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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단순함의 미학

‘탑건: 매버릭’엔 1980~90년대 낭만적 허세가 있다. /영화 홈페이지 ‘탑건: 매버릭’을 봤다. ‘남산의 부장들’ 이후 2년 6개월 만에 극장에 가서 본 영화다. 코로나로 인해 극장에 가길 꺼려했고, 같이 영화 볼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 볼 만한 영화가 없어 통 극장에 가질 않았다. 그런데 1986년 개봉한 ‘탑건’의 후속편이라니, 또 주변에서 재밌다고 난리 치니 극장에 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고등학생 때로 기억한다. 청소년 관람불가였음에도 비디오 가게에서 ‘탑건’을 빌려 봤다.오프닝 화면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좀 뭉클해졌다. 1986년작과 똑같은 음악, 똑같은 구도의 시퀀스, 본편의 오리지널리티를 고스란히 되살려낸 연출이 1980~90년대 향수를 자극했다. 80년대에 나는 미취학 아동이었으므로 별로 할 말이 없지만, 90년대라면 다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를 90년대에 보냈다. 그 시절에 보고 듣고 읽은 영화, 음악, 책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톰 크루즈가 철 지난 항공점퍼를 입고, 레이밴 선글라스를 끼고, 가와사키 오토바이를 타고 이륙하는 전투기와 나란히 달리는 장면에서 쾌감을 느꼈다.한 줄 감상평을 남기자면, “다시 군대에 가고 싶을 지경”이다. 오랜만에 가슴 뜨거워지는 영화를 봤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스펙터클한 영상미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투박하고 간단하지만 명료해서 좋았다. 선이 굵고 호방해서 통쾌했다. 석양, 해변 럭비, 술집 골든벨, 오토바이, 레이벤 선글라스, 록 밴드 음악, 제복 등 구닥다리 형식으로 폼 잡는 게 좋았다. 그게 흥행의 이유라는데, 사실 ‘주말의 명화’ 시절 영화들은 다 그랬다.‘다이하드’, ‘리셀웨폰’ 같은 액션 영화들은 물론이고, 팔씨름 하는 영화(‘오버 더 톱’), 양치기 돼지가 주인공인 영화(‘꼬마돼지 베이브’), 누가 오래 잠수하나 시합하는 영화(‘그랑블루’)도 있었다. ‘가을의 전설’이나 ‘브레이브 하트’, ‘늑대와 춤을’ 같은 영화는 서사의 아름다움과 함께 영상미가 압권이었다. 우리나라 드라마 ‘모래시계’만 봐도 마지막 장면은 지리산 노고단의 겨울 석양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의 역광 속 뒷모습을 담았다. 단순하지만 멋이 있었다. 아니, 단순해서 멋있었다.요즘 영화도, 음악도, 문학도 다 복잡하기만 하다. 내밀한 세계로, 미시적인 세계로만 파고들다보니 작고, 어렵고, 난해하다. 천재적이지만 멋이 없다. 근래 한국소설을 읽다보면, 장편도 아니고 단편임에도 자기가 설정한 이야기의 복잡성에 갇혀서, 작가 스스로 미로를 헤매는 그런 작품들을 종종 보게 된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계산적이고, 복잡다단하고, 속을 알 수 없다. ‘탑건: 매버릭’을 보며 제일 반가웠던 건 1980~90년대의 낭만적 허세,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단순함이었다.얼마 전 한 영상이 화제가 됐다. 중년 남성이 커피숍 키오스크 사용법을 몰라 주문에 애를 먹자 애꿎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욕설을 했다. 아르바이트생은 자주 겪는 일이라는 듯 유쾌하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 대뜸 큰소리부터 지른 소위 ‘개저씨’를 비난하는 여론 가운데 키오스크 시스템이 디지털 문명에 익숙지 않은 고령 세대를 소외시킨다는 우려도 있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패스트푸드점이나 커피숍 키오스크뿐인가? 스포츠 경기, 공연, 항공권 예매도 이제는 온라인 서비스나 무인 시스템으로 거의 전환됐다. 각종 보안 인증 시스템도 문제다. 공인인증서는 폐지됐다지만 더 복잡한 것들이 생겨났다. 지난 5월 종합소득세 신고를 위해 국세청 홈택스에 접속했다가 짜증나 죽는 줄 알았다. 세금 신고와 납부를 장려하려면 관련 용어와 절차부터 좀 쉽게 바꾸면 안 될까? 세무 전문가가 아닌 이상 알아볼 수 없는 어려운 한자어와 수식들을 보면서 ‘일부러 이러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오만해진다. 오래된 것은 모두 낡고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긴다. 사회 시스템도, 영화도, 음악도, 문학도 모두 첨단을 지향하는데, 첨단으로 가는 방법이 많아질수록 절차는 복잡해진다. 그 복잡함은 결국 우리 스스로를 폐쇄된 세계 안에 가두게 한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자꾸 틀려 집에 못 들어가거나 웹 사이트 패스워드를 분실해 영영 ‘온라인 미아’가 되기도 한다.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 곁에는 친구가 없다. ‘탑건: 매버릭’에서 매버릭은 중요한 순간에 늘 망설이는 루스터에게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지 마.”

2022-07-26

고물가 시대 생존법

장을 보러 갈때면 한숨이 푹푹 나온다. 금겹살이라 불리는 돼지고기는 쳐다보지 않은지 오래 되었고 자두나 복숭아, 수박 같은 여름 과일도 가격 보고 놀라 금세 내려놓고 만다.높은 가격에 섣불리 카트에 담지 못하다 결국 향하는 건 세일코너. 그런데 이마저도 쉽지 않다. 카트에 물건을 담을 떄마다 더해지는 가격 계산을 하다보니, 언제부턴가 장보기가 숙제마냥 피로하게 느껴진다.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점심을 밖에서 해결해야 할 때도 난감하다. 냉면은 1만원 중반대를 훌쩍 뛰어 넘는데다가, 비빔밥이나 국밥도 9천원이나 달한다. 만 원 아래로 사 먹을 수 있는 메뉴가 굉장히 제한적이니, 이제 외식은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야 잘 하지 않게 되었다.물가 폭등 현상은 비교적 소득이 적은 20대에게 더 무겁게 다가온다. 최근 여러 신조어도 생겨났는데, 물가 상승으로 직장인들의 점심값 지출이 늘어난 상황을 뜻하는 ‘런치 플레이션’, 앱을 통해 돈을 아끼는 ‘앱테크족’. 외식을 지양하고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로 끼니를 해결하는 ‘냉털족’ 등이 생겨났다.사회에 발을 내디딘 지 1년 차인 초년생 친구는 점심을 저렴하게 해결하기 위해 편의점 서비스에 구독했다고 한다.편의점 구독 서비스란 단어가 생소해서 알아보았더니. 2000원에서 4000원 사이의 월 이용료를 내면 약 20~30%정도 상품을 할인가에 살 수 있는 멤버십 제도였다. 물론 상품 가격마다 다르지만 도시락은 약 1000원에서 1500원에서 정도 할인 받아 살 수 있었고, 커피 또한 할인받아 1000원 아래로 즐길 수 있었다.먹거리 외에도 와인이나 맥주 같은 주류, 또는 생리대와 마스크 같은 생활용품도 다양하게 보였다. 결제시 통신사 할인이나 기타 할인까지 더할 수 있으니, 월급 빼고 다 오른 웃픈 현실에서 편의점 구독화하기는 필수처럼 여겨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인터넷에서 물건을 살 때도 이젠 최저가 검색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정 쇼핑 사이트에서 물건 구매시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쇼핑 플랫폼이 주목받고 있다.G마켓이나 11번가, CJ온스타일 등 250여개 브랜드와 제휴를 맺어 할인 정보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했고, 일일이 쇼핑몰 사이트를 방문하는 것이 아닌, 해당 플랫폼 페이지를 통해 물건을 구입하면 결제 금액의 일부를 현금으로 환급해주는 방식이다.본가에서 나와 1인가구를 꿋꿋이 유지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날 때면 ‘이토록 아껴서 뭘 하나’ 싶을 정도로 시시하지만 유쾌한 정보와 감정을 공유하는 순간이 있다.대중교통 비용을 할인해주는 알뜰교통카드 발급이나 일정 금액 이상 꾸준히 저축시 2배 이상의 금액을 더해주는 저축 제도, 또는 소셜커머스 플랫폼에서 이벤트로 저렴하게 나온 핫딜 구매가 등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안부를 묻는다.최근 친구들에게 반응이 좋았고 나 또한 만족스레 이용하고 있는 건, 버려질 위기에 처한 농산물 구입이다. 생각보다 농산물은 맛이나 영양소에 큰 변화가 없더라도 작은 흠집이 있다거나 모양이 이상하거나, 또는 판로가 부족하여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여러 이유로 버려질 위기에 처한 농산물들을 저렴한 가격에 배달해주는 여러 플랫폼들이 생겨나고 있다. 검색만 해도 쉽게 찾을 수 있어서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업체를 선택하면 된다. 대부분 배달 주기도 원하는 기간으로 설정할 수 있고 선호하지 않는 채소가 있다면 뺄 수 있어서 편리하다.가지나 감자, 방울토마토, 브로콜리, 초당 옥수수 등 다양한 종류를 소량으로 박스에 담아 보내주고, 시세 대비 30% 저렴한 가격인 약 2만원 안쪽으로 살 수 있으니 1인 가구에 적합하다.물가 오름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원인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져 있어 해결책이 쉽지 않다.아직도 지구 한 편에서는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니 전 세계 공통적으로 쉬이 풀 수 없는 지난한 일임을 인지하고 나는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대응책을 찾아보려 한다. 또한 정부에서 물가 안정을 위한 대책이 지속적으로 강구될 수 있도록, 진심으로 바라본다.

