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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1월의 정원 노트

자주 가는 찻집이 있다. 집 가까이 있어서 걸어가면 좋은 거리이다. 가게 안 곳곳에 주인장이 오래전부터 하나씩 간직해 온 애장품이 가득하다. 아기자기한 소품을 구경하는 데만 한참이 걸린다. 그 물건이 태어날 때는 소소한 쓰임새였지만 오래 간직하니 이제는 다시 구하기 힘든 귀한 보물이 됐다. 향이 좋은 홍차를 주문해 놓고 새끼손톱만 한 나무로 만든 직인부터 다리가 달린 오래된 소형 텔레비전, 벽에 붙은 기하학적인 무늬의 욕실 발 매트, 창가에 꽃병인가 하고 다가갔더니 책으로 변신하는 팝업북, 이런 소품을 보다 보면 자리로 차가 배달된다.이 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소품이라면 책이다. 테이블 옆에 나지막하게 놓은 책꽂이에 꽂힌 아롱다롱한 책등이 멋진 인테리어다. 제목을 자세히 보니 주인장의 취미가 보였다. 홍차, 쿠킹, 바느질, 가드닝에 관한 책들이 등을 나란히 하고 엎드렸다. 그중에 두 권이 눈에 더 들어와 차가 우러나는 동안 꺼내 펼쳤다. ‘보태니컬 셰익스피어’는 식물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시적인 글귀에 정교한 색연필화가 더해진 책이라 반해버렸다. 앉은 자리에서 바로 휴대폰으로 같은 책을 주문했다.또 한 권은 ‘정원 생활자의 열두 달’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정원 꾸미는 일에 1도 관심 없지만 아주 쉽게 써 놓은 글에 삽화까지 더 해서인지 책장이 잘 넘어갔다. 소장하기엔 욕심이고 더 읽고 싶은데 도서관에 가서 찾아볼까 고민하는데 갓구운 스콘 하나를 맛보라며 뜨거운 찻물과 함께 내민다. 주인장에게 물으니 단골이라 빌려 가도 좋다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책을 품고 돌아오는 길에도 입안에 홍차 향이 가득했다.1월에는 정원 가꾸기의 1년 계획을 짜는 일부터 시작된다. 몇 해 전까지 나도 12월 말이면 내년에 할 일을 꼼꼼히 적어 놓고 실천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너무 애쓰며 사는 거 같아 계획부터 세우지 말자 결심하고 쉬엄쉬엄하기로 내려놓기를 실천하는 중이다. 가드닝 하는 사람들의 겨울은 정원에 꽃이 없는 달이니 나처럼 방학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봄에 피는 식물의 월동 확인부터 온실에서 씨앗 파종하기, 화단을 조성할 곳의 흙 정리도 해야 하고 병충해도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가지치기였다.어릴 적 나는 과수원집 딸이었다. 겨울방학이면 전지(가지치기)를 전문으로 하는 아저씨들이 집에서 숙식하며 며칠씩 일을 했다. 키 작은 언니와 나는 아저씨들이 지나간 나무 아래에 잔가지를 주워 모으는 담당이었다. 추운 날엔 꾀를 부려 친구네로 숨기도 해서 혼자 일한 언니가 눈을 흘기며 씩씩거리기도 했다. 그땐 왜 나무를 자꾸만 잘라내는지 가만히 두면 더 커서 열매가 더 많이 열린텐데 싶었다. 이 책에 보니 가지치기의 목적은 나무 모양을 아름답게 잡고 열매를 좀 더 튼실하게 키우기 위함이라고 한다.가지를 쳐내는 게 어떻게 열매를 튼실하게 한다는 거지, 왜 하필 추운 겨울에 상처를 내는 걸까 했던 내 의문의 답도 책에 있었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살아오다 겨울 앞두고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면 병든 가지가 잘 보인다. 서로 부딪쳐 손상된 가지, 엉켜버려 서로의 성장에 방해가 된 가지 등속들을 새잎이 나오기 전에 정리해 줘야 나무가 건강하게 봄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봄맞이하기 위해 나도 가지치기를 하기로 했다. 먼저 안방 옷장을 정리했다. 지난 1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은 골라내서 쓸만한 것은 벼룩시장에 내놓고 나머진 수거함에 넣었다. 또 가지치기해야 할 종목은 휴대폰 안에 있다. 몇 해 동안 연락하지 않은, 이름만으로 누구인지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명단을 추려냈다. 그리고 저장공간을 가장 많이 차지 한 사진 정리를 몇 시간에 걸쳐서 했다. 지워야 할 것인지 남겨야 할 사진인지 결정하는 일이 만만찮았다. 사과나무 가지치기만큼 어려웠다. 잔가지 줍듯 하나하나 골라 불쏘시개로 던졌다. 남은 저장공간이 간당간당하다가 휴지통까지 비워내니 여유 공간이 생겼다.여유 공간 틈으로 2022년 1월 내 삶의 새순이 움트기 시작했다. /김순희(수필가)

2022-01-02

나는 기다립니다

선물이 도착했다. 산타할아버지 같은 친구가 멀리서 보내온 보따리를 풀었다. 참하게 포장한 반짝이는 리본을 풀자니 아까울 지경이다. 손편지까지 써서 실어 보낸 것이라 친구의 마음을 열어보는 기분이다. 이십 대 청년이 된 아들 둘의 어린아이 모습까지 기억할 만큼 오래 이어진 인연의 끈이다.오래된 끈과 띠를 모아 국립대구박물관에서 한국의 복식 특별전을 한다기에 길을 나섰다. 포항과 대구를 잇는 긴 띠인 고속도로를 달려가니 한 시간 조금 더 걸려 도착했다. 코로나가 창궐하는 때 닫힌 공간이라 걱정했는데, 그 넓은 곳을 돌아보는 내내 박물관이 온통 내 차지였다. 조용하게 전시품과 영상과 글을 온전하게 느꼈다.첫 방에는 왕의 허리띠가 놓였다. 벽 전체에 끈이 흔들리고 띠가 출렁이는 영상이 흐른다. 배 부를 때와 고플 때 시시각각 달라지는 허리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하는 허리띠의 미학에 대한 짧은 시였다. 창(猖)은 미쳐 날뛰다, 어지럽다란 뜻의 한자이고, 피(披)는 헤치다, 펴다, (끈을) 풀다 라는 의미를 품었다. 그래서 헐렁한 우리 한복을 입고 끈으로 매무새를 다듬지 않으면 ‘창피하다’란 말로 이어진다. 사극에 등장하는 술 취한 사람이나 미치광이는 옷고름이나 허리띠 없이 옷이 풀어 헤쳐져 있다. 창피한 복장이다.우리나라에 허리띠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이천 년이 넘었다고 한다. 서봉총의 금허리띠는 신라 시대가 황금의 나라였다는 것을 자랑하였고, 금속공예로 구현된 고려의 허리띠는 문양에 등장하는 사람이 내 엄지손톱보다 작아 그 섬세함을 느끼려면 돋보기로 봐야 할 지경이다. 왕의 허리띠에는 가장 귀한 재료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기술이 모두 들어가서 위엄과 기품을 느끼게 했다.조선 시대의 신분증인 호패도 허리에 끈으로 매달았다. 첫 돌에는 다섯 가지 색을 넣은 오방장두루마기나 까치두루마기라 불린 옷을 입히고 오래 살라고 십장생을 수 놓은 돌띠를 매 주었다. 그림책 ‘나는 기다립니다’가 생각났다. 빨간 털실 한 가닥이 이어져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기를 기다리고, 배우자가 떠나며 끈이 끊어지지만, 자식이 자라 뱃속에 손자가 다시 빨간 끈으로 표현돼 삶이 빨간 털실로 끝없이 이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전시회 마지막 방을 나오기 바로 전에, 두 개의 허리띠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하나는 김일 선수의 챔피언 벨트. 어린 시절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몇 집뿐이라 ‘김일 레슬링’을 보려고 좁은 방 가득 동네 사람 모두가 들어왔었다. 경기는 박치기왕의 승리로 끝났고 방을 나오는 사람들 얼굴이 모두 발갛게 홍조를 띠었다.또 하나의 띠는 고희경 대위의 것이었다. 부모님 전 상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에 계실 아버지와 어머님께 드리는 편지가 또박또박 적혔다.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하자 나라에 큰일 하게 되었다고 기뻐하셨는데 곧바로 6·25가 터져 안부도 전하지 못하고 급히 전쟁터로 가게 되었다. 포탄이 터지는 포항에서 전우들과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며 1950년 8월 어느 여름 불효자 올림이라 끝맺는다.그다음 글이 추신인가 하고 보니, 이 편지가 가상의 것이란 설명이었다. 고희경 중위는 전투에 참여한 지 두 달 만에 포항 기북면 무명 380고지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목에 걸고 있던 인식표와 띠쇠와 계급장이 2009년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유해와 함께 발견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유가족을 찾지 못해 가상의 편지를 작성해보았다는 설명이었다.전투 중에 동료가 사망하면 앞니 사이에 인식표 하나를 박고 남은 하나의 인식표는 수거해 온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누구의 유해인지 알 방법이라고 한다. 아들도 군대에서 더미를 이용해 이 방법을 배웠다고 덧붙였다. 고희경 중위는 전사한 후 한 계급 올라 대위가 되었지만, 가족과의 끈이 아직도 이어지지 못했다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박물관을 나오며 70년간 끊어진 빨간 인연의 끈이 어여 가 닿기를 기도했다./김순희(수필가)

