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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초록 풀머리

강길수 수필가 졸지에 유명을 달리한 지체(肢體)들의 한이 원혼으로 변해 빙의라도 한 것일까. 짧게 남은 팔뚝들에 숨 막힐 듯 많이 솟아난 잔가지들이, 명부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혼령들의 초록 풀머리로 보이니 말이다.하늘로 굵은 팔들을 벌려 연록 생명을 뽐내던 곳이, 인간의 기계톱으로 갑자기 죽음의 아수라장으로 변하던 봄날의 일이 되살아난다. 석 달이 지났다. 팔뚝들이 댕강 잘려 나갔던 언저리에 초록 풀머리들이 빼곡하다. 죽지 않고 살아내기 위해 나무가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쳤으면, 전설의 고향 프로에 나오던 귀신보다 더 빽빽한 풀머리를 달아냈을까.웬일인지 눈길이 자꾸 초록 풀머리에 머문다. 가지치기 전문가들은 나무의 디엔에이가 작용해 그러니, 괜한 데 마음 쓰지 말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마침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의 존재다. 이를 자각한다면 온갖 생명체는 물론, 무생물 하나까지도 자연공동체의 일원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 않은가.어릴 적 산골에서 자라나며 나무와 친하게 지냈다. 나뭇가지를 자치기 막대, 낚싯대, 팽이 등 놀이도구로 쓰고, 피리로 만들어 불기도 했다. 어른들은 의식주를 위해 서까래같이 나무 밑동을 톱으로 자른다든가, 뽕나무처럼 일부 가지를 치곤 했다. 그러나 도시의 가로수나 조경수처럼, 몸체에 붙은 가지를 한두 뼘 정도만 남기고 몽땅 잘라버리는 광경은 보지 못했다.내 눈엔 나무 가지치기도 인간의 욕구 충족행위로 보인다. 사람이 심은 나무도 생장과 소멸의 아름다움을 자연에 맡겨 두면 안 될까. 살아있는 식물로 인위적인 미를 추구하는 일은 결국 인간의 자연 지배욕에 닿을 것이다. 대기와 수질오염, 기후변화, 해수면 상승, 자원고갈, 쓰레기 난제 같은 참담한 환경파괴로 나타난 인간의 자연 지배욕은, 이제 지구촌의 생존 여부와 직결되고 있다.석 달 전 출근길에 만난 무자비한 가지치기는, 또 다른 인간의 전쟁터였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만 살육일까. 인간이 무분별하게 자연을 죽이는 것도 바로 살육이다. 이제부터라도 모든 사람이 이를 깨달았으면 좋겠다. 인간도 살아있는 것을 먹어야 할 숙명의 존재인 이상,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먹을거리만 자연에서 구하거나 가꾸어 먹어야 할 것이 아닌가.무럭무럭 자라는 두 손주가 자연 품에서 웃으며 뛰노는 모습에서 두 아들 어릴 때보다 더한 행복을 맛본다. 하지만 어떤 불안과 걱정, 야릇한 슬픔과 죄책감이 가슴속을 헤집는다. 나도 생명이 살 수 없는 자연을 손주들에게 물려줄 것만 같은 기성세대이기 때문이다.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2018년 ‘지구온난화 1.5도 보고서’나 관련 전문가들이 지구 기후의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 곧, 회복 불능 상태 진입을 경고하며 온실가스 억제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할아비는, 손주들에게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먼저 간 동기들의 빙의로 태어났을 초록 풀머리들이, 세상에 울부짖고 있다.

2022-07-10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정희 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연구회에서 ‘공감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주된 목적은 공감교육을 통해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능력을 키워서 소통하고,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끔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공감에 대해서 좋은 인식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주장과 그에 따른 설명을 읽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라고 한다면 그 글에 대한 공감을 이룬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내용이나 다뤄지는 사건, 인물 등에 대해 감정이입을 하고 정서적 교감을 하여 공감 능력을 높이게 된다. 또한 글쓴이가 느낀 감정의 표현들을 읽고 자신의 경험과 연결시켜 동질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공감의 한 형태인 것이다.그런데 최근 젊은이들을 보면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로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확대, 대학입시에서의 경쟁 심화, 그리고 서로를 공감할 수 있는 시간과 경험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안과 오해, 갈등이 늘어만 가고 있는 것이다. 대학 입시가 현실적인 상황이다 보니 입시생들은 각자 고개 숙이고 문제 풀이를 하는 동안, 서로 부딪치고 소통할 기회마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반면,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은 카카오톡이나 트위터처럼 자신의 개인 정보, 영상, 그리고 의견을 인터넷 세계에 확산시키는 사회적 네트워크의 유행에 힘입어 자신의 삶을 밖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타인과의 공감 능력하고는 연결 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한 때 성장소설로 ‘아몬드’가 회자된 적이 있다. 공감능력이 결여된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태어날 때부터 아몬드라 불리는 편도체가 작아서 다른 사람의 상황과 기분을 느낄 수가 없다. 분노도 공포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주인공의 병명은 ‘알렉시미타아’라고 하여, ‘감정불능표현증’이다. 우리들이 느끼는 기본적인 감정인 기쁨, 슬픔, 두려움 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아몬드’에는 공감능력이 결여된 주인공을 비롯하여 뒤틀린 마음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 소년들이 등장한다. 욕설과 폭력이 일상이 되어버린 소년들은 범죄에 가담하게 되고 만다.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 주변에 잠재되어 있는 문제들인 것이다.나는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다행이도 주인공은 엄마의 헌신적인 사랑과 감정 없는 주인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시작한 친구들로 인해 서서히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게 된다.우리 사회는 공감의 부재로 인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 고통에 무관심해 지고 갈등이 증가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지금은 바로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 즉 공감능력을 키워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그런데 공감에는 두 얼굴을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공감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유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질이 인질범에 동화되어 그들의 편을 드는 스톡홀름증후군에 빠지기 쉽다.

