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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지프스의 돌 그리기

최근 각종 취미개발 플랫폼에서 오일파스텔을 활용한 수업들이 많이 보인다. 미술 재료 도구 중 하나인 오일파스텔은 파스텔의 한 종류로, 크레용과 파스텔의 중간 정도 질감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파스텔에 왁스나 기름을 섞어 만들기 때문에 기존 파스텔보단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그려지며 특유의 촉촉하면서도 매끄러운 질감 표현 덕분에 그리는 재미가 크다. 또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분의 공간이 크게 필요치 않고, 물이나 팔레트 등의 도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장소든 간편하게 그릴 수 있단 장점이 있다. 덕분에 전문가뿐만 아니라 많은 미술 입문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재료기도 하다.오일파스텔은 기존 파스텔보다 단단하고 가루가 없으며, 입자가 두껍기 때문에 굵거나 두터운 굵기 표현이 가능하다. 오일파스텔에서 가장 재미있는 특징은 색 위에 색을 얹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다. 가장 손쉬운 재료인 손가락부터 압지나 얇은 가죽으로 말아 만든 찰필 또는 티슈나 스틱, 면봉 등의 재료로 세밀한 색 섞기가 가능하다.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 효과를 자연스럽게 줄 수 있을뿐더러, 치즈나 빵 등의 덩어리지는 느낌이나 쌀의 고슬거리는 질감 같은 섬세한 그리기 또한 가능하다.오일파스텔이 생소해서 다소 역사가 짧은 듯싶지만 사실 오래 전 입체파를 대표하는 화가인 피카소도 즐겨 쓴 재료 중 하나다. 오일파스텔은 평면상에 여러 선이나 색채로 형상을 그려내는 회화의 표현이 충분히 가능하면서도, 명암 위주로 그림을 그리는 소묘의 성격까지 모두 가졌다. 목탄에서 시작하여 파스텔, 그리고 오일파스텔까지 오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 흥미로운 미술 도구다.오일파스텔은 단순히 흰 도화지에 색을 가득 채워 넣는다거나 스케치 안에 색을 칠하는 방법도 있지만 긁어내기, 찍기, 덮어씌우기, 혼합하기 등 다채로운 기법을 사용하여 그림을 표현할 때에 재미가 더해진다.오일파스텔은 무른 성질 때문에 종이 위로 미끄러지듯 그려진다. 힘을 얼마나 주는냐에 따라 색이 다르게 나오기도 한다. 때문에 생각했던 색과는 전혀 다르게 나올 때가 있다. 색을 많이 써보고 힘을 얼마만큼 주어야 하는지 시도와 실패를 거듭하며 더 나은 그림이 나올 수 있도록 나아가는 과정은 무척 흥미롭기까지 하다.나는 주로 러닝을 한 뒤에 그 날 본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그림을 그린다. 가만히 배경을 들여다보면 자연은 정확한 틀이나 일정한 규칙을 가진 모양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각기 다른 본질이 섞여 있고 그것이 모두 일정치 않고 다양한 선과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에 더욱 자연스럽고 경이롭다는 걸 알게 된다.구름은 단순히 흰색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하늘색, 분홍색, 보라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이 자연스레 섞여 있다. 생각하지도 못한 색상이 겹쳐 서로를 물들이고 있을 때에 대상이 더욱 구체적으로 보인다. 색과 색이 자연스레 연결되어 섞일 때의 즐거움은 배가 되고 그리기의 행위는 더욱 자유로워진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스케치를 한 뒤에 작은 디테일을 잡아가는 과정을 유유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가득 채워진 색을 마주하면 걱정이 조금씩 녹아 물러지는 기분이 든다. 명암이나 색감, 형태 등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여러 색이 겹쳐 하나의 존재로 다가올 때면 종이 위로 생명력이 느껴지며 활기가 돈다. 마음이 무너지려고 할 때마다 날카롭게 깎곤 했던 다짐이 조금씩 누그러져선 끝내 안정이 찾아온다.근래 들어선 돌을 자주 그리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가장 맨 아래서부터 올린 바위는 산꼭대기에 다다르자마자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무한으로 돌을 굴러야 하는 시지프스의 벌은 영원히 끝나지 않기에 의미가 없다. 하지만 독일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니체는 이를 두고 인생은 허무한 것이니 이 허무주의를 받아들이되, 오히려 나 스스로 중심을 정하여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원한 허무 속에서의 초인의 모습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무언가 덧없다거나 중심이 흔들리는 날엔 크고 작은 바위를 그린다. 신기하게도 그릴 때마다 다른 모양, 다른 색을 지닌 각각의 돌이 탄생한다. 그렇게 나의 중심은 부드럽게 그려지고 수많은 색을 띠고 있다. 그렇게 눈으로 확인하면 퍽 안심이 된다.

2022-11-29

상대평가라는 허상

어느새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날이 추워졌고,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한 학기가 끝나간다는 신호다. 학기 내내 얼른 종강만 했으면 좋겠다고, 하루라도 좀 맘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종강이 가까워지자 괜시리 마음이 바빠진다. 편치 않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평가할 방법들을 점검한다. 내가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내가 맡은 수업은 말하기 수업과 글쓰기 수업인데, 객관적인 평가가 다소 어려운 과목이다 보니 어떤 기준으로 평가를 하는 게 좋은 방법인지 항상 궁금해진다. 사실 말하기와 글쓰기는 개인의 노력 여하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부분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라 결과물을 중심으로 평가를 하는 것이 옳은지 늘 고민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의 말하기와 글쓰기를 성취도로 평가를 하자니, 객관적인 결과물이 눈앞에 놓여있어 그 또한 석연찮기는 마찬가지이다.그래서 일종의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 상호평가였다. 평가 점수의 절반은 내가 책정하고, 나머지 절반은 같은 반의 학생들이 책정하도록 했다. 단순히 점수만이 아니라 피드백 또한 해줄 것을 부탁했다. 생각보다 학생들이 성실하게 평가를 해주었던 덕분에, 1학기 때에는 성적 평가를 하기 꽤 수월했던 것 같다. 또, 해당 성적에 대해서 이의가 들어온 경우에도 이를 해명하고 설득하기에 꽤 도움이 되었다. 어쨌든 자신 또한 평가의 주체였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하지만 이렇게 학생들을 각각의 점수에 따라 줄을 세우더라도 여전히 의구심이 남곤 한다. 나는 정말 아이들을 잘 가르친 걸까? 아이들은 내가 가르친 걸 잘 흡수한 걸까? 막상 이런 방식으로 평가를 하다보면 매 수업 성실하게 임했던 학생들이 항상 좋은 결과를 받는 것은 아니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수업을 성실하게 들은 학생이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재능이든 뭐든 좋은 결과물을 내놓는 학생이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맞는 것인지 늘 헷갈리곤 한다. 어쨌든 둘을 절충하는 방식으로 성적을 내곤 하지만, 그렇다고 의구심이 사라지지는 않는 것 같다.사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상대평가 방식을 썩 신뢰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성취도가 아닌 상대적인 결과를 가지고 평가를 하는 것이다 보니 그다지 성취도가 높지 않더라도 한 반 안에서 상대적으로 잘하기만 한다면 A+를 받을 수 있다. 반면에 운이 안 좋게 학업 집중력이 높은 학생들이 많은 학과에서는 비슷한 성취도를 보이더라도 같은 성적을 받으리라 보장할 수 없다. 예컨대, 수업 반마다 성적을 책정하다보니, 한 반 내에서는 큰 문제가 없지만 그걸 학교 전체의 규모로 놓고 보게 되면, 어쩔 수 없는 결과적인 불평등이 생기곤 한다.그리고 또 한 가지, 반 전체의 분위기가 다 같이 열심히 하지 않는 방향으로 갈 때면 정말 걷잡을 수 없어진다. 어차피 성적은 상대적으로 결정 나는 것이다 보니, 다른 아이들보다 약간만 열심히 하면 될 뿐, 교강사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대학 내 상대평가 비중의 강화가 경쟁력 강화를 위함이었다는 것을 떠올려보자면, 이건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폐해가 아닐까 싶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학교의 목적이 지식의 습득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면, 이처럼 지식의 습득 여부가 아닌 상대적인 결과에 따라 성적을 매기는 건 어쩐지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입사를 비롯한 여러 과정에 있어 대학에서의 성적이 공신력과 변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상대평가의 비중을 늘렸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지식의 습득에 도움이 되는 결정인지에 대해서는 왠지 고민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인문학 교사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면, 아무래도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거기에 골몰하는 것보다는 수업 시간을 통해 이후에는 해볼 수 없는 고민을 해봤으면 싶다. 사실 입사를 비롯한 이후의 과정들에 대학에서의 성적이 그렇게 큰 변별력을 갖지도 못하는데, 왜 학생들이 오직 좋은 성적을 받는 것에만 골몰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대학교육의 실패란, 단지 사람들이 상식이 부족해진다거나 하는 지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사람들을 점점 더 아무런 사유도 질문도 하지 않도록 만들어가는 그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하지만 어쨌든, 이번 학기에도 나는 학생들을 평가하고 제도와 규칙에 따라 성적을 배분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고민들을 학생들에 대한 평가에 녹여낼 수 있을지, 과연 이런 고민이 언젠가 끝나기는 할지. 어쨌든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삶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좋은 평가방법을 고민해보는 수밖에 없겠다.

