성의 비율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점이었는데, 여성은 73.0%, 남성은 26.9%로 조사되었다. 10대 대표 간식이라 불리는 ‘떡볶이’의 월간 검색량은 월 24만 8천건이었다. 떡볶이의 24만 보다 훨씬 높은 40만 건이라는 검색량은 마라탕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해볼 수 있었다.또한 마라탕 선호가 성별과 연령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2022년 7월 기준으로 한 카드 회사가 체크카드를 발급한 회원의 ‘음식점 이용금액’ 소비 패턴을 분석했더니, 중·고등학생 여학생의 마라/샹궈 음식점 이용금액이 3위를 차지했다. 4위는 떡볶이가 뒤따랐다. 반면 중고등 남학생은 1위 배달/야식, 2위 햄버거, 3위 커피전문점으로 마라/샹궈 음식점에서의 이용금액은 순위에 없을 정도로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다.이렇게 Z세대 여학생 사이에서 마라탕이 유행한 이유는 뭘까? 알싸하고 자극적이라 국물조차 먹지 않는다는 중국 마라탕과는 달리, 한국 마라탕은 대부분 사골 국물을 주로 쓴다. 매운 국물에 푹 절여진 야채와 고기 그리고 어묵을 한꺼번에 먹을 수 있어 국밥만큼이나 든든한 한끼라는 특징이 있다. 또한 한국 특유의 달거나 시원한 매운 맛이 아닌, ‘알싸하고 얼얼한 매움’은 마라탕에서만 즐길 수 있는 낯설고 이국적인 맛을 지녀 더욱 중독성을 지닌다.또한 마라탕은 내가 원하는 재료를 마음껏 커스터마이징해서 먹을 수 있단 특징이 있다. 먹고 싶은 채소와 고기, 어묵, 해산물 등 수십 가지 재료를 취향대로 담아 카운터에 내면 무게에 따라 가격을 책정한 뒤 주방에서 조리를 한 다음 내어준다. 금액 또한 저렴하다. 기성세대는 이러한 주문 방식이 다소 번잡하고 귀찮게 느껴질 수 있지만 Z세대는 자신의 입맛과 취향, 그리고 개성을 반영하는 과정을 즐기고 소비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마라탕의 유행 덕분에 인터넷뿐만 아니라 마트나 슈퍼에서도 마라탕 소스나 각종 향신료, 재료 등을 쉽게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국내 대형 식품회사에서 한국인 입맛에 맞추어 자극적인 향신료를 빼고 사골 육수를 사용한 마라 소스를 앞다투어 출시하고 있어, 기호대로 선택할 수 있단 이점이 있다. 또한 하이디라오나 라오간마 등의 중국 현지에서도 유명한 브랜드 상품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요리 과정 또한 쉽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직접 마라탕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유튜브에선 이미 마라탕 먹방(마라탕 만들기)’ 영상이 조회수 964만회를 기록하고 있고, ‘야식으론 절대 먹지 마라 마라탕’이란 제목을 가진 동영상은 약 734만회라는 조회수를 지니고 있을 정도다.이젠 길거리를 걷다보면 마라탕 외에도 마라 국밥이나 마라 떡볶이, 마라 라면, 마라 부대찌개, 마라 치킨 등 마라를 활용한 다양한 음식이 출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마라탕은 나트륨이 많은 음식이라 자주 먹게 된다면 고혈압이나 심혈관 질환 같은 질병에 노출될 수 있다. 되도록 국물을 마시는 건 자제해야 한다고 하지만, 입이 얼어붙은 듯한 마라의 얼얼한 중독성에 빠지게 되면 국물을 참을 수 없게 된다. 특히 날이 쌀쌀해진 저녁엔 각종 채소를 넣은 마라탕이 생각난다. 맛있는 음식으로 오늘의 스트레스를 잠시 잊을 수 있다니, 단순하고 가벼운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가을날이다.