2022-07-03

염치 아는 사람

강길수 수필가 바뀐 녹색 신호등에 따라 횡단보도를 중간쯤 걸어갈 때다. 느닷없이 좌회전 소형 승용차가 스르르 앞을 가로막았다, 승용차 앞바퀴가 횡단보도의 흰 선을 한 걸음쯤 차지하며 멈췄다. 속도가 느려 놀라지는 않았지만, 황당했다.‘무슨 이런 차가 다 있어?’하고 속에서 부아가 나려는 순간, “죄송합니다!”라는 음성이 반쯤 열린 운전석 창을 달려 나와 마음을 감쌌다. 목소리는 염치를 아는 운전자의 진심을 실어와 정전기처럼 찌릿하게 가슴을 찔렀다. 마음에 일던 반감이 사르르 녹았다.조건반사같이 운전자에게 접은 우산 쥔 손을 흔들며, ‘괜찮아요!’하고 속말을 얹어 보냈다. 쳐다보니 운전자는 동년배 정도로 나이 들어 보이는 분이었다. 동병상련 같은 감정도 윤슬처럼 일었다.저분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무슨 연유로 신호등 바뀌는 시간을 잘못 헤아리고 교차로에 진입했을 터. 앞 차로에는 직진 차량이 달려오고, 돌아 지나가야 할 왼쪽 횡단보도 신호등엔 초록색 불이 켜져 사람이 걷고 있으니 말이다. 진퇴양난의 급박한 상황에서도 자기 잘못을 깨닫고 즉시, 보행자에게 진정을 담은 사과를 한 침착한 분이다. 염치를 아는 멋진 분을 출근길에 보다니, 기쁜 날이다.즐겁게 사무실로 향하는데 생각의 나래가 저절로 펴졌다. 내게 같은 상황이 생겼다면 어찌하였을까. 아마도 멈추어 서서 당황하여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못 했을 터다. 정신 차린 후에는 맞은 편에서 달려오는 차도 피했고 횡단보도 보행자와도 아무 일 없었으니, 천만다행이란 생각만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거다.이어 마음의 소리가 너울져 왔다. ‘그래. 우리 서민들은 살아있는 거야. 아니, 제대로 살아내고 있는 거야! 오며 만난 운전자 같은 분, 곧 염치를 알아 잘못을 바로 사과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반면, ‘민주’라는 탈을 쓴 지도층이란 이리떼들이 염치도 모르고 설쳐 나라를 흔드는 꼴을 그간 민초들은 많이도 보아왔다. 두고 볼 수 없는 서민들이 에스엔에스 등을 통해 시대의 선지자처럼 울부짖었다. 하지만 정치인도, 지식인도, 주류언론도, 관료도 침묵만 해온 우리 사회다.거짓이 진실로 둔갑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트릴 부정선거 의혹이 선거 결과 통계치와 물증으로 드러나도 정치권과 언론계, 학계는 애써 외면만 한다, 사회정의가 사라져가고, 나라의 빚이 산더미로 늘어나도, 국민은 참된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 수년간 답답한 세월만 보냈다. 민초들의 눈에 비친 정치판과 관료집단은 말로만 ‘국민’을 팔뿐, 자기나 제 편의 이익과 유, 불리만 따지는 소인배들로 득실거렸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인 정치인과 관료는 없는 것인가.천우신조로, 지난달 정권이 바뀌었다. 새 정권은 오로지 나라와 국민만을 위해, 무너져가는 사회정의부터 바로 세우는 데 매진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사회 저변의 정직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의심받는 선거 정의부터 바로 세우는 일이 최우선과제라고 믿는다. 염치 있는 사회를 향한, ‘새 도덕재무장 운동’이라도 벌이면 어떨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가 그립다.

2022-06-26

0.2와 2.0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얼마 전의 일이다. 모 프로젝트 연구제안서 공모의 심사 위원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많은 글 중 유난히 눈에 띄는 글 하나가 있었다. 단박에 공모자가 꽤 오랫동안 고심해서 쓴 것임을 알 수 있었고, 아이디어도 남들이 생각지 못한 매우 참신한 것인데다 아이디어의 실효성을 증명하기 위해 제시한 자료들도 정확해 읽는 내내 감탄을 마지않던 글이었다. 참으로 오랜 가뭄에 내린 단비처럼 반가운 글이어서 나는 당연히 그게 선정 리스트에 오를 줄 알았다. 그런데 결국은 떨어졌다. 까닭은, 유명한 심사위원장이 그 글은 제쳐놓고 다른 글들을 중심으로 먼저 이야기를 풀어갔기 때문인데, 그 글을 제쳐놓은 이유는 또, 글이 너무 독창적인데다 별 이름 없는 지방의 소위 삼류 대학 출신의 것이라 제시한 이론의 실효성도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세상에는 새로운 생각과 시도를 하면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이들이 있다.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남이 생각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서 역사에 한 획을 긋곤 하는 이들의 삶이, 늘 꽃길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제왕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것이 ‘인(仁)’이라 했던 공자의 사상도 당시에는 ‘현실감 떨어지는 이론’이라 배척받았고, 당시 대세이던 천동설에 반해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적 발견을 여러 각도로 지지한 갈릴레이도, 종교재판에 회부되며 혹독한 수난을 겪었으며, ‘갈루아의 이론’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수학자 갈루아의 방정식론도, 당시 프랑스 학사원에서 등한시되었고 사후에야 그 이론의 위대함이 세상에 알려졌다.눈이 두 개라고 사물을 더 잘 보는 것이 결코 아니다. 0.2의 시력을 지닌 두 개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과 2.0의 시력을 지닌 한 개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 어느 것이 더 선명히 잘 보일까. 장자의 ‘소요유’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북쪽 바다에 큰 물고기 한 마리가 변해서 된 새, 대붕(大鵬)이 큰 날개짓을 하고자 때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 메추라기가 숲 풀 사이에서 날개를 퍼덕거리는 게 날 수 있는 가장 높은 것인데 대붕이 어딜 가려는가 하고 비웃는 얘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장자는 “작은 뜻은 큰 뜻에 미칠 수 없고, 이끼와 버섯은 달이 차고 이지러짐을 모르고, 매미는 봄, 가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그렇다. 덧셈·뺄셈만 아는 이는 곱셈·나누기를 하는 사람을 이해못하고 이상하게까지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세상은 덧셈·뺄셈만 아는, 매미같이 여름 한 철만 아는, 두 개의 눈이나 0.2의 흐릿한 시력을 지닌 그런 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곱셈·나누기를 아는, 사시사철을 아는, 애꾸눈일지언정 2.0의 시력을 지닌, 그러한 이들에 의해 달라지는 법이다. 좋은 글을 쓰고도 여러 선입견으로 그 독창성을 인정받지 못한 공모자의 글도 언젠가는 빛을 발하리라.바야흐로 6월 하순, 한창 뜨거웠던 3월 대선과 6월 지방선거도 모두 끝나고 이제 새로운 시대의 변혁을 꿈꾸는 바람들이 많은 요즘이다. 모쪼록 0.2의 흐릿한 시력이 아닌, 2.0의 선명한 시력으로, 다들 지난 정부의 공과를 잘 살펴 한층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중앙·지방 정부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22-06-19