2022-11-22

나의 결핍이 자랑이 될 때

낙엽이 진 자리는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질 것이다. /언스플래쉬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늦가을,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지금 나는 잘살고 있는 걸까?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이상하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생각은 오후의 그림자처럼 자꾸만 길어진다. 그간 내가 이뤄온 성취와 다짐, 소망, 꿈꾸는 미래의 방향성이나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나의 단점까지 떠오른다. 스스로가 대견하다가도 한없이 작고 연약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콧잔등 위로 눅진한 빛이 내려앉으면 불현듯 하나의 깨달음이 밀려온다. 아, 가을이구나. 그래서 이렇게 감상적이구나.그런 날들이다. 달력을 한 장 넘기면 한 해의 끝이 다가오고, 몇 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해가 밝아있을 것이다. 올해의 나는 어땠던가. 이번 해는 제대로 살아냈는가. 뭔가에 쫓기듯 바쁘게 살았지만 매일같이 실수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었고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 발걸음이 중심이 아닌 언저리를 돌고 있다는 감각. 오랜 시간 동안 내 안에 끈덕지게 붙어있는 우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요즘에는 잠이 부쩍 많아졌다. 온종일 잠자는 것도 가능하겠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가끔은 잠자는 행위가 최후의 도피처럼 느껴진다. 마음이 훼손되었다고 느끼는 날, 절망이나 고통과 같은 불행의 감정들이 내 안으로 썰물처럼 밀려드는 순간이 오면 나는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감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향함을 상상한다. 거기에서 나는 단 하나의 부족함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 된다. 통장에 돈이 넘치도록 가득하고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근심이라곤 없는 하루를 보내는, 비극적 사건은 절대 찾아오지 않으며 주변 이들에게 자신의 것을 기쁘게 내어주는 그런 사람.그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걸 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정말 있는 줄만 알았다. 그들이 세상의 다수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낙관적인 세계에서 산다고 여겼으며 웃는 얼굴의 사람들 사이를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헤집고 다녔다. 그러면 어떤 상실감이 찾아왔다. 인생을 운용하는 데 있어 중요한 하나의 조각, 그것을 이미 획득한 자들에게 질투를 느꼈으며 그 열등감이야말로 내 삶을 추동하는 원동력이었다.동시에 그런 내 마음이 들킬까 봐 두려웠던 적도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나를 두고 결핍이 많은 아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 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영영 들키고 싶지 않던 비밀을 폭로 당한 사람처럼 마음이 홧홧해졌다. 그렇지만 친구 앞에서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씩씩하게 웃었다. 내 안에서 자꾸만 떠오르는 어떤 부정성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슬픔, 모자람, 추하고 가끔은 천박하다고 느껴지는 내 모습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나는 나를 지킬 수 있었다.손에 쥔 것에 별로 없다고 느껴질 때 나는 내 안에서 솟아오르는 우울을 본다. 그것이 없다면 나는 메마르고 텅 빈 몸이 되는 것이다. 늦가을의 책상 앞에 앉아 삶에 대해 몇 시간이고 고민하는 날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문장으로 적어내려는 시도도 없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고 세상을 불신하고 얼굴도 모르는 타인을 질투하고 연민하는 일. 세상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고 평온한 일상에 목말라하는 일. 이것은 모두 살아서 역동적으로 꿈틀대는 감정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이제 나는 나의 결핍을 자랑으로 여긴다. 내 안에 비루하고 나약한 것들이 있다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주지 않지만 인간으로 남게끔 해준다. 쓸모없고 형편없는 것이 위대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나의 영원한 한계이면서 동시에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주는 요소라는 것을 안다.나는 나의 결핍으로 나를 증명할 수 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흩어지는 시간 속에서 혼자만 아는 어떤 표식을 남겨놓는 행위를 하는 일은 모두 나의 결핍 덕분이다. 나는 나의 결핍으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소통하며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어떤 방에서 울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다. 버석버석한 낙엽이 차곡차곡 쌓인 거리를 바라본다. 이제 곧 긴긴 겨울이 온다. 늘 같은 자리에 굳건히 서 있는 나무는 다가올 추위를 견디고 다시 싹을 틔울 것이다. 황망하리만치 텅 빈 자리는 더욱 빼곡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런 순환과 믿음을 떠올리는 가을이다.

2022-11-22

이태원, 환상과 현실

이태원 참사 이틀 뒤 월요일, 오전 수업에서 출석 확인을 위해 학생들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다가 목이 멨다. 안녕을 묻기조차 죄스러운 아침에 학생들에게 “무사하게 여기 앉아 있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50명 정도가 수강하는 수업이라 매주 네다섯 명쯤은 결석하는데, 이날은 이름을 불러 대답이 없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수업 마치고 조교를 통해 연락했더니 다행히 모두 별 일 없었다. 요 며칠 보도블록 위에 떨어진 플라타너스 낙엽 위로 늦가을 햇살이 부드럽기만 하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그런 나날이다.참사 직후에는 슬픔보다 분노가 더 컸다. 주체할 수 없어서, 학생들에게 다소 격한 목소리로 거친 생각을 토해냈다. 아니다. 감정을 토해냈다. “먹고 놀고 마냥 웃고 즐기는 티브이 예능프로그램들 몇 개만 남겨두고 싹 다 없애면 좋겠다”고 운을 뗀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갔다. 학생들에게 말한 내용 그대로 옮긴다.티브이도 SNS도 환상만 주입하지 현실은 말하지 않는다. 이태원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만 보게 하지 가파르고 비좁은 골목, 차와 사람이 마구 뒤엉켜 복잡한 도로, 마약과 성범죄 등 어두운 그늘은 은폐한다. 여행지의 아름다움만 노래하고 강도나 인종 혐오 등 치안 위험에 대해선 함구하는 여행상품이나 마찬가지다. 미디어와 SNS는 환상을 부추기면서 현실을 망각시킨다. 잊어야 할 괴롭고 팍팍한 현실이 얼마나 많으면, 다 잊고서 먹고 마시고 즐기라 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까지 잊게 하니 문제다. 현장에 출동한 구급차와 경찰차를 보고 핼로윈 코스튬인 줄 알았다고 한다. 사이렌 소리에 맞춰 음악을 틀고 노래 부르며 뛰었다. 환상에 취해 현실감이 마비된 것이다.축제의 주말을 즐기러 이태원에 간 사람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사람들에게 환상을 선물하면서 현실을 빼앗아간 미디어의 잘못이다. 도시 인프라의 몸피보다 몇 배는 큰 대중의 욕망을 다 수용도 못하면서 미디어와 함께 방관하고, 환상이 무너졌을 때 추락하는 이들이 무사하도록 완충력 지닌 튼튼한 현실을 만들지 못한 위정자들 잘못이다. 소방관, 경찰, 군인 등 제복에 대한 존경이 없는 사회 풍조도 그렇다. 내가 누리는 자유가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그 사실을 알면 쾌락원리를 위반하는 환상에 속지 않고 절제할 수 있다.쾌락은 아름다운 것이고, 환상 없이 우리는 살 수 없지만, 쾌락은 무책임하다. 환상은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다. 너무 황당해 믿을 수 없는 이 참사가 환상이면 좋겠다.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밤의 비극이 악몽이었다는 듯, 다음날 오후 텅 빈 이태원 거리가 다른 세상 같다. 하지만 현실이다.다른 거 다 차치하고, 참사의 가장 큰 원인은 서울이 초과밀도 사회라는 것이다.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서로 빽빽하게 끼여 숨 막히면서 사는 도시다. 서울이라는 사회는 인구의 밀도를, 자본의 밀도를, 욕망의 밀도를 다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인 서울’을 꿈꾸게 한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제일 안타까운 건, 아직도 대한민국이 타자에 대한 관용, 다름에 대한 존중이 없는 보수적이고 경직된 사회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핼로윈이라 해도 좀비 분장을 하고, 코스프레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타인의 따가운 눈총과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는 곳은 서울에 몇 군데 없다. 대한민국에서 오직 이태원만이 다양한 인종과 문화, 여러 가치, 다채로운 개성, 전위적인 서브컬처, 소수성이 한 데 어우러질 수 있는 곳이다. 이태원밖에 없기 때문에 이태원으로 모여든 거다.“놀다가 죽었다”는 말을 누구도 쉽게 뱉어선 안 된다. 유년기부터 자연스레 핼로윈을 축제로 받아들인 청년들에게 이태원은 타인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들뜰 수 있는 곳이다. 놀다 죽은 게 아니라 그냥 걷다 죽은 사람들이다. 들뜨고 신난 게 잘못인가? 21세기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라면 10만명 아니라 100만명이 모여도 누구 하나 다치지 않아야 한다.더 말을 잇지 못하겠다. 참사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유가족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있길 기도한다.

2022-11-15

오늘을 위한 달리기

러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 호흡에 맞춰 뛰는 것이다. /언스플래쉬 마음처럼 되지 않는 날이다. 그럴 때엔 몸을 움직여야 한다. 평소 명상이나 요가를 즐겨 했지만 요즘은 달리는 재미에 푹 빠졌다.생각 없이 뛰다 보면 어느덧 숨은 목 끝까지 차고 다리엔 힘이 풀려 후들거린다. 현재 남은 거리를 막연히 계산하다보면, 과연 내가 무사히 완주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과 포기하고 싶은 욕망이 든다. 달리기뿐만 아니라 근래 내가 도전했던 모든 것들이 그랬다. 이게 정말 맞는 건지, 올바른 것인지 계산하느라 나아가는 걸 금방 멈추곤 했다. 하지만 러닝은 그런 불필요한 걱정을 덜어주고, 포기하고 싶을 때 한 발 더 내딛으며 고통을 극복하는 습관을 기를 수 있게 해주었다.나는 아직 러닝 초보라 주로 회복 러닝을 택해서 한다. 회복 러닝은 몸이 러닝에 익숙해질 때까지 편안하고 즐겁게 달리며 몸을 깨운다. 회복 러닝에서 가장 중요히 여기는 건 몸이 달리기에서 익숙해질 때까지 나를 기다리는 일이다.나를 기다리는 여정은 힘들지만 자유롭다. 달리는 동안에는 타인과 나의 러닝 속도를 절대 비교하지 않는다. 오로지 달리기 이전의 나의 모습과 완주한 나의 모습을 비교할 뿐이다. 인내와 통찰의 시간을 견디며 달리다 보면 일상생활에서의 스트레스와 충동에서 멀리 벗어나게 된다. 또한 완주하는 순간까지의 노력은 오롯이 나의 몫이기 때문에 그 시간의 주인공은 내가 된다.러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빠른 속도도 바른 자세도 아닌, 나의 호흡에 맞추어 뛰는 것이다. 너무 힘들다면 스스로 달리는 속도를 조절하고, 앞뒤로 움직이는 팔의 움직임을 강화하거나 물을 마시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또는 현재 나를 압박하는 압박감이나 불안을 멈추고선 달리는 자세에 집중하는 방법도 있다.러닝은 전력질주가 아니다. 무작정 멀리 빠르게 달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같은 속도로 꾸준히 나아가 완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달리다 보면 몸의 일정한 리듬이 생기게 되고, 지금 달리는 속도 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욕심이므로 버려야 한다. 절제와 자신감, 두 가지를 기억하며 적절한 러닝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더 빨리 달리는 것이 아닌, 더 빨리 달릴 수 있단 자신감을 가지고 흐름을 유지한다면 목표 달성은 물론, 기록에 남을 만한 멋진 달리기가 된다.러닝은 출발 전 신발끈을 확실하게 묶는 것에서 시작한다. 스트레칭으로 몸의 긴장을 풀고, 복장 단장을 마쳤다면 그 다음은 런-워크로 시작하여 달리는 몸에 익숙해지기 위해 워밍업을 한다. 심박수가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며 등에선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사실 이 순간이 가장 힘들지만 이는 좋은 신호다. 달릴 수 있는 몸으로 준비가 되었단 뜻이기 때문이다.달릴 때에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달리는 순간이 즐겁고, 더 달릴 수 있다는 확신만을 가진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다 보면 결국 현재에 집중하게 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동시에 너무 멀리 있는 길을 내다보고 가늠하며 걱정 하지도 않는다. 과거에서부터 이어진 후회, 미래로부터 끌어온 불안은 저 멀리 내어두고, 마음을 현재에 놓아 불편함과 불안을 사라지게끔 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중간 휴식은 필수다. 회복은 다음 달리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다. 자연스럽게 러닝호흡에서 회복호흡으로 바꾸어 호흡을 가다듬으며 심박수를 낮춘다. 달리기와 쉼을 반복할 때엔 신기하게도 조금씩 달리기 실력이 향상되는 걸 몸으로도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작은 노력이 모여 전보다 더 큰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단 믿음과 자신감은 오늘을 더욱 즐겁게 살게 한다.영화 ‘블리드 포 디스’에선 복서인 비니 파지엔자가 등장한다. 최고 인기 복서이던 그는 불의의 사고로 의사로부터 다신 걷지 못할 거라는 판정을 받지만, 수많은 재활과 노력 끝에 다시 링 위로 서는 것은 물론 WBA 슈퍼웰터급 챔피언을 차지한다. 그는 우승 인터뷰에서 “불가능해 보이지만 실제로 해보면 어느 순간 끝나고, 얼마나 간단한지 알게 돼요”라 말한 바 있다. 처음부터 불가능은 없으며, 실은 모든 것이 아주 간단하다고 말하는 그의 인터뷰 영상은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 오랜 기간 회자되고 있다. 모든 건 사실 간단하고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을 되새기며 오늘도 가볍게 달려 본다.