2021-12-26

사라질 것과 살아날 것의 조우

경주라는 이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신라가 끝날 때이다. 경순왕이 서라벌을 떠나 개성에서 항복하면서 신라의 천년 사직이 끝나고 도시 이름도 서라벌(금성)에서 지금의 경주로 바꿨다고 한다. 천년을 간직한 이름이다.천 년을 견뎌낸 유적과 갓 백 살을 넘긴 건물을 만나러 갔다. 천 년이라는 세월을 펼쳐보기 전에 짧은 시간을 살아낸 경주역을 미리 만나보기로 했다. 곧 폐역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와서 먼저 그리로 발걸음을 옮겨 눈도장을 찍고, 고려 시대에 토성으로 태어나 조선 시대에 석축으로 변신하였다가 일제강점기에 성벽 50m만 남기고 그 형태의 대부분이 헐렸던 경주읍성을 나중에 알현했다.어린 시절, 안동에서 수학여행으로 경주에 왔었다. 처음 맞닥뜨린 곳이 경주역이다. 비둘기호에서 내려 지하도를 지나 광장으로 나왔을 때 어찌나 넓었는지, 신라 시대에는 더 많은 사람이 살았다던 그 역사적인 도시의 입구를 두리번거리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그때도 역 지붕이 기와였었나, 광장 오른편에 삼층탑이 선 공원이 있었드랬나 아련하지만 말이다. 두 줄로 서서 역 근처의 민박에서 하룻밤을 자고(사실은 까불고 노느라 거의 밤을 샜다.) 새벽에 석굴암으로 일출을 보러 가려고 또다시 역 광장에서 버스를 타고 갔다가 다시 경주역에서 안동으로 돌아갔었다.여행이라는 이름을 처음 내게 안겨준 곳이 경주역인 셈이다. 남편은 여기서 서울까지 가는 기차를 탔다고 했다. 나와 같은 기억을 간직한 이들이 전국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이의 추억의 장소인 이곳이 28일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그러다 건물이 없어지고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다 기억하던 우리가 사라지면 함께 잊히고 말지 모른다.경주역에서 차로 3분 거리에 읍성이 복원되었다기에 가보기로 했다. 경주읍성은 1012년 고려 현종이 토성을 짓고 우왕이 석축으로 개축하고 네 개 문을 정비하였다. 조선 시대에 경주부 읍성의 길이며 성안에 우물이 83개소이고, 해자(海子)는 아직 파지 않았다는 기록이 문종실록에 등장한다.일제강점기가 들어서자 전국에 읍성 철거 명령이 떨어졌고, 경주읍성도 철거 대상이 되었다.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912년쯤 불국사와 석굴암을 구경하려고 경주를 방문하였을 때 시내에 들어오는데 큰 성벽의 높이 때문에 차량이 통과할 수 없다고 하자 그대로 동쪽 성벽 조금만 남기고 모두 철거하였다. 성벽이 철거된 후 나온 자재는 모두 경주선으로 투입되었다고 하니 경주읍성이 경주역을 만드는데 쓰인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인연이 쌓인 두 유적지가 한 곳은 천 년을 버티어 온 경력으로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제 모습을 되찾아 가고, 겨우 백 년을 버틴 짧은 이력의 역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성에 오르니 경주시가 내려다보인다. 향일문에서 서쪽을 향하니 해가 지는 멋진 풍경이 기둥 사이에 액자로 걸렸다. 성벽 아래에 복원하면서 발견된 석재들이 놓였다. 마치 역 광장에 수학여행 온 초등생 같다. 전교생이 겨우 세 반인거 보니 시골에서 온 듯하다. 절구 모양으로 물을 담고 있는 반, 건물의 기둥을 받힌 주춧돌 반, 돌로 만든 다리로 사람들을 건너게 한 친구들까지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모여서 옛날이야기를 조잘대는 듯하다. 복원한 새 건물과 철거 위기에도 살아남은 성벽을 이어 놓았다. 그 밑으로 차가 지나다닌다. 스러져 가던 역사가 현재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처럼 보였다. 복원해서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면 박제된 건축물이지만 이렇게 오를 수 있고 차가 성을 드나들 수 있다면 살아 숨 쉬게 된다.계림초등학교의 담장 역할 정도만 담당하다가 2014년부터 발굴을 시작해 성벽의 일부가 완성됐다. 학교 옆으로 아직도 한창 발굴하는 중이다. 스러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 더디고 오래 걸리는 일이다. 천년 고도에서 아직은 짧은 시간인 백 년을 살아낸 것들도 스러지기 전에 소중히 간직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 기록해 본다./김순희(수필가)

2021-12-19

녀던길

제사 지내고 돌아오는 길, 먼 산 위에 달이 떴다. 나물을 다듬고 탕국을 끓일 초저녁부터 우리 동네를 서성이다가 음복이라도 하고 가라는 소릴 기다렸는지 반쯤 감긴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본다. 달을 향해 달리다 상에서 내린 술 몇 잔에 취기가 오른 옆지기에게 저 달 좀 올려다보라 권했다. 달을 보니 요 며칠 퇴계 이황의 시선집의 목차를 어루만졌더니 시 한 수 읊고 싶은 밤이라 읊조렸다.퇴계에서, 도산 달밤에 매화를 읊어, 어제 농암 선생을 뵙고 물러 나와 느낀 바 있어 두 수를 짓다, 조사경이 병 때문에 청량산으로 가자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기에 금협지가 화답한 운으로 시를 지었다, 제목만으로 이황 선생이 거닐던 서원과 시를 나누던 친구들까지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 시인들이 그의 문학을 따라 하고 싶어서 선생이 자주 걷던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주말에 길을 나섰다.안동 선비 순례길은 아홉 개의 코스가 있다. 우리는 그중에 예던길을 걷기로 했다. 네 번째가 퇴계 예던길이다. 퇴계가 지은 ‘도산십이곡’에도 녀던길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옛 성현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그분들을 못 뵙네 옛 성현을 못 봬도 그분들이 행하던 길은 앞에 있네 그분들이 가던 길이 앞에 있는데 아니 가고 어쩌리. ‘녀던’은 ‘가던’, ‘다니던’의 뜻이 담겨 있다. 지금은 녀던길이라는 이름 대신 예던길로 불리는 이 길은 퇴계가 숙부(송재 이우)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위해 청량산으로 가면서 처음 걸었던 곳이다. 스스로 ‘청량산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청량산을 사랑했던 퇴계는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이 길을 걸어 ‘퇴계 오솔길’이라 부르기도 한다. 녀던길, 예던길 모두 같은 길이다.퇴계는 낙동강을 따라 거닐었으나 현재는 사유지 문제로 인해 옛길을 그대로 걸을 수는 없다고 했다. 안동시에서는 강변길 대신 건지산으로 돌아가는 길을 만들어놓았다. 약 4km에 달하는 산길이다. 단천교에서 고산정까지 가는 길에 백운동, 미천장담, 한속담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퇴계의 한시와 그 경관을 감상할 수 있어 ‘시심의 길’이라 불리기도 한다.산행에 자신이 없어 다시 차를 타고 농암종택이 있는 가송리로 가서 예던길을 이어 걸었다. 원래 도산서원 인근 분천동에 있었으나 1975년 안동댐 건설로 그 지역이 수몰됨에 따라 현재의 자리로 이전 복원했다. 종택과 사당, 긍구당, 분강서원, 애일당 등 농암 관련 각종 문화재를 지금의 자리로 한데 모아놓았다. 종택은 고택 체험하는 사람들로 붐비는지 주차장이 빈틈이 없었다. 방안에 사람들이 있다니 조용히 기와집이 앉은 품새와 현판과 문살만 슬쩍 보고 강가로 나왔다,오전의 햇살이 낙동강에 내려앉는다. 물소리인지 햇빛이 반짝이며 내는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다. 순간에 지나가는 풍경이라 얼른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만큼 담아내는 실력이 내겐 없다. 다시 강의 윤슬을 한참 서서 눈으로 담았다. 고산정을 향하여 남편과 두런거리며 걸었다.이황 선생은 늘 혼자서 이 길을 걸었을까? 가끔은 애제자와 동행하기도 했겠지? 아침 일찍 나서서 농암종택에서 안동식혜로 목이라도 축이고 고산정까지 갔겠지. 아, 그때 고춧가루가 있었나? 이황 선생은 1570년에 돌아가셨고, 임진왜란 즈음에 전래했다는 설이 있으니 빨간 식혜는 아니었을 거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도 목이 말랐다. 가까운 거리라 손에 물병 하나 들지 않고 걸어온 게 후회스러웠다.강 건너에 고산정이 멀리 보였다. 난간이 없는 다리를 건너 차 한 대 비켜서기 힘든 길을 걸어 고산정에 다다랐다. 마당에서 강을 내려다보노라니 물빛에 비친 풍경이 이황 선생의 발길을 자주 이곳으로 불러들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묵은 탱자나무가 선생이 자주 외던 시 한 수 들려줄 것만 같았다. 고산정을 둘러싼 주위 산이 온통 돌산이다. 마치 이곳에 머물던 선비들이 읽은 책을 켜켜이 쌓아 놓으니 산이 된 듯하다. 산바람 강바람에 묻어오는 글향이 은은하다. /김순희(수필가)