2022-11-01

욕망만 간단히

몇 해 전, 2학기 첫 수업에서 동급생들보다 예닐곱 살 많은 한 학생이 재직증명서를 내밀며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어 출석이 어렵다고, 대신 매주 과제를 성실히 제출하겠다며 출석에 관한 양해를 부탁했다. 취업자의 대체 출석을 조건부 허용하는 학칙도 있고 해서 ‘성실한 과제 제출’을 전제로 허락했다. 매 학기마다 1주차에는 수업 소개, 진도 및 평가 계획, 목표 등을 안내하고, 표절, 무단인용, 중복제출 등 창작물과 과제물에 대한 창작윤리를 강조한다.이스마일 카다레의 ‘꿈의 궁전’을 읽고 어느 부분이 매혹적인 판타지로 다가왔는지를 짧게 써 내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출석 인정을 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메일에 첨부된 과제물을 열어보았다. 어느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책 리뷰를 그대로 긁어서는 종결어미와 부사만 슬쩍 바꿔 자기 글인 양 제출한 것이었다. 2주차 수업에서 출석을 부르며 한 사람씩 과제 피드백을 해줬는데, 자리에 없는 그 학생 순서에서 “(책을) 안 읽고 쓴 것 같아요… 짜깁기한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다른 학생들에게도 경각심을 주고 싶었다.내가 한 이야기가 그 학생에게 전해졌는지 수업 이틀 뒤 “제가 없는 자리에서 제 이야기를 나쁘게 하셨다면서요? 직접 연락해 말씀하셔야지, 그렇게 뒷담화하시니까 불쾌하네요” 하는 장문의 항의 문자를 받았다.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한 건 불쾌할 수 있겠다 싶어 그 부분을 사과했다. 또 한 번 날이 선, 나를 훈계하는 투의 문자가 날아들었다. 답을 하려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관뒀다. 울릉도 도동 터미널에서 포항으로 가는 여객선을 기다리던 환한 가을날이었다.불쾌하긴 했지만 금방 잊어버렸다. 행여나 감정적으로 불이익을 준다고 여길까봐 그 학생의 과제물과 시험답안은 객관적으로, 아니 더 너그럽게 평가했다. 학칙은 취업 학생에게 줄 수 있는 점수를 제한하고 있는데, 그 범위 안에서 최고점을 줬다.그리고 1년쯤 지난 어느 날, 그 학생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미리보기 화면에는 “선생님, ㅇㅇㅇ입니다. 이번에 제 책이 나왔습니다”까지 적혀 있어 내게 책을 보내주려 주소를 묻는 건줄 알았다. 메시지를 열어보니 온라인 서점 구매 링크와 함께 “관심 부탁드립니다”라고 써져 있었다. 인사말 같은 건 없었다. 씁쓸했다.지난 학기 성적 입력을 마치고, 한 학생으로부터 성적 정정 요청 메일을 받았다. 아주 길게 써내려 간 장문에는 수업에 대한 칭찬, 감사 인사와 함께 자신이 왜 A+를 받지 못했는지 의아하다는 질문,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고 뛰어난 학생인지 설득하려는 주장, “교수님의 강의가 제 인생에서 큰 깨달음을 준 수업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디 그 기억이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으로 기억되게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귀여운 협박(?)까지 담겨 있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다음날,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담아 답메일을 보냈다. 그 학생 성적을 올려주면, 다른 학생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성적은 정정할 수 없지만, 미안한 마음을 담아 내가 쓴 책들을 보내주고 싶었다. 혹시라도 받길 원한다면 주소를 남겨달라고 했다. 메일을 보냄과 거의 동시에 ‘수신확인’ 상태가 ‘읽음’이 되었다. 아마 정정 요청이 받아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빠뜨린 내용이 있어 10여분 뒤 메일을 하나 더 보냈다. 마음이 몹시 상했는지 나중에 보낸 메일은 내내 읽지 않다가 닷새쯤 지나서야 읽었다. 두 개의 메일을 보냈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자기 필요에 의해 할 말을 했고, 요구가 관철되지 않았으므로 더는 용건 없다는 것일 테다. 이 학생에게 주려고 포장해놓은 책 꾸러미를 풀었다. 씁쓸했다.요즘 학생들이 생각하는 ‘용건만 간단히’의 의미가 이런 것일까? 요즘 세대는 더 이상 예의를 배우지 않는다. 나도 아직 30대이고 미혼이지만, 3040 부모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우리 애한테 왜 그래요”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영 마뜩찮다. 부모의 훈육 탓만은 아니다. 각자도생의 이기적 사회 풍조에서 젊은 세대가 배울 만한 어른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점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은 사라지고 ‘욕망’만 남는 듯하다. MZ세대의 ‘용건만 간단히’는 어쩌면 ‘욕망만 간단히’가 아닐까? 씁쓸하다.