2022-11-15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이유

참담한 마음으로 일상을 보내는 요즘이다. /언스플래쉬 며칠간 참담한 마음으로 일상을 보냈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며칠 전 일어난 참사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유가족의 아픔에 어찌 비할 수 있겠느냐만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죄책감을 끊임없이 느낀다. 책상 앞에 앉아 문장 몇 줄을 쓰는 것이 위선적인 행위처럼 여겨진다. 애도 위로 쏟아지는 혐오와 무분별한 언어폭력에도, 공적으로 책임져야 할 지점을 개인의 영역으로 밀어내는 일에도 완전히 지쳤다. 자꾸만 무너지고 무력해진다.마음이 자꾸 극단적으로 치닫는 이유는 분명하다. 같은 슬픔을 같은 마음으로 몇 번이나 경험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우리는 여러 죽음을 겪었다.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노동자의 죽음과 삽시간에 무너지는 건물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 한 사람들. 우리 사회를 비통함으로 물들게 했던 참사들. 그에 따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비슷한 상황이 또다시 반복되었다.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믿었던 참사 전후의 예방과 대처는 여전히 미흡하다. 세상은 얼마나 더 끔찍해질 수 있을까. 상상의 범주를 넘어선 죽음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터널 안을 헤매는 기분으로 맥없이 고개를 떨어뜨린다.이태원 참사의 사망자와 부상자 수를 본다. 이것은 숫자 이상의 고통과 상실이 우리 주변에 만연하다는 뜻이다. 내게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 하룻밤에 사라져버리는 일. 경험하지 않은 자들이 쉽게 재단할 수 없는 마음에 놓인 이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그러한 아픔을 마주하는 과정에 예의를 지키기는커녕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말이 있다. 춤추고 노래하는 일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일. 자유와 젊음으로 대변되던 공간을 순식간에 부패한 곳으로 만들어버리는 일. 사람 많은 곳에 간 것이 잘못이다. 놀러 나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다. 이러한 말은 상대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절대적으로 근거 없는 힐난의 말이다. 이런 말의 깊은 곳에는 비이성적인 혐오가 뿌리잡고 있으며 개인 존재의 존엄을 축소하는 태도가 내재하여있다.그러니까 이것은 책임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시민과 안전을 책임지는 정부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서는 이 일을 결코 종결지을 수 없다. 쓰러진 친구의 호흡기를 누르며 무릎에 시퍼렇게 멍이 들면서도 자기 탓이라며 울부짖는 청년에게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일. 사고의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생존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공동체가 짊어져야 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민중이 국가권력에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정치적인 영역을 넘어서서 그 무능과 안일함을 질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을 떠넘기는 공직자들의 발언을 보면서도 그랬다. 상실감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지 못한 채로 책임을 절감시키기에 급급한 태도는 국가에 대한 믿음을 지워버리는 것이다.인터넷에 올라오는 사상자를 혐오하는 발언이나 자극적인 영상, 기사들 역시 자기 책임을 내버린 일이다. 타인에 대한 예의를 가져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행해지는 일들이 있다. 한 사람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이런 식의 발화는 엄격한 법적 장치를 통해 통제되어야 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단순한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잘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당연한 일상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지금 발붙이고 있는 이 시간이 언제 꺼질지 모르는 위기로 느껴진다.‘나는’보다 ‘우리는’이라는 주어가 더욱더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명하다. 각자도생을 권유받는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이 모든 참사가 타인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누군가의 고통을 멀리 두는 순간 자기의 삶을 파괴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함께 동시대를 걸어가는 공동체의 일원이며 이 모든 일에는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쓰기까지도 오랜 고민이 필요했다. 쓰고 지우고를 반복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나 역시 아픔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막막한 무력함으로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다가 마음을 다잡는다. 이 발화는 나를 깨우치는 기록이다. 절대 잊지 않기 위함이다. 누군가의 고통이 결국에는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이다.함께 아파하고 슬퍼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이유다.

2022-11-08

당신의 믿음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 근처의 신축 빌라 공사 현장에서 사고가 일어나 인부 여럿이 다치고 죽었다. 어린 나는 내 가까이서 사람이 죽었다는 게 딱히 실감이 나진 않았던 것 같다. 사람이 죽는다는 건, 토요 미스터리 극장이나 이야기 속으로 같은 무서운 TV 프로그램, 혹은 경찰청 사람들이나 공개수배 25시 같은 수사 프로그램에서나 나오던 이야기였기에 그랬던 것 같다.늦은 밤 부모님 몰래 TV를 보는 아이처럼, 나는 한동안 사고가 일어난 주변을 몰래 바라보곤 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 사람이 저곳에서 죽었다는 것도 실감나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사고는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당시엔 그런 일들보다 재밌고 신나는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어린 나의 마음은 그 일을 오래도록 담아둘 정도로 크지도 않았다.오래도록 그 일을 잊고 있다가 다시금 떠오른 건 초등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수업 시간에 친구와 장난을 치다가 노년의 담임선생에게 뺨을 맞은 적이 있었다. 아직 국민 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던 때의, 아직은 체벌이 익숙하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이야기. 그날 화가 난 선생님은 9살짜리 아이를 오래도록 혼내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너 같은 애는 나중에 커서도 뻔하다. 저기 공사장에서 사람 죽은 거 아느냐. 선생님 말도 잘 안 듣고, 하느님도 안 믿고, 성경 공부도 안 한 사람들이다. 하느님 안 믿으니까 공부도 안하고, 방탕하게 살다가 공사장에서 험한 일만 하다 천벌 받은 거다. 그게 다 죄다. 너도 커서 똑같이 그렇게 될 거다.누군가에게 뺨을 맞은 건 처음이었기에 많이 놀라고 당황스러웠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무섭고 두려워 나는 큰소리로 오래도록 엉엉 울었다. 결국 소리를 듣고 놀란 옆 반 선생님이 양호실로 데리고 갈 때까지도, 나는 계속 울었다. 죄라는 건 TV에 나오는 험악하고 무서운, 귀신이나 범죄자들이나 저지르는 건 줄 알았던 나에게 담임 선생이 한 말은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뺨을 맞고 펑펑 운 탓에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집에 돌아온 나를 본 할머니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고모와 함께 학교에 쳐들어갔다. 그 담임선생이 고모와 같은 교회의 신자였다는 걸 알게 된 건 내가 중학교에 올라갈 무렵의 일이다.무섭고 두려웠던 그날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건 많이 놀랐던 탓도 있겠지만, 사실 그보단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았던 질문이 해결되었기 때문도 있다. 좀처럼 알 수 없던 사실이 슬며시 “아, 그래서였구나.”로 바뀌는 기억은 좀처럼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왜 죽는 것인지, 왜 누군가의 죽음은 저처럼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미처 알지 못했던 나에게, 그날의 기억은 세상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그렇구나. 죽는다는 건 죄에 대한 벌이구나. 하느님 믿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성경 공부 잘 하지 않으면 죄인인 거구나. 그러면 저렇게 죽는 거구나.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죽게 되겠구나. 무섭도록 유치하고 단순하기에 더 잔인한 이야기. 그래서 오래도록 마음에 새겨지고 마는 상처 같은 이야기.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죽은 건,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이교도의 축제를 즐기러 가서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이 죽은 건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참사는 북한 공작이며, 이게 다 지난 정부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 참사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이 죽은 앞에서 찬송가를 틀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사람들. 신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빌리고는 무엇으로도 갚지 않는 사람들. 무섭도록 유치하고 단순하기에 더 잔인한 이야기. 그래서 더욱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야기. 누군가는 진심으로 믿게 될 그런 이야기. 참사가 벌어질 때면 매번 나오는 이야기.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가 어릴 적 겪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래서 매번 다시금 묻게 된다. 내가 저지른 죄는 정말 그렇게 큰 죄였나요? 그들이 죽은 건 그렇게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인가요? 우리의 가난과 우리의 삶과 우리의 슬픔은 모두 우리가 지은 죄 탓인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들의 죄만을 대속하셨을 뿐, 우리의 죄는 고스란히 우리의 몫으로 남겨졌던 것인가요? 우리를 죄인이라 말하는 당신은 누구인가요.만약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를 향해 말하고 싶다. 예수께서는 누군가의 죄를 짊어지고자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당신은 누군가의 죄를 탓하고 욕하고 벌하기 위해 세상을 살아가는군요. 그건 지옥의 일이에요. 당신은 지옥을 믿는 사람입니다.

2022-11-08

마라탕의 인기는 어디까지?