2022-07-26

도둑맞은 가난

매 선거철마다 보이던 풍경 가운데 하나. 선거를 앞둔 후보가 가난한 쪽방 촌에 2~3일 가량 머물며 기자들과 인터뷰를 한다. 대한민국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었는지 몰랐다며, 가난한 우리 이웃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진심어린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이런 쪽방촌이 무수히 남아있다.영국의 래퍼 겸 작가인 대런 맥가비는 이와 같은 광경을 ‘가난 사파리’(돌배게, 2020)라 부르며 꼬집는다. 정부와 시민단체로부터도 평소 때에는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다가, 선거철이 되면 관심이 집중되는 광경을 비꼬는 말이다. 2017년 영국의 켄징턴 북부에 위치한 임대아파트 그렌펠 타워 화재사건으로 150명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 정부와 언론은 빈민층의 실태를 집중조명 했지만, 여론의 관심은 금새 더 자극적인 화제로 옮겨갔고, 빈민층에 대한 관심은 금방 사그라졌다. 맥가비는 그와 같은 사회적 풍경을 진열창 앞의 안전한 거리에서 원주민을 잠시 구경하며 동정을 표하다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며 이를 ‘사파리’에 비유한 것이다.우리가 이와 같은 영국의 풍경에 선거철 정치인들의 모습을 겹쳐 본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진정성은 있다. 그렇게나마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가난을 잠시나마 보고 듣고 경험해보는 것이 어쩌면 그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거주민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일방적인 민폐만 끼치며 어떠한 배려도 보이지 않은 채, 떡볶이를 먹고 국밥을 먹고 라면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모습에서 무슨 진정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단지 가난을 소비할 뿐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말이다.이것을 단지 정치인들만의 문제라 말할 수 있을까. 매년 이즈음이 되면 생기던 대학생 쪽방촌 체험도 그렇다. 정작 그곳에 사는 주거민의 동의는 구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체험 프로그램 속에서, 가난은 현실이 아니라 단지 테마 체험에 불과하다. 브라질의 호싱야, 인도 뭄바이의 다라비,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타운십 등지에서 이루어진 슬럼가 투어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은 한 때의 감정적 여흥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여행을 하며 이국의 정서를 체험하듯 가난을 잠시 체험해볼 뿐이다.사람들은 가난을 이해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자신이 가난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가 가난하고 불우했다 생각하지만, 그와 같은 가난은 상대적인 개념일 뿐, 앞서 거론한 지역에서의 절대적 가난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이 말하는 가난이란, 자신의 물질적 욕구가 여러 제반으로 인해 충족되지 못했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거나 현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질적 수준이 모자랐던 시간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가깝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가난이란 실제적인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은 잔인하리만치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여전히 가난한 것은 자신과 달리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가난은 생을 위협하는 재난이 아니라, 자신이 정복해온 삶의 여정의 트로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문제는 이와 같은 상황이 실제로 절대적 가난에 처한 사람들의 내면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가난을 부정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배척한다. 적어도 자신은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 그들의 삶을 부정하고 그들의 노력을 부정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이 사회의 중산층이라 여기지만, 하루하루 몰려오는 빈곤에 따른 여파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나 비슷한 생활수준의 타인에게 분노하게끔 만든다. 예컨대,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한 것을 가난한 사람들이 빼앗거나 무임승차한다는 식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인터넷 공간만 돌아봐도 자신의 실제적 가난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자신은 이미 가난을 극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반, 자신은 가난하다 말하지만 실제 경제적 수준은 절대적 가난과는 한참은 거리가 먼 사람들이 반이다. 진정한 절대적 가난에 처한 사람들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여러 방식으로 그들의 삶은 감춰지고 사라진다. 문제화되지 않기에, 그와 같은 사람들과 공간은 한국 사회에서 없는 것으로 셈해지고 만다.이제는 TV 프로그램마저 달동네와 쪽방촌을 조망하지 않으며,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의 나름의 힘든 삶을 가난으로 포장해 보여줄 뿐이다. 소설가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보다 훨씬 더 질이 안 좋은, 심지어 그와 같은 ‘가난장난’이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이제는 가난한 사람들마저 스스로를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 현실이, 대한민국의 현재이다. 부디 이번에는 그 많은 공약과 정책들이 무사히 이행되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2022-07-19

내향인으로 살아남기

내향적인 사람으로 산다는 건 오해를 사는 일의 연속이다. /언스플래쉬 사람마다 정해진 에너지가 있다는 말을 온몸으로 깨닫는 요즘이다. 근무 시간 내내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리고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쓰노라면 일순 머리가 핑 돌기도 한다.연비가 좋지 않아. 내 몸은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자책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아프다, 골골대면서 모처럼 찾아오는 휴일엔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침대에 누워있는 것으로 시간을 다 쓴다. 어쩌면 나는 게으른 사람인 걸까? 소중한 주말을 멍하니 흘려보내면 그런 생각이 떠오르고 쉽게 우울해진다.그러다 최근, 나 자신을 변호하기 좋은 말을 발견하게 됐다.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오은영 박사가 한 이야기였다. 시도 때도 없이 누워있는 아이를 보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긴장감이 높다. 특히 변화가 있거나 새로운 걸 할 때는 긴장을 많이 한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긴장한다. 그래서 집에 오면 그 긴장을 완화시키려고 누워있는 거다. 게으른 게 절대 아니다.”그녀의 말에 위안받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무수한 ‘집순이’, ‘집돌이’들, 특히 언제 어디서나 누워있는 것을 생활화하는 이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을 테다. 그렇다. 우리를 단순히 게으른 자로 취급해선 안 된다. 사회를 살아가는데 남들보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할 뿐.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는 ‘집순(돌)이’들도 두 부류로 나눠진다. 집에서도 바쁘게 움직이는 쪽과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쪽. 당연히 나는 종일 누워있어야만 하는 쪽이다. 침대 밖을 나오는 것도 힘든데 하물며 집 밖으로 나서는 일은 문자 그대로 강행군이나 다름없다.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만남, 혹은 좋아하는 사람을 보러 가는 발걸음조차 무겁다. 누군가를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눠도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말을 꺼내는 상대의 의도를 돌아보게 되고 대화 도중 문득문득 떠오르는 침묵이 불안하고 스스로의 말을 끊임없이 검열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피로감이 쌓이는 것이다.외향적인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봤을 때 내향적인 사람은 어딘가 불편하게 보일 수 있다. 자신만큼의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고 서운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내향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떠올려 보기를 권한다. 바깥으로 뻗어가지 않고 안쪽으로 향한다는 것. 모두의 에너지가 향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면 상대를 이해하기가 조금은 수월해진다.내향적인 사람, 다시 말해 내향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오해를 사는 일의 연속이다. ‘요즘 뭐 하고 살아?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는 연락은 내향인들에게 있어 강도 높은 업무를 부여받은 것과 비슷하다. 약속이 정해지는 순간부터 약속 당일까지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디서 만나야 하지? 만나서 먹어야 할 음식은? 어떤 주제의 대화를 나누어야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을까? 그 시간대는 사람들이 붐빈다던데 차라리 다른 곳에서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상대를 만나기도 전에 완전히 지쳐버린다.이러한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억울한 목소리로 외치고 싶다. 알아요. 나도 이런 내가 싫단 말이에요.싫어도 별수 없다.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인류의 오랜 소망으로 여러 장르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변형의 형태를 보라. 마블 코믹스의 ‘스파이더맨’은 루저에 가까운 인물이 거미에 물려 하루아침에 슈퍼 파워를 갖게 되는 서사를 담고 있지 않은가.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나 자신에서 탈피하여 완벽하게 다른 것으로 탄생하는 상상은 즐겁지만 결국 허구에 그칠 수밖에 없다. 내향인은 자신이 내향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이것은 슬프거나 끔찍한 일이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을 자는 것처럼 당연한 일일 뿐이다.그러니까 이 글은 수다스럽고 불필요한 자기 대변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내향인의 누명을 한 꺼풀 벗겨내고 싶다.당신의 지인이 연락을 잘 받지 않는다던가, 만남을 차일피일 미룬다면, 그것은 당신이 싫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그는 자신의 지난한 일상을 살아내기 위하여 가진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아껴서 사용하는 중이며 스스로와의 대화를 나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미덥지 않더라도 약간의 애정으로 내향인을 들여다보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당신을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돌파하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애쓰고 있다는 것을.

2022-07-19

이상하고도 특별한

이상하다는 건 뭘까. 사전에선 정상적인 상태와 다르다, 또는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지식과는 달리 별나거나 색다르다는 의미를 뜻한다. 유의어로는 독특하다 괴상하다, 특이하다라는 단어들이 뒤따른다.ENA 채널 드라마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선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 스팩트럼을 동시에 가진 변호사 ‘우영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영우는 한번 본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다. 5살부터 법조문과 판례문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달달 외우는 명석한 두뇌를 지님과 동시에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 수석 졸업, 변호사 시험은 1500점 이상의 점수를 받으며 천재의 면모를 보여준다.27살이 된 영우는 대한민국 최초의 자폐인 변호사란 타이틀을 따내며 법무법인 한바다에 인턴으로 입사한다. 하지만 대형 로펌에서 살아남기란 그리 녹록치 못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은 거꾸로 읽어도, 똑바로 읽어도 우영우라 소개하며, 갑작스레 고래 이야기에 푹 빠져서 대화의 흐름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길을 가다 영우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옆으로 비켜서서 걸을지도 모른다. 영우는 모든 감각을 과민하게 느끼기 때문에 출근길에도 극도로 예민해져선 몸에 힘을 잔뜩 준채로 어색하게 걷는다. 회사에 도착해선 회전문을 통과하지 못해 문 앞에서 서성인다. 어렵사리 회사 건물에 들어가도 자폐 스펙트럼 증상 중 하나인 반향어(상대방의 말을 따라하는 행위)를 사용하여 주위 사람을 난처하게 한다.영우를 가장 위기로 몰아넣는 건 사람들의 시선이다. 일하는 변호사가 아닌, 자폐를 가진 사람으로 많은 이들이 지나치게 영우를 배려하거나, 반대로 무시 하거나, 정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변론을 하지 말아달라는 편견과 멸시를 묵묵히 받아들여야 한다.하지만 영우는 본인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는 동시에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 또한 잘 알고 있다. 누군가는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라 단정 지으며 사건을 그간의 규칙에 맞춰 해결하려하지만, 영우는 그렇지 않다. 정형화된 틀이나 선입견이 영우에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고 결정적인 핵심 키를 찾아 불리한 위기를 유리한 기회로 가볍게 뒤집는다.장애에 대한 시선은 영우에게만 주목되지 않는다. 1화에선 노년 여성이 등장하고 2화에선 성소수자, 3화에선 영우와 같은 스펙트럼 장애를 앓고 있지만, 지능이 높지 않은 김정훈이 등장한다. 영우는 세상의 바깥에 밀려난 이들을 같은 시선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려 집요하게 애쓴다. 그 과정에서 세상의 많은 이들이 장애를 다루는 태도나 인식이 너무나 미흡함을 극명히 보여준다.‘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지난 6월 29일 수요일에 시작했으며, 스카이TV가 운영하는 ENA 채널을 통해 방송되고 있다. 닐슨코리아 전국유료가구 기준에 따르면 1회엔 0.9%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2회에선 1.8%, 3회에선 4.0%, 그리고 4회만에 5.2%라는 이례적인 상승세를 보여주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드라마가 뜨겁게 주목받으면서 많은 이들이 영우에게서 위안을 느낀다고 한다. 거듭되는 차별과 실패로 위기를 마주해도 영우는 엉뚱하고 유쾌하게 정의된 규칙과 틀을 마구 깨부순다. 그 과정이 과장되었다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섬세하고 씩씩하게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그간 영우를 편견으로 바라보았던 주변 인물들과 시청자까지 자신의 편으로 이해시킨다.나와 다름을 인지하고 이해하려는 데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간 내가 갖고 있던 지식과 선입견을 모조리 벗어나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며 장애는 무조건 보호하고 연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무작정 선의를 내보이는 건 오히려 무심히 상처를 줄 수 있단 걸 깨달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최선은 장애를 가진 이들을 이상한, 남다른, 독특한, 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두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이다.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며,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깊이 공감할 때에 세상은 아주 조금씩 변화하여 단단해진다. 이러한 드라마를 마주하면 크게 안심이 된다.