2022-11-01

당신은 정말 입을 가졌는가

10월 15일 경기도 평택시 소재의 제빵공장에서 직원 A씨가 기계에 몸이 끼여 사망했다. 위생을 위해 착용하고 있던 앞치마가 샌드위치 소스 배합기에 빨려 들어갔던 탓이었다. 기계에는 사고를 막기 위한 인터록과 같은 어떠한 장치나 설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심지어 이와 같은 사고가 발생할 경우 대처하기 위한 매뉴얼조차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A씨는 사망했고, 그의 시신은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의 손에 수습되었다. 사망 사고 이후에도 공장은 정상 가동되었다. 노동부에서 9대의 소스 배합기 가운데 자동 정지 장치가 없는 7대에 대해서만 작업 중지 명령을 했기에, SPL은 나머지 2개의 배합기 기계를 가동하여 공장을 가동시켰다. 사고가 난 배합기에 흰 천을 둘러둔 채. 그날 오후에서야 노동부는 사고가 발생한 3층 전체의 공정 중지를 명령했고, 해당 층의 작업은 정지되었다.해당 공장에서는 일주일 전에도 한 직원의 손이 기계에 끼이는 사고가 벌어졌었다고 한다. 공장 측에서는 그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기간제는 알아서 병원에 가라”고 말하곤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 직원은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 자비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 사고 이후에도 마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공장은 샌드위치를 만들었고, A씨가 사망한 날에도 작업장은 아무런 일 없던 것처럼 가동되었다. 희고 깔끔한 공장에는 어떠한 핏자국도 없었고, 아무런 잡음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고가 있던 다음날, SPC그룹은 자사의 파리바게트가 영국 런던에 1호점을 열게 되었다는 사실을 홍보하는 보도 자료를 대대적으로 배포하였다. SPC그룹의 회장이 공식적인 입장을 표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서였다.이은주 정의당 의원이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으로부터 받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해당 공장에서는 2017년부터 2022년 9월까지 37명의 사람이 사망했다. 그 가운데 끼임 사고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15명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제33조 제1항에서는 “유해 또는 위험한 작업을 하거나 동력에 의하여 작동하는 기계·기구의 경우 유해·위험방지를 위한 방호조치를 하지 아니하고는 이를 양도·대여·설치 또는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인터록 장치를 비롯한 방호 조치”를 해야 할 책임을 밝히는 것에 불과할 뿐, 인터록을 의무화하는 법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SPC 허영인 회장은 총 1000억원을 투자해 그룹 전반의 안전경영 시스템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말했으며, 특히 사고가 일어난 SPC은 영업이익의 50% 가량을 산업안전 개선을 위해 투자하겠다고 대국민 사과 회견을 통해 밝혔다. 하지만 그 회견마저도 불과 두 시간여 전에 급하게 공지된 것이었고, 정작 SPC의 노동자들과 시민단체의 회원들은 출입을 가로막힌, 오직 기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마저도, 허영인 회장은 질의응답조차 하지 않은 채 고작 15분 만에 자신들의 입장만을 표명하곤 사라졌다.이것이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희고 보드랍고 깨끗한 샌드위치에 담긴 시간이다. 우리가 먹는 이 작고 흰 빵에 담긴 이야기를 나는 과연 얼마만큼이나 알아왔던가. 앎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토록 편한 마음으로 먹을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꼭 샌드위치에만 국한된 일일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상품의 뒤에는 이처럼 무수히 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점철되어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또한 어떤 상품에 가리워진 사건과 사고의 당사자 혹은 목격자이다. 다만, 당신이 말하지 않아왔기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입이 없다. SNS를 비롯한 뉴미디어 채널이 늘어나고, 누구나 자신의 채널을 만들어 콘텐츠를 제작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입이 없다. 그러니 ‘입’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입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건 당신의 착각일 뿐이다. 그렇기에 저들은 여전히 똑같은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다.할란 엘리슨의 소설 ‘나는 입이 없다 그러나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에서는 시스템 컴퓨터에 의해 모든 기능을 빼앗긴 채 액체 장난감으로 전락한 인간이 등장한다.당신을 그것을 단지 SF적인 상상력일 따름이라 치부할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다를까. 우리는 정말 입을 가졌는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컴퓨터 속에서 우리가 가진 손, 발, 입, 눈, 귀와 같은 것들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럴까? 그럼에도 세상은 왜 여전히 같은 사고를 반복하는 것일까.당신은 정말로, 자신이 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2022-10-25