2021-12-12

붉은 등을 켰다

가을이 겨울을 위해 붉은 등을 켰다. 동네가 환하다. 수백 년 전부터 바알갛게 불을 밝힌 만 그루의 나무 곁에 십만 그루가 가로등처럼 꽃불을 켜서 마을 전체가 환하다. 의성 사곡면 화전리로 들어서는 순간 어찌나 동네가 붉은지 ‘산수유 마을’이란 별칭이 꼭 맞아떨어진다. 지난봄, 입구에서부터 버스 정류장에도 산자락에도 어김없이 산수유꽃이 노랗더니 지금은 붉은 물감을 칠해 새로운 겨울 축제를 열었나 싶다. ‘영원불변한 사랑’이라는 꽃말처럼 300년 넘게 오래도록 마을을 밝힌다.산책로에 들어서니 발밑에 빨간 열매가 떨어졌다. 학창시절 국어책에 실렸던 김종길 시인의 성탄제(聖誕祭)가 저절로 떠오른다.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애처롭게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려고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고,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하며 끝맺던 시.그 시절 나는 산수유를 알지 못했다. 꽃의 색깔뿐만 아니라 모양도, 시에 등장하는 빨갛다는 열매가 콩알만 한지 사과만 한지도 궁금했다. 지금은 얼른 핸드폰을 열어 검색 찬스를 쓰면 되지만, 그때는 국어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손톱만 한 작은 열매라고 하셔서 앵두 같겠거니 했는데 발아래 산수유는 투명한 다홍 색의 타원형 보석 같다. 그때 이 어여쁜 모양을 알았더라면 시가 더 내 몸속에 알알이 새겨져 흘렀을 것이다.혹여 시인은 산수유 마을을 겨울의 길목에 다녀갔을지도 모른다. 본관이 의성이고 안동에서 태어나셨으니 이곳 사곡면 화전리에 와서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산수유 붉은 물결을 눈에 넣고 시를 썼을 것이다. 시 전체에 산수유 빛깔이 흩뿌려져 있다. 바알간 숯불로 시작해 열로 상기한 볼, 불현듯 느끼는, 마지막 구절에 산수유 알이 박혀 흐르는 혈액을 보면 동네에 내를 따라 늘어진 붉은 산수유 가지들을 보고 부리나케 시상을 떠올렸을 것이다.물이 흐르는 곳으로 작은 돌계단을 따라 내려섰다. 골짜기 가득 붉은 산수유 이불을 덮어놓았다. 찾아간 시간이 해거름 녘이라 물가에 늘어진 가지 뒤에 붉은 조명을 비추는 듯해 더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었다. 잎은 하나 없이 온통 붉게 상기된 얼굴을 냇물에 비추니 물빛도 산수유를 꼭 닮아 버렸다. 넋 놓고 올려다보노라니 나도 덩달아 달아올랐다.가만히 열매를 생각하니 꽃이 피었다 지고, 또 열매가 익기까지 시간이 참 오래도 걸렸다 싶다. 가장 일찍 눈을 떠 봄소식을 전하는 전령사 노릇을 하는 녀석이 여름에 붉게 익어도 될 터인데 뒤에 핀 사과꽃도 열매 다 익혀 시장으로 마트로 팔려갔는데, 더 늦게 핀 감꽃도 주황색 까치밥만 남겨둔 지금, 이렇게 활짝 붉은 꽃 잔치를 느지막하게 열었다. 누구보다 많은 계절을 담기 위해 봄 여름 갈 겨울을 기다린 녀석들이다. 성격 급한 나로선 따라 하기 힘들다.노란 산수유 꽃이 필 때는 동네가 사람들로 넘쳤었다. 산책로를 따라 사진을 찍으면 꽃만큼 사람도 찍혔더랬다. 붉은 산수유 꽃이 핀 지금은 우리뿐이다. 꽃등 아래 흐르는 냇물 소리만 가득하다. 봄에 기념사진 찍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던 그 자리가 오로지 내 차지다. 뒷사람 눈치 보지 않고 남편이 하라는 대로 포즈를 취하며 붉은 내음새를 가득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고선 폰을 내려놓고 눈으로도 한참 바라보았다. 마음에 알알이 새겨넣었다.산수유 마을은 가로등 모양도 산수유다. 사람이 자연을 따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순리를 따르는 일이다. 거스르며 사는 일이 힘들다는 것을 산수유 마을 사람들은 300년 전에 알았다. 골짜기 깊은 곳이라 해가 일찍 졌다. 기둥 끝에 빨간 열매 두 개가 부리나케 불을 켰다. 불현듯 성탄이 가까웠다는 게 떠올랐다. 집에도 산수유 닮은 불빛 몇 개 내 걸어야겠다. /김순희(수필가)

2021-12-05

노을 맛집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붉게 물들어 타는 저녁놀~.” 1984년 어린이날 MBC동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우리에게 다가온 ‘노을’이다. 아이들이나 부르던 동요가 전국 길거리에서 울려 퍼지도록 유행한 것은 이 곡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싶다. 노을 하면 바로 노랫말이 저절로 입안에 맴돈다.내가 사는 포항은 일출로 유명하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첫해를 보겠다고 호미곶 근처에 방을 잡고 새벽잠을 포기하며 마중을 한다. 그 틈에 한 번도 낀 적이 없는 이유는 일출보다는 저녁밥 짓는 연기 낮게 깔릴 때 서쪽 하늘 보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서나 노을을 볼 수 있는 서해까지 낙조를 보러 가는 일은 먼 거리라 큰맘을 먹어야 가능하다. 그보다는 우리 동네 노을을 찾아보기로 했다. 도시 숲에서 석양은 좁고 길게 보인다. 고층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또 우리 집 뒷베란다 창살 사이로 가끔 핑크빛 노을이 걸린다.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계단을 뛰어 내려가서 보려고 하면 그새 어둠이 깔리고 만다. 순식간에 건물 사이로 사라지는 빛이 우리에게 던지는 시간차 공격이다.일몰 담당인 서해는 어디로나 해가 떨어지지만 동해는 일출 담당이라 노을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서쪽으로 해가 지는 곳이 어디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호미곶이 떠올랐다. 삐죽이 튀어나온 곶 끄트머리에서 움푹 들어간 영일만 안쪽을 바라보면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볼 수도 있을 거라 짐작했다.일몰 시간을 알아보니 5시 9분이다. 여름보다 두 시간 이상 짧아졌으니 4시에 집을 나섰다. 호미곶 중에 둘레길을 걸으며 노을을 보기 좋은 동네로 향했다. 도구에서부터 바다를 옆에 끼고 구불구불 달리다 보면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이 나온다. 공원 일월대에 올라 옆으로 비껴보는 낙조도 볼만하다. 정면이 아니라 난간에 서서 시내를 향해 몸을 돌리면 구름에 반사된 노을을 날이 좋은 날에만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차를 더 달려 대동배 2리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웠다.해파랑길 15코스 중에 이 동네가 노을 맛집이다. 구룡포 쪽으로 둘레길 따라 걷다 보면 저 데크 끝에 큰 바위가 우뚝 섰다. 멀리서 보니 사람의 옆 모습을 닮았다. 툭 튀어나온 매부리코에 굳게 다문 입, 눈썹 자리 즈음에 작은 소나무가 자란 것이 모아이 상이라 입간판에 이름 붙여질 만한 바위다. 가까이 가니 모아이 상은 사라지고 그냥 절벽이다. 다시 뒷걸음치며 보니 얼굴 형체가 서서히 나타나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건너편으로 해가 지는 걸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우리도 여기서 노을을 보기로 했다. 가만히 앉아 마음을 기울이니 파도 소리에 맞춰 하늘도 점점 붉게 물드는 소리가 들렸다. 일렁이는 바다에 바위섬 몇 개, 그 뒤로 먼 산이 지평선을 낮게 오르내리며 그려놓았다. 그 위에 동그란 해가 막 내려앉으려 주춤주춤거렸다. 마지막 남은 해의 힘이 어찌나 센지 빠알간 색이 파도 위에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그 사이로 갈매기가 한 줄 시를 쓰며 가른다.노을은 바라보기에 좋은 그림이다. 시간이 자연에 걸어놓은 걸작이다. 하지만 노을도 바라보지 않으면 가까운 곳에 전시회를 찾지 않아 놓친 거나 매한가지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니 저렇게 붉은 노을도 언제나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착각이다. 비슷한 시간에 며칠을 찾아갔어도 그 시각에 구름이 덮여 파도 위 해그림자는 볼 수 없었다. 첫날만치 감동적이지 않았다. 조금씩 흐리고 조금씩 덜 붉었다.아쉬운 마음에 한참을 카메라에 담다 보니 해가 산 너머로 꼴깍 넘어 가버렸다. 노을이 가장 좋은 시간은 그다음에 찾아왔다. 사위가 어슴푸레해지며 하늘과 바다가 점점 더 붉게 물들었다. 해가 사라진 자리에 붉은 부스러기들이 하늘과 바다에 가득 흩뿌려져 세상이 오로지 붉은색 하나였다. 바라보던 친구들 얼굴도 수줍게 붉어졌다. 친구들 눈 속에 명화가 내걸렸다. /김순희(수필가)