보석들의 희망

강길수 수필가 손을 흔들며 경보선수같이 빠르게 지난다. 스르르 멈춘 택시 앞이다. 평소 내 습관을 여지없이 깨부순 택시 기사다.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몸에서 세로토닌(serotonin)이라도 일시에 분비되나 보다. 운전자라면 누구나 상식이나 법상으로 멈춰 서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마음이 기쁘다. 살면서 저절로 관습법처럼 자리 잡은 게 있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의 ‘운전자 통행 우선’이란 잘못된 행동양식이다. 그 관습법이 별안간 타파된 즐거움이리라.오늘 퇴근길이었다. 첫 번째 신호등 없는 건널목에 도착해 좌우를 살폈다. 왼쪽 2개 차로는 멀리까지 차가 없고, 오른쪽 차로에는 저만치 2대의 차가 간격을 두고 오고 있었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건널 수 있겠다 싶어 왼쪽 차로의 절반쯤 가다가 섰다. 차량을 보내고 가는 게 안전하겠다 싶어 엉거주춤 서서 기다렸다. 그런데 앞에 오던 택시가 스르르 멈춰 서는 게 아닌가. 물론, 뒤차도 따라 섰다.그 옛날 이립(而立) 초반의 어느 날, 일본의 한 시골에서 만났던 광경과 느낌이 확 되살아났다. 세미나를 마친 가뿐한 주말 아침나절, 기차를 타고 온천 관광지 벳푸로 향했다. 지방도 근처를 지나는데, 저만치 횡단보도 곁에서 일고여덟 살로 보이는 아이들 몇이 서 있다. 멀리서 커다란 트럭이 그곳을 향해 온다. 트럭은 아이들이 몇 번 건너도 될 법한 먼 거리다. 이야기에 빠졌는지 아이들은 건너지 않았다. 육중한 트럭이 횡단보도 앞에 천천히 멈추어 섰다. 그제야 아이들은 즐겁게 그곳을 건너가는 게 아닌가.감탄과 부러움이 가슴에서 솟아났다. 선진국의 본모습이란 생각도 났다. 며칠간 만난 꽁초 하나 없는 거리가 더 이해되었다. ‘우리는 언제 저렇게 할까’하는 마음도 들었다. 선진사회는, 돈으로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했다. 일본도 예전에는 교통 등 기초질서가 엉망이었는데, 1964 도쿄 올림픽을 치르며 바로잡았단다. 세미나 간 때가 일본이 올림픽 후 20년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는데, 88올림픽이 30년도 더 지난 지금의 우리와 대비된다. 일본은 올림픽을 더 잘 활용했다 싶다.조건반사처럼 저절로 택시 기사에게 손 인사를 하며 지날 때의 심사…. 온 세상이 밝게 다가오는 순간이라 할까. 코로나 팬데믹으로 드리워졌던 어두운 장막도 걷히는 것만 같다. 살맛도 난다. 어떤 기업직원들이 한때, ‘기본의 실천’이란 문구를 작업복에 새기고 일했다. 사실 택시 기사는 교통법규의 기본을 지킨 것이다. 그런데 기쁜 걸 보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기본이 덜된 것은 아닐까.다시 출발하는 택시를 뒤로하고 골목으로 들어선다. 문득, “오늘 보석을 만났어!”하고 마음의 추임새가 사방으로 퍼져가는 듯하다. 당연히 해야 하는 행위가 보석으로 보이는 것은, 내 마음 눈이 잘못된 탓일까. 아니면 일그러진 초상(肖像)의 우리 사회이기 때문일까. 신호등 있는 간선도로 횡단보도다. 한 우회전 차량이 보행자인 내가 다 지나가고, 보행신호등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 간다. 역시 기분이 좋다.기본과 상식이 바로 선 보석들을 만난 기쁨이 희망으로 바뀐다.

