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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초밥 같은 사람들

등록일 2024-05-13 19:21 게재일 2024-05-1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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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훈이형의 가게 VCOB에서 열린 필자의 단독공연.

나는 마마보이였다. 그래서 19살에 겪었던 어머니와의 이별은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에 가며 나는 이전에 만났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 중 아주 많은 수의 사람들과 유대감을 쌓아갔다. 어머니가 떠난 빈자리를 수많은 사람들로 어떻게든 채워보려 했던 것이다. 대인관계가 양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나로서는 뿌듯하고도 자랑스런 일이었다. 대학 시절 내내 이 건물에서 수업을 마치고 다른 건물로 수업을 들으러 가는 동안 수많은 친구, 선후배들과 인사를 나누며 요즘 말로 ‘핵인싸’임을 과시하는 것이 나의 커다란 기쁨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나는 그 모든 사람들을 내 품안에 두는 것이 무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곁에 두기엔 나라는 사람의 그릇이 작기만 했다. 가만히 둬도 내 곁에 있어주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애써 지켜내야 하는 관계들도 있었다. 어쩔 수없이 소홀해지는 관계들이 생겨나면 그들은 여지없이 내 곁을 떠나곤 했다. 그 사실들을 뒤늦게 알아채고 나는 아쉬워했고 때때로 괴로워했지만 인연이라 믿었던 사람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갱이들처럼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붙잡아둘 수 없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은, 그리고 그들이 나를 떠나거나 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나이를 몇 살 더 먹은 뒤의 일이었다. 멀어지는 사람들에게 애쓰는 일을 멈추니 마음이 한결 후련해졌다. 그리고 매 시절마다 내게 찾아오는 새로운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떠날 사람을 붙잡는데 쓰던 마음을 내게 다가오는 새로운 인연에게 쏟는 것이 더 낫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그들도 언젠가 내 곁을 떠나갈 수 있겠지만 그때가 되면 또다시 내 곁을 찾아올 이들이 있을 테니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또 몇 살을 더 먹으며 새로이 발견하게 된 사실이 있다. 멀어졌다 생각한 어떤 사람들은 우연한 기회에, 또는 뜬금없는 타이밍에 내 곁으로 돌아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기훈이형이 내게는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 년은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먼 과거의 일이다. 나는 대학로에서 열린 한 축제의 출연자였고, 형은 그 축제의 기획단과 출연자들에게 직접 디자인한 티셔츠를 납품하는 젊은 사업가였다. 우리는 모두 이십대였고 그 나이대의 많은 이들이 그랬듯 금세 친해져 같이 술을 먹기도 하고 그의 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자연스레 멀어져 내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서른이 넘은 어느 날, 몇 년 만에 기훈이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작가로 활동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자신은 출판사를 차렸으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만들어갈 책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별다른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또다시 서로의 기억에서 지워져갔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흘러 이번에는 내가 그를 찾았다. 야심차게 준비한 샘플 원고가 있었는데, 출판사를 물색하던 도중 문득 기훈이형이 떠오른 것이다. 어느새 그는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최근에는 빈티지샵을 열었다고 거기로 놀러오라고 했다. 나는 단숨에 원고를 들고 그의 가게로 달려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함께 책을 만들기로 했고, 그의 빈티지샵에서 교양강좌를 열기도 했고, 음악 공연을 열기도 하는 등 함께 재미있는 일들을 해 나가고 있다. 두 번이나 끊어졌던 관계가 이제는 서로와 함께 또 무슨 재미난 일을 해 볼 수 있을까 궁리하는 관계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강백수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강백수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몇 해 전 ‘회전 초밥’이라는 노래를 발표한 적이 있다. 내 곁에 머물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는 사람들이 꼭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초밥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만든 노래다. 레일 위의 모든 초밥이 욕심나지만 내 테이블 공간은 한정되어 있어서 모두를 다 내 앞으로 끌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어떤 초밥들은 어쩔 수없이 내 곁을 떠나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초밥이 내게 새로이 다가오기도 하고, 아까 떠나보낸 초밥이 돌아오기도 한다. 이 초밥들 하나하나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외로워지는 것은 무서운 일이지만 떠날 사람을 떠나게 두고 다가올 사람을 다가오게 둔다고 해서 쉽사리 외로워질 것 같지는 않다. 내 곁에는 늘 소중한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니까. 이 글을 쓰다 보니 생각나는 얼굴들이 있다. 어떤 얼굴들은 여전히 내 곁에 머물러 주어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또 어떤 얼굴은 이미 오래 전에 멀어져버려 그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들 중 누군가와 또 어떤 날 어떤 방식으로 재회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글을 통해 안부를 전한다. 나는 잘 있고, 언젠가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다고. 설령 만나지 못하더라도 내내 건강하길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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