2022-07-12

그 섬에 가고 싶다

섬, 이라고 소리 내 발음하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체온이 조금 내려간다. 한 여름 무더위와 열대야로 고생할 때 써먹기 좋은 방법이다. 섬은 나른한 꿈의 세계, 모든 생각이 평화로운 비무장지대다. 그럼에도 섬에서 나는 죄 지은 것도 없이 죄인이 된다. 수평선을 훔친 내 눈이 푸른 수의를 입고 푸르디푸른 감옥에 갇힐 때,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기도 싫은 자발적 징역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섬에 가면 그냥 눌러앉고 싶어진다.나는 섬을 사랑한다. 내 몸에는 섬의 기억이 새겨져 있다. 전남 완도의 작은 마을 초평리가 엄마의 고향이다. 그러니까 섬은 일종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살면서 수많은 섬을 여행했다. 제주도, 가파도, 마라도, 지귀도, 우도, 추자도, 울릉도, 덕적도, 비진도, 사랑도, 가거도, 완도, 청산도, 보길도, 외도, 홍도, 만재도, 위도, 개야도, 녹도, 초도, 강화도, 교동도, 거금도, 식도, 금오도… 이국의 섬들도 아름다웠다. 크레타, 산토리니, 카프리, 바이칼 알혼… 그러고 보니 모두 사람이 사는 섬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섬, 무인도에는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가서는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섬이라는 운명이 혹 무인도 표류로 이어지진 않을까, 가끔 걱정하며 상상하곤 한다.“무인도에 간다면~”으로 시작하는 질문은 만국공통 게임일 것이다. 무인도에 간다면 꼭 가져갈 세 가지로 낚싯대, 라디오, 가족사진을 꼽는 나는 ‘현실 반 낭만 반’적인 사람 같다. 집이야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이용해 대충 만들고, 식수는 코코넛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명색이 전문 낚시인인데, 낚싯대 하나만 있으면 식량을 확보하는 건 자신 있다. 라디오는 세상 소식을 알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지만, 음악을 듣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음악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가족사진은 그리움을 달래주고,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반드시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환기시켜줄 것이다.인터넷에 ‘무인도 가는 법’을 검색하면 인천 팔미도나 사승봉도, 실미도 관광 상품이 안내된다. 무인도도 관광지화된 것이다. 아니면 망망대해에서 표류해 기적적으로 섬에 닿는 것이 무인도에 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다. 둘 다 싫다. 관광 상품은 동물원에 갇힌 아프리카 코끼리를 보는 듯한 슬픔을 일으킬 것 같고, 표류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어차피 갈 수 없다. 왜냐하면 무인도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 유인도가 되는 무인도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비실재의 세계다.나에게 있어 사랑이란 무인도를 무인도로 남겨두는 일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내 사랑은 혼자 하는 놀이, 혼자 앓는 열병이었다. 짝사랑의 대상에게 차마 마음을 말하지 못했다. 말하는 순간 사랑이라는 환상이 깨질까봐, 혼자 설레고 혼자 황홀한 세상이 물거품처럼 사라질까봐 그저 상상의 영역으로, 어딘가에 있다는 아름다운 섬으로 남겨두는 쪽을 택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때로는 용기를 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을 고백하면 그녀들은 멀리 떠나고, 나는 슬픔이라는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난파선, 아니 내 자신이 아무도 찾지 않는 무인도가 되었다. 사랑을 고백하지 않으면 그녀가 결코 닿을 수 없는 무인도로 영영 남고, 사랑을 고백하면 내가 무인도가 되어버리는 이상한 바다에서 청춘을 보냈다. 어느 시절에는 뜨겁게 연애하기도 했지만, 사랑이란 늘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서 우리를 추락시킨다. 멀리서는 평화롭고 아름답게만 보이던 섬에 막상 들어가 보면 뱀, 전갈, 독거미, 불개미가 득시글하고 뜨거운 뙤약볕에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나에게 사랑이라는 섬은 잔혹했다.지난달에는 연평도에 농어 낚시 다녀오고, 통영 연화도에 전갱이 잡으러 갔다 오고, 며칠 전에는 제주도에 가서 한치 잔뜩 낚아 왔다. 다음주에는 고흥 나로도에 민어 잡으러 간다.이 섬에서 저 섬으로 신나게 낚시 다니다 보니 벌써 7월, 30대의 마지막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다섯 달만 지나면 마흔이다. 정신 차리고 연애를 모색해야 할 때다. 노총각으로, 무인도로 영영 남고 싶지 않다. 내 생이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이어선 곤란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정착할 수 있는 “그 섬에 가고 싶”다.

2022-07-12

오타쿠, 세이브 더 월드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년 소녀들의 성장 드라마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차원 우주에서부터 초능력, 소련의 스파이와 미 정부의 비밀 실험 등 갖가지 음모론을 버무려놓은 작품으로 청소년판 X-파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매 시즌 새롭게 등장하는 음모와 그 안에 감춰진 세계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은 추리물과 액션을 훌륭하게 조합하면서 특유의 레트로적인 분위기를 살리고 있어 굉장한 몰입도를 자랑한다.하지만 내가 이 드라마를 챙겨 보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건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즐기는 ‘던전드래곤’이라는 게임 때문이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게임은 흔히 TRPG라 부르는 게임의 일종으로 전사, 마법사, 성직자, 도둑 등 각자의 역할에 맞춰 연기하는 일종의 상황극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를 진행하는 마스터는 캠페인을 만들고 상황을 조율하며, 참여자들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적절한 퀘스트와 보상을 제공한다. 반대로 게임의 참여자들은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연기를 수행하며 공동의 목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가운데 ‘던전드래곤’은 그 가운데 검과 마법이 발달한 세계인 ‘포가튼 렐름’을 주 무대로 삼는 캠페인 세계관으로,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데모 고르곤과 마인드 플레이어, 베크나 역시 이 세계에 등장하는 유명한 악마와 괴물, 마법사의 이름이다.요즘 등장하는 RPG 게임의 기본 틀을 만들어낸 ‘던전드래곤’이지만 사실 이 게임에 대한 처우는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테이블에 앉아 캐릭터를 연기하는 모습 때문인지, 이 게임은 ‘너드’,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오타쿠’들이 하는 게임이라는 인상이 강했던 탓이다. 때문에 드라마에서도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급생들의 처우는 흔히 말하는 ‘찐따’ 취급에 가깝고, 그런 만큼 아이들은 서로를 더 의지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이들에게 ‘던전드래곤’이란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이들에게 검과 마법이 난무하는 ‘던전드래곤’의 세계는 현실에 억눌려 있던 자신의 자아와 신념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자유로운 세계이며, 그런 서로를 의지하고 인정해주는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어 외롭지 않은 세계이다.덕분에 아이들은 이성적으로는 해석될 수도, 해결될 수도 없는 사건들 앞에서도 무너지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하나의 캠페인을 마주하듯 자신들의 방식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해결해나가고자 시도한다. 얼굴이 갈라지고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에게는 ‘데모고르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친구의 마음을 조종하는 알 수 없는 괴물에게는 ‘마인드 플레이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런 행동들은 어른들의 눈에 아이들의 소꿉장난처럼 비춰지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나가는 것은 그와 같은 아이들이다. 어른들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체념하고 슬퍼할 때, 아이들은 그와 같은 상상력을 통해 현실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고 새롭게 해결해낸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재밌는 건 아이들의 이 과정에 있어 ‘던전드래곤’이 현실의 이해와 해석, 문제의 해결을 위한 중요한 참조점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세계를 경유하여 현실을 바라보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모든 문제들이 자신들의 손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서로에게 다짐한다. 마치, 그들이 플레이하던 캠페인인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결코 어른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자신들만의 세계를 경유해 현실을 바라보며, 그렇게 현실의 문제에 대처하는 나름의 방법을 배워나간다.조금 먼저 성숙해버린 아이들로부터 현실에서 ‘찐따’ 취급을 받던 아이들이 세계를 구해낼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공동체 속의 누군가가 특수한 취향을 가지거나 혹은 그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것에 야유하고 그들을 배척한다. 단지 취향을 이유로 하는 배척 속에서, 아이들은 은연중에 사회를 배워나간다. “남들과 다른 것을 원하지 말라.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있더라도, 남들이 원하는 것을 똑같이 원하는 척 따라가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배제될 것이다.” 하지만 ‘기묘한 이야기’는 그와 같은 독특함과 취향이 오히려 세계를 구하는 열쇠라고 속삭인다. 기묘하고 괴이한 것은 이 세계이지 당신이 아니며, 당신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당신에게는 단지 당신만의 서사가 있을 따름이며, 그건 결코 괴이하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는 다정함.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이 ‘기묘한 이야기’에 담긴 아이들의 성장 서사에 열광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2022-07-05

우리는 서로의 등을 맞대고 자

‘등을 지다’는 말처럼 서운하게 느껴지는 문장이 또 있을까. 그것은 나의 시선이 더 이상 당신을 향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우리라는 관계를 떠나 반대의 방향으로 가겠다는 의미를 가진다. 상대의 등을 바라보는 행위는 애달프다. 돌아보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과 끝내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떠오른다. 등이라는 신체 기관은 어긋남에서 오는 슬픔의 상징일지도 모른다.내게 자신의 등을 보이는 존재가 있다. 팔뚝만 한 크기의 작은 개다. 보리라는 이름을 가진 이 친구는 조용히 다가와 자신의 등을 내 몸에 밀착시키곤 한다. 그러면 뜨거우면서 말캉한 감정이 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느껴진다. 작은 소리에도 날카롭게 반응하는 동물이 다른 종의 동물에게 아무렇지 않게 등을 보인다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이전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우리는 서로의 등을 맞대고 잔다. 취침 시간이 되면 이부자리를 정돈하면서 보리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옆자리를 툭툭 친다. 나의 작은 개는 손짓을 따라서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오른다. 나는 보리의 배를 긁어주기도 하고 머리부터 꼬리까지 이어지는 털의 결을 따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잠에 빠져든다. 웅크리고 자는 중에 등 뒤에서 따뜻한 기운이 닿는다. 둥글게 말린 척추가 느껴지면 자연스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 뒤를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그 신비롭고 이상한 사실에 관하여.개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감정적 부분이 있을 것이다. 개가 인간에게 주는 사랑과 기쁨이 있지만 그만큼 굉장한 책임감을 져야만 한다. 한 생명이 자라날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은 당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훈련하고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가끔 개와 관련된 사건사고가 들려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한다.캐롤라인 냅은 자신의 저서인 ‘개와 나’에서 말한다. “나는 개에 대해 감상적이지는 않다. 모든 사람이 개를 키운다고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개와 주인의 관계가 언제나 건강하고 유익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순간의 선택으로 개를 키우게 된 저자는 개와 함께 사는 삶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개는 우리를 정답고 온화한 세계로 이끈다’는 말이 황당하게 느껴졌다. “개는 정답고 온화할 때도 있지만, 무서울 때도, 짜증 날 때도, 혼란스러울 때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공격적이고 고집불통에 제멋대로이기도 하다.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또 주인에게 책임감과 강제성, 그리고 의존성에 대해서 온갖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그녀의 말대로다. 개와 함께 산다는 건 아름답지만은 않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만큼이나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적확한 문장으로서만 마음과 마음이 닿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보리와 나는 같은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우리는 손짓이나 뉘앙스로 소통한다. 그러다 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오해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어린 시절 상상했던 드넓은 마당에서 개와 함께 뛰어노는 목가적 풍경은 내 것이 아니다. 나의 개는 동화에서 본 것처럼 아름답고 충성도 높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실질적인 문제를 제공한다. 내가 아끼는 물건을 마구잡이로 물어뜯어 놓고, 나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기도 하며, 오줌을 싼 자리에는 지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별것 아닌 일에 지나치게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구는 면이 있다. 보리는 내가 꿈꾸던 완벽한 반려견이 아니며 나 역시도 보리에게 있어서 완벽한 반려인이 아닐 것이다.그렇지만 밤이 되면 우리는 동시에 같은 자리에 눕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등과 등이 맞닿는다. 내 뒤통수는 내 시선이 닿지 못하는 곳. 내가 볼 수 없는 곳을 지켜주는 존재가 내 곁에 있다. 위안과 안도, 그리고 약간의 슬픔이 찾아온다.나의 작은 개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너는 나의 뒤에서 무엇을 보는 거냐고. 우리는 서로의 내부로 들어갈 수 없기에 등과 등이 맞닿는 것으로 안심한다. 안희연의 시 ‘그의 작은 개는 너무 작아서’에는 이런 시구가 있다. “한 존재를 끌어안고 너무 깊이 와버렸기 때문에/ 자신이 끌어안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대로라면 행복하다고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서로가 있기 때문에 충분한 밤을 보내고 아침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척추뼈의 감각에서 사랑을 읽는다.