2021-11-28

왕릉 가는 길

늘 지나쳐 가기만 했었다. 경주 산림연구원에서 통일전으로 달려가다 보면 헌강왕릉이란 표지판이 휙 다가왔다 사라진다. 산기슭으로 오르면 능이 있을 거라고 알려주는데 매번 모른 척 지나왔었다. 오늘은 사람 없는 조용한 곳으로 산책가자 하니, 그곳이 떠올랐다.역사 선생이란 이름으로 평생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린 남편에게 헌강왕은 신라 몇 대 왕이냐 물었다. 검색해 보아야 안다고 하니, 역사무지랭이인 나와 다를 바 없네 하고 놀리니,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중요한 업적도 없는 왕까지 어찌 아느냐고 받아친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신라의 왕이 몇 명이었는지 배운 기억이 없다. 조선시대는 ‘태정태세문단속 예성연중집단속’ 이러면서 운율까지 넣어 외웠지만, 삼국시대는 먼 나라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그나마 경주 가까이 살아서 그 유명한 선덕여왕이 27대 왕으로 첨성대를 만들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삼국 통일에 힘쓴 이들을 모신 통일전에 차를 세웠다. 지난주 노랗던 은행잎 가로수 길은 겨우살이 준비를 끝낸 듯 빈 가지만으로 손님을 맞는다. 주차장 가에 ‘동남산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섰다. 교촌마을에서 시작해 서출지까지 걷는 코스인데, 헌강왕릉을 지나가도록 길을 표시해 두었다.헌강왕릉을 향해 가다 보니, ‘정강왕릉’이란 표지판이 먼저 우리를 반겼다. 표지판의 손짓을 따라 올려다보니 살짝 오르막길이었다. 소나무들이 도열한 병사들처럼 능까지 이어져 시원한 그늘을 만들었다. 걷기에 좋은 산책로였다. 소나무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곳에 철모르는 진달래 두 송이가 폈다. 늦가을 숲에 봄처녀 진달래가 길을 잃었나 싶어 가까이 가서 눈맞춤을 해줬다. 갈바람에도 떨지 말고 잘 견디라고 속삭여주었다.정강왕릉은 추석에도 벌초를 받지 못한 듯 억새를 머리에 가득 이고 있었다. 둘레에 복원하다 남은 석재들이 누워 제자리를 찾아주길 기다린다. 둘레솔 덕분에 그래도 능이라는 모습을 잃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형의 능으로 가려면 왔던 길을 내려가야 하나 싶었는데, 헌강왕릉으로 가는 길이 옆으로 나 있다. 가을 햇살이 따가운데 소나무 숲으로 이어진 길을 가니 참 좋다. 누런 솔잎이 떨어져 걷는 이에게 푹신한 발걸음을 안겨준다. 소나무 사이로 늦가을 들을 지나오며 서늘해진 바람이 스친다. 마른 잎들이 바스락 몸을 떤다. 길 곳곳에 망개 열매가 빨갛게 익었고, 건너기 상거러운 골짜기에는 나무다리도 놓아 300m 거리에 형이자 선왕인 헌강왕릉까지 숲길이 이어졌다. 숨이 차기도 전에 봉긋한 능이 나타났다. 동생이 누운 자리에 비해 사람의 손길이 더 갔는지 봉분이 멀끔하다. 양식이나 크기는 두 능이 거의 똑같지만 정강왕릉에 경주시의 관심이 덜 미친 것 같다.삼국사기에서는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경주 남산동에 있는 이 능을 현대 학자들의 연구 결과 실제 정강왕의 능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 무덤의 양식은 9세기 말엽에 재위한 정강왕 때보다 좀 더 이전 시기의 양식이기 때문에 제47대 헌안왕의 무덤이 아닐까 했다. 그러면 정강왕이 묻힌 무덤은 어디일까? 진덕여왕릉으로 알려진 고분 뒤에 있는 대형 봉토분을 왕릉으로 본다면 헌강왕과 정강왕의 능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다른 곳이라 해도 형제의 능은 지금처럼 꼭 붙어 있다. 우리의 무관심을 형제애로 이겨내고 있다는 이야기다. 동남산 가는 길로 길을 잡았다면 숲으로 꼭 오르길 바란다. 많이도 말고 5분이면 능에 다다른다. 일타쌍피, 한꺼번에 두 개의 능을 만날 수 있으니까. 날이 좋은 날은 소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어 좋고, 바람이 많은 날은 숲이 온화하게 감싸주어서 좋다. 여러 날 중에 가장 좋은 날은 사진작가들이 새벽녘에 찾는다는, 비 온 다음 날 아침이다. 안개가 소나무 사이로 거닐다 능 앞에서 하늘로 오르는 멋진 장면을 만날 수 있다. 이번 주말에 비가 온다는 소식이다. 안개에 둘러싸인 왕릉을 볼 좋은 기회이다./김순희(수필가)

2021-11-21

길이 달콤하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걷기에 참 좋다. 여름부터 포항 여기저기를 찾아 매일 아침 걷기 시작한 것이 가을이 깊도록 이어졌다. 철길숲의 맨 끝 지점인 효자교회에서 유강까지 가는 코스를 걸었다. 가장 최근에 꾸미기 시작한 길이라 미완성이다. 유강에 이르러서는 흙길이라 걷기엔 폭삭해서 좋은데 비 오는 날엔 질척거려 신발에 진흙이 다 달라붙었다. 가로수는 덜 자라 햇볕을 다 가리지 못한다.그래도 새길을 걷는 맛이 있다. 지나는 이도 다른 길에 비해 적어 소란스럽지 않아 가을 아침 공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기찻길 옆으로 코스모스가 남은 가을을 붙잡고 흔들고 여름꽃인 미국수국이 갈바람이 시린지 남은 꽃잎 끝을 말리고 있다. 나무에 내걸린 풍경이 바람에 스치운다. 새벽부터 출근한 새소리가 덧입혀져 듣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그때, 함께 걷던 진아씨가 묻는다. “이건 무슨 꽃이에요?” 시골 출신이라 도시녀에 비해 꽃과 나무 이름 몇개 더 알고 있다고 무엇이든 자꾸 물어온다. 푸힛, 사실은 나도 잘 모르는데 말이다. 잎 모양이 지난해 청하중학교 교정에서 본 나무였다. 함께 간 순옥언니가 아들과 함께 심었다는 그 나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입속에서만 가물거렸다.스마트폰이 나설 때다. 가까이 가서 꽃과 잎이 자세히 나오게 사진을 찍어 검색란에 올리자 비슷한 무리의 꽃나무들이 주르륵 펼쳐진다. 그중에 눈에 익은 이름이 보였다. ‘은목서’, 처음 들었을 때 나무 이름보다 역사책 언저리에 써진 선비 이름 같다고 느꼈던 그 이름 맞았다. ‘은’은 하얀 꽃이 펴서 붙여진 것일 테고, 목은 나무, 그럼 서(犀)는 무슨 뜻일까, 한자를 찾아보니 무소 서였다. 수피가 코뿔소의 피부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었다.사진을 찍으려고 가까이 가니 향이향이, 끝내줬다. 마스크를 하고 있는데도 뚫고 들어와 내 몸을 달달하게 만들었다. 꽃 이름을 물은 진아씨에게 얼른 향기를 맡아보라고 했다. 원래 냄새를 잘 못 느낀다며 마스크를 벗고 나무 가까이 코를 들이밀었다. 앗 따거, 뾰족한 잎에 찔려 화들짝 놀란다. 달콤한 향기와 달리 가시를 세운 잎 모양이 독특하다. 나도 조심조심 가지 마디에 피어난 꽃잎에 코를 파묻고 향을 흠뻑 받아들였다.한껏 향에 취한 뒤 나무 전체를 찍으려고 뒤로 물러서니 그 옆에 가로수들이 은목서였다. 대부분의 나무가 떨켜를 만드는 서늘한 늦가을에 이제서야 하얗게 꽃문을 여는 나무를 만나서인지 신기하고 반가웠다. 아기 손톱 같은 몽오리들이 오종종하니 피었는데도 향기는 길을 가득 채웠다.향에 취해 한번은 아쉬워 그 길을 두어 번 오갔다. 내일 또 오자하고 돌아섰다.나무 사전에는 팔월에서 시월에 핀다고 하는데 지금은 십일월이다. 사전의 내용을 고쳐 써야겠다. 열매는 다음 해 이월 삼월에 맺힌다고 하는데 진아씨는 4월쯤에 몇 개 주우러 오겠다고 한다. 나는 종일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꽃집을 하는 친구에게 은목서 한 그루를 주문하고야 말았다. 고양이를 입양한 후 그 좋아하던 꽃을 포기했었다. 고양이 호흡기에 꽃이 독이 된다 해서 꽃병이 여러 날 휴업상태였다. 그런 이유를 곱씹어봐도 은목서는 탐이 났다. 고양이 보리가 관심을 기울이면 시댁 마당에 심기로 하고 질러 버렸다. 며칠 후면 은목서는 우리 식구 이름이 될 것이다.“푸른 하늘 으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아무 하안나무 토끼 한 마리.” 노래에 나오는 계수나무가 목서라고 한다. 주황색의 꽃이 피면 금목서 하얀색이 피면 은목서이다. 향이 좋아서 샤넬넘버.5의 재료로 쓰인다고 하니 효자교회 근처 철길숲은 지금 고급 향수의 바다다.신기한 건 하나 더 있다. 뾰족하던 잎이 나무가 성숙할수록 둥그스름해진다는 것이다. 아직은 모가 난 내 마음도 나이가 들면 조금씩 무뎌질 거라고 알려주는 듯하다. 은목서를 가까이 두고 마음지침서로 들춰봐야 가능한 일이다. /김순희(수필가)