빛 좋은 개살구 먹는 법

‘빛 좋은 개살구’를 현명하게 먹는 방법은 뭘까? /언스플래쉬 바야흐로 ‘보여주기’의 시대다. 자신의 일상을 전시하는 일은 어렵지 않고 그만큼이나 쉽게 타인의 삶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옛 친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워지면 스마트폰을 들어 SNS를 켜면 된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의 하루가 궁금하면 유튜브에 접속해 영상을 시청하면 된다.현대사회에서 카카오톡, 페이스북, 블로그, 인스타그램과 같은 플랫폼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소셜 네트워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구시대적이라는 감각을 넘어 타인과의 소통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된다.이런 구조 속에서 자기를 보여주는 방식 또한 중요해졌다. 소위 MZ세대로 통칭되는 청년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과제 앞에 놓였다. 그 어디보다 경쟁구조가 선명한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러한 증명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처럼 보인다. 가진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하면 자신의 것이 너무나 조그맣다고 느끼기 쉽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몸집을 부풀리기 마련이다.‘빛 좋은 개살구’라는 속담이 있다. SNS에서 인기라는 식당에 가면 앉을 자리가 없다. 문 앞에는 웨이팅하는 손님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받은 음식은 번지르르한 모양과는 달리 별로 특별한 것 없는 맛이다. 인기 연예인이 극찬했다는 화장품은 고급스러운 패키지에 비해 효과가 미미하고 백만 독자를 사로잡았다는 책에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가득하다. 이처럼 겉으로 보기엔 좋아 보이는 것들도 깊게 들여다보면 실속이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실제보다 더욱 멋들어지게 포장하는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타의로 작동되는 일이기도 하다. 인기라는 거품이 꺼지고 자신의 실체가 드러날까 두려웠다는 유명 가수의 이야기처럼 자신을 세상에 내보이는 사람들은 어떠한 포장지에 싸이기 마련이다.우리는 모두 다른 조건을 가지고 삶을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당연하게 있는 것들을 만져 보지조차 못하고 자신에게 허용된 세계라는 느낌을 받기가 어렵다. 내가 가진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이 필요하고 거기에서 ‘보여주기’의 굴레는 더욱 공고해진다.SNS의 주요한 기능 중 하나는 나와 타인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나는 9개월 동안 외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데, 그때의 외로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나만 빼고 세계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SNS로 소통하면서 나 역시 이 세계에 공고하게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현재의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고 나의 하루가 얼마나 더 아름답고 빛나게 기록될 것인지에 대한 탐구에 돌입하게 되었다. 내가 누구와 만나는지, 무엇을 먹고, 어디에 가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나의 가치가 정해진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인스타그램 계정을 삭제하는 것이었다.그때의 나는 나를 얼마나 훼손하면서 살고 있는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에 연연하며 최대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것은 당연히 어리석고 피곤한 일일 수밖에 없다.우리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완벽하게 벗어날 순 없다. 망망한 무인도에 완벽하게 고립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딘가에 계속해서 노출될 것이다. 아날로그적 시대를 그리워하며 지금의 상황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현실에서 도피하는 일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빛 좋은 개살구’를 현명하게 먹는 방법 중 하나는 개살구가 그저 ‘빛이 좋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거 생각보다 맛이 없잖아, 하고 실망하는 대신 허황된 빛을 가진 열매를 그 자체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누군가에겐 본질보다 보이는 모양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고 그것을 굳이 비난할 필요는 없다. 밍밍하고 맛이 떫은 것을 먹더라도 괜찮다. 우선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먹자는 것이다.그러니 정말 싱싱하고 달콤한 과육을 원하는 이들은 응당 이러한 빛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겠다. 보여주는 것에만 매혹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기르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 자신이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닌지 끊임없이 되돌아보려는 시선 또한 중요하다.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내 안에 있는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고민은 정보가 홍수처럼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단단한 힘이 될 것이다.