2022-07-05

퇴적공간, 종로3가

종로3가 유진식당에서 냉면과 수육에 막걸리 마셨다. 종로는 늘 정겹고 애틋한 곳이다. 종로3가역 5번출구 ‘송해길’ 송해 선생 흉상 앞에 분향소가 설치돼 있었다. 눈길을 끄는 현수막이 보였다. “송해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함께여서 즐거웠습니다. ㅡ종로 이웃 성소수자 일동” 송해 선생은 퀴어 축제를 옹호하는 등 생전 성소수자들을 편견 없이 환대했다.‘이웃’이라는 단어 앞에 먹먹했다. 종로3가는 과거부터 성소수자들이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한 곳이다. 생산력 없는 노인들, 장애인들도 종로3가에 모여 별 일 없이 하루를 보낸다. 해거름 무렵 나이 든 손님들이 노상 테이블에 앉기 시작했다. ‘퇴적공간’의 저자 오근재는 탑골공원을 비롯한 종로3가 일대를 사회 중심에서 밀려난 아브젝트들의 집적지라고 했다. 하루 3천여 명의 노인들이 모여드는데, 가정이라는 집단에서 1차 추방을 당하고, 사회적 변화로부터 2차 추방을 당한 이들이라고 덧붙였다. 추방당해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이웃’들이다.어느 장소에 오래 다니다보면 장소와 사람이 한 몸이 되는 느낌이다. 장소가 사람에게 스며든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이는 장소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장소애라는 것은 말 그대로 장소에 대한 사랑이다. 쉽게 말하자면 장소와 살 부비며 사는 동안 정분이 나는 것이다. 마틴 부버의 말을 빌리자면, ‘나’와 장소가 ‘나-당신’의 관계가 되는 것, 무의식과 실존 안에서 주체와 장소가 하나 되는 것”(장석주, ‘장소의 탄생’)이다. 종로3가는 한국 도시 문명이 통과해온 사회·문화적 맥락을 극적으로 수록해온 장소로서 쇠락과 번영이 공존하는 ‘서울’을 대변한다. 종로3가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번영보다는 주로 쇠락을 살아내는 이들이다. 낮술의 흥취가 즐겁지만,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해지는 이유다.종로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돈암동이다. 1989년 2월 18일, 돈암동 세입자대책위 부위원장이던 철거민 정상율은 세입자에게 행패를 부리는 집주인을 말리러 갔다가 집주인이 휘두른 칼에 가슴을 찔려 사망했다. 그는 돈암2동 606-377번지에 살던 소시민이었다. 이 죽음은 재개발 시대 도시 빈민들의 고통을 증언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듬해 봄, 돈암동 철거민들의 오랜 아픔과 눈물이 마침내 영구임대주택 건립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그날 달동네에서는 잔치가 열려 돼지 삶고 막걸리 나눠 마시며 춤추고 노래했다. 그 후 30년이 지나 돈암동에는 근사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김광섭이 ‘성북동 비둘기’에서 묘사한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이 울려 퍼지던 “산1번지 채석장”이 지금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다. 재개발 시대는 끝났지만 30여 년 전 정상율의 노제를 지낸 흥천사 입구에는 천원 동냥하는 노숙인들이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청계천 버들다리 전태일 열사 동상 앞에도 두터운 점퍼를 입은 채 바닥에 누워 잠든 노숙인들이 늘 있다. 무관심과 소외의 그늘이다. 이번에 성소수자들이 내건 송해 선생 추모 현수막이 뉴스에 보도됐는데, 혐오, 분리, 차별의 댓글들을 읽는 게 고통스러웠다. 한편 종로를 대표하는 노포인 ‘을지면옥’이 이제 헐린다고 한다. 다른 곳으로 이전해 계속 장사하겠지만, 오래된 건물이 주는 아늑함과 곰살맞은 세월의 숨결은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 뉴스 댓글에도 흉물이니 슬럼화니 알박기니 하는 천박한 자본논리들만 판친다. 을지로 노가리골목의 원조집인 을지OB베어는 두 달 전 강제집행으로 철거됐다. 옆 가게인 만선호프가 건물을 매입해 쫓아낸 것이다. 이제 골목에는 만선호프 뿐이다. 그런 식으로 확장한 만선호프만 10개다. 좋은가? 미친 짓이다.한국 사회는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으나 사람들의 욕망은 점점 획일화되어 간다. 자본화된 욕망은 밀려난 이들, 약자와 소수자들, 오래된 것들, 이질적 타자를 품지 못한다. 추억과 낭만들이, 이웃들의 삶이 여기저기 철거되는 중이다. 유진식당에서 낮술 마시고 일어나는데, 연둣빛 정장을 멋지게 차려 입은 어르신께서 아무 이유 없이 자판기 커피를 뽑아주셨다. 늙고, 낡고, 병들고, 촌스럽고, 조금은 지저분하고, 싸구려지만, 생면부지의 타인에게도 마음을 여는 이웃들이 종로3가에 있다. 이때 종로3가는 대명사다. 사람과 장소가 한 몸이 되어버린, 사랑하는 그곳을 나는 잃고 싶지 않다.

2022-06-28

갓생 살기

요즘 ‘갓생’이란 말이 여기저기서 자주 들린다. ‘갓생’이란 갓(God,신)과 인생(人生)을 합친 신조어로 꾸준히 계획적으로 살아내는 삶을 뜻한다. 그런데 목표를 설정하는 게 그리 거창하지 않다. 자신의 삶을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면서, 이루기 쉬운 작은 목표들을 설정한다.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 물 한잔 마시기, 하루에 한 번 하늘 올려다보기, 밥 먹고 눕지 않기, 명상하기 등 쉽게 행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성취감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목표를 지향한다. ‘갓생 살기’의 핵심 포인트는 지속 가능한 꾸준함과 그에 따른 성취감이기 때문이다.과거 자기 계발 열풍이 불었을 땐 유명인이 행하는 루틴을 그대로 따라한다거나, 1년 안에 10KG 빼기, 책을 100여권 읽기 등 다소 거창한 목표를 크게 잡아 노력했다면 이와 다르게 갓생살기는 개인이나 상황에 초점을 두고 지금 당장 이룰 수 있는 목표에 집중한다. 절대적으로 옳은 삶의 방식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듯, 갓생 살기를 실현하는 이들이 세운 목표는 힘을잔뜩 뺀 채로 ‘개인’에 맞추어져 있다. 하루 영양제 챙겨 먹기, 식사 후 양치질 곧바로 하기, 밥 한공기만 먹기, SNS 이용 시간 제한하기 등 나의 삶에 중점을 두고선 개인이 원하는 행복의 방향을 추구한다는 것이다.경험이나 체험을 인증하고 공유하는 MZ세대 사이에서 ‘갓생’이 유행처럼 번지자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 오하명(오늘 하루 명상) 등의 해시태그가 달린 챌린지 게시물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행한 노력을 SNS에 인증하며 자신감을 얻고 또 사람들에게 응원을 받으며 오늘의 성취를 쌓고 쌓아 나의 삶을 보살피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취지다.해외선 이미 ‘THAT GIRL’ 챌린지가 한창이다. 유튜브에 THAT GIRL CHALLENGE, THAT GIRL VLOG 등 간단히 검색만 해보아도 게시물들이 폭설 마냥 쏟아진다. 갓생살기와 비슷한 맥락이지만 THAT GIRL은 일도 잘하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과 자기관리 전부 완벽한 현대 여성을 뜻하는 듯하다.전문가들은 이러한 유행의 흐름을 두고선, ‘갓생 살기’는 코로나 19가 불러온 현상이라 말한다. 제한된 일상에서 많은 이들이 무기력함과 우울함을 겪었기에 오히려 자신이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여 주체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삶을 택한다는 것이다.갓생이 트렌드로 자리 잡자 이와 관련된 서비스나 마케팅이 활발해졌는데, 캐시워크는 ‘영양제 먹기 챌린지’ 이벤트를 시행한 바 있다. 14일 동안 빠지지 않고 영양제를 먹고선 SNS에 인증샷을 남기면 CU 편의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프티콘을 증정했다.농심은 수분 섭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바른 물 습관 캠페인을 선보였다. 전지현의 하루 물 루틴이란 콘셉트로 하루 중 언제 물을 마시면 좋을지 소개했고, 갓생 사는 이들을 타깃으로 하루 2L 물 마시는 습관을 권장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최근 GS편의점에 방문했다가 신기한 초콜릿을 발견했다. 나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어 즐길 수 있다는 ‘오늘 하루 초콜릿’은 아침과 점심, 저녁으로 초콜릿을 때에 따라 먹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아침 초콜릿은 칼슘과 비타민 D가 들었고, 점심은 타우린, 저녁은 마그네슘이 포함되는 등 기발한 아이디어와 재미가 더해진 제품이라 인상 깊었다.오늘 하루 초콜릿을 기획한 GS 리테일의 ‘갓생기획’팀은 ‘공감’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토대로 그간 없던 새로운 먹거리를 꾸준히 내놓는다. 유명 도넛 브랜드인 ‘노티드’와의 콜라보한 노티드 우유와 허니버터땅콩으로 알려진 바프(HBAF)와의 협업한 꿀젤리를 선보이며 특별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갓생기획의 굿즈도 존재한다. 갓생을 살겠다는 글자가 쓰여진 다이어리부터 시작해서 MZ세대에서 핫한 ‘인생네컷’을 따라한 무무씨의 갓셍네컷 등 웃음을 자아내는 상품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갓생은 오늘 당장의 ‘나’에 대해 집중한다. 먼 미래의 희망을 막연히 기대한다기보단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며 ‘오늘의 행복’에 기댄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사소하고 가벼운 목표여도 갓생을 실천하는 이들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보인다. 머지않아 이 다짐과 원동력이 배로 커질 수 있도록, 계속 되는 여러 좌절에도 나아가려는 MZ세대 친구들에게 함께 하잔 응원을 보내고 싶다.