2022-06-07

씀바귀, 도심에 살다

강길수 수필가 보도 가에 흐드러진 붉은 장미꽃이 사람 마음을 흔든다. 뉘라서 저 장미꽃들의 향연에 취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내 시선은, 낮은 곳 구석진 곳에서 또 다른 오월을 밝히고 있는 쪼그만 노랑 꽃에 더 머문다.내일이면 생명 찬란한 5월도 하순으로 접어든다. 한낮의 햇빛이 따갑다. 보도 곁 잔디잎들은 절반쯤 누렇다. 가뭄 타나 보다. 그런데 잔디 사이에서, 이 목마름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 노란 꽃들이 활짝 웃고 있다. 바로 씀바귀꽃이다. 잔디밭에 더부살이하면서도, 씀바귀는 움츠러들거나 가물 타지도 않고 해맑은 얼굴로 모두를 반긴다. 잔디도 씀바귀를 한 식구로 받아들여 사는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도 다정하게 보일 수 있겠는가.그뿐 아니다. 도심의 씀바귀는 정원에서, 보도와 담벼락 사이에서, 보도블록 사이 틈에서, 심지어 슬래브 집 옥상 구석 등 척박한 곳에서도 잘 살아내며 꽃피우고 있다. 겉보기에는 잎과 줄기와 꽃도 부드럽고 연약하기만 하다. 하지만, 강인하다. 저 강인한 생명력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씀바귀의 잎과 줄기 뿌리까지 모두 다 식용으로 또는, 약재로 쓰는가 보다.씀바귀는 흰 꽃이 피는 종 등 비슷한 몇 가지가 있으나, 모두 같은 용도로 쓰인다. 사람이 먹으면 혈관 건강, 항암효과, 간 기능개선, 면역력 강화, 노화 지연 작용을 한단다. 또 골다공증 예방, 빈혈 방지, 위장 건강, 당뇨 예방, 신경안정 같은 역할도 한다고 한다. 만병통치약 같다. 알고 보니, 씀바귀는 사람에게 무척 이로운 보물이었다.어느 날, 꽃 지고 여문 씀바귀 씨앗은 갓털 비행기에 타고 바람 따라 도심까지 날아왔으리라. 바람과 땅, 건물과 가로수, 풀, 도로 등 도시의 온갖 것과 합심하여 흙이나 먼지가 있는 틈과 공간에 착륙했을 터이다. 절망스러운 도심의 척박한 환경을 꿋꿋이 이기며 싹터 자라나, 앙증스러운 노란 꽃을 많이도 피워낸 씀바귀….씀바귀는 어찌하여 도시로 분가했을까. 푸른 산과 들, 냇가, 강가 다 두고 깡마른 도시의 구석구석으로 와 정착한 이유는 뭘까. 단순히 바람 타고 날아와 물리력으로 내려앉은 게 전부일까. 그렇지 않으리라. 자연현상 하나도 그 원인과 과정, 결과로 이어지는 이야기와 메시지를 지니게 마련이니 말이다. 하면, 도심 곳곳 하찮게 보이는 장소에 퍼져 나지막하게 자라는 씀바귀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2022 지방선거 공식 운동 기간이다. 선거를 앞둔 기간에, 웬일로 눈길이 자꾸 노란 씀바귀꽃에 가는 걸까. 도시의 낮은 곳, 구석진 곳 혹은, 다른 풀, 나무들과 어우러져야만 살 수 있는 곳에 태어나 자라나서 촛불처럼 어둠을 비추는 얼굴들. 연약해 보이는 몸으로 척박한 환경 이겨내고 꽃피워 5월을 밝히는 씀바귀. 태생이 사람이나 초식동물을 위해 온몸을 바쳐 희생하여 자기를 먹는 자를 살리는 존재….문득, 노란 씀바귀꽃 얼굴이 바람에 나부끼며 수줍은 아이처럼 무슨 말을 하는 것만 같다.“그래요. 풀뿌리 민주주의의 일꾼들은 우리 씀바귀 같아야만 해요”라고….

2022-05-22

그 후, 한 달

강길수 수필가 합창 소리 가득하다. 경내로 내려꽂히는 따가운 5월 초순 한낮 햇살도 가세하여 함께 노래하고 박수갈채를 보낸다.4월 초순 어느 아침, 이곳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소리가 뒤범벅된 아수라장이었다. 오랜 세월 자란 굵은 팔뚝들이, 아닌 밤중 홍두께로 툭툭 잘려 나가 너부러지며 아우성치는 현장이었다. 팔뚝 잘리는 큰 나무의 통곡도, 막무가내로 자르는 날카로운 기계음도 못 듣는 로봇 일꾼으로 변한 사람들…. 그 폭력의 잔상이 가슴에 남았다.한 달이 지났다. 기계톱에 맥없이 잘려 떨어지는 팔뚝의 유탄에 맞아 일부 가지가 유명을 달리했던 장미는, 잃은 동기들을 기리려는 듯 더 커다란 붉은 꽃들을 피워냈다. 핑크빛 수줍은 볼로 웃으며 봄 마중하던 진달래도 악몽 같던 날 한쪽 꽃과 가지를 잃었는데, 그새 상처를 보듬고 초록 옷으로 갈아입었다. 단풍나무 등 작은 정원수들도 가지치기 아픔을 겪어내고 생기발랄한 잎들로 단장했다.저절로 눈이 위로 향한다. 한 달 전, 온 팔뚝이 절반쯤 뚝 잘린 채 하늘에 의지하여 서 있던 활엽수들…. 하지만 지금은, 남은 팔뚝들에 생명의 합창 소리가 가득하다. 굵은 가지들을 에워싼 새싹들이 시루에서 촘촘히 솟아오르는 콩나물 같다. 빼곡한 새싹들이 자라며 환호한다. 춤춘다. 긴 박수 보내며 큰 노래 부른다.나무는 미래를 내다보며 사는 걸까. 제법 묵은 가지에 언제 저 많은 새싹을 틔울 눈을 마련하였을까. 산골에 나서 많은 나무를 벗하며 자랐다. 어린 시절, 꺾어 놀이도구로도 삼으며 함께한 나무들은 그렇게 많은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시는 과수원의 사과나무나 자두나무도 그랬다. 하면, 나무들은 비상시를 대비한 예비 눈을 몸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말인가.내가 저 나무들의 처지였다면, 새싹을 내보낼 눈이 없어서 지금 속수무책으로 몸이 말라가고 있을 것이다. 한 달 만에 어찌 저리 많은 새 눈을 만들어 싹을 피울 수 있으랴. 새싹들은 대부분 한 뼘은 자랐고, 어떤 것은 두 뼘 이상 커 잔가지가 되었다. 새 가지 중에 어떤 것은 큰 가지, 또 어떤 것은 잔가지가 될 것이다. 팔뚝 잃은 고통과 상처를 계속 치유하며 더 많은 가지를 가진 나무, 더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리라.누가 나무를 함부로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나무의 주인행세를 할 수 있겠는가. 또 누가, 나무를 하찮다 떠들 수 있을 것인가. 졸지에 팔뚝들을 잃은 많은 나무 중 한 그루도 죽은 나무는 없다. 원망의 소리도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무는 스스로 치유하고, 스스로 싹틔우고, 스스로 살고 있다. 만일 사람을 저 나무들처럼 취급한다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터다.묵묵히, 그저 묵묵히 모든 것을 순종하며 사는 생명체가 나무다. 비가 오거나 오지 않아도, 햇볕이 엷거나 따가워도, 미풍이나 태풍이 불어도, 큰 더위나 살을 에는 추위가 닥쳐도 나무는 제 자리에서 굳건히 견뎌낸다. 나아가, 사람이 제 몸을 송두리째 베어 목재나 다른 쓰임에 써도 묵묵히 자신을 바친다. 나무는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존재다.나도, 나무처럼 살아내고 싶다.