2021-11-14

직지(直指)

해가 뜨기 전 직지사로 향했다. 두 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거리라 새벽부터 서둘렀다. 어느 절이나 산사를 제대로 보려면 방문객이 적은 시간에 가야 고즈넉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입구에 차를 세우니 서늘한 아침 공기만 일주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직지’라는 절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다. 지난해 이맘때 즈음, 구미의 도리사를 찾았더니 산책로 끝에 전망대에 오르니 아도화상이 태조산에 절을 짓고 난 후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똑바로 가리키며 저곳에도 좋은 절터가 있다 하여 직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한 가지이다. 또 다른 설은 능여가 절터를 잴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한 데서 붙여졌다 한다.가람 배치가 다른 절과 좀 다르다. 오래된 향기가 물씬한 대웅전의 문살도 도톰했다. 거기다 꽃 문살이 아닌 반듯한 격자무늬다. 담백한 맛이 ‘나는 직지다’ 하는 듯했다. 마침 찾아간 시간이 예불 드리는 시간인지 전각마다 스님들의 독경 소리가 우렁차다. 절의 규모가 크다는 것을 염불 소리로 말해주었다. 스님이 나무아미타불 선창하면 무릎 꿇고 앉은 신도들이 관세음보살 맞받는 것 같다. 골짜기 가득 목탁 소리로 가득 찼다. 직지사에서 처음 느낀 절 분위기다.그보다 더 눈에 뜨이는 차이는 탑이 많다는 점이다. 보통은 일 금당 이 탑 형태이다. 불국사의 대웅전 앞에 다보탑과 석가탑이 자리한 모양처럼. 처음 직지사가 세워질 때는 오층목탑이었다는데 지금은 대웅전 앞에 두 개의 삼층탑이 나란히 섰고, 비로전 앞에도 삼층탑이 성보 박물관인 청풍료 뒤에도 삼층석탑이 있다.신라 초기 눌지왕 2년 아도 화상이 터를 잡을 때 만든 오층목탑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머리 깎고 출가한 절이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전각들과 함께 불태워졌다. 지금의 네 개의 탑은 제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터전을 옮겨왔다. 경북 문경군 산북면 옛 절터인 도천사에 쓰러져 있던 석탑 세 기는 1974년 이곳 직지사로 옮겨 복원되었다. 첫 집에서는 나란히 서 있었으나 직지사의 형편에 따라 떨어지게 됐다. 나머지 하나는 구미시 선산읍의 강락사 옛터에 무너져 있던 것을 선산 군청 앞마당으로 옮겼다가 다시 1980년 10월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원래 직지사가 낳은 탑은 없다. 다 데려온 자식인데도 늠름한 모습을 잃지 않도록 돌보고 있는 것을 보니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님이 세 자녀를 다 키워 첫 딸은 시집 보내고 두 아들은 도시로 유학을 보낸 그즈음, 시동생이 어린 조카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집안 어른들이 모여 아이를 누가 돌볼 것인가에 대해 논하였지만, 선뜻 맡겠다는 이가 없었다 한다. 그걸 어머님이 품으셨다.새로 이사 온 곳이 낯설어 오줌을 싸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이제는 육아를 벗어났다 싶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 또다시 초등학교에 가는 아이의 준비물을 챙기고 학부모가 되어 담임과 상담도 여러 번이었다. 낳은 자식들과 다르게 자꾸만 어긋나가는 아이를 중학생이 될 때까지 돌보셨다. 대학 등록금도 모아서 따로 불러 주시는 걸 본 적도 있다. 지금은 결혼해 아들을 낳아 일가를 이루었다고 명절에 시댁을 찾아오곤 한다.데려온 자식을 내 자식처럼 키우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건 내가 두 아들을 키우면서 더 깊이 깨달았다. 어진 어머니의 속이 녹아내리는 시간이 쌓인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다들 백수를 사는 인생인데 어머님은 암 투병을 하시다 여든 번째 생일을 하늘나라에서 맞으셨다.직지를 말 그대로 해석하면 바르게 가리킨다는 뜻이다. 어머님이 며느리인 내게 말이 아닌 몸으로 가리킨 것은 바르게 살라는 것이다. 시집와 25년을 살면서 내게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하신 적이 없다. 그저 몸소 앞서 걸어가셨다. 부족한 것뿐인 며느리지만 데려온 자식도 내 자식이다 ‘직지’ 하셨다. 옮겨온 곳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삼층탑 앞에서 두 손을 모아 어머니를 기린다. /김순희(수필가)

2021-10-31

탐추

독서모임에서 박웅현의 ‘다시 책은 도끼다’를 읽고 느낌을 나눴다. 밑줄 친 문장 중에 풍류에 대해 정의를 해 놓은 부분이다. 그림 설명해주는 손철주님은 봄이면 탐매하러 가자고 지인들에게 연락한다. 몇 날 몇 시에 모여서 2박 3일 일정으로 매화 향기를 느끼러 가니 참석하라고 말이다. ‘탐매’라는 낱말이 국어사전에 나온다. 탐매하다, 탐매객, 이런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그렇게 매해 탐매를 떠난다고 하니 그게 바로 풍류라고 한다. 그럼 나도 풍류객이다. 계절마다 피는 꽃을 찾아 나서니 말이다.지금은 가을, 오늘은 구절초를 보러 갔다. 서악동 도봉서당 뒤에 구절초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지 몇 년째인데 이제야 가게 되었다. 일하는 지인들의 시간에 맞추다 보니 어스름 녘에 찾아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데 눈앞이 환하다. 삼층탑 주변에 하얀 꽃잎으로 수를 놓았다. 구절초가 언덕을 덮고 있다.해가 산 너머 집으로 서둘러 가느라 붉은 그림자가 서악동에 내렸다.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꽃밭을 눈에 넣어야 했다. 차에서 내리니 서늘한 기운이 골짜기에 가득할 뿐 늦은 시간이라 인적은 끊겼다. 그래서 구절초밭이 온통 우리 차지였다. 밭고랑 사이를 거닐자 은은한 가을 저녁 향내가 풍겼다. 아, 좋다~하는 소리가 서로의 입에서 나와 미소짓게 했다.언덕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탑 주변을 하얀 구절초 병정들이 에워쌌다. 그 옆으로 서당 기와의 색이 짙어 꽃이 더 환하게 돋보였다. 골짜기를 둘러싼 소나무 숲은 어두워져도 꽃밭엔 어둠이 더디게 내렸다. 덕분에 천천히 구절초를 탐하는 시간을 가졌다.일행 중에 오 학년 사내아이 둘이 구절초 사이로 뛰어다녔다. 사진을 찍어 저녁을 먹은 후 포토제닉상을 뽑겠다고 했더니 카메라를 향해 열심히 포즈를 취해준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박중훈과 안성기의 명장면도 재현하고, 어깨동무도 했다가 슈퍼맨도 되어주었다. 별 이야기 아닌데도 까르르 웃고 조잘거리는 소리가 꽃이 피어나는 소리와 닮았다.깜깜해져 꽃이 보이지 않을 때 즈음 산을 내려왔다. 구절초를 간직한 서라벌 하늘 위로 달이 둥실 떠올랐다. 달이 이지러진 곳 하나 없이 동그랗다. 오늘이 보름인가, 달력을 찾아보니 음력 시월 십육 일. 어제가 보름이었다. 낮 동안 포항은 종일 비가 내려 꽃을 보러 못 가겠구나 했다가 오후 5시쯤 구름이 걷혔다. 경주로 와보니 땅이 젖지 않아 여긴 비가 오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이래서 계획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걸 또 느꼈다.도솔 마을에서 경주의 맛을 느끼며 찍은 사진을 자세히 보았다. 멋진 사진의 주인공에게 문화상품권을 주기로 해서인지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른 셋이 사진을 돌려보며 어느 게 더 좋다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두 아이에게 ‘천원이라 미안해’하며 만 원짜리 상품권을 줬더니 받자마자 입이 함지박만 해졌다. 그 얼굴이 구절초처럼 방싯거린다. 아이들이 꽃보다 곱다.가장 행복할 때는 맛있는 거 먹으면서 다음에 뭐 먹을지 의논할 때이다. 구절초 보고 와서 남은 가을에 어디로 탐추하러 떠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양의 핑크 댑싸리가 시월 말이면 절정이고, 안동 시내 낙동강 둔치의 핑크뮬리 보고 헛제삿밥 먹는 코스도 좋다. 경주 최제우 동상이 있는 천도교 성지 용담정으로 가는 길이 은행나무 가로수이다. 곧 노랗게 물들어 우리를 부를 것이다. 조금 멀리 눈을 들면 순천만의 낙조가 보인다. 갈대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바람과 같은 방향으로 흔들리면 우리도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노을을 보면 좋은 곳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니 파주출판단지 지혜의 숲의 높은 책장 앞에서 인증샷을 찍으면 더없이 좋은 여행이 된다. 가을을 탐할 곳이 끝도 없이 튀어나온다.배불리 가을을 채우고 경주의 밤거리를 걸었다. 보름달이 더 높이 솟았다. 아이들이 신나서 앞서서 뛰어갔다. 달을 배경으로 한 컷의 꽃 사진을 더 찍었다. 신라의 달밤이다. /김순희(수필가)