최근 집근처에서 산책을 하다 깜짝 놀랐다. 최근 2-3년 사이에 마라탕 가게가 부쩍 늘었다는 게 확연히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마라탕은 2010년대 중국인과 유학생을 대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특히 최근 3-4년부터 마라탕 열풍이 지속되며 약 32개의 마라탕 브랜드가 국내에 생겨났다. 그 중 일부는 100개 이상의 프랜차이즈 사업을 펼칠 정도로 활발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마라탕이란 중국 쓰촨을 기반으로 하여 둥베이 지방을 거쳐 만들어진 중국 요리다. 한자로 마(痲)는 저리다 혹은 마비 라는 뜻을 지녔고, 라(辣)는 맵다, 탕(71D9)은 뜨겁다는 뜻을 지녔다. 초피나 팔각, 정향 등 다양한 향신료를 가열해 향을 낸 기름에 육수를 부은 다음 채소나 고기, 버섯, 두부 등의 식재료를 넣고 끓이는 탕요리다.마라탕의 유행은 계속되고 있다. 네이버 기준 검색량 키워드를 조회해보았을 때 ‘마라탕’의 월간 검색량 조회수는 총 40만건으로 나타났다. 연령별 검색 비율은 10대 27.7%로 가장 높게 나왔고, 그 다음은 20대 27.6%로 나왔다. 더 재미있는 건 여성의 비율과 남성의 비율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점이었는데, 여성은 73.0%, 남성은 26.9%로 조사되었다. 10대 대표 간식이라 불리는 ‘떡볶이’의 월간 검색량은 월 24만 8천건이었다. 떡볶이의 24만 보다 훨씬 높은 40만 건이라는 검색량은 마라탕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해볼 수 있었다.또한 마라탕 선호가 성별과 연령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2022년 7월 기준으로 한 카드 회사가 체크카드를 발급한 회원의 ‘음식점 이용금액’ 소비 패턴을 분석했더니, 중·고등학생 여학생의 마라/샹궈 음식점 이용금액이 3위를 차지했다. 4위는 떡볶이가 뒤따랐다. 반면 중고등 남학생은 1위 배달/야식, 2위 햄버거, 3위 커피전문점으로 마라/샹궈 음식점에서의 이용금액은 순위에 없을 정도로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다.이렇게 Z세대 여학생 사이에서 마라탕이 유행한 이유는 뭘까? 알싸하고 자극적이라 국물조차 먹지 않는다는 중국 마라탕과는 달리, 한국 마라탕은 대부분 사골 국물을 주로 쓴다. 매운 국물에 푹 절여진 야채와 고기 그리고 어묵을 한꺼번에 먹을 수 있어 국밥만큼이나 든든한 한끼라는 특징이 있다. 또한 한국 특유의 달거나 시원한 매운 맛이 아닌, ‘알싸하고 얼얼한 매움’은 마라탕에서만 즐길 수 있는 낯설고 이국적인 맛을 지녀 더욱 중독성을 지닌다.또한 마라탕은 내가 원하는 재료를 마음껏 커스터마이징해서 먹을 수 있단 특징이 있다. 먹고 싶은 채소와 고기, 어묵, 해산물 등 수십 가지 재료를 취향대로 담아 카운터에 내면 무게에 따라 가격을 책정한 뒤 주방에서 조리를 한 다음 내어준다. 금액 또한 저렴하다. 기성세대는 이러한 주문 방식이 다소 번잡하고 귀찮게 느껴질 수 있지만 Z세대는 자신의 입맛과 취향, 그리고 개성을 반영하는 과정을 즐기고 소비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마라탕의 유행 덕분에 인터넷뿐만 아니라 마트나 슈퍼에서도 마라탕 소스나 각종 향신료, 재료 등을 쉽게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국내 대형 식품회사에서 한국인 입맛에 맞추어 자극적인 향신료를 빼고 사골 육수를 사용한 마라 소스를 앞다투어 출시하고 있어, 기호대로 선택할 수 있단 이점이 있다. 또한 하이디라오나 라오간마 등의 중국 현지에서도 유명한 브랜드 상품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요리 과정 또한 쉽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직접 마라탕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유튜브에선 이미 마라탕 먹방(마라탕 만들기)’ 영상이 조회수 964만회를 기록하고 있고, ‘야식으론 절대 먹지 마라 마라탕’이란 제목을 가진 동영상은 약 734만회라는 조회수를 지니고 있을 정도다.이젠 길거리를 걷다보면 마라탕 외에도 마라 국밥이나 마라 떡볶이, 마라 라면, 마라 부대찌개, 마라 치킨 등 마라를 활용한 다양한 음식이 출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마라탕은 나트륨이 많은 음식이라 자주 먹게 된다면 고혈압이나 심혈관 질환 같은 질병에 노출될 수 있다. 되도록 국물을 마시는 건 자제해야 한다고 하지만, 입이 얼어붙은 듯한 마라의 얼얼한 중독성에 빠지게 되면 국물을 참을 수 없게 된다. 특히 날이 쌀쌀해진 저녁엔 각종 채소를 넣은 마라탕이 생각난다. 맛있는 음식으로 오늘의 스트레스를 잠시 잊을 수 있다니, 단순하고 가벼운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가을날이다.

2022-11-01

욕망만 간단히

몇 해 전, 2학기 첫 수업에서 동급생들보다 예닐곱 살 많은 한 학생이 재직증명서를 내밀며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어 출석이 어렵다고, 대신 매주 과제를 성실히 제출하겠다며 출석에 관한 양해를 부탁했다. 취업자의 대체 출석을 조건부 허용하는 학칙도 있고 해서 ‘성실한 과제 제출’을 전제로 허락했다. 매 학기마다 1주차에는 수업 소개, 진도 및 평가 계획, 목표 등을 안내하고, 표절, 무단인용, 중복제출 등 창작물과 과제물에 대한 창작윤리를 강조한다.이스마일 카다레의 ‘꿈의 궁전’을 읽고 어느 부분이 매혹적인 판타지로 다가왔는지를 짧게 써 내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출석 인정을 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메일에 첨부된 과제물을 열어보았다. 어느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책 리뷰를 그대로 긁어서는 종결어미와 부사만 슬쩍 바꿔 자기 글인 양 제출한 것이었다. 2주차 수업에서 출석을 부르며 한 사람씩 과제 피드백을 해줬는데, 자리에 없는 그 학생 순서에서 “(책을) 안 읽고 쓴 것 같아요… 짜깁기한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다른 학생들에게도 경각심을 주고 싶었다.내가 한 이야기가 그 학생에게 전해졌는지 수업 이틀 뒤 “제가 없는 자리에서 제 이야기를 나쁘게 하셨다면서요? 직접 연락해 말씀하셔야지, 그렇게 뒷담화하시니까 불쾌하네요” 하는 장문의 항의 문자를 받았다.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한 건 불쾌할 수 있겠다 싶어 그 부분을 사과했다. 또 한 번 날이 선, 나를 훈계하는 투의 문자가 날아들었다. 답을 하려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관뒀다. 울릉도 도동 터미널에서 포항으로 가는 여객선을 기다리던 환한 가을날이었다.불쾌하긴 했지만 금방 잊어버렸다. 행여나 감정적으로 불이익을 준다고 여길까봐 그 학생의 과제물과 시험답안은 객관적으로, 아니 더 너그럽게 평가했다. 학칙은 취업 학생에게 줄 수 있는 점수를 제한하고 있는데, 그 범위 안에서 최고점을 줬다.그리고 1년쯤 지난 어느 날, 그 학생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미리보기 화면에는 “선생님, ㅇㅇㅇ입니다. 이번에 제 책이 나왔습니다”까지 적혀 있어 내게 책을 보내주려 주소를 묻는 건줄 알았다. 메시지를 열어보니 온라인 서점 구매 링크와 함께 “관심 부탁드립니다”라고 써져 있었다. 인사말 같은 건 없었다. 씁쓸했다.지난 학기 성적 입력을 마치고, 한 학생으로부터 성적 정정 요청 메일을 받았다. 아주 길게 써내려 간 장문에는 수업에 대한 칭찬, 감사 인사와 함께 자신이 왜 A+를 받지 못했는지 의아하다는 질문,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고 뛰어난 학생인지 설득하려는 주장, “교수님의 강의가 제 인생에서 큰 깨달음을 준 수업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디 그 기억이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으로 기억되게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귀여운 협박(?)까지 담겨 있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다음날,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담아 답메일을 보냈다. 그 학생 성적을 올려주면, 다른 학생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성적은 정정할 수 없지만, 미안한 마음을 담아 내가 쓴 책들을 보내주고 싶었다. 혹시라도 받길 원한다면 주소를 남겨달라고 했다. 메일을 보냄과 거의 동시에 ‘수신확인’ 상태가 ‘읽음’이 되었다. 아마 정정 요청이 받아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빠뜨린 내용이 있어 10여분 뒤 메일을 하나 더 보냈다. 마음이 몹시 상했는지 나중에 보낸 메일은 내내 읽지 않다가 닷새쯤 지나서야 읽었다. 두 개의 메일을 보냈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자기 필요에 의해 할 말을 했고, 요구가 관철되지 않았으므로 더는 용건 없다는 것일 테다. 이 학생에게 주려고 포장해놓은 책 꾸러미를 풀었다. 씁쓸했다.요즘 학생들이 생각하는 ‘용건만 간단히’의 의미가 이런 것일까? 요즘 세대는 더 이상 예의를 배우지 않는다. 나도 아직 30대이고 미혼이지만, 3040 부모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우리 애한테 왜 그래요”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영 마뜩찮다. 부모의 훈육 탓만은 아니다. 각자도생의 이기적 사회 풍조에서 젊은 세대가 배울 만한 어른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점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은 사라지고 ‘욕망’만 남는 듯하다. MZ세대의 ‘용건만 간단히’는 어쩌면 ‘욕망만 간단히’가 아닐까? 씁쓸하다.

2022-11-01

당신은 정말 입을 가졌는가

10월 15일 경기도 평택시 소재의 제빵공장에서 직원 A씨가 기계에 몸이 끼여 사망했다. 위생을 위해 착용하고 있던 앞치마가 샌드위치 소스 배합기에 빨려 들어갔던 탓이었다. 기계에는 사고를 막기 위한 인터록과 같은 어떠한 장치나 설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심지어 이와 같은 사고가 발생할 경우 대처하기 위한 매뉴얼조차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A씨는 사망했고, 그의 시신은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의 손에 수습되었다. 사망 사고 이후에도 공장은 정상 가동되었다. 노동부에서 9대의 소스 배합기 가운데 자동 정지 장치가 없는 7대에 대해서만 작업 중지 명령을 했기에, SPL은 나머지 2개의 배합기 기계를 가동하여 공장을 가동시켰다. 사고가 난 배합기에 흰 천을 둘러둔 채. 그날 오후에서야 노동부는 사고가 발생한 3층 전체의 공정 중지를 명령했고, 해당 층의 작업은 정지되었다.해당 공장에서는 일주일 전에도 한 직원의 손이 기계에 끼이는 사고가 벌어졌었다고 한다. 공장 측에서는 그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기간제는 알아서 병원에 가라”고 말하곤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 직원은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 자비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 사고 이후에도 마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공장은 샌드위치를 만들었고, A씨가 사망한 날에도 작업장은 아무런 일 없던 것처럼 가동되었다. 희고 깔끔한 공장에는 어떠한 핏자국도 없었고, 아무런 잡음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고가 있던 다음날, SPC그룹은 자사의 파리바게트가 영국 런던에 1호점을 열게 되었다는 사실을 홍보하는 보도 자료를 대대적으로 배포하였다. SPC그룹의 회장이 공식적인 입장을 표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서였다.이은주 정의당 의원이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으로부터 받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해당 공장에서는 2017년부터 2022년 9월까지 37명의 사람이 사망했다. 그 가운데 끼임 사고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15명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제33조 제1항에서는 “유해 또는 위험한 작업을 하거나 동력에 의하여 작동하는 기계·기구의 경우 유해·위험방지를 위한 방호조치를 하지 아니하고는 이를 양도·대여·설치 또는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인터록 장치를 비롯한 방호 조치”를 해야 할 책임을 밝히는 것에 불과할 뿐, 인터록을 의무화하는 법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SPC 허영인 회장은 총 1000억원을 투자해 그룹 전반의 안전경영 시스템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말했으며, 특히 사고가 일어난 SPC은 영업이익의 50% 가량을 산업안전 개선을 위해 투자하겠다고 대국민 사과 회견을 통해 밝혔다. 하지만 그 회견마저도 불과 두 시간여 전에 급하게 공지된 것이었고, 정작 SPC의 노동자들과 시민단체의 회원들은 출입을 가로막힌, 오직 기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마저도, 허영인 회장은 질의응답조차 하지 않은 채 고작 15분 만에 자신들의 입장만을 표명하곤 사라졌다.이것이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희고 보드랍고 깨끗한 샌드위치에 담긴 시간이다. 우리가 먹는 이 작고 흰 빵에 담긴 이야기를 나는 과연 얼마만큼이나 알아왔던가. 앎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토록 편한 마음으로 먹을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꼭 샌드위치에만 국한된 일일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상품의 뒤에는 이처럼 무수히 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점철되어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또한 어떤 상품에 가리워진 사건과 사고의 당사자 혹은 목격자이다. 다만, 당신이 말하지 않아왔기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입이 없다. SNS를 비롯한 뉴미디어 채널이 늘어나고, 누구나 자신의 채널을 만들어 콘텐츠를 제작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입이 없다. 그러니 ‘입’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입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건 당신의 착각일 뿐이다. 그렇기에 저들은 여전히 똑같은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다.할란 엘리슨의 소설 ‘나는 입이 없다 그러나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에서는 시스템 컴퓨터에 의해 모든 기능을 빼앗긴 채 액체 장난감으로 전락한 인간이 등장한다.당신을 그것을 단지 SF적인 상상력일 따름이라 치부할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다를까. 우리는 정말 입을 가졌는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컴퓨터 속에서 우리가 가진 손, 발, 입, 눈, 귀와 같은 것들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럴까? 그럼에도 세상은 왜 여전히 같은 사고를 반복하는 것일까.당신은 정말로, 자신이 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2022-10-25