2022-05-15

코로나19 펜스

강길수 수필가 학교 녹지화단에서 영산홍꽃이 활짝 웃으며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하지만, 갈 수 없다. 전 같으면 여러 사람이 정자나 곁 의자에 앉아 웃음꽃을 피우고, 더러는 운동장을 걷고 있을 시간이다.무엇이 마음에 걸리고 억누르는 것만 같다. 찝찝한 생각도 가슴을 붙잡는다.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 전염 후 새로 세운 펜스 때문이다. 펜스는 녹지의 화단이나 정자, 의자 같은 시설물들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 부지경계선 위에 무작정 놓아졌다. 그 바람에 녹지의 꽃과 나무, 편의 시설들이 그만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십여 년 전쯤, 전국적인 ‘담장 허물기’ 붐이 일었다. 초등학교는 물론 관공서, 종교시설까지 담장 허물기 사업이 벌어졌다. 국민 쉼터가 부족한 우리나라 도심의 현실에서 담장 허물기 사업은 가뭄의 단비였다. 덕분에 주민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쉬거나, 걷기운동까지 하게 되었으니 정말 따봉이었다. 피부에 와 닿는 위민(爲民)행정의 한 표본이었다.출퇴근 시마다 한 초등학교 곁을 걸어 지나다닌다. 보도 옆 학교 구내엔 아름다운 녹지 정원이 담장 허물기 사업으로 마련되었다. 정자, 야외의자 등 편의 시설도 함께 있어 도심의 훌륭한 녹지 쉼터다. 많은 시민이 쉬거나 여가를 즐기는 곳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철길 숲이 생기기 전엔 나도 자주 걷거나 쉬었다. 코로나19가 퍼진 어느 날, 어른 허리춤 높이의 ‘코로나19 펜스’가 녹지 정원을 막아섰다.우리말 ‘울타리’는 풀이나 나무 따위를 얽거나 엮어서 만든 일종의 표지(標識)다. 경계를 알려주어 사람이 스스로 넘지 말라는 안내판 같은 것이리라. 하지만, 코로나19 전염을 막으러 설치한 이 금속펜스는 울타리로 보이지 않는다. 하얗게 칠하고 알록달록한 동그라미, 타원, 세모, 마름모 모양의 무늬들로 꾸몄다. 그러나 사람 출입을 강제로 막으려는 시설물이니, ‘울타리’가 될 수는 없을 터다.금속펜스의 높이나 견고성으로 볼 때, 영, 유아나 노약자 말고는 맘먹으면 누구나 넘을 수 있다. 때문에, 범죄 의도를 품고 넘는 자는 막을 수 없다. 때문에, 시민 쉼터만 빼앗은 결과가 되고 말았다. ‘코로나19 펜스’를 세운 이곳 초등학교들의 녹지 차단 모습은 거의 같다. 비용은 따지지 않더라도, 뻔히 보이는 것을 애써 감추려는 나라 살림의 단면을 펜스를 통해 보는 것 같아 답답하고 씁쓸하다.대통령이 ‘촛불혁명’이라 자칭하며 출범한 문재인 정권의 지난 5년이, 학교의 ‘코로나19 펜스’ 같아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아름다운 녹지가 눈에 뻔히 보이는데, 불필요한 펜스가 가로막아 갈 수 없는 답답함…. ‘소득 주도 성장론’의 실패처럼 나라의 경제, 안보, 외교, 복지, 의료, 국방 등 주요 정책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펜스처럼 만들어져, 주권자 국민과 소통하지 못했다. ‘내로남불’의 먹먹한 세월만 보냈다.이번 3·9 대선은 중앙 선관위의 통계수치가 증명하는 ‘부정선거’ 정황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도우심으로 정권이 바뀌게 됐다. 새 정부는 나라의 요소요소에 필요 없이 막아 세운 ‘코로나19 펜스들’을 하루빨리 제거해 나가면 좋겠다.