2021-10-24

추억을 긷는 소리

시끌벅적한 소리가 사라졌다.20년 넘게 초등학교 옆에 살았다. 아이들이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에 학교가 있다는 것에 무조건 이사를 결정했었다. 부엌으로 난 작은 창문을 열어두면 쉬는 시간 아이들의 뜀박질 소리가 그 문으로 들어온다.하지만 이맘때 들려오던 운동회 소리가 코로나 때문에 끊겨버렸다. 날이 정해지면 한동안 운동장에서 매스게임 연습하느라 선생님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날아오고, 행진곡이 배경음악으로 쉴 새 없이 동네를 들썩거렸었다. 그런 소리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마스크에 묻혔는지 초등학교 옆이란 게 느껴지지 않는 요즘이다.이십 대인 아들 둘이 졸업한 초등학교이다. 저 학교에서 큰아이는 봄가을로 여섯 번이 넘는 운동회를 경험했다. 일기장을 뒤적이니 2005년 9월 29일의 운동회 장면이 만국기를 흔들며 나타났다. 둘째가 1학년에 입학해서 5학년인 형과 함께 체육복 차림으로 신나게 학교로 향했다. 내 어릴 적 같으면 운동장에 만국기 날리고 장사꾼들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그 틈새에 할머니가 밤 삶고, 떡 싸서 큰 나무 아래에 전을 폈을 것이다.도시에 사는 우리 아이들의 운동회는 심심하다. 그저 맨손 달리기 한 번이면 끝이다. 남편과 나의 운동신경을 닮아 재바르지 못한 두 아들은 늘 꼴찌를 못 면한다. 학교 가기 전 아이들에게 남편이 부탁한다. “일등 하면 안 된다. 꼴찌로 달려라, 천천히. 너같이 잘 생긴 사람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천천히 달려줘야 해. 알았냐?” 말도 안 된다고 킥킥거리며 현관을 나선다. 저녁에 야영 간 남편이 전화했다. 3등, 4등을 했다니까 5학년은 세 명씩 달리고 1학년은 4명 달렸나 한다. 보물찾기나 장애물경기처럼 여러 변수가 없는 맨손 달리기는 어차피 다섯 명 달리면 5등, 여섯 명 달리면 6등 하는 아이들이라 위로할 방법으로 뒤로 처질수록 용돈을 더 주겠노라 약속했었던 거다. 그 후로 아이들이 맨손 달리기를 즐겼다.다음 해 가을, 두 아이의 학교 운동회날이 돌아왔다. 늘 간단하게 오전에만 하던 소운동회를 올해엔 학부모님들 다 모시고 거창하게 한다고 초대장을 들고 왔다. 수업 시간 쪼개서 달려가니 2학년 둘째의 달리기 순서였다. 달려가다가 훌라후프 다섯 번 넘고 또 달려가기였다. 신발 맞는 거 신으랬더니 또 형 신발을 신고 달려가느라 낑낑거리는 게 안타까워 목청껏 그냥 뛰라고 응원을 보냈다. 안 그래도 겨우 4등으로 달리다가 드디어 신발이 벗겨졌다. 엄마의 바람은 뒤로하고 우리 둘째 되돌아와서 천천히 신발을 다시 껴 신는다. 그동안 다른 애들 다 뛰어가 버리고 없다. 그래도 5등으로 웃으며 뛰어간다.6학년 큰애는 ‘손님 찾기’라고 쪽지에 적힌 대로 한 다음 달려가는 건데 4-4반 선생님을 찾으라는 쪽지를 잡았나 보다. 다른 선생님들 다 나와서 누구 찾냐고 물어보시는데 하얀 바지 입으신 4반 남자 선생님이 맨 꼴찌로 나와서는 아들더러 이왕 꼴찌인 거 아이 혼자 뛰어가게 했다. 헐! 성질 더러운 나는 화가 치밀었다. 초등학생 담임이 운동회를 뭐로 보는 거지? 아이들이 최선을 다하는 걸 배우도록 하는 게 운동회인데 꼴찌라고 그냥 혼자 뛰어가게 한다고? 안 그래도 부끄럼 많은 아들은 뻘쭘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얼굴에 쓰였다. 끝까지 손잡고 뛰어줘야지 선생님아. ‘님’자도 붙이기 싫었다.그 와중에 교감 선생님, 맨 나중에 단상에서 내려와 옆에 다른 아이 손 잡고 꼴등으로 달리던 아이를 거의 끌다시피 데리고 날아가서 3등으로 골인했다. 역시 교감 선생님 짱이다. 어른이라면 그 정도 모범은 보여야 하는 거 아닌지.콩주머니로 박을 터뜨려야 점심을 먹을 수 있었고, 마지막 청군 백군 학년 대표들이 나와 이어달리기를 하며 전교생을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 다음에야 운동장이 조용해지던 기억 속의 운동회, 일기장 속에서 길어 올린 아이들의 운동회로 허전한 가을의 쓸쓸함을 달랬다. /김순희(수필가)