2022-06-28

이것은 나의 몫, 나의 책임

사람들은 모두 꿈을 꾼다. 불완전한 자신을 벗어나 완전하고 충만한 자신의 모습을 꿈꾼다. 더 나은 삶, 더 즐거운 인생, 더 나은 ‘나’의 모습을 꿈꾸며 저마다의 미래를 꿈꾼다. 그래서 꿈은 모두 제 갈래의 길로 갈라져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는 공통된 목적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가닿는 방법은 모두가 다르다. 같은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설혹 비슷한 미래를 꿈꾼다 할지라도.이렇게 말하자면 모두가 다른 꿈의 조각을 앓으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같은 꿈의 조각을 앓고 있다. 지금의 나에 대한 불만족으로부터 비롯되는, 더 나은 내가 되는 꿈 말이다. 어느 누구도 지금의 자신을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제 각각의 불완전함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꿈이 모두 나름의 색으로 칠해져 있어 제각각의 색으로 빛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원하는 건 사실 꽤나 단순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무언가, 자신의 삶을 충만하다 느낄 수 있게 해 줄 무언가다.어렸을 때,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줄 알았다. 내가 원하는 걸 마음껏 꿈 꿀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가난과 화목하지 않은 가족 속에서, ‘나’의 꿈은 실현 불가능한 미래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그 무렵 나는 음악이 하고 싶었다.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나는 내가 재능이 있다고 믿었고, 얼마든 열심히 할 수 있고 또 잘 해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문제는 돈과 시간이었는데, 가난했던 우리 가족은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그게 밉고 싫어서, 나는 학교도 가지 않은 채 매일을 떠돌아다녔다.나는 진심을 다해 나를 둘러싼 환경을 마음껏 원망했다. 세상에는 자신이 무얼 원하는 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토록 허다하게 많은데, 하고 싶은 일을 찾았음에도 그걸 할 수 없게 만드는 무능한 가족들이 미웠다. 나의 삶이 비극으로 끝난다면, 그건 나의 환경 탓이리라고 진심으로 믿었다.어느새 20년 가까이 지난 청소년 시절의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씩 그 무렵의 감정을 생각한다. 그때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만약 내가 정말로 음악이 하고 싶었다면,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주말이면 레슨을 받고 했다면 됐지 않았을까? 정작 학교를 관뒀을 때 지독한 무기력감에 시달렸던 건 왜였을까? 왜 나는 내가 스스로 해내지 않고, 부모님에게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도록 ‘전부’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던 걸까. 그들이 결코 내어줄 수 없으리라는 걸 그보다 더 어렸을 때에도 잘 알고 있었으면서.그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에 가닿게 된다. 나는 정말 음악이 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정말로 음악이 하고 싶었던 걸까. ‘나’라는 인간이 사실은 그저 평범하고 아무런 재능도 없으며, 죽기 살기로 노력해야 겨우 평범한 수준에야 이를 뿐인 지극히 보통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건 아닐까. 그렇기에 ‘음악’이라는 닿을 수 없는 꿈을 목표로 설정하고 스스로의 결핍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타인의 탓으로 돌렸던 건 아니었을까.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아마 답은 없을 것이다. 그건 이미 20년이나 지나버린 과거이고, 그때의 열정은 그때의 나만이 알고 있을 것이므로. 어쩌면 그건 오로지 ‘나’만의 탓도 아닐 것이고, 오로지 ‘부모’의 탓도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공평하게 무능했고, 공평하게 비겁했던 것 같다. 할 수 없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이 공평하게 뒤섞여,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만약 그때 정말로 음악을 시작했더라면, 부모님께서 나를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었다면, 나는 그만큼 음악을 열망하진 않았으리라는 거다. 적어도, 나의 음악에 대한 열망은 그만큼 순수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 다만, 여전히 나는 방법을 모른다. 단 하나 아는 것이 있다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이 실현될 수 없을 때, 그걸 남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건 나의 삶이 타인에 의해 규정되도록 만드는 생각이니까. 환경이 나의 삶을 규정하도록 내버려두는 짓이니까.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어야만 했다. 내가 나의 욕망을 실현시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건 타인의 탓이 아니라 나의 무능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이다. 오직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만이, 나의 삶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게 점점 나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2022-06-21

이야기의 힘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우리 가족은 고향을 떠나 다른 도시로 이사를 해야 했다. 익숙한 환경을 뒤로한 채 낯선 세계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학생을 향한 조건 없는 환대를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자주 교실에 홀로 놓였다. 같은 반 친구들과 나누는 시답지 않은 대화. 짝을 지어야만 하는 체육 시간. 삼삼오오 모여 급식소로 향하는 경쾌한 발걸음. 그러한 일상은 내게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대로인데 나를 둘러싼 세상은 완전히 변해있었고 그 간극을 메우는 방법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진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책은 내게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만화나 게임기는 가차 없이 압수하던 선생님이 소설만큼은 허용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발자크 같은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두드려주기까지 했다. 그 격려가 나의 유일한 자부심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에 들러 어려워 보이는 책을 찾았고 모든 문장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끝끝내 읽어내기 위해 노력했다.그러니까 소설을 읽는 행위는 중학생이었던 내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의 방식이었다. 육체는 교실에 있지만 정신은 머나먼 곳을 유영하면서 일종의 자유로움을 느낀 것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는 생생한 체험으로 다가왔으며 강렬한 방식으로 나를 매료시켰다. 어느 순간부터 소설은 단순한 도피처가 아닌 나 자신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다.인간은 상상하는 동물이다. 이 괴상한 능력 덕분에 인류는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작가들은 상상의 영역으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세계를 그린다. 그것은 희망적인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고 섬뜩하고 두려운 형태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는 작가의 결심에 달려 있다. 놀라우리만치 디테일한 세상을 그려낸 올더스 헉슬리, 조지 오웰, 그리고 마거릿 애트우드처럼.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는 전체주의 국가를 상상한다. 소설의 배경은 21세기 중반이다. 전 지구적 전쟁과 환경오염으로 출생률이 급격히 감소하게 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면서 ‘길리아드’라는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남성 권력자 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제 사회로 구성원들의 활동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이토록 끔찍한 국가에서 가장 희생당하는 건 여성이다. 그들은 기능대로 옷의 색이 정해져 있으며 여성의 역할은 가임과 출산에 국한된다. 이러한 체제를 옹호하는 자는 말한다. 과거의 사회는 선택권이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차고 넘치는 선택의 여지에 죽어가는 사회’였다고. 그러니 지금의 상황이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고. ‘세상에는 자유가 한 가지밖에 없는 게 아니야. 목표를 향한 자유가 있는가 하면 무언가로부터의 자유가 있지. 무정부 시대의 자유는 무엇을 행할 자유였어. 하지만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무언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거야.’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러나 주인공은 자유를 박탈당하기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며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것을 내가 꾸며내는 이야기로 믿고 싶다. 만일 내가 꾸며낸 이야기라면, 결말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언젠가 끝이 나고, 진짜 삶은 그 후에 이어질 것이다. 끝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허구의 인물은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도 그것이 허구이기를 바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우리는 너무나 명징한 현실을 발견하게 된다.그런 면에서 이야기는 신비하고 이상하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일수록 그렇다. 선명하게 흘러가는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완전히 빠져들게 되고 그러다가도 순식간에 모든 것이 휘발되며 백지상태가 되기도 한다.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고 한 시대를 뒤흔들 수 있는 거대한 가치를 마주하다가도 하등 쓸모없는 허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애트우드는 이야기를 쓰는 행위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어둠, 그리고 욕망이나 충동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 들어가서 운이 좋으면 어둠을 밝히고 빛 속으로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오리라는 욕망 또는 충동 말이다.’막막한 외로움에 어쩔 줄 모르던 과거의 내게 세상의 모든 낙관적인 단어를 모아 건넸다 한들 어떤 위로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도서관에 꽂혀 있는 무수한 소설책 또한 완전한 위로의 방식이 될 순 없었다. 늘 그렇듯 소설은 해답을 주지 않으니까. 하나의 이야기를 그저 보여줄 뿐이니까. 거기에서 빛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것은 결국 스스로가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서라는 전언이며 그 무심하면서 다정한 언어야말로 내가 경험했던 이야기의 놀라운 힘이다.

2022-06-21

송해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송해 할아버지 이제 편히 쉬세요. 덕분에 행복했어요. /연합뉴스 송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선생님이나 어르신 등 여러 호칭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싶다.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누구에게 “할아버지!” 부른 일이 없었다. 슬픔과 애틋함, 그리고 사랑을 담아, 할아버지! 참 오랜만에 불러본다. 송해 할아버지… 할아버지!실시간 인기 검색어에 송해 할아버지가 오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주무시는 할아버지의 코에 손을 갖다대보는 어린 손자처럼, 조마조마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온 국민이 다 그랬다.여섯 해 전 죽도시장 ‘울릉도 돼지집’에서 머릿고기에 탁주 마시는데, 주인 할머니가 울상이었다.송해 할배 돌아가셨대서 시장 사람들 다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힌다고. “헛소문이래요. 멀쩡하시대요” 말씀드리자 옆집 아주머니에게 “만우절도 아닌데 왜 거짓말해! 악썽루머 싸이버 수사대에 의뢰한단다!” 역정을 냈다.그 모습이 재밌어 큭큭 웃었다. “건강하단다! 어이고 오래 살겠다!”라던 돼지집 할머니 예언대로라면 백 살은 넘기셨어야 하건만, 너무 일찍 가셨다. 코로나로 야외 공개방송이 중단되면서 에너지를 잃어버리신 게 아닌가 싶다. 계속 팔도를 돌아다니며 무대에 올랐다면 10년은 더 사셨을 것이다.장수의 아이콘이셨다. 제임스 딘, 엘비스 프레슬리, 체 게바라, 레이 찰스보다 형님이고, 그레이스 켈리에게는 오빠이자 마릴린 먼로에게는 한 해 아래 동생이셨다. 백 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으니 천수를 누리셨다. 말년에 무의미한 연명치료 받으며 고생하다 가신 것도 아니니 어찌 보면 호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황망하고 먹먹한 것은, 그분은 정말 천 년 만 년 사실 줄 알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실 줄로만 알았다.어린 시절, 일요일 정오가 되면 늘 “전구우욱~! 노래자랑!” 외치는 소리와 함께 “딴따단 딴따단딴” 흥겨운 오프닝 음악이 집안을 가득 채웠다.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가도 “전구우욱~!”, 엄마랑 동네 국수집에 잔치국수 먹으러 가도 “노래자랑!”, 친구네 집에 놀러가도 “딴따단 딴따단딴”, 쌀집에 떡 찾으러 심부름 가도 “딩동댕동” 어느 곳에서나 ‘노래자랑’이었다. 괜히 ‘전국’이라는 총체성의 명사가 붙은 게 아니다. 앞집, 옆집, 뒷집, 너 나 아무개 할 것 없이 누구나 틀어놓는 프로그램, 안 봐도 틀어놓는 프로그램이 ‘전국 노래자랑’이었고, ‘일요일의 남자’ 송해 할아버지의 익살맞고 다정한 음성은 공기처럼, 물처럼 늘 있는 것이었다.온몸에 꿀벌을 두르고 무대에 오른 양봉업자 아저씨 때문에 벌에 쏘이기도 하고, 짜디짠 어리굴젓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어주는 아주머니 손길을 거절 못해 우물우물 잡수기도 하고, 김인협 악단장(2012년 별세)에게 용돈을 갈취(?)해 어린아이들 나눠주기도 하고, 때로는 꼬마아이와, 때로는 백 세 어르신과 함께 덩실덩실 춤추기도 하셨다.‘전국 노래자랑’에는 각 지역의 고유한 특색이 늘 살아 숨 쉬고, 가족과 이웃 공동체의 따뜻한 온정이 있고, 서민의 웃음과 눈물, 삶의 애환과 고락이 흥건했다. 전국 노래자랑이 방영되는 일요일 점심이면 온 나라가 다 시장터고, 약수터고, 광장이고, 가설무대였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요양병원에 오래 누워 계셔서 이제는 보지도, 거의 듣지도 못하는 나의 할머니께서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 중 가장 좋아하는 분이 송해 할아버지셨다.문맹인데다 눈과 귀가 어두운 할머니는 당신이 아는 기초적이고 직관적인 언어를 조합해 의미를 만들곤 하셨는데, 매주 일요일 정오가 되면 전국 노래자랑이라는 프로그램 이름 대신 늘 ‘산에서 노래하는 거’ 틀어달라고 내게 부탁하시곤 했다.“그 할아버지 웃겨 죽겠어”라며 박장대소하던 할머니와 함께 계란을 삶아 까먹던 그 일요일,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그 모든 일요일들에 언제나 송해 할아버지가 계셨다. 이제 요양병원 면회가 허용되지만, 할머니 귀에 보청기를 껴 드리고 “할머니!”하고 불러볼 수 있지만, 송해 할아버지 소식은 차마 전하지 못할 것 같다.모두의 할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드려야겠다. 송해 할아버지 편히 쉬세요. 덕분에 행복했어요.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천구우욱~! 노래자랑!” 신나게 외쳐주세요. 이땅의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웃을게요.