빛 좋은 개살구 먹는 법

‘빛 좋은 개살구’를 현명하게 먹는 방법은 뭘까? /언스플래쉬 바야흐로 ‘보여주기’의 시대다. 자신의 일상을 전시하는 일은 어렵지 않고 그만큼이나 쉽게 타인의 삶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옛 친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워지면 스마트폰을 들어 SNS를 켜면 된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의 하루가 궁금하면 유튜브에 접속해 영상을 시청하면 된다.현대사회에서 카카오톡, 페이스북, 블로그, 인스타그램과 같은 플랫폼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소셜 네트워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구시대적이라는 감각을 넘어 타인과의 소통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된다.이런 구조 속에서 자기를 보여주는 방식 또한 중요해졌다. 소위 MZ세대로 통칭되는 청년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과제 앞에 놓였다. 그 어디보다 경쟁구조가 선명한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러한 증명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처럼 보인다. 가진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하면 자신의 것이 너무나 조그맣다고 느끼기 쉽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몸집을 부풀리기 마련이다.‘빛 좋은 개살구’라는 속담이 있다. SNS에서 인기라는 식당에 가면 앉을 자리가 없다. 문 앞에는 웨이팅하는 손님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받은 음식은 번지르르한 모양과는 달리 별로 특별한 것 없는 맛이다. 인기 연예인이 극찬했다는 화장품은 고급스러운 패키지에 비해 효과가 미미하고 백만 독자를 사로잡았다는 책에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가득하다. 이처럼 겉으로 보기엔 좋아 보이는 것들도 깊게 들여다보면 실속이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실제보다 더욱 멋들어지게 포장하는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타의로 작동되는 일이기도 하다. 인기라는 거품이 꺼지고 자신의 실체가 드러날까 두려웠다는 유명 가수의 이야기처럼 자신을 세상에 내보이는 사람들은 어떠한 포장지에 싸이기 마련이다.우리는 모두 다른 조건을 가지고 삶을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당연하게 있는 것들을 만져 보지조차 못하고 자신에게 허용된 세계라는 느낌을 받기가 어렵다. 내가 가진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이 필요하고 거기에서 ‘보여주기’의 굴레는 더욱 공고해진다.SNS의 주요한 기능 중 하나는 나와 타인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나는 9개월 동안 외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데, 그때의 외로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나만 빼고 세계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SNS로 소통하면서 나 역시 이 세계에 공고하게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현재의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고 나의 하루가 얼마나 더 아름답고 빛나게 기록될 것인지에 대한 탐구에 돌입하게 되었다. 내가 누구와 만나는지, 무엇을 먹고, 어디에 가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나의 가치가 정해진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인스타그램 계정을 삭제하는 것이었다.그때의 나는 나를 얼마나 훼손하면서 살고 있는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에 연연하며 최대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것은 당연히 어리석고 피곤한 일일 수밖에 없다.우리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완벽하게 벗어날 순 없다. 망망한 무인도에 완벽하게 고립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딘가에 계속해서 노출될 것이다. 아날로그적 시대를 그리워하며 지금의 상황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현실에서 도피하는 일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빛 좋은 개살구’를 현명하게 먹는 방법 중 하나는 개살구가 그저 ‘빛이 좋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거 생각보다 맛이 없잖아, 하고 실망하는 대신 허황된 빛을 가진 열매를 그 자체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누군가에겐 본질보다 보이는 모양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고 그것을 굳이 비난할 필요는 없다. 밍밍하고 맛이 떫은 것을 먹더라도 괜찮다. 우선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먹자는 것이다.그러니 정말 싱싱하고 달콤한 과육을 원하는 이들은 응당 이러한 빛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겠다. 보여주는 것에만 매혹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기르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 자신이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닌지 끊임없이 되돌아보려는 시선 또한 중요하다.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내 안에 있는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고민은 정보가 홍수처럼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단단한 힘이 될 것이다.

2022-10-25

외로운 황홀함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언스플래쉬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정지용, ‘유리창 1’)정지용의 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라든가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와 같은 감각적인 묘사와 언어운용은 요즘의 어떤 시와 비교해도 세련되게 느껴진다. 이미지나 리듬감도 뛰어나지만, ‘유리창 1’을 아름다운 시로 기억하게 만드는 가장 핵심적 요인은 이 시 전체에 배어 있는 슬픔과 연민의 정서다.알려진 바 이 시는 지용이 폐렴으로 어린 나이에 죽은 아이를 그리며 쓴 작품이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라는 문장은 지용의 마음을 절절하게 나타내준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산새처럼 날아”간 아이가 있는 밤하늘을 보기 위함이다. 이는 “외로운 황홀한 심사”를 일으키는데, 죽은 아이를 생각하며 외로울 수는 있어도 황홀하기는 쉽지 않다. 외로움이 보편적 감정이라면 황홀함은 보편성을 넘어선, 시인이라는 예민한 존재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정서일 것이다.죽은 아이가 날아간 밤하늘을 바라보니 슬프고 외로운데,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 풍경은 한없이 아름다워 황홀하다. 이 황홀함은 풍경에 의한 고취인 동시에 슬픔이라는 감정이 몰고 온 일종의 환각적 상태다. 슬픔 속에 오래 침잠되어 있다 보면 세상이 비현실적 공간으로 여겨진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이든 육체의 고통 또는 현실의 절망이든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아이가 없는 현실에서는 외로우나 아이를 만나는 상상에서는 황홀하다. 그 황홀함은 세상에서 오직 ‘나’만, 아이의 죽음을 오롯이 살아내야 하는 부모만이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외로운 황홀한 심사다. 자녀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부모를 칭하는 단어가 없는 것은, 누구도 그 마음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는 슬픔, 그 슬픔 속에서 아이를 만나는 상상…. 삶도 죽음도 초월한 어느 곳에서 느끼는 그 감정이 바로 외로운 황홀함일 것이다. “외로운 심사”라고만 했으면 이 시는 아름다움이 덜 했을 것이다. “외롭고 황홀한”도 안 된다. 그렇게 쓸 경우 외로움과 황홀함은 각각 독립적인 감정의 상태이거나 서로 다른 두 감정의 연쇄작용일 뿐이다. 밤하늘을 보며 정지용이 느낀 외로움과 황홀함은 한 덩어리다. 그래서 오직 “외로운 황홀한 심사”여야만 한다. 외롭고도 황홀한 것이 아니라 외로운 황홀함이야말로 화자가 느끼는 적확한 감정이므로.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몇 해 전, 청소년 시 낭송 UCC 경연대회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 한 학생이 이 시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는데,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냈다. 사월 바다에서 딸을 잃은 아버지가 팽목항에 주저앉아 스마트폰에 담긴 딸의 사진을 본다. 액정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 내린다. 그렇게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화면 속 딸의 얼굴을 선명하게 보기 위해, 아버지는 밤에 홀로 액정을 닦는다. 그 “외로운 황홀한 심사”를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을까?지난 9월, 태풍 힌남노가 몰고 온 수해로 소중한 목숨들이 스러졌다. 침수된 주차장에 차를 빼러 가는 엄마가 걱정돼 함께 나섰다가 숨진 중학생 김 군의 사연이 세상을 울렸다. 급박한 순간 엄마는 “너라도 살아야 한다”며 아들을 내보내려 했고, 아들은 “엄마, 사랑해요.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야속한 하늘은 이 다정한 모자(母子)를 갈라놓고야 말았다. 살아남은 엄마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없다. 별이 되어 밤하늘로 날아갔을 거라고, 무엇이든 되어 다시 만날 거라고, 다음 세상에서도 엄마와 아들로 태어날 거라고….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외로움, 꿈속에서나마 아들을 만날 황홀함…. 언제 그랬냐는 듯 계절은 어느새 가을이다.

2022-10-18

탄소 발자국 줄이기

이산화탄소 배출은 지구온난화의 주요 원인이다. /언스플래쉬 다가오는 11월 24일부턴 일회용품 사용 제한이 확대된다. 현재는 대형 마트나 편의점 등에서 비닐봉투를 사용할 수 없지만, 대신 편의점이나 빵집 같은 경우엔 일정한 돈을 내면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하지만 11월 24일부턴 편의점이나 빵집에서도 비닐봉투를 절대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젠 비닐봉투 대신 종량제 봉투, 부직포 가방, 또는 재활용이 가능한 순수 종이 재질로 된 종이봉투로 대체된다. 전 지구적 문제라고 할 수 있는 환경보호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로 읽힌다.카페에선 일회용 종이컵과 플라스틱 빨대, 그리고 뜨거운 음료를 젓는 플라스틱 막대까지 매장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음료를 포장하는 경우 12월 2일부터는 일회용 컵 보증금제가 실행되는데, 일회용 컵을 사용한 뒤 반납하면 300원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한다.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는 것으로 일회용품의 폐해를 줄이자는 것이다.대규모 점포에서의 우산 비닐 사용도 금지되고 야구장이나 콘서트장에서의 응원 용품도 제한되며, 계속되는 환경 문제를 줄이기 위해 일회용품 사용 규제가 확대되고 있다. 일회용품 사용 제한 이슈에 소비자들의 소비 형태는 앞으로 많은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환경 보호를 위한 소비자의 규제가 강화된 만큼, 그간 국제사회와 기업은 변화된 규제를 통해 어떠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우리나라를 비롯해 전세계 국제사회는 환경보호에 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탄소발자국을 없애기 위한 대응책을 지속적으로 꾸준히 내놓고 있다. 2005년 EU는 탄소배출권 거래제(ETS) 방안을 세계 최초로 내놓으며 실행 중에 있다. 탄소배출권 거래제란 온실가수 감축 의무가 있는 국가에 배출 허용량을 부여하고, 한도를 초과할 경우 탄소배출에 대해 기업에 비용을 부담을 요구하는 것이다. 경제적 이익을 우선가치로 삼는 기업에게도 무형의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하지만 EU 바깥에서 탄소누출 현상이 지속되자 EU는 2023년에 탄소 국경세(EU외 국가 제품에 적용하는 세금)를 도입하겠단 입장을 밝힌 상태다. 이러한 탄소배출권 거래제, 탄소 국경세 도입으로 인해 기후변화 이슈는 전세계적으로 중요한 화두로 자리잡으며, 지속적으로 전세계가 풀어나가야 할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지난 2015년 국내에 도입된 탄소 배출권 거래제는 정부가 전체 탄소 배출 허용 총량을 설정하고, 각 기업마다 일정 배출권을 부여한다. 기업은 할당 받은 배출권 범위 내에서 생산활동과 탄소를 배출할 수 있으며, 부족하거나 남는 경우에는 시장에서 배출권을 사거나 또는 팔 수 있도록 되어 있다.이렇게 제품 생산부터 폐기까지 적절한 탄소배출을 유지한 기업은 환경부가 인증한 탄소발자국 인증 라벨을 상품에 기입할 수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지구온난화의 주요 원인인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의도로 실행되고 있으나 정작 탄소발자국 라벨을 단 제품이 많지 않고, 나 또한 조사 직전까지 이 라벨의 정체를 몰랐단 점이 조금 부끄러웠다. 적극적인 홍보와 개개인의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미국의 생활 용품을 제조하는 한 거대 기업은 친환경 인증제품을 55개 등록하며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55개의 인증받은 제품은 타 제품보다 60%가 넘는 조회수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이미 소비자들은 탄소중립 정책을 지향하는 기업을 지지하고 선택하고 있단 추세를 보인다는 뜻이다. 바람직한 변화다. 해외뿐만 아닌 최근 많은 국내 기업 또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의 경영 방식을 내세우며 친환경적 순환경제로의 전환을 실천하고 있다.이러한 행보에 관심을 가지며 탄소발자국 인증 제품 구매, 메탄가스 감소를 위한 고기 섭취 줄이기, 각종 일회용품 줄이기, 디지털 탄소발자국 줄이기 등, 나부터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행동하는 것이 이 어려운 난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공존과 상생을 위해 국제사회와 국가, 기업뿐만 아닌 개인의 관심 또한 필요한 때다.