2021-10-17

탱자 가라사대

동네 어귀에 살던 새순오빠네 집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둘렀다. 어릴적 기억이라 동네 오빠 이름은 맞는지 확신은 없지만, 울타리의 가시는 눈에 선하다. 남후초등학교까지 가려면 어린 내 걸음으로 삼십여 분이 걸렸다. 옆집 미정이를 우리 집 앞에서 먼저 만나고, 순연이 집 앞에 가서 학교 가자고 큰소리로 외치면 얼굴이 유난히 하얗던 순연이는 책보를 가녀린 허리에 매고 달려 나왔다. 우리 셋은 서너 번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에 살았기에 학교 가는 길도, 하교 후 ‘짜개놀이’와 ‘왼발은 뛰어도 관계없어요’, ‘숨바꼭질’도 함께 했다.순연이 집도 마을 어귀였다. 그 옆집 울타리엔 이맘때 즈음 노르스름해진 탱자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가시가 많은 담장이지만 개구멍 하나 정도는 꼭 있다. 그 집엔 아들만 셋인 것으로 기억한다. 개구진 사내아이들이 지나다닌 길이었을 게다. 막내 아들인 새순오빠가 나보다 몇 살 위라 그나마 초등학교를 잠깐 같이 공유했기에 희미한 기억이라도 있는 것이다.먹을게 흔치 않던 우리는 시고 쓰고 아주 쬐금은 단맛이 있는 탱자가 노오래지면 몰래 따 먹기도 했다. 먹기보단 공처럼 던지고 놀기도 하고 소꿉놀이에 반찬이 되기도 했다. 이제껏 내가 본 탱자나무는 낮은 키에 울타리로 선 것 뿐이었다. 얼마나 오래 우리 곁에서 울타리로 살아왔는지 몰랐다. 그러다 슬그머니 콘크리트 담장으로 바뀌어 버려 탱자가 귀해졌다.보경사 장독대 앞에 더 귀한 탱자나무가 400년 동안 앉아 있다. 앉아 있다고 한 건 법성리의 탱자나무처럼 줄기를 늘씬하게 뽑아 올리지 않았단 말이다. 400년을 견뎌온 것을 인정받아 경상북도 보호수가 됐다. 오랜 세월을 간직한 어르신답게 품도 팡팡하니 그늘에 고양이가 쉼터를 마련하고도 남을 만치다. 가지도 잎도 가시도 푸른색이라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아야 탱자나무 맞네싶다. 그래서 열매가 노랗게 색을 내는 지금 가면 귤이 익은 거랑 똑 닮아 귤을 추운 곳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사자성어가 왜 생긴 건지 알게 된다.초나라 왕은 제나라 사신인 ‘안자’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제나라 출신 범죄자를 그 앞에서 심문했다. 왕의 의도를 알아챈 안자는 “귤이 회남에서 나면 귤이 되지만 회북에서 나면 탱자가 된다고 합니다. 제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 중에는 도둑이 없습니다. 그런데 초나라에만 가면 도둑질을 하게 되니 어떻게 된 영문일까요?”라고 맞받아쳤다. 이 말에 초나라 왕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귤화위지’는 심는 지역에 따라 귤이 탱자가 되듯이 사람도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장독대 옆에 서서 된장 간장이 익는 동안 날 좋을 때마다 뚜껑을 열어 놓으면 탱자나무가 자주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5월 하얀 꽃을 피운 날엔 꽃가루도 한소끔 뿌려주었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장맛은 깊어지고 탱자는 노랗게 익었더랬지. 보경사 스님들은 향긋한 탱자 향이 밴 된장국을 드셔서 경내에 울리는 목탁 소리도 더 은은한듯하다.탱자나무는 역사 속에 유배를 보낸 죄인 처소 주변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치는 일로 등장하기도 한다. 뾰족한 가시가 돋친 탱자나무가 빼곡하게 숲을 이루면 아무리 향기 좋은 열매가 열려도 죄인에게는 험상궂기만 한 탱자나무였을 것이다. 비록 귤이나 유자만큼 사랑받지 못해 쓸모가 없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놀 때 ‘탱자탱자 놀다’라고 표현하고, ‘유자는 얼어도 선비 손에 놀고 탱자는 잘 생겨도 거지 손에 논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탱자를 낮추어 보았다. 덜 익은 청열매로는 아토피 치료에 쓰고 가을에 잘 익은 것은 잘게 썰어 효소로 만들어 차로 마신다.가을이면 노랗게 익은 탱자를 한 바구니 따서 집안 곳곳에 담아두어 그 향긋함이 집안을 가득 채우게 했다. 우리 집에 더 놓겠다고 덤비면 장독대 옆에 선 탱자 어르신 엄하게 가시를 세우며 나무라신다. 이 가을엔 담장을 지나는 이를 위해 욕심을 내려놓거라. /김순희(수필가)

2021-09-26

도동서원의 녹턴

쇼팽의 ‘녹턴’을 들었다. 빗소리클래식이라고 제목을 붙여 비 오는 오후에 친구가 배달한 음악이다. 피아노 소리에 빗소리를 더한 앙상블이 듣기 좋아, 해질무렵부터 틀어놓았더니 두 시간이 후룩 지났다.빗소리 듣기에 좋은 곳을 다녀왔다. 대구의 도동서원이다. 조선의 성리학자 김굉필을 기리는 곳으로 건축미가 돋보이는 곳이다. 특히 중정당의 기단이 압권이다. 돌의 크기와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이라 마치 몬드리안이 무채색으로 무늬 꾸미기를 기단에 그려 놓은 듯하다. 멋진 그림에 취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사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 우산을 가져간 터라 얼른 폈다.해설사는 비가 흠뻑 내린 날에 기단이 최고로 아름답다며 오늘 잘 왔다고 신나서 설명을 이어갔다. 이런 무늬를 만든 것은 전국에서 몰려든 학생들이다. 각자의 고향에서부터 돌을 짊어지고 와 스승을 추모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단을 올렸다. 다른 서원이 똑같은 크기로 반듯하게 쌓은 것과 달리 크기가 다른 돌을 깎아 맞추며 빈틈없이 쌓다 보니 최대 12각인 돌도 있다고 해서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았다. 돌을 줄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허튼층쌓기를 해서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는 사이 돌에 빗물이 스며들며 색이 더 짙어졌다. 빗소리클래식을 듣기 좋은 날이다.기단에는 용머리 네 개가 있는데 이는 과거에 급제해 등용하라는 의미와 물을 상징해 목조 건물을 화재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단 위 강당의 기둥은 나무의 모양을 그대로 살려 둥그렇다. 나무는 금강송으로 배에 싣고 낙동강을 통해 들여왔다. 지붕을 받치는 기둥 위쪽엔 흰색 띠를 둘렀다. 이것을 상지라고 하는데, 멀리서도 이곳이 성인을 모신 서원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상지를 두른 곳은 전국에서 도동서원이 유일하다. 김굉필이 유학자 중에 젤 위, 조선 5현의 젤 앞자리 ‘수현’이란 뜻이다.수현을 모시는 서원이라서인지 도동서원은 담장도 특별하다. 환주문을 끼고 나지막하게 쌓은 흙담에도 빗발이 서렸다. 여느 담장에는 암기와만 넣어서 쌓는 거랑 다르게 수기와 끝의 수막새를 섞어 음과 양의 기운을 맞추었다. 덕분에 독특한 디자인이 완성됐다. 긴 시간 빗물을 머금었다 말리며 더 단단해져 수백 년의 세월을 몸에 새겨넣었다. 좋은 황토로 쌓아서 비가 오니 붉은색이 더 진해졌다. 전국 담장 중 이곳을 최초로 1963년 보물(제350호)로 지정한 이유가 충분해 보였다.담장 말고도 건물 벽마다 무늬가 달라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수월루가 수리 중이라 문간채로 들어가도록 길을 내었는데 흙벽에 숭숭숭 박아넣은 돌의 모양이 정겹다. 전사청과 기숙사 건물인 거인재, 거의재의 벽은 민무늬이다. 다음으로 볼거리는 마당에 서서 보면 중정당 오른쪽이 교장 선생님이 쓰신 방인데 다른 방보다 한 걸음 뒤로 달아내 책을 많이 보관했다고 한다. 뒷벽의 무늬는 마치 책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책장 같다. 학자의 기운을 받으려고 서재 앞에서 찰칵, 기념사진을 남겼다.2019년 7월 유네스코는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 목록에 올렸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1543년), 경남 함양 남계서원(1552년), 경북 경주 옥산서원(1572년), 경북 안동 도산서원(1574년), 전남 장성 필암서원(1590년), 대구 도동서원(1605년), 경북 안동 병산서원(1613년), 전북 정읍 무성서원(1615년), 충남 논산 돈암서원(1634년) 이렇게 9곳이다. 이토록 어여쁜 대구 도동서원이 뽑힌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홉 곳 중에 오늘 도동서원을 보았으니 이제 네 곳이 남았다. 남계, 필암, 무성, 돈암서원도 곧 정복해 보고자 한다.건물 구석구석을 돌아 나오니 주차장 마당에 400살의 품이 너른 은행나무 사이로 저녁이 내린다.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조용한 밤의 분위기를 살린 서정적인 피아노곡인 쇼팽의 녹턴을 떠올리게 한다.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 나무가 가지를 흔들며 노란 단풍이 들 때 또 오라는 선율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김순희(수필가)