2022-05-08

벚꽃 단상

이정희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올 4월 초 몇 년 만에 벚꽃구경을 갔었다. 낮에 걷기 운동 삼아 산책한 벚꽃나무 가로수 길은 벚꽃을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밤 벚꽃놀이가 최고다. 새삼 벚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약 한 달 동안 벚꽃 세계에 빠져 지냈다. 수령이 족히 100년은 넘을 것 같은 아름드리 큰 나무에 만개한 벚꽃을 보면서 이렇게 큰 나무에 이렇게 많은 꽃을 화사하게 피우는 나무가 또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벚나무밖에 없는 것 같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꽃을 피우는 개나리, 진달래도 늘 키가 고만고만하고 더이상 거목이 되지 않는다. 벚꽃보다 한 달 가량 앞서 피는 매화나무 역시 수령이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벚나무처럼 큰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벚나무는 크면 클수록 더 많은 꽃을 피운다. 신비로운 꽃나무다.이러한 벚꽃의 아름다움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의 국화(國花)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벚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국화라는 것은 국기나 국가(國歌)와는 달리 법률 등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정되는 경우가 드물고,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 관습적으로 정해진다. 엄밀히 말해 일본 국화는 정해진 것이 없다. 그저 일본을 상징하는 꽃이 벚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때는 벚꽃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이 발동해 2003년에 한 시민단체가 강원도 횡성군의 3·1공원에 있는 벚나무를 잘라내야 한다는 운동을 벌였었다. 나도 아파트 주변, 학교 교정 내에 있는 벚꽃을 보면서 일본 나라꽃인데 하면서 불편한 마음이 불쑥불쑥 들곤 했다. 그래도 위안으로 삼는 것이 있다면 일본의 벚꽃의 원산지가 제주도라는 이야기다.일본에서 벚꽃의 이미지는 단순히 나라를 상징하는 꽃이란 의미보다 더 큰 것을 내포하고 있다. 바로 무사도를 벚꽃의 이미지에 결부시켜 일본 정신의 상징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 나라시대에는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고 즐기는 꽃은 매화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헤이안시대부터 벚꽃은 서민들에게 사랑받는 꽃으로 자리매김하고 여성의 화신으로 비유되었다. 특히 근세시대의 8대 도쿠가와 요시무네 장군에 의해 지금의 도쿄에 가로수로 벚나무가 대대적으로 심어졌고, 점차 일본 전역에 벚나무 심기가 장려되었고, 이후 서민들의 꽃놀이로 정착하였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벚꽃은 이미지로서는 여성의 꽃이었다. 그래서 근세시대에 성곽에 벚나무를 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례로 지금은 일본에서 벚꽃놀이 명소로 알려진 아오모리현의 히로사키성에 1882년 벚나무를 심었을 때 성곽을 여성의 이미지가 강한 꽃으로, 게다가 놀이장소로 만드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해서 벚꽃을 뽑아버렸다고 한다.근대 이후에 만개한 벚꽃이 지기 직전에 가장 화사한 모습을 보이고 미련 없이 깨끗이 진다는 데에서 무사도와 일치한다는 이미지를 결부시켜 일본의 국화로 만들어낸 것이다.봄이 되면 벚꽃구경에 심취한 우리의 마음속에는 일본이란 이미지는 더이상 없게 되었다. 이제 벚꽃은 반일감정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2022-05-01

무슨 바람

강길수 수필가 경내가 잔인하다. 울부짖음이 가득하다. 어제 퇴근 때는 연록 새 식구 맞는 노랫소리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한데, 오늘 아침엔 아파 우는 소리, 앓는 소리, 겁에 질린 소리가 마음 귀를 따갑게 파고든다. 게다가 커다란 기계음이 몸의 귀청을 마구 때린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소리가 뒤범벅되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일꾼들은 사다리차 작업대에 타고 기계톱 소리 한껏 올려, 몸통에 뻗어 오른 굵은 팔뚝들을 툭툭 잘라낸다. 통곡도 기계음도 못 듣는 로봇 일꾼 같다. 며칠 안에 연록 새 잎새들이 손가락마다 돋아나 생명을 찬양할 텐데, 그 꿈들도 댕강 끊어지고 있다. 잘린 팔뚝들은 바닥에 이리저리 떨어져 너부러진다. 그 서슬에 애꿎은 진달래꽃 가지와 장미 새순도 덩달아 유명을 달리한다.대여섯 해를 이 담장 곁을 걸어 출퇴근하는데, 오늘 같은 광경은 처음이다. 해마다 거리에서 막무가내식 가로수 가지치기를 많이 보아 온 터다. 커다란 가로수들이 사람의 손에 갑자기 흉물스레 변모할 때는, 사람은 다른 생명에게 너무 잔인하다는 마음이 파도쳤었다. 반면, 이곳은 그런 무참한 모습이 없어 즐거웠다. 맘껏 사는 나무들과 자연스레 벗하며 오갔다.올핸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4월에 접어들자마자 사람 손이 울창하던 경내를 휑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뚝 잘린 팔뚝만 몸통에 붙인 채, 어쩔 줄 모르며 서 있는 저 나무들은 졸지에 얼마나 아프고 괴로울까. 교통방해, 통신시설 피해 등 불가피한 전지도 있다. 그 이외의 나무는 가로수나 정원수라도 자연의 섭리에 맡기는 문화는 만들 수 없을까.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어야 하는가. 그 일부여야 하는가.오늘날 우리 지구 행성을 ‘지구촌’으로 만들어버린 서양문명은, 급변하는 생태계와 기후변화에 어떤 진단과 처방과 치료를 하고 있을까. 서양문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바탕은 아무래도 유태교와 그리스도교일 것이다. 모세의 토라에서 신은 만물을 창조한 후, 사람을 만들고 그에게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또한,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하고 명하였다. 예수그리스도는 회개의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를 치유했을 뿐 아니라, 죽었다가 부활하였다.땅과 생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한 유다이즘과, 사람을 치유하고 부활한 예수그리스도의 모범은, 서양문명의 기조로 전승되면서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라고 곡해하지 않았을까. 그 곡해가 자연을 크게 훼손해 왔다 싶다. 자연과 하나로 살아온 여러 문화의 멋진 삶은, 안타깝게도 기계 물질문명의 물결에 밀려나고 말았다. 웰빙, 로하스, 슬로시티 같은 운동이 서구 중심으로 일고 있으나 역부족으로 보인다.이곳 나무 가지치기는 사나흘에 걸쳐 끝났다. 자연 숲을 옮긴 듯 아름답던 경관은 사라지고, 텅 빈 허전함만 남았다. 전장(戰場)의 잔해처럼 남은 저 굵은 둥치들은, 언제 싹틔워 가지가 자라나고 초록 옷을 입을 것인가. 팔을 잃은 나무들은 끙끙 앓을망정 불평하지 않는다. 그러나, 외치고 있다.‘우린 절망을 모른답니다. 곧 새 팔에 연록 옷을 다시 입을 테니까요!’라고….