2022-06-14

오늘도 나마스떼

요가에서 중요한 건 꾸준함이다. /언스플래쉬 일상이 고되게 느껴질 땐 매트 위로 오른다. 유튜브 즐겨 찾기에 저장해둔 요가 영상을 틀면 잔잔하고도 낮은 선생님의 음성이 수련의 시작을 알린다.요가는 몸의 상하좌우를 균일하게 늘리는 스트레칭으로 시작한다. 어느 한쪽의 방향에 치우치지 않게 몸의 오른쪽을 늘리면 그 다음은 왼쪽을 늘린다. 일직선으로 서 있는 ‘타다이사’나 자세는 머리부터 시작해서 어깨, 골반, 무릎, 발끝까지 일자로 곧게 버티고 서 있는다. 어느 부위 하나 불룩 나오거나 들어가지 않게 힘을 주어 반듯함을 유지한다.소 자세인 ‘비틸라아사나’와 고양이 자세인 ‘마리쟈아사나’, 테이블 자세 등 순서에 맞춰 자세를 취한다. 상체를 길게 늘어뜨려 근육에 자극을 주거나 느슨하게 푸는 이완을 반복하며 몸의 신경이 구석구석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정강이와 종아리 순으로 자극을 옮기고, 오른쪽 손바닥에만 무게를 집중하는 등 의도한 대로 힘을 분산시켜 내 몸에 크고 작은 부위가 자리하고 있음을 느껴본다. 신경이 세밀하게 자리하고 있음이 느껴질 때면 살아있다는 감각이 생생히 전해져서 만족스럽다.요가는 겉으로 매우 정적인 듯 보이면서도 굉장히 동적이다. ‘8개의 가지’란 뜻을 지닌 ‘아쉬탕가’는 60가지 이상의 시퀀스를 쉬지 않고 빠르게 이어서 동작한다. 아직 수련이 부족한 난 뻣뻣한 몸으로 겨우 몇 가지 동작만 해내고, 이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흠뻑 땀으로 젖어 기진맥진해버릴 정도다.주로 즐겨하는 ‘빈야사’는 산스크리트어로 연결하다란 뜻을 가졌다. 다양한 동작을 자유로운 흐름으로 이어가는데 개인적으로 아쉬탕가보다 조금 수월하게 느껴진다. 흐름에 맞추어 동작을 행하다 보면 꼭 안무를 추는 것 같기도 하다. 반복적이지만 리듬이 있고 이야기에 기승전결이 있듯 순서에 따라 동작에 깊이감이 존재한다.이외에도 정말 많은 요가 종류가 있지만, 유튜브 영상 속 선생님께선 수련을 할 땐 늘 새로운 경험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특히 매번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지루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데, 그럴 때 일수록 움직임 하나하나를 각기 다르게 바라보고 느끼도록 연습해야 한다고 하셨다.하나의 자세를 새롭게 바라보고 임하는 것. 사실 요즘 나의 근황은 썩 좋지 못했다. 비슷한 나날과 비슷한 감정으로 존재하는 동안 나 스스로를 방치하다시피 살아갔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절실히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힘을 응축시킨 채 웅크려 있었다. 그러던 와중 익숙한 것에서의 낯섦을 찾으며 매번 새로움을 경험하고 수련해야 한다는 영상 속 요가 선생님의 말씀에 얼마나 크게 안도했는지 모른다. 본격적으로 요가를 배우고 싶어 최근 집 근처에 위치한 학원에 등록했다. 총 16명이 모이는 오전반으로 아침부터 부지런히 사람들이 모여든다. 매트를 깔고 일정한 거리에서 각자의 수련을 진행하는 동안 학원 원장님은 옆 사람과 본인의 자세를 비교하면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하신다. 자세를 따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려운 동작 부분에선 무리하지 않고 가만히 숨을 고르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하셨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신기하게도 매번 매트 위로 오를 때마다 같은 동작임에도 수월히 해낼 때가 있고, 유독 어느 날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날씨도 온도와 습도가 다르게 바뀌듯, 사람의 감정과 체력도 마찬가지라서 해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매번 다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중요한 건 꾸준함이다. 새롭게 바라보며 늘 겸손하게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단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요가를 통해 배웠다.수업을 가는 오전 열시와 끝나고 집으로 향하는 열한시 반은 같은 길을 걸을지라도 많은 부분이 다르게 보인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나 미세하게 다르게 변한 나무의 그림자, 바람의 세기까지 계속해서 변화하는 시공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움을 찾을 수 있도록 유연한 생각을 지녀보려 한다. 그것이 실패와 좌절뿐일지라도 말이다.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산행을 만끽할 수 있고, 높이 오르지 않아도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음을 알려준 요가 선생님의 말씀을 되짚어보면서 요가의 끝은 합장으로 마무리 한다. 합장 자세는 평온함이자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몸짓이라 한다. 손바닥을 맞대어 우뚝하고도 도저한 산을 흉내내며 오늘도 작게 말해본다. 나마스떼.

2022-06-14

세상의 모든 둘째에게

나는 삼 남매 중 둘째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들 역시 그렇다. 둘째끼리는 통하는 어떤 지점이 있는 것이 아닌지 쓸데없이 헤아려보곤 한다. 우리 모임은 ‘둘째들’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갖고 있는데 나는 이 명명이 썩 마음에 든다.우리 ‘둘째들’은 말이 얼마나 잘 통하는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밤을 새우기 일쑤다. 언니나 오빠에게 당했던 에피소드, 동생에게 화났던 일을 늘어놓으려면 2박 3일도 모자라다. 부모님, 조부모님 관련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끝도 없다. 우리는 둘째라는 것에 대한 묘한 억울함과 설움을 가지고 있다. “언니(혹은 오빠)의 말을 잘 들어야지”라는 말과 “동생에게 양보해야지”하는 말이 뒤섞여서 나는 늘 참아야만 하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고 그렇다면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자식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 덕선은 이러한 둘째의 전형이다. 집안의 자랑이자 학창 시절 1등을 도맡아 하던 잘난 언니와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는 동생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인 덕선은 유쾌하고 발랄한 성격의 소유자면서 철없는 면모도 다분하지만 주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세심함을 갖추고 있다.덕선은 받는 것보다 양보하고 참는 것을 먼저 배웠다.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은 계란프라이보다 콩자반이 좋다고 말하고 치킨에서 가장 맛있는 부위인 닭다리를 언니와 동생에게 양보하면서도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인다.쌓여가던 서러움이 폭발하는 사건이 벌어진 어느 날, 덕선은 아이처럼 앙앙 운다. “왜 나만 계란 후라이 안 해줘? 나도 콩자반 싫어하거든? 나도 닭다리 먹을 줄 알거든. 언니는 보라고 동생은 노을인데 왜 나만 덕선이냐고!”덕선의 외침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둘째가 공유하는 지점일 것이다.언제였던가. 친구 중 한 명이 어릴 때 겪은 일화를 내어놓았다.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언니에게 양보했을 때, 할머니는 “아이고 참 착하다”라며 자신을 칭찬했지만 동생이 자신에게 뭔가를 양보하자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던 일. 그 단호한 어투가 여전히 귓가에 생생하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양보할 필요가 없다고 교육받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의문했더랬다.캐나다로 어학연수 가고 싶다는 남동생에게 부모님이 너희 누나들은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고 다독이자 그는 “어차피 작은 누나는 그런 것들 필요 없잖아!”라고 소리쳤고 결국 친구는 폭발하고 말았다. 야, 나도 인간이거든. 그저 항상 너한테 양보했을 뿐이었거든. 고성이 오가던 가운데 부모님은 친구의 어깨를 붙잡았다. “둘째야, 그래도 네가 누난데 참아야지.”이야기를 듣고 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히 ‘둘째들’다운 에피소드였다. 그래, 우리가 참아야지. 항상 그랬듯이.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야, 둘째라고 가오가 없냐. 쟁취해야 하는 것이 있음에도 욕심내지 않는 건 바보 같은 일이야. 그렇게 서로를 토닥이며 코끝이 찡해오던 밤, 우리는 다짐했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 희생하는 착한 아이로 사는 일은 이제 그만두자고.그래서였을까.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었다.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는 정중하게 대접받지 못한 상황에 자주 노출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깨달음이 오자 우리가 외치던 부당함이 단순한 투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첫째만큼의 든든함도, 막내만큼의 깜찍함도 없는 애매한 위치의 둘째들에게 고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가 서러움이 없겠느냐만, 둘째의 설움은 둘째만이 아는 법. 뭐 그런 사소한 것을 마음에 담아 두냐고 혀를 차지만 우리만큼은 서로의 마음을 다독여주자.나 역시 그랬다. 그렇지. 맞아. 서운하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둘째들’이 있었기에 그 시절을 무사히 보내올 수 있었다. 미세한 차이를 경험해본 자들. 이상하고 부당하다고 차마 말하기 어려웠던 상황들을 잘 알고 있기에 서로가 다정하고 애틋해지는 것이다.그리하여 만국의 둘째들이여, 행복하자. 지구의 실세가 언젠가는 둘째들로 거듭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 그날까지 모두 평온하고 건강하도록.