2022-10-18

말하는 마음, 듣는 마음

세상에 발화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어딜 가도 조용히 사색하는 사람 보다 지치지 않고 떠드는 사람만 보인다. 나부터 그렇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일기장은 물론이고 지면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들이 가득하다. 여기저기에 끼적여놓은 문장을 보면 부끄럽다 못해 수치스러운 감정까지 든다. 이것이 필요한 이야기일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이브하지 않은가? 매일매일 비슷비슷한 문장을 적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쓰는 인간으로서의 자의식은 작아질 대로 작아져서 반쯤 베어 문 땅콩보다 더 조그매지는 기분이다.글을 쓸 때만이 아니다. 평소에도 나는 굉장히 수다스러운 성격이다. 대화를 주도하는 것을 좋아하고 정적을 참지 못하며 침묵과 함께 찾아오는 엄숙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어려운 일을 위트 있게 넘기고 싶어서 상대에게 무례한 언사를 행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자책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다음에는 입을 열지 않을 거야. 침묵을 견디는 사람이 될 거야. 다짐해보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그러한 결심은 순식간에 휘발되고 다시 시끄럽게 떠드는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참 이상한 일이다.가진 게 없어서 잃을 것도 없었던 때, 자기 연민으로 똘똘 뭉쳐 주변을 왜곡시켜 보거나 마냥 숨어 있고 싶어 했던 시절, 나는 어떤 고립감을 느끼면서도 거기서 벗어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의미한 행동은 세상에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잘못되었어. 그러니까 이 세계가 망할 수밖에 없는 거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의 말을 가로막고 상대가 얼마나 편협한 관념에 갇혀 있는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너는 왜 본질을 못 봐? 나는 선명하고 자신감 있는 척했지만 끝끝내 어떤 것도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 어리석음을 인지하면서도 발화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굳이 이해해보려는 태도야말로 내가 존립할 수 있는 이유였으니까. 그때의 나는 이상한 결연함이 있었다. 입을 다무는 것은 비겁한 것이라고. 끓어오르는 언어를 숨기지 말고, 밖으로 모두 드러내 보이자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면서 말하는 양은 더욱 늘어났고 발화의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술자리의 거친 언어는 정제되었고 강의의 형태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다 보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불안이 들었다. 뭔가를 선동하고 있는데 그것이 위험한 방식인 것 같은 기분. 이것은 정말 중요한 개념이다, 하고 강조하는 말은 원론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스스로가 선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주입하려 했다. 나는 말하는 것을 멈추고 물었다. 너희의 생각은 어때? 그들의 입에서 놀라운 언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내가 들여다보지 못한 지점과 알지 못한 세계를 전달받았다. 끝끝내 장악할 수 없는, 아니 장악할 필요가 없던 그들의 역사였다. 비로소 나는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어렵다. 발화보다 경청이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듣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다정한 마음과 체력이다. 상대의 말을 하릴없이 듣다 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불쑥 끼어들어 이런저런 것들을 정정하고 싶다. 그러나 상대의 말 뒤에 숨은 마음을 느끼고 그것을 함께 나누는 순간 나를 넘어서 우리라는 세계로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건 굉장히 근사한 일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소설을 쓰는 내내 나는 발화하는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어딘가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미지의 독자를 상상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내뱉는다. 그러나 한 쪽에서 나는 듣는 사람의 역할을 한다. 소설 속 인물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활자로 옮기는 일을 한다. 말하는 마음과 듣는 마음은 맞닿아 있다.이제는 알 것 같다.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뭔가를 바꾸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누군가의 불안과 불만을 듣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세상에는 계속해서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외롭고 어려운 투쟁을 지속하며 누군가에게 가닿으려 애쓰는 마음이 있다. 그것에 대해 한 마디를 더 보태는 것보다 이야기를 듣고 곱씹고 생각해보는 태도. 거기서 기적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말하는 마음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듣는 마음으로 이어지고 다정한 마음의 시작이 될 것이다.

2022-10-11

사과라도 잘 하고 싶어

말하기 수업 첫 시간에는 항상 실수를 겁내지 말라고 가르친다. 대신 실수를 했을 때에는 반드시 사과하라고 덧붙인다. 그게 작은 실수든, 혹은 큰 실수든.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아이들은 이 부분에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곤 한다. 사과라는 말이 무겁게 들리는 까닭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틀린 것을 인정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꾸만 꾀를 낸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정당하게 들릴 논리를 찾는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지만, 틀려선 안 되기에 자신을 끝없이 합리화시킨다.다음부터 조심하겠다는 말 한 마디면 해결될 일도 그러다보면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커다란 거짓말을 동반한다. 과외를 할 때부터 그런 상황을 몇 번쯤 겪다 보니, 이제는 아예 수업 첫 시간에 사과에 대해 가르친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겁내지 말라고. 그건, 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혹은 나의 마음이 너와 다를 때에도 쓸 수 있는 표현이라고. 사소한 실수에서부터 누군가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을 때에까지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거라고. 그 정도의 잘못은 누구나 저지를 수밖에 없는 거라고.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은 목숨을 건 사죄나 영어에서의 ‘Apologize’ 같은 것이 아니라고. 그건 그냥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맺는 사람들끼리의 최소한의 성의 표시 같은 거라고.종종 그런 아이들이 있다. 그럼 그런 사과는 가식이고 거짓말인 거 아니냐고. 자신은 진심이 아니면 사과하기 싫고, 진심이 아닌 사과는 받고 싶지 않다고. ‘진심’이라는 말이 무겁게 들리기보다는 귀찮은 무언가를 처리하는 방식처럼 느껴진다. 진심. 그걸 어떻게 확인하지? 어떻게 믿을 수 있지? 타인의 진심을? 자신의 진심조차 믿지 못하고 알 수 없는 고작 인간이? 지나고 나서야 늘 그것이 자신의 진심이었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유약하디 유약한 인간에게, 나는 종종 진심이라는 말은 너무 해로운 말장난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어쩌면 너무나 원론적인 이야기라서 뭘 그런 걸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냐고 할 수도 있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런 시기가 언제든 좋으니 빨리 왔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서로의 실수에 대해 잘 사과하고, 그래서 내가 가르치는 내용이 수준 낮은 이야기처럼 들리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하지만 아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또 어른이 되고, 아이들은 그런 어른에게서 배우며 자랄 테니까. 그래, 어디 이게 아이들만의 문제일까. 어른들이 그랬으니 아이들 또한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며 자란 것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유감이라는 간단한 말조차 하지 못해서 더 큰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타인을 욕보이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실수는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실수에는 죽일 듯이 달려드는 정의 중독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그가 죽을 때까지 물어뜯으면서, 자신이 그 자리에 서는 것이 두려워 필사적으로 자신의 실수를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고, 타인에게 죄를 전가하는 사람들이란.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사과를 잘 하지 않는 사람들만큼이나 무서운 건, 사과를 잘 받아들여주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토록 진심과 진정성을 강조하는 사회이면서, 이 사회는 누군가의 진심과 진정성을 결코 믿지 않는다. 아는 것이다. 자신 또한 어떠한 진심도, 어떠한 진정성도 없이 단지 살아가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을. 자신 또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생존’하고 있을 따름이며, 정의나 대의보다는 돈과 안락함에 얼마든 쉽게 유혹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니 우리가 타인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건 오직 그것이 자신의 돈과 안락함에 도움이 될 때뿐이다. 그 모든 악순환을 가리기 위해, 우리는 진심이라거나 진정성 같은 말들을 만들고 치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하지만 나는 실수하지 않을 자신도 없고, 사람 없이는 살아갈 자신도 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투박하게 구르고 실수하며 끝없이 사과하며 사는 수밖에. 나는 말하고 싶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 그러다보면 무수히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사과하는 수밖에. 끝없이 사과하고, 끝없이 실수하며, 그렇다하더라도 끝없이 시도하며 살아갈 수밖에. 내가 지쳐 집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올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투박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2022-10-11