2022-04-24

일본은 우리의 적인가

이정희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일본은 우리의 적인가’, 이 도발적인 제목에 끌려 책을 사고 말았다. 물론 필자는 일본을 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는 과연 일본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글을 썼을까가 궁금해서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한일 간의 갈등의 핵심에 대해서 저자는 일본의 무가(武家)사회의 칼의 윤리와 한국의 유교사회의 붓의 윤리를 비교하였다. 일본의 무가사회와 한국의 유교사회에 착목해서 차이점을 논한 연구자는 저자 이덕훈씨가 처음은 아니다. 지난 2월에 세상을 달리한 이어령씨 역시 한일문화의 이질성에 대해서 무가사회와 선비사회의 차이를 지적한 바 있다. 필자 역시 일본, 일본인, 일본문화를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일본의 무가사회의 특징, 사무라이 정신 등이라고 생각한다.일본에는 사람은 사무라이, 꽃은 벚꽃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무라이가 되어야 하고, 꽃 중에서는 벚꽃이 으뜸이라는 이야기다. 사무라이와 벚꽃이 지니는 상징성만 연구해도 일본인들의 사고형태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그럼, 사무라이의 칼의 윤리를 살펴보기로 한다. 칼의 윤리에서 최고의 악은 지는 것이다. 이기고 지는 승패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기면 힘이 있고, 떳떳한 것이고, 지면 약하고 창피한 것이다. 사무라이들은 싸움에서 지면 반성하고 참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불명예를 극복하고자 할복자살을 한다. 할복자살을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운다. 아니 죽기 위해서 싸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죽음은 때로는 모든 것을 용서받는 경우도 있다. 또한, 무가사회에서 특이한 점은 배신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실리를 위해서는 배신이 통용되는 것이다.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유교사회의 붓의 윤리에서는 승패도 중요하나 선악을 중심 가치관으로 본다. 즉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따진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겼을 경우 우리는 그 승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배신은 더더욱 허용하지 않는 사회다. 우리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이와 같이 칼의 윤리와 붓의 윤리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상태라면 합일점을 찾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나 선악의 기준은 인류 보편적인 가치 기준이다. 이 보편적인 진리를 일본인들이 깨우친다면 새로운 변화가 일 것이다.유학시절, 같은 외국인 유학생 중에 타이에서 온 친구와 필리핀에서 온 친구들과 한일관계에 대해서 논한 적이 있다. 이때 그 친구들이 “한국과 일본은 형제들끼 리 싸우는 것 같다”고 말을 해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들 눈에는 생김새도 비슷하고 문화도 비슷하다고 본 모양이다. 정말 형제가 지독하게 싸우면 어떻게 될까. 좀처럼 화해하지 못하고, 의절을 하고 평생 안 보고 지내기도 할 것이다. 조금도 화해할 분위기가 아닐 경우 제3자가 개입을 해서 좋아질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우리는 선악의 논리에서 대의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려고 하고, 전략적으로 제3자를 이롭게 활용하면 일본이 수그러들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2022-04-03

표본 경고등

강길수 수필가 표본(標本)이 반란을 일으켰다. 모집단(母集團)을 두 표본으로 나눠 이달 치른 3·9 제20대 대선 개표 결과 이야기다. 표본에서 통계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결과가 나왔으니 말이다.개표 날, 나도 밤을 꼬박 지새웠다. 초저녁 사전투표 함을 먼저 개표하여 여당 후보가 앞서갔다. 여론조사 결과와 다르게 나오는 점이 이상했다. 선거 공정성 회복을 위해 부정선거 척결을 주장하는 이들의 논거가 생각나 ‘그럼, 그렇지’하는 마음도 들었다. 당일 투표함이 열린 후부터 제1야당 후보가 표 차를 따라잡아 역전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였다. 안도의 한숨도 나왔다.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젊은 날, 경영학을 배우며 공부했던 통계학책이 아른거리기도 했다. 모집단은 이번 대선의 투표자 총수를 뜻하고, 두 표본이란 사전투표자 수와 당일 투표자 수를 말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대선의 최종투표자 수는 340만6만7천853명, 투표율은 77.1%, 사전투표율은 36.9%다. 이것은 총투표자 중 사전투표자 비율이 47.9%다. 거의 절반의 유권자가 사전투표를 했다는 뜻이다. 두 표본의 크기는 모두 1천600만명 이상이다. 내 통계학적 상식으로는, 모집단에 대한 표본의 크기가 이 정도면 통계적 분석도 필요 없이 그 데이터가 서로 차이 나면 안 된다.사전투표와 당일 투표의 최종득표율은 여당 후보가 사전 52.57%/당일 39.08%이고, 제1야당 후보는 사전 43.82%/당일 56.24%다. 두 후보의 사전투표득표율에서 당일 투표득표율을 뺀 값은 여당 후보 +13.49%, 제1야당 후보 ·12.42%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번 대선의 모집단과 두 표본의 데이터 차이는 없어야 한다. 통계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이 개표 결과는, 어떤 의도적 작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사전투표 개표 초기(3.65% 개표 시)의 여당 후보와 제1야당 후보의 득표율은 각각 51.66%와 45.25%로 6.41%를 여당 후보가 앞서갔다. 개표율 50.89% 때의 양 후보의 득표율은 동률 곧, 48.29%를 보였다. 그 후 제1야당 후보 득표가 역전하여 꾸준히 그 차이를 이어갔다. 결국 새벽에 최종득표율 여당 후보 47.83%, 제1야당 후보 48.56%로 0.73%의 적은 차로 제1야당 후보가 승리하였다. 시계열에 따른 득표율 변화는 사전 투표함을 먼저 개표해 일어난 통계적 현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우리 사회 일군의 사람들은 재작년 총선 이후, 나라에 선거 정의를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번 대선 사전투표에서는 총 9%가 넘는 득표 조작이 있었다는 통계적 주장도 있다. 선거표본에 경고등이 켜진 셈이다. 만일, 어떤 세력의 선거 조작으로 그 결과가 뒤바뀐다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국헌문란이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요, 생명이다. 부정선거는 민주주의를 죽이는 행위다. 부정선거 주장을 단순히 선거 음모론으로 치부만 할 일은 아니다. 그 근거를 파헤쳐 사실로 확인되면 결단코 고쳐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나라의 자유민주주의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2022-03-20