2022-06-07

가장 느린 해방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소설이나 평론을 인용하시던 교수님께서 드라마의 대사를 인용하시다니. 나는 순간 얼어붙었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드라마 내용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교수님께서 하신 얘긴 대충 그런 거였다.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 사람들보다, 망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정직할 수밖에 없다고. ‘나의 해방일지’에서도 그러지 않느냐고. 항상 소설이나 평론가의 말을 인용하시던 선생님께서 드라마의 제목까지 거론하시며 이야기를 하시다니. 나는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웃음을 터뜨려야 하나 꽤나 고민을 했더랬다.드라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최근에 재밌게 본 드라마라고 해도 ‘바이킹스’ 뿐이고, 남들 다 좋다던 ‘이태원 클라쓰’도 세 번을 도전했다가 중도 하차했다.드라마 특유의 느린 템포가 내 성미에는 맞질 않았던 거다. (‘바이킹스’를 끝까지 봤던 것도, 아마 한 화마다 한두 번씩은 잔인하고 자극적인 장면이 나와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교수님께서 드라마를 재밌게 보신다니, 말동무라도 해드리려면 나도 봐야할 것만 같았지만, 영화나 소설이나 평론이라면 모를까, 드라마라니. 교수님과 대화를 하기 위해 드라마까지 보는 건 좀 아니다 싶어 몇 주를 미루고 있었다.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선생님은 그 말을 했던 거였더라. 왜 잘 사는 사람들보다 망가진 사람들이 정직하다고 하셨던 거였더라. 웃자고 하셨던 건 아니었던 것 같고,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시던 와중에 하셨던 것 같은데. 아. 안되겠다. 한 번 그 대사 나오는 대목만 봐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드라마를 틀어놓았다. 도저히 그 긴 시간을 버틸 수가 없어서 빨래나 개고 바닥이나 닦으면서 볼 요량으로 말이다.사실 첫 화는 그냥 그랬다. 서울에 태어났으면 뭔가 달랐을 거라 말하는 정서를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거니와(나는 서울 토박이라 그 정서를 온전히 이해하긴 힘들었다. 죄송합니다.) 다들 자신이 힘들다고는 하는데, 그들의 삶의 적어도 ‘나’보다는 나아보여서 그렇게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헌데 2화쯤부터는 내 귀가 점점 드라마에 쏠려가더니, 3화 중반쯤부터는 개던 빨래를 손에 쥔 채 멍하니 열중하고 있었다. 세상에. 내가, 드라마에, 열중을 하다니. 그것도 나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말이다.나는 자신의 힘듦을 토로하는 서사에 좀처럼 공감하지 못한다. 그들의 힘듦 그 자체에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 힘듦이라는 것이 ‘나’의 힘듦보다 객관적으로 힘든 것인지 자꾸만 비교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그래도 쟤들은 나보다 이런 점에선 낫네, 그래도 쟤들은 집이라도 있네, 그래도 쟤들은 밥걱정은 없네 등등. 그런 푸념을 하며 이야기는 나에게서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그런데도 내가 ‘나의 해방일지’에 집중하게 되는 건, 그들이 경험하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트러블에 공감이 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 모든 인물들이 이 일상을 행복도 불행도 아닌 어딘가 쯤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그렇지 않은가. 보통의 사람들에게 일생이란 그다지 불행한 것도, 그다지 행복한 것도 아니다. 크나큰 슬픔이 찾아오는 경우도 드물고 말도 못할 희열의 순간이 찾아오는 경우도 드물다.적당한 슬픔과 적당한 기쁨. 그마저도 적당한 기쁨은 자주 찾아오지도 않으면서 적당한 고달픔만 반복되기에, ‘나’의 삶은 괴롭고 힘들게만 느껴진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보란 듯이 잘 사는 사람들은 그런 정도의 괴로움을 적당히 숨기거나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어딘가 망가진 사람들은 작은 자극에도 그 적당히 반복된 고달픔을 우수수 쏟아내고야 만다. 어딘가 마땅한 방향성을 지니지 못한 채 쏟아지는 적당한 고달픔의 말들은 그래서 대단하지도, 거창하지도 못하다. 단지 진심어릴 뿐이고, 그래서 처연하고 사랑스러울 따름이다.‘나의 해방일지’라는 거창한 제목과 달리, 이 드라마는 그렇게 거대한 악과 싸우지도 않으며 거대한 성공을 거머쥐지도 않는다.단지 조용히, 자신을 옭아매오던 작은 고통들과 맞서는 법을 하나씩 배워볼 따름이다. 그래서 이 작은 해방의 과정은 결코 성공을 향해 있지 않다. 다만 조용히 자신의 발밑을 바라보며, 자신이 선 자리를 바라볼 뿐이다. 조금의 해방을 위해서. 잘해야 한다고, 성공해야 한다고. 누구에게도 지적받지 않아야 한다고. 누군가에게든 사랑받아야만 한다는, 누구나 갖고 있는 강박으로부터 아주 조금씩 천천히 말이다.

2022-06-07

우리 모두는 천천히 달려가야 한다

여름이 되면 손에 잡히는 소설이 하나 있다. SF소설인 천개의 파랑은 안락사가 확정된 경주마 ‘투데이’ 위에서 두 번째로 낙마하고 있는 휴머노이드 ‘콜리’의 독백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멀고도 가까운 2035년에는 인간보다 더 빠른 말의 경주 속도에 짜릿한 전율을 느끼고 선망하는 스포츠인, 경마가 유행하고 있다. ‘어느 무엇보다 더 빨라야 하는’ 인간의 욕심과 욕구가 점철되어 있는 공간은 지금과 변함이 없지만 2035년에는 말의 기수가 휴머노이드로 대체되었고, 경기장뿐만 아니라 세상 곳곳에는 인간 대신 휴머노이드로 대체 된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연재를 만나기 전까지 콜리는 휴머노이드 C-27로 불렸다. 인간의 실수로 탄생된 C-27은 세상의 채도가 높은 것에 놀랄 줄 알고, 노을을 감상하고 감탄하며 단어와 지식을 무작위로 학습한다. C-27은 어느 날 경주마 투데이와 민주를 만나게 된다. 투데이의 움직임을 따라하고 등에 앉아 주로를 질주하는 순간 누군가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기쁨’을 알게 된다.그러나 투데이는 최고의 기록을 세우기 위해 혹사당했고, 늘 1위를 유지했던 유망주에서 벗어나는 순간 많은 인간들이 질타를 받게 된다. 몸값이 떨어지고 인간의 관심이 사라지는 동안, C-27은 투데이가 점점 달릴 때 행복을 느끼지 않는 다는 걸 않고 고민에 빠진다.어느 늦여름의 경기에서 투데이가 쓰러질 듯 달리는 걸 깨달은 C-27은 투데이를 지키기 위해 낙마를 선택한다. 뒤따라오는 말발굽에 밟혀 골반과 하반신이 전부 부서지고 결국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게 된다.곧 자신을 수거해올 하청업체를 기다리는 동안 연재를 만나게 된다. 하늘을 보기 위해 넋을 놓다 말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들은 연재는 C-27을 자신의 집으로 수거하여 돌본다. 그리고 ‘콜리’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연재의 동생인 은혜는 다리를 쓸 수 없는 하반신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모습과 비슷한 콜리에게서 연민과 동질의 감정을 느낀다. 연재와 은혜의 엄마 보경은 로봇 콜리를 만나며 죽은 남편의 모습을 회상하며, 자신의 멈춰버린 시간을 흐를 수 있도록 현재의 행복을 쌓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그렇게 촛불이 타오르듯 서서히, 그녀들의 평범한 서사가 빛을 발하며 반짝이기 시작한다.그녀들의 서사는 콜리를 만나며 더 이상 개인의 아픔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곧 안락사 위기에 처한 투데이를 다시 한 번 경마장 위에 달려보게 하는 공통된 목적을 갖게 된 그녀들은, 누군가는 타인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지나칠 법한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응시한다. 자신 또한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는 인간일 뿐인데도 타인에게 섬세하면서도 정제된 언어를 건넨다. 동시에 자신의 아픔을 돌아보고 보살핀다. 그러한 시도와 용기는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의문을 가질 때 콜리는 “저는 실수로 만들어 진거라고 연재가 말했어요. 연재는 실수가 기회와 같은 말이래요.”라며 담담하게 말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퇴사를 하고 난 뒤의 일상은 여유와 조급함을 오간다. 어느 날엔 새롭게 시작하는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도, 어느 날엔 사소한 일에도 쉽게 무력해지고 만다.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긴장감 있는 반전 서사나 놀라운 반전이 없다. 그저 평범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간다. 조금 심심하고 담백하지만 호흡하며 읽어나가는 동안 어느덧 책의 끝장에 다다른다.파랑을 떠올리면 하늘이 연상되고, 하늘은 아주 많은 것을 담는 그릇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 날씨를 담고, 새를 담고, 무지개도 담고, 수많은 인간의 그리움도 목소리도 담는다. 그래서인지 천 개의 파랑이라는 제목과 책의 이야기는 무척 넓은 품을 가지고 있는 듯 잘 어우러진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라는 문구를 휴대폰에 기록하여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 또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감정의 결을 포착해 하나씩 각자의 이름을 붙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조금 더 천천히 숨을 고르다보면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분명 선명히 보일 것이다. 그런 믿음과 함께 여름을 맞이하러 나가본다.