아르바이트? 안 합니다

최근 아르바이트 구인난이 심각하다. 단계적 이상회복으로 인해 영업 시간이 늘어나고 주문량 또한 증가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할 사람이 없어 많은 자영업자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구인공고를 올려도 몇 달째 연락이 없는데다 전보다 시급을 올려도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 오죽하면 자영업자들은 고용을 포기할 지경이다. ‘손님보다 더 귀한 알바생’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구인구직 전문 포털인 ‘알바천국’이 실시한 설문 결과에 의하면 전체 고용주 113명 중 79.1%가 알바생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드러났다. ‘지원자 수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78.9%로 1위로 꼽혔으며, 올해(2022년) 알바생 구인 체감 난이도는 매우 어렵다(44.4%)로 조사되었다.약 115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소상공인 자영업자 대표 카페인 ‘아프니까 사장이다’ 에서도 ‘구인난’ 키워드가 쓰인 글이 수없이 쏟아지고 있다. 구인에 어려움을 겪는 사장님들은 시급을 1만 2천원에서 최대 2만원까지 내걸어도 사람을 구할 수 없어 강제휴무와 강제 영업시간 단축, 홀 규모 줄이기 같은 방법을 택하고 있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구인난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더해져 발생하고 있다. 현재 20대 청년들의 노동은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차량공유서비스 운전자나 배달 라이더, 물류 센터 등의 플랫폼에 집중되고 있다. 2021년 11월 고용노동부와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2021년 플랫폼 종사자 규모와 근무 실태’ 자료 조사에 의하면 플랫폼에 종사하는 긱워커(단기로 계약을 맺은 일회성 근로자)는 22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20대 청년들은 그때그때 상황과 필요에 따라 계약을 맺어 노동을 제공하고 그만큼의 대가를 받는 형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또한 많은 구직자들은 그간의 ‘시간 쪼개기’ 고용 형식을 거부하고 있단 것을 보여준다. 시간 쪼개기는 주휴수당 조건인 주 15시간을 초과하지 않기 위해 알바생 여러 명을 상대로 3-4시간 정도로 짧게 고용하는 형태다. 선택권 없는 짧은 노동시간, 높은 업무 강도, 그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급여 때문에 많은 이들이 술집이나 식당, 카페에서의 근무를 꺼려하는 것이다. 몇몇 자영업자 사장님들은 이 문제점을 알고 급히 인건비를 인상하고 인력 확보를 위해 그간의 고용 프로세스도 바꾸어 보지만 많은 구직자들의 마음을 돌려 세우기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나는 19살부터 많은 알바를 해왔다. 일식집과 베이커리 겸 카페, 족발집, 화장품 가게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해봤지만 사실 좋은 기억이란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3-4년이 지난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특히 개인 사장님이 계시는 작은 규모의 가게에선 난처한 일이 많았다. 교육 기간을 핑계로 3개월간 최저시급조차 주지 않는 곳이 대다수였고, 당시 3개월이 지나면 가게나 개인 사정을 핑계로 습관처럼 자르는 곳이 빈번했다. 5인 미만의 사업장은 법적인 책임을 묻기도, 부당함을 해소하기 어렵단 점을 교묘히 이용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르바이트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넘쳐났다. 하지만 이런 점을 다 제외하고도 제일 힘들었던 점은 아르바이트생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음 자를 수 있다는 고용주의 태도였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2년 넘게 기쁜 마음으로 일을 했던 곳도 있었다. 최저 시급에 집에서 약간 거리가 먼 일식집이었다. 그곳의 사장님은 늘 다정하고 따뜻한 말로 안부를 물어봐주시지만 도를 넘어서 사생활에 대해 캐묻진 않으셨다. 그릇이 부족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되는 날엔 입은 옷이 다 젖을 정도로 하루 종일 설거지만 하던 적도 있었다. 일의 강도는 높았지만, 그럼에도 2년 내내 큰 불만 없이 오래 다닐 수 있었던 건 사장님의 친절한 언행와 나의 노고를 알아주는 섬세한 배려 덕분이었다. 오히려 일을 그만 두는 게 아쉬울 정도로 많은 경험을 했고, 그 경험 덕분에 낯선 사람을 만나 친절히 대하는 데에 익숙한 편이다.아르바이트 근무자를 진심으로 대하는 좋은 자영업자도 있을 것이다. 근로자의 필요성과 요구를 조금 더 헤아려 더 나은 근무 조건과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좋은 환경과 보상이 만들어진다면 최저 시급임에도 많은 아르바이트 근로자들이 모여들 것이다. 물론 자영업자의 노력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측면에서 실질적인 지원책이 필요할 것이고, 결국은 모두가 장기적으로 고민하고 개선해 나가야 하는 문제다.

2022-10-04

관크와 인공지능, 그리고 아우라

지지난주 주말 서울 예술의전당 회원 음악회에 다녀왔다. 매년 가을마다 ‘내돈내산’(내 돈 주고 내가 산 것)의 뿌듯함을 느끼는 시간이다. 2년씩 세 번, 6년째 예술의전당 골드회원을 유지 중인데, 회원 음악회 한 번이면 연회비 10만원이 아깝지 않다. 아니 황송할 정도다.거장 정치용이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세계적인 플루티스트 최나경과 협연했다. 1부는 베르디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와 메르카단테 ‘플루트 협주곡 e단조’, 2부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으로 꾸려진 무대였다.음반과 유튜브로만 듣던 월드스타 최나경의 연주를 눈앞에서 보니 쥐떼들이 왜 피리 소리 따라가다 연못에 빠져 죽었는지 알겠다. (내가 또 쥐띠다) 메르카단테 협주곡 1악장 플루트 솔로의 첫 음이 울리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음악은 세계를 여럿으로 분리하기도 하고, 이미 갈라진 세계를 하나로 합하기도 한다.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내는 걸까, 넋 놓고 들었다. 현악단의 합주 때 악기를 내려놓고 독주를 기다리는 그녀 표정과 몸짓도 다 음악이었다.앙코르로 연주한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은 그저 경이로움이었다. 플루트를 모르지만, 플루트로 할 수 있는 모든 기교를 다 본 것 같았다. 특히 바이올린의 피치카토 주법을 플루트로 소리 낼 때마다 무슨 마술을 보는 기분이었다.2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은 곡 자체가 지닌 격정적이고 강렬한 에너지와 그것을 차분하게 통제하고 조율하고 극대화시키는 정치용 지휘자 사이의 상응이 아름다웠다. 2악장은 다른 교향곡들의 4악장 이상으로 세게 치닫고, 4악장은 몇 개의 클라이맥스가 있는지 다 셀 수 없을 정도. “불행한 결혼에 몹시 고민하던 시기의 산물”이라는 곡 해설을 읽고 미혼이지만 이해 완료되었다. 음악 듣고 결혼과 더 멀어진 느낌이랄까.모든 현악기가 피치카토로 연주하는 3악장에서도, 태풍처럼 몰아치는 4악장의 격랑 속에서도, 앙코르곡 슈트라우스 ‘관광열차 폴카’의 경쾌함 가운데서도 단원들 표정은 편안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유쾌했다. ‘소통’을 중시한다는 정치용 지휘자의 부드러운 리더십은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연상케 했다. 커튼콜 때 각 파트 단원들을 일일이 일으켜 박수 받게 한 다정함 역시 아름다웠다.단 하나 아쉬운 건 역시 ‘관크’(타인이 영화나 연극 등을 관람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뜻의 신조어. 관객+크리티컬의 줄임말)다. 플루트 협주곡 마지막 3악장이 무르익을 때 내 옆옆 자리서 울려 퍼진 스마트폰 인공지능 음성, “음악을 찾지 못했어요. 주변 소음이 너무 심하지 않은지 확인해주세요” 소리가 크기도 했고, 오래 지속되기까지 했다. 지난 3월 크리스티안 짐머만 내한공연 때도 똑같은 관크가 발생했다고 한다. 본인도 당황했겠지만 한 사람이 느낀 당혹감은 2천명 관객이 빼앗긴 감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발레리를 인용하자면 “음악의 세계와 소음의 세계는 분명히 갈라져 있다. 하나의 소음이 하나의 고립된 사건임에 비해 하나의 음악은 저 혼자서 우주를 만든다. 연주회장에서 한 악기가 떨어 울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의 시작이라는 느낌, 한 세계의 시작을 갖게 된”다. 그런데 “어느 연주회장에서 교향악이 울려 퍼져 위압하는 동안에 만일 의자 하나가 넘어진다든가, 누가 기침을 한다든가, 문이 닫혀진다든가 하는 일이 생긴다면, 당장에 우리는 무언지 모를 파열의 인상을 갖게 된다. 그 순간 베니스 유리와도 같은 본성의 그 무엇이 깨어지거나 금간 것”이다.완벽하게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지는데, 인공지능은 음악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심지어 음악을 소음으로 인식했다. 내가 어제 연주회장에서 본 것은 기술복제시대의 한계다. 모든 걸 데이터화해 무한 반복하는 기술복제는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 즉 아우라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날 콘서트홀에 울려 퍼진 인공지능의 음성에도 최나경의 아우라는, 음악의 한 우주는 조금도 깨지지 않았다. 음악이 이겼다. 인간이 기술을 이겼다.연주회가 끝나고,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린 음악당 광장을 걸었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좋았다. 멀리 있는 것이 잠시 가까이 온 그 느낌, 아우라였다.

2022-10-04

돈쭐내드립니다

어린 시절 추억을 자극하는 짜장면. 내가 사는 동네에 ‘복무춘’이라는 오래된 중국집이 있다. 나는 매일 그 집 앞을 지나간다. 춘장 볶는 냄새, 양파와 돼지고기가 커다란 웍에서 지글지글 볶아지는 소리, 달콤새콤한 탕수육 소스 향기, 윤기가 반들반들한 짜장면과 얼큰해 보이는 짬뽕… 시각과 후각, 청각을 모두 사로잡아 유혹하는데, 미치겠다. 다른 음식들도 침샘을 자극하지만 짜장면만큼 강력하진 않다. 짜장면은 내 소울 푸드다.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 집에 들어갔다. 짜장면 한 그릇 시켜 맛있게 먹었다. ‘역시 이 맛이야’, 계산하려는데, 카드 단말기가 고장 났다고 한다. 아주머니께서 그냥 다음에 갖다 달라신다. 아니, 요즘 어떤 세상인데. 금방 은행 들러 현금 뽑아 갖다 드렸다. 삐거덕 소리를 내는 낡은 철문을 열고 나오자 옛 추억이 하나 떠올랐다.어릴 때 동네에 영빈관이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엄마한테 듣기로는 아버지 친구분이 하시는 집이었다. ‘아빠 친구 식당이니까 짜장면 한 그릇쯤 그냥 주겠지’ 싶어서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친구랑 그 집엘 가 “저 가방공장 아들인데요” 했더니 정말 공짜로 먹었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그랬다. 하루는 친구들 잔뜩 데리고 가 “나만 믿어” 큰소리치고 짜장면 한 그릇씩 먹였다. 어깨가 으쓱했다.이제 와 기억하니 내가 “가방공장 아들”이라고 했을 때 주인 내외분은 어리둥절해 했던 것 같다. “누구라고?” 한참 골똘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같다’가 아니라 ‘다’, 확실하다. 그 시절 동네엔 영빈관 말고도 신흥원, 양자강 등 다른 집들도 있었으니, 아마 엄마가 다른 집과 착각했거나 영빈관 주인께서 아버지와 친우관계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맹랑한 소년의 터무니없는 공짜 주문이었지만, 내가 올 때마다, 심지어 친구들까지 데리고 오는 날에도 “곱빼기로 줄까”, “밥도 줄까”, “더 먹어라” 하셨다. 자식 같아 귀엽고 한편으론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런 정이 있던 시절이었다.요즘 온라인에서 ‘돈쭐’이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돈’과 ‘혼쭐’의 합성어인데, “돈으로 혼쭐을 내준다”는 의미다. 결식아동이나 독거노인들을 돕는 등 남몰래 선행을 해온 사실이 알려지거나 정직한 양심으로 오랜 세월 장사했음에도 건물주의 갑질 등 횡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른바 ‘착한 가게’들을 찾아가서 매상을 잔뜩 올려주는 게 ‘돈쭐’이다.한 학생이 치킨이 먹고 싶다며 떼 쓰는 어린 동생 손을 잡고, 가진 돈 전부인 5천원을 꼭 쥔 채 치킨집 앞을 서성였다. 장사가 안 돼 가게 앞에 나와 밤하늘을 보며 한숨 쉬던 치킨집 사장님은 대번에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 5천원어치만 먹을 수 있냐고 묻는 형제에게 가게에서 가장 비싸고 맛있는 치킨을 푸짐하게 내줬다. 코로나로 매출이 반토막 나 월세마저 밀렸지만, 돈은 받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알사탕을 쥐어줘 보냈다. 그 후로 초등학생 동생은 몇 번 더 가게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미담은 고등학생인 형이 치킨집 본사로 편지를 보내 알려지게 됐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와 함께 살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중이라고 한다. 사연이 알려지자 네티즌들은 가게 상호와 위치를 공유해 그야말로 잔뜩 ‘돈쭐’을 내줬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중학교 교복을 입으면서부터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수년째 지방 어딘가에, 엄마는 식당에, 포장지 공장에, 인력사무소에. 그래서 나는 학교 마치면 할아버지 할머니 도와 폐지 줍고, 혼자 사당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공 던지고 공 차고, 혼자 철가방 들고 분식집 오토바이 배달하고 그랬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아무 데서나 자고 어디서 싸우다 두드려 맞고 그랬다. 술 취해 비틀거리는 새벽길에 교회 지하 기도실에 가 혼자 기도했다. 가족들이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해달라고.이젠 그 비틀거리던 날들도 다 추억이 됐지만, 짜장면 냄새는 아직도 코끝에 향기롭다. IMF 사태로 아버지 가방공장 망하고, 얼마 안 가 영빈관도 없어졌다. 기억난다. 춘장 볶는 냄새가 달큼했던, 사진관 맞은편 속옷가게 건물 그 지하 식당. 엄마가 돈 빌렸다는 계란집을 피해서 일부러 빙 돌아 숨어 들어가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이 있던 그 중국집. 지금도 어디선가 장사하고 계시다면, 그분들을 찾아가 돈쭐을 내드리고 싶다.