스마트 시대의 방역 패스

곽지영포스텍 산학협력교수 요즘 식당, 카페, 극장 등 다중이용시설 어디나 입구 풍경은 비슷하다. 길게 줄을 서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폰을 꺼내 들고 흔들고 있는 사람들. 간간이 담당 직원과 같이 폰을 가리키며 옥신각신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모습도 보인다. 다중이용시설의 방역 패스가 의무화되면서 생긴 ‘위드 코로나’ 시대 새로운 풍속도다. 방역기준이 강화되면서부터는 입장하는 손님들의 백신 접종 날짜를 일일이 확인하는 전담 아르바이트생이 등장하기도 했다. 패스 기능을 하는 앱을 각종 포털, 통신사, 질병관리청에서 모두 제공하는데, 간혹 먹통이 되거나 사용자 인증을 새로 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 갑작스런 상황에 진땀을 빼기도 하고, 가게마다 인정되는 기준과 방식이 다를 때도 있어서, 식사하러 간 손님들의 기분이 입구에서부터 상하기도 한다. 직원들도 곤욕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손님이 밀려드는 시간, 주문받고 음료를 준비하기도 바쁠텐데, 일일이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확인해야 하니 말이다. 초기에는 입구에 비치된 노트에 공개적으로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쓰고 들어가야 했던 것에 비하면 그나마 나아진 것인가 싶기도 하다.우리나라 18세 이상 성인의 스마트폰 사용률이 98%에 이른다고는 하지만, 스마트시티를 연구하는 공학자의 입장에서조차, 나이 불문하고 스마트폰 없이는 장을 보고 밥을 먹는 일에도 제약을 받는 세상이 너무 일찍 와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께서 입구에서 쩔쩔매시는 모습을 보면, 나라도 다가가서 좀 도와드려야 하나 고민스러울 때도 있으니까. 그러다보니 식당이나 마트 입구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에 골몰하게 된다. 과연 지금의 방법이 최선인지, 이렇게 하면 실제로 감염병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있을지. 혹시 좀 더 스마트한 방법, 원래의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이용자의 불편과 부정적 감성을 줄일 방법은 없을지….예상컨대, 입장하는 사람들에게 QR코드를 직접 찍게 하는 지금의 방역 패스는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듯하다. 방역 패스를 실시하는 목적을 다시 생각해 보면, 첫째, 다중이용시설의 시간대별 방문 기록을 남기는 일, 둘째, 입장객의 백신 접종 이력과 유효기간 만료 여부를 확인하는 일, 셋째, 확진자가 발생했을 경우, 방문 이력을 분석하여 정확한 시간, 장소 등을 특정한 후 밀접 접촉자를 파악하는 일 등의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이 세가지가 모두 간단한 센서와 IT기술만으로도 자동화가 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이다.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방역 패스 도입에 따른 사람들의 불만과 사회적 논란이 심상치 않다고 한다. 방역 패스는 우리 모두를 감염병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도입한, 공익 차원에서 불가피한 안전망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 생기는 불편을 이용자들에게 떠넘기고, 사생활 노출이나 기본권 침해 우려까지 외면해버린다면, 안전망은 제 기능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공익을 위한 최후의 보루인 방역 패스가 오명을 벗고 사회적 합의를 얻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22-02-20

나는 실존주의자다

이정희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나는 종종 주위 사람들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실존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반응은 “어머, 그래요”, 또는 “그런데, 실존주의가 뭐에요”라고 묻는다.지금 이 시대야말로 실존주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양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3인방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궁극적인 질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였다. 이 질문이야말로 철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에 끌리는 사람은 분명 실존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물론 실존주의자는 실존주의 철학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지 않고서는 실존주의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존주의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해서 실존주의자인 것도 아니다.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 사르트르는 우리들이 언제 무엇을 하든지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가 최고의 실존주의자로 추앙받는 이유는 진정으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철학자였기 때문이다.며칠 전 오랜만에 서점에 들렸다가 ‘실존주의자로 사는 법’이라는 책을 발견하고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신나게 사가지고 나왔다. 실존주의는 자유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철학이며, 성실과 용기를 무기로 삼아 현실을 직시하고 사물을 철저하게 통찰하는 법을 이야기 하는 철학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그동안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실존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간단하고 단호하게 정의한 책은 없었다. 나는 진정한 실존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먼저,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철저히 파헤쳐 봐야겠다. 현재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 코로나는 어떻게 발생했으며, 코로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으며, 코로나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 분석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진지하고 치열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우리가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 안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잠재력 발견이야말로 실존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계획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항목이다.실존주의자를 정리하면, 무슨 일이든 해낼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어떠한 상황이든 변명을 하지 않는 사람, 결코 나약하지 않으며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 인간의 존엄과 자존심과 위엄을 당당히 지키는 사람, 정의롭지 않은 일에 의연히 맞서는 사람, 자신과 적당히 타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 다른 사람이 원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기를 거부하는 사람, 인생의 역경 속에서도 부단한 노력을 통해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실존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우리가 사는 사회는 끔찍하게 불공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주의자적인 자세로 올바른 삶을 목표로 살고자 한다면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2022-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