2022-05-31

딸배를 위한 변명

‘딸배’는 온라인상에서 배달 라이더들을 칭하는 은어다. ‘배달’이라는 단어를 거꾸로 뒤집은 건데, 딸딸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또는 ‘딸통(배달통)’을 달고 다닌다고 해서 ‘딸배’다. 배달 라이더들을 비하하거나 모멸감을 주려 할 때 사용하는 멸칭이다. 이런 단어가 생겨난 것은 전적으로 라이더들의 잘못이다.배달 라이더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 수밖에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이나 늦은 밤이나 내가 먹을 귀한 음식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물론 많지만, 라이더들을 ‘딸배충’이라 부르며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해치는 암적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가장 큰 이유는 라이더들의 불법 주행이다. 머플러를 개조해 배기음을 키우거나 다른 운전자의 시야를 방해하는 LED 전구를 주렁주렁 단다거나 하는 불법 개조 역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모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일부 라이더들은 교통 법규를 밥 먹듯이 무시한다. 불법 좌회전, 불법 유턴, 버스 전용차선 달리기, 역주행, 인도 주행 등 타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른다. 그러면서 높은 수익을 올린다. 인터넷에 배달 라이더로 돈 벌었다는 자랑 글들이 종종 오는데, 당연히 고운 시선으로 보일 리 없다. 나도 배달 라이더지만 불법 주행하는 오토바이들을 보면 화가 난다.배달 라이더들이 인도 주행을 하거나 신호를 위반하면 사람들은 ‘저 딸배충 돈에 미쳐가지고 묶음 배달하느라 저런다’고, ‘콜 하나라도 더 잡으려고 난리친다’고 생각한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실제로 묶음 배달을 하면 빠른 시간 안에 여러 집을 가야 하기에 서두를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단건 배달을 해도 서둘러야 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는 복합적인 구조적 문제가 있다.배달 라이더들의 교통 위반 행위는 분명한 잘못이다. 라이더들은 반드시 운행 습관을 고쳐야 한다. 하지만 라이더들이 불법 주행을 할 수밖에 없게 하는 시스템 역시 개선될 필요가 있다. 소비자는 빠른 배달을 원한다. 배달 주문 고객 요청 사항 중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최대한 빨리 갖다주세요’나 ‘빠른 배달 부탁합니다’다. 그만큼 ‘속도’가 생명인 배달인데, 속력을 낼 수 없게 하는 여러 장애물들이 있다. 음식점의 조리 대기 시간, 지나치게 높은 과속방지턱들, 꽉 막힌 도로 정체, 악천후, 이륜차가 달리기에 너무나도 위험한 노면 상태, 많아도 너무 많은 신호들, 차단기와 공동현관 비밀번호 등 아파트 출입의 까다로운 과정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지체되는 시간 등등이다. 하지만 소비자는 이런 사정을 모른다.내가 겪은 일이다. 스쿠터 주차 랙 쇠붙이가 부러져 아스팔트를 텅텅 때리느라 정상적인 주행을 할 수 없었다. 테이프로 칭칭 감아 겨우 응급처치를 하는 데 10분쯤 걸렸다. 예상 시간보다 5분 늦게 도착했는데, 손님은 묶음 배달을 의심하며 화를 냈고, 내 해명은 듣지 않았다. 다음날 내 라이더 평점이 깎여 있었다. 평점이 깎이면 배차 콜도 줄어들게 된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음식점도 손님도 배달 라이더도 모두 ‘빨리 빨리’를 욕망한다. 그리고 배달 어플은 그 ‘빨리 빨리’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고, 이용한다. 배달 도착 예정 시간을 산출하는 AI는 빅 데이터를 통해 스스로 학습하는데, 배달 라이더들이 원래 20분 걸리는 길을 15분 만에 가기 시작하면 AI는 그 경로를 이제 15분 코스로 인식한다. 교통 상황과 날씨 등 변수는 고려하지 않는다. 라이더들은 그렇게 AI가 단축시킨 시간 내에 배달을 완수해야만 한다. 라이더들이 빠르게 달릴수록 AI는 더 짧은 시간 안에 배달하라 명령하고, 결국 라이더들은 더 빨리, 더 더 빨리 달릴 수밖에 없다.이 사슬을 끊으려면 음식점, 손님, 라이더 모두 ‘빨리’ 대신 ‘천천히’와 ‘안전하게’를 지향해야 한다. 다행히 조금씩 변화하는 게 보인다. 음식을 받아 갈 때 종업원이 “안전운전하세요”라고 당부하고, 손님도 요청 사항에 ‘천천히, 조심히 와주세요’를 입력한다. 라이더들도 교통 법규를 준수해 배달 문화를 바꾸는 자정 노력을 하는 중이다. 그러니 ‘딸배’라고 너무 욕하지 말자. 비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쳐도 당신의 소중한 치킨과 피자를 싣고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2022-05-31

그렇게 어른이 된다

나에게는 중학교 때부터 항상 붙어 다닌 세 명의 친구가 있다. 좋은 일도 슬픈 일도, 바보같은 짓도 함께 하며 울고 웃었던 친구들. 서로의 경조사를 항상 함께하며 힘들 땐 위로가, 기쁠 땐 함께 웃어준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웃기다고, 우리도 서로 얼굴만 봐도 자꾸 웃게 된다. 다들 밖에서는 존중받고 또 신뢰받으며 살아가는 친구들이지만, 왜인지 모르게 우리끼리 있을 때면 한없이 바보 같고 실없어진다. 나는 친구들의 그런 모습이 서로에 대한 신뢰처럼 느껴지곤 해,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며 농담 따먹기를 하는 순간들이 더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우리는 모두 서울 은평구에 살았었다. 둘씩 둘씩 아주 어려서부터 친구였다가, 중학교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우린 마치 그보다 훨씬 전부터 넷이 하나였던 것처럼 붙어 다녔고, 서로 싸우기도 하고 한없이 의지하기도 하며 20년을 함께 지내왔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교대로 군대를 다녀오고, 이사를 가고 하면서, 이제는 모두 은평구를 떠나고 말았다. 같은 동네를 살 땐 몰랐다. 가까운 거리에 네가, 밤이면 우리가 함께 모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축복이었는지 말이다. 이렇게 다들 다른 지역에서 살아가게 되니, 그와 같은 인연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이었는지 새삼 느낀다.그렇게 우리는 30대가 되었고, 하나 둘 결혼을 하며 가정을 이뤄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철없는 아이가 아니라, 누군가의 동반자로서, 누군가의 아빠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제는 마냥 실없는 짓만 할 수는 없게 된 친구들의 모습에 때로는 서운하기도 하고 때로는 질투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그렇게 변해가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기쁘다.저번 토요일의 일이다. 우리는 넷 중 가장 일찍 결혼해 어느새 한 아이의 아빠가 된 친구의 집에 모였다. 보다 일찍 아이도 보고, 녀석의 사는 모습도 보고 싶었지만, 코로나 시국에 갓난아기를 보러 간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아 미뤄진 자리였다. 그 사이 아이는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 걷고, 뛰고, 토끼나 아빠, 속닥, 똑딱 같은 간단한 단어를 말할 정도로 커 있었다. 나는 그게 신기해 한참을 보고만 있었다. 너무나 작고, 너무나 부드럽고, 그래서 금방이라도 부서지거나 사라질 것만 같아 조금은 슬퍼지는 행복한 기분이었다.사실 나는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가 어떻게 행동해 주는 게 옳은 건지 알 수 없어 불안하고 무서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녀석의 딸을 보는 건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아마 나에게 소중한 사람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기에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신기하다는 말 말고는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느낌. 하지만 보다 신기했던 건, 그런 아이의 모습보다도 더 신기했던 건, 아이를 시종일관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하는 내 친구의 모습이었다. 어느새 녀석은 함께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밤새 함께 술을 먹고는 부스스한 얼굴로 인사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아이를 지켜주겠다고 각오한, 이 세상이 위험하고 험한 곳이지만 그곳에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각오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녀석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사실 난 좀 건방지고 오만한 구석이 있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생각이 깊고 마음이 넓다고 생각할 때가 자주 있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성숙한 아이인 것처럼 굴었고, 세상 모든 슬픔과 고통을 미리 경험한 사람인 것처럼, 혹은 전생의 슬픔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어렸고, 어리석었다. 단지 어리고 어리석어 타인은커녕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 단지 한없이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커녕, 스스로의 마음도 감당하지 못하는 어른아이.그렇게 어른이 된 친구의 집을 나오며 나도 모르게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것을, 너는 알까. 네가 이미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졌으며, 세상을 향해 인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내가 너를 얼마나 자랑스럽다 생각했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너와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진심으로 존경하는, 너와 같은 어른이. 아마 너는 아직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주길. 너에게는 너의 힘듦을 함께하고 너의 아이를 함께 지켜줄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너의 행복을 지켜줄 친구들이 너의 곁에 항상 함께 있다는 사실 말이다.

2022-05-24

복수, 그 수상함에 관한 단상

얼마 전 학생들과 함께 권여선 작가의 ‘친구’라는 작품을 읽었다. 해옥이라는 여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소설은 짧은 분량이지만 우리의 현실을 완벽하게 그려내며 문학으로 획득할 수 있는 강렬한 페이소스를 보여준다.해옥은 “하루하루에 기쁨이랄 것”이 없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에게는 아무도 모를 두 가지의 기쁨이 있는데 하나는 매일 새벽마다 감사기도를 드리는 신이며 또 다른 하나는 보물과도 같은 아들 민수다. 평소와 다름없이 지난한 일상을 살던 해옥은 담임에게서 아들인 민수가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간 해옥이 민수의 친구라고 알고 있던 아이들이 민수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폭력까지 휘두른 것이었다. 무엇보다 소설에서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부분은 해옥과 민수가 폭력을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며 더 나아가 아들인 민수는 자신을 괴롭힌 가해자들을 친구라는 미명으로 감싸는 모습까지 보인다.텍스트를 읽은 학생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내어놓았다. 우리와 맞닿은 현실을 언어적으로 구현했다는 놀라움과 인물의 심리를 날카롭게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에 감탄했으며 소설 속 인물인 해옥에 완전히 이입하다 못해 더 나아가 이토록 답답한 상황에 분개하는 학생도 있었다. ‘사이다’ 없이 ‘고구마’로만 끝났다는 것이었다. 해옥과 민수가 받은 폭력을 갚아주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도적 장치로서 문제를 해결했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이야기의 막을 내린 것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허구의 상황을 보여주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뤄볼 수도 있겠다. 해옥의 내면에서 부글거리는 분노의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면 선하게 살아가는 모자에게 닥친 위기 상황이 종국에는 복수극으로 전환되어 독자로 하여금 일종의 만족감을 선사했을지도 모른다.사실상 ‘복수’라는 키워드는 유구한 역사 동안 다양하게 소비되어 왔다. 서양 최초의 서사시라 일컬어지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역시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아가멤논을 향한 복수심으로 시작된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작품이 복수의 서사를 사용하면서 법과 규제의 테두리 안에서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의 내밀한 감정적 지점을 건드린다.그러나 이러한 복수극의 플롯이 어쩐지 수상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솟아오르는 감정에 사로잡혀 자기 인생을 내걸고 타인을 파멸시키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며 결국 자신의 존엄까지 해치는 인물에게 공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못해 당연해진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피해 보는 인생을 살 바엔 차라리 추악함을 택하겠다는 마음도 만연하다. 복수의 무서운 점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잘 살아라. 그것이 최고의 복수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자기 삶의 정확성을 가지는 일조차 누군가를 향한 분노로 추동하고 있지 않은가.그렇다고 해서 사랑과 용서를 설파하기엔 결코 아름답지 않은 세상이다. 세상에 만연한 추악함을 덮을 수 있는 것이 막연한 사랑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서도 드러나는 문제의식이다. 용서하는 행동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종교적 믿음을 붙잡았지만 전지전능하고 공평한 신은 살인자의 마음마저 어루만지며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살인자의 목을 조르는 편이 낫겠다고 소리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런 지점에서 ‘친구’의 해옥은 얼마나 답답한가. 자신의 별 볼 일 없는 삶을 신의 뜻이라고 치부하며 폭력에 노출된 아들을 보면서도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우리는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이 획득하게 되는 어떠한 지점에 관해 알아야 한다. 올바르고 완벽한 정답을 인지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일상을 지탱하는 큰 힘이다. 세계의 끔찍함을 완벽하게 응시하는 순간 분노할 수밖에 없고 그 감정에 잡아먹히는 것은 오히려 더 큰 불행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상황이 오히려 전지전능한 누군가의 뜻이라고 믿으면서 살아갈 뿐이다.이런 인물들을 그저 답답하다고 치부하기엔 마음 한편이 아려오는 것이다. 어떠한 일의 판단과 결정은 오롯이 그들의 몫이며 무엇도 정답이 될 순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 작품을 읽는다. 불합리한 상황에 분노하는 일. 타인의 감정까지 지평을 넓히는 일. 그렇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가게 두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는 인물 또한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일로 나아가기 위함인 것이다.

2022-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