2022-10-25

외로운 황홀함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언스플래쉬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정지용, ‘유리창 1’)정지용의 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라든가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와 같은 감각적인 묘사와 언어운용은 요즘의 어떤 시와 비교해도 세련되게 느껴진다. 이미지나 리듬감도 뛰어나지만, ‘유리창 1’을 아름다운 시로 기억하게 만드는 가장 핵심적 요인은 이 시 전체에 배어 있는 슬픔과 연민의 정서다.알려진 바 이 시는 지용이 폐렴으로 어린 나이에 죽은 아이를 그리며 쓴 작품이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라는 문장은 지용의 마음을 절절하게 나타내준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산새처럼 날아”간 아이가 있는 밤하늘을 보기 위함이다. 이는 “외로운 황홀한 심사”를 일으키는데, 죽은 아이를 생각하며 외로울 수는 있어도 황홀하기는 쉽지 않다. 외로움이 보편적 감정이라면 황홀함은 보편성을 넘어선, 시인이라는 예민한 존재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정서일 것이다.죽은 아이가 날아간 밤하늘을 바라보니 슬프고 외로운데,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 풍경은 한없이 아름다워 황홀하다. 이 황홀함은 풍경에 의한 고취인 동시에 슬픔이라는 감정이 몰고 온 일종의 환각적 상태다. 슬픔 속에 오래 침잠되어 있다 보면 세상이 비현실적 공간으로 여겨진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이든 육체의 고통 또는 현실의 절망이든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아이가 없는 현실에서는 외로우나 아이를 만나는 상상에서는 황홀하다. 그 황홀함은 세상에서 오직 ‘나’만, 아이의 죽음을 오롯이 살아내야 하는 부모만이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외로운 황홀한 심사다. 자녀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부모를 칭하는 단어가 없는 것은, 누구도 그 마음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는 슬픔, 그 슬픔 속에서 아이를 만나는 상상…. 삶도 죽음도 초월한 어느 곳에서 느끼는 그 감정이 바로 외로운 황홀함일 것이다. “외로운 심사”라고만 했으면 이 시는 아름다움이 덜 했을 것이다. “외롭고 황홀한”도 안 된다. 그렇게 쓸 경우 외로움과 황홀함은 각각 독립적인 감정의 상태이거나 서로 다른 두 감정의 연쇄작용일 뿐이다. 밤하늘을 보며 정지용이 느낀 외로움과 황홀함은 한 덩어리다. 그래서 오직 “외로운 황홀한 심사”여야만 한다. 외롭고도 황홀한 것이 아니라 외로운 황홀함이야말로 화자가 느끼는 적확한 감정이므로.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몇 해 전, 청소년 시 낭송 UCC 경연대회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 한 학생이 이 시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는데,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냈다. 사월 바다에서 딸을 잃은 아버지가 팽목항에 주저앉아 스마트폰에 담긴 딸의 사진을 본다. 액정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 내린다. 그렇게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화면 속 딸의 얼굴을 선명하게 보기 위해, 아버지는 밤에 홀로 액정을 닦는다. 그 “외로운 황홀한 심사”를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을까?지난 9월, 태풍 힌남노가 몰고 온 수해로 소중한 목숨들이 스러졌다. 침수된 주차장에 차를 빼러 가는 엄마가 걱정돼 함께 나섰다가 숨진 중학생 김 군의 사연이 세상을 울렸다. 급박한 순간 엄마는 “너라도 살아야 한다”며 아들을 내보내려 했고, 아들은 “엄마, 사랑해요.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야속한 하늘은 이 다정한 모자(母子)를 갈라놓고야 말았다. 살아남은 엄마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없다. 별이 되어 밤하늘로 날아갔을 거라고, 무엇이든 되어 다시 만날 거라고, 다음 세상에서도 엄마와 아들로 태어날 거라고….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외로움, 꿈속에서나마 아들을 만날 황홀함…. 언제 그랬냐는 듯 계절은 어느새 가을이다.

2022-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