2022-09-20

가을비와 감자수프

가을비가 내린다. 창가에 앉아 있으면 비릿한 물의 냄새가 난다. 올해는 비와 관련된 사고가 많았으므로 젖은 아스팔트나 짙게 물든 나뭇잎을 바라보는 일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그저 창문에 달라붙은 빗방울이 한 곳에 오래 맺혀 있는 장면을 응시한다. 가늘고, 연약하고, 지나치게 투명한 비. 세상 위로 두터운 솜이불이 덮인 듯 침울하고 잠잠하다.변화하는 계절에 앞서 해야 하는 몇 가지의 일이 있다. 첫째는 지금 살고 있는 낡은 집에 외풍 새지 않도록 창문 보수 공사를 해야 한다.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PVC 재질의 얇은 투명막을 창문 표면에 붙이고, 틈 사이사이엔 ‘뽁뽁이’라 부르는 롤에어캡을 촘촘히 두른다. 그리고 지난 봄 한 쪽에 잘 개켜두었던 두꺼운 천을 가져와서 그 위를 덮는다. 그럼 투명막과 뽁뽁이가 가려져서 훨씬 보기 좋다.간단 보수가 끝났다면 옷장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가을 옷을 꺼낸다. 세탁해야 하는 옷과 그만 버려야 하는 옷들을 분류한다. 지나치게 상태가 좋은 건 중고 장터에 팔기도 하고, 영 상태가 엉망인건 버리기도 한다.그렇게 부지런히 집 안을 움직이다보면 어느새 금방 배고파진다. 가을 더위는 여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금새 열이 오르고 금방 식는다.근사한 식사를 차리기엔 미처 체력이 도와주지 않고, 그렇다고 간단히 끼니를 때우기엔 아쉬울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감자를 얇게 썰어 버터와 우유를 넣고 푹 끓여내는 감자 수프다. 감자의 은은한 단맛과 부드럽고 느끼한 크림의 맛이 어우러져 단짠딴짠한 맛이 잘 살아있는데다 따스한 목넘김이 좋은 요리다.재료 준비는 간단하다. 버터 한 두어 조각, 양파, 감자, 우유, 크림, 체다 치즈 정도만 있으면 된다. 중간 크기의 감자 2-3개를 찬 물에 잘 씻은 다음 얇게 썬다. 한손에 단단하게 잡히는 감자의 촉감도 좋지만, 무엇보다 울퉁불퉁한 감자를 찬 물에 부드럽게 흘려 흙탕물을 씻겨 낼 때의 기분이 좋다.짙은 갈색의 껍질을 벗겨내 하얗고 미끌미끌한 감자의 속을 드러내는 과정 또한 케케묵은 반복의 일상을 반짝이게 닦아내는 기분이 든다.재료 준비가 다 됐다면 준비한 냄비에 버터를 넣고 녹힌 뒤 양파 한 개를 썰어 넣는다. 양파의 단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썰어둔 감자와 종이컵 기준 물 2컵을 넣고 10분 정도 익힌다. 감자가 쉽게 으깨질 정도로 익었다면 우유 2컵 반과 생크림 2컵을 넣는다.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우유’와 ‘생크림’이다. 우유나 크림 대신 물을 넣으면 특유의 고소한 풍미와 감칠맛이 줄어든다. 불을 끄고 한 김 식힌 뒤에 끓인 감자를 믹서기에 넣어 간다.나는 스프에 감자가 어느 정도 씹히는 걸 좋아해서 제형을 봐가며 적당히 갈아준다. 간 감자 수프를 다시 냄비에 담고 모짜렐라 치즈 2장을 넣어 2분 정도 더 끓이면 완성이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후추나 파슬리를 뿌려 먹거나, 빵 두어 조각을 곁들이면 훌륭한 식사가 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이렇게 만든 감자수프는 마트에서 파는 수프 팩과는 또 다른 맛이다. 물론 손이 많이 가고 재료를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만들어 먹는 수프는 재료 본연의 맛이 하나하나 살아 있다. 게다가 보글보글 수프가 끓을 때의 소리와 냄새는 백 마디의 여러 말보다 따스한 위로가 되어 다가온다. 잘 만들어진 감자 수프가 그릇에 담긴 모양새는 순하고도 무해해서 절로 긴장이 풀어진다.가을은 부엌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은 계절이다. 재료를 물에 씻고 다듬으며 내가 내는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그럼 여름 내내 멈추어 있던 주방을 다시금 닦고 빛내어 윤택하게 만드는 듯한 기분이 된달까.그간 소음으로 느껴지던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조금씩 새곤 했던 수도꼭지의 물방울 소리, 인상 찌푸려졌던 뜨거운 불이 이제 더는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겨울을 대비해 음식을 구비해 두는 가을 다람쥐처럼, 생활의 애정과 부지런함을 품고선 가을의 한복판으로 나서 본다.

2022-09-20

88년, 서울

영화 ‘서울 대작전’(감독 문현성)은 80년대 후반의 서울을 배경으로 올드카의 향연이 눈에 띠는 영화이다. 쏘나타, 포니 픽업, 르망, 프라이드, 스텔라, 그랜저, 포터, 프레스토, 베스타, 코란도 등 다양한 올드카들이 멋지게 튜닝된 모습으로 서울 공도를 질주하는 모습은 그간의 한국 영화에서 보지 못한 색다른 재미라 할 만 하다.하지만 보다 주목을 요하는 것은 이 영화가 ‘88년의 서울’을 재현해내는 방식이다. 그 모습은 그간의 작품들에서 그려진 ‘현실감 있는 서울’의 모습과는 다르다. CG를 통해 구현된 서울의 모습은 현실적이라기보다 만화적이라는 느낌에 가까우며, 이는 할리우드가 자신들의 80년대를 재현해내는 방식과 닮아있다. 더불어 극의 초반에 자신의 차를 압류당하고 빌린 차를 튜닝해 문제를 해결해나간다는 플롯의 구성은 최근의 카 체이싱 영화 뿐만 아니라 ‘니드 포 스피드’와 같은 게임 속 분위기를 연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채롭다.하지만 이는 ‘서울 대작전’이라는 영화가 80년대의 서울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 속 서울의 모습은 촌스러움과 ‘힙’한 느낌이 한껏 과장된 채 서로 공존하는 문화적 혼종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대작전’은 재현의 실패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겠으나, 이를 작품의 실패로 간주하는 것은 다소 섣부른 진단이 아닐까 싶다.그렇다면 이 영화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속에서 자주 노출되는 “서울 바이브”라는 단어를 곱씹어보자. 그때 그 시절과는 맞지 않는 ‘바이브’라는 단어는, 이들이 원하는 바가 충실하게 재현된 과거가 아니라 자신들의 리듬으로 재구성된 문화적 구성물임을 선언한다. 관객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영화로부터 거대한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영화의 미학적 지향이 그 시절을 그 시절답게 재현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발칙하다고 할 만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우리가 살아온 과거를 제멋대로 비틀고 찢어 조합했을 뿐인 영화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간 레트로를 지향해온 다방면의 문화 컨텐츠가 자꾸만 놓치고 마는 과거의 요소를 억지로라도 붙잡고 있기 위해 노력한다. 예컨대, 그간의 레트로를 표방하는 컨텐츠들이 당대의 문화적 요소를 조망하면서 의도적으로 정치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는 흐린 눈으로 지나쳐간 것과 달리, ‘서울 대작전’은 88년 서울의 뒷모습을 영화 속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88올림픽의 재개발로 집이 사라진 철거민들의 모습과 그 위에 나붙은 세계화, 축제, 올림픽, 발전과 같은 표어들. 독재 정권의 관성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지 못한 인물들의 모습. 깡패보다 악랄한 정권의 부역자들과 이들을 스쳐가듯 날아가는 검게 그을린 흰 비둘기의 모습에 이르기까지.그와 같은 부분적 요소들을 거쳐 다시 영화를 바라보자면, 이 영화가 원하고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한결 뚜렷해진다. 그것은 과거를 재현하고 곱씹으며 “그땐 좋았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재구성된 문화적 혼종성의 공간을 통해 이들이 욕망하는 바는 관습과 관행으로 물든 한국적 정치경제적 체질과의 단절이다. 이는 영화의 플롯에서도 두드러지는데, 영화 속 주인공들은 전 정권과의 단절을 원하는 신 정권과도 단절하길 원한다. 예컨대 이들에게 88년 서울이란 여전히 독재의 관습과 관행을 버리지 못한 채 ‘새로움’과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둘러썼을 뿐인 구시대에 다름없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88년의 서울’이라는 상징적 시공간을 단순한 재현이 아닌 패스티쉬의 방식으로 묘사한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레트로’를 지향하고 표방하는 문화 컨텐츠들이 지향해야 하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도 이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정치적, 경제적 위험성이 거세되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향락의 대상으로 전락한 과거가 아니다. 과거에 내재된 정치경제적 불안의 요소들마저 새로운 감각을 통해 문화적으로 재현해내는 감각이 필요하다. ‘서울 대작전’이 실패하는 바가 있다면, 그와 같은 재현이 보다 미학적이지 못했다는 점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미학적 실패는 영화 전체를 퇴행적 좌파의 꿈으로 읽어낼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깊은 아쉬움을 남기는 지점이기도 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나름의 의미와 재미를 갖추고 있다. 그 시절을 얼마나 ‘그 시절답게’ 재현하는 가가 아니라 그 시절에 미처 현실화되지 못한 ‘가능성’을 탐문하고자 시도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대작전’이 던지는 메시지란 “그땐 좋았었지”같은 싸구려 노스텔지어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란 “그리하여 우리에게 미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까울 것이다.

2022-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