2021-09-12

이사 후기

나루끝을 지키고 선 느티나무. 보금자리를 옮겼다. 나는 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좀처럼 거처를 옮기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살던 집이 하천 확장 공사로 잠기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 주변에 살던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같은 동네로 함께 가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조용한 시골 동네에 살다가 도시로 나왔다. 이사 할 집의 위치가 기찻길 옆이란 소문을 듣고 왔는데, 와보니 숲이었다. 도시숲이라 산속 깊은 곳처럼 새소리 물소리 가득한 곳은 아니지만, 가까운 산에서 산비둘기가 날아와 가지에 앉아 울어 주니 조금은 위로받는다.새로 자리 잡은 동네는 나루끝이다. 포항여고 입구이며 수도산으로 가려고 길을 건너기 위해 기다리는 신호등이 내 발치에 있다. 새벽엔 아침잠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느린 걸음으로 지나가고, 해가 뜨기 시작하면 머리도 덜 마른 여고생들이 조잘거리며 발걸음을 서두른다. 이 길로 걸어서 출근하는 부지런한 직장인들의 바쁜 걸음걸이와 달리 포항초등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은 발밑에 개미집을 보느라 느즈락 거리다 신호가 바뀌려 하면 후다닥 뛰어간다. 조용한 시골의 아침보다는 시끄럽지만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시간이 잘 간다는 장점도 있다.이곳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동빈내항 근처의 학산역까지 철로가 놓여 있어서 기적 소리로 아침을 시작한 곳이다. 북쪽으로는 우현동에 유류 저장고가 있어서 포항역을 지나서도 철도가 이어져 있다가 걷어내고 그 부지에 숲이 만들어졌다. 유성여고 앞까지 이어진 산책로 곳곳에 마련한 벤치는 사람들이 시간의 여유를 부리는 곳이다. 수런거리는 입김이 내가 선 자리까지 달려와 내 겨드랑이에 쉬던 매미가 떨림을 멈추기도 한다.포항시가 노선폐지로 없어진 철도 구간을 걷기 좋은 숲 공간으로 만든 것은 2009년부터라 한다. 우현동 유류 저장고에서 서산터널을 지나 신흥동 안포 건널목까지 나무를 심고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를 만들었다. 그 길가에 나도 한 자리 꿰찼다. 특히 옛날 우현동 철길 일대는 연탄공장까지 있어 도시의 후미진 곳이었는데, 우리 친구 스물일곱 그루가 철길숲에 이사 오면서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그리고 2015년 KTX 신역사로 포항역을 이전해 기존의 포항역에서 효자역까지도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도가 되니, 이 구간에서 역시 레일을 걷어내 장미를 심고 조형물을 설치해, 기차가 걷던 길이 시민들이 산책하는 숲이 됐다.나와 친구들이 나루끝으로 이사 하는데 힘을 보태 준 이들은 기계면 봉계1리 선래 마을 사람들이다. 그 동네 입구에서 300년이나 마을 지킴이를 했던 내 경력을 인정해서 하천 확장 공사에 휩쓸려 가는 것을 안타까이 여겼다. 내 어깨에 올라 미끄럼을 타며 어른이 되고, 여름이면 내 그늘에 와서 더위를 잊던 어르신들이 앞장서서 살려냈다. 이 뜻깊은 사연을 내 발 앞에 동그란 비석에 새겨넣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키 큰 우리가 언제 불쑥 솟아난 것인지 궁금하지 않도록 말이다.2010년 5월 3일 이사를 왔으니 벌써 십 년이 훅 지났다. 친구들도 근처에 띄엄띄엄 자리를 잡아 뿌리를 내렸다. 십 년이란 시간 동안 메타세쿼이아 친구들이 수북하니 이사와 줄지어 서 있어 열병식하는 군인들처럼 늠름하다. 덕분에 동네가 든든하다. 안심하고 노랗게 둘레에 금계국이 피었다. 데크에는 수로가 있고 사이사이 둥그런 연못도 있어서 연꽃 화분이 차지하고 앉았다. 언제 피었다 지는지 보려고 길게 그림자를 그쪽으로 드리운다.남한에는 1천년 이상 살아있는 화석인 노거수가 64그루 있다고 한다. 그중 25그루가 나와 같은 이름을 가졌다. 그중 13건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삼척 도계읍에는 1천년을 사신 할아버지가 살고,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에는 800살인 당숙이 사신다. 모든 노거수 어르신들이 내가 살았던 기계면처럼 시골에 사신다. 멀리서도 그 풍채를 알아볼 수 있게 품이 넓다. 그 모습만으로 이 동네가 유서 깊은 곳이라는 설명을 대신하는 안내장이다.나는 나루끝 도시숲의 팸플릿인 느티나무다. /김순희(수필가)

2021-09-05

담백하고 간결하게

해가 뜨기 전 출발했다. 고요한 숲에 우리 발소리만 가득했으면 하는 바람이 일찍 잠을 깨웠다. 아직 잠이 덜 깬 7번 국도를 달리니 바다에 아침노을이 붉다. 동해에 잠겼던 해가 몸을 막 건져 올려서인지 바다와 주위의 구름까지 물들여 놓았다.가을 여행길에 어울리는 곡을 틀었다. 어제 음악 사이트에서 내려받은 노래다.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우~돌아선 그 사람 우~생각나네~’ 정경호의 ‘회상’이 차 안에 울려 퍼진다. 떠나버린 여자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을 읊조리듯 부른다. 진짜 노래를 잘 하는 가수가 부르는 열창이 아닌, 배우가 기교 없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담백한 수필 같아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한 번 더 들었다.예배시간에 이런 감동을 느낀 적이 있다. 순서에 맞춰 강대상에 올라 마이크 앞에 선 집사님, “예수님 우리 집에 멸치젓갈을 담갔는데 지금 딱 맛이 들었으니 한 번 오셔서 따뜻한 밥 한 숟갈에 얹어 맛보아 주세요. 그리고 베란다에 들여놓은 소국이 한창이니 향기도 함께 맡아 주세요.” 시를 써와서 낭독하듯 들려주는 기도가 생전 처음 듣는 기도라 가만히 고개를 들어 어떤 분이신가 하고 살폈다. 보통 장로님들은 나라 걱정으로 시작해서 태풍이 쓸어간 곳의 피해주민 안부를 챙기고, 목사님 말씀에 은혜가 넘쳐나길 염원하며 긴 기도의 끝을 맺는다. 그 많은 기도 중에 몇 해 전에 들은 그날의 기도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 건 아마도 그 집사님의 기도가 예수님을 친구라 여기고 드리는 담백한 초대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글도 담백하고 간결한 문체가 좋다. 한자 말을 주저리주저리 엮어 펼쳐 놓거나 미사여구를 주렁주렁 걸친 어려운 글보다 이야기하듯 쉽게 쓴 글이 좋다. 오늘 찾아가는 숲도 그런 곳이다.사진 찍는 지인을 통해 알게 된 곳, 가봐야지 하다 몇 년이 쓰윽 지나버렸다. 이번에는 꼭 가려고 마음을 먹으니 매일 비가 쏟아져 길동무인 남편의 발목을 잡았다. 일기예보를 수시로 찾아보다가 내일이 태풍의 눈인지 하루 맑다고 나왔다. 코로나 걱정도 되어서 사람들 뜸한 새벽에 가서 보고 오자고 부추겼다.7번 국도에서 영덕 상주 간 고속도로에 올랐다. 며칠 내린 비가 하늘로 오르며 구름을 만들었다. 우리가 갈 영양 수비면 방향의 산 중턱에 구름이 걸렸다. 구름 아래 동네 논에 벼가 벌써 알을 채웠고, 고추 고랑마다 반짝 맑은 날이니 식구들 모두 나와 고추 따느라 바빴다.영양 수비면 죽파리 주차장에 다달았다. 대여섯 대 정도 댈 수 있는 주차장이라는 이야기에 우리 자리가 없으면 어쩌나 싶어 더 일찍 왔더니 다행히 세 번째였다. 차 한 대 정도 올라갈 수 있는 비포장 길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다. 3.2 킬로미터를 걸어가야 숲이 나타난다니 천천히 걷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길에 오롯이 남편과 나뿐이었다.며칠 내린 비가 골짜기에 쏟아져 내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시원하게 큰지 귀가 먹먹하다. 한시가 바쁜 매미의 한껏 몸을 떠는소리도 물소리를 뚫고 나왔다. 또 걷자니 구부러진 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코끝에 느껴졌다. 칡꽃 향기다. 세찬 비에 보랏빛 꽃잎을 한 자락 길에 뿌려놓았다. 그 옆에 개머루가 터키옥처럼 파란빛으로 익어간다. 그렇게 물멍을 한참 매미멍을 또 한참, 한 시간쯤 걸으니 어느 순간 어둡던 숲이 환했다. 여기서부터는 자작나무의 세계에요 한다.산 하나가 자작나무의 세계다. 드레스코드가 하얀색인 파티에 초대받았다. 모두가 흰색인 틈에 남편과 나만 색깔 옷이라 확 튀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자작나무가 자신의 순백의 삶을 들려준다. 자작자작, 숲의 목소리는 맑게 끓인 닭곰탕의 맛이다. 막냇동생 백일에 이웃에 돌린 백설기 떡이다. 담백하고 간결하게 하늘로 뻗어가는 문체다. 가을의 문턱에서 듣기 좋은 맞춤 곡이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기도이다.산을 내려오며 뺨을 만지니 촉촉하다. 가을이 담뿍 묻어 있다. /김순희(수필가)

2021-08-29

안동

자두가 맛있는 계절이다. 물렁한 것보다 단단한 식감이 취향이라 과일가게에 가면 주먹만 한 자두를 골라 바알간 부분 한 입 깨물어보고 산다. 새콤한 맛이 입안에 번진다.어릴 적 내 고향 안동에서는 자두를 자두라 부르지 않았다. 우리 집 담장에도 이웃집 미정이네 마당에도 한 그루씩 있던 추리나무, 누구보다 봄을 부지런히 준비해 잎보다 먼저 하얀 꽃을 피웠다. 후루룩 봄바람 따라 꽃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꽃잎 대신 초록색의 열매를 내민다. 새끼손톱만 하던 초록색이 하루하루 옅어지다 연두색이 될 즈음 우린 나무를 흔들어 추리를 따먹었다. 한꺼번에 나무를 터는 게 아니라 올려다보고 젤 굵은 것을 골라 하루에 몇 개씩 골라 먹었다. 빨갛게 다 익을 즈음엔 몇 개 달려 있지 못했다. 글을 쓰는 지금, 생각만으로도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우리 동네에서는 추리였던 과일이 자두라는 걸 포항으로 전학을 오며 알았다. 포항이 고향인 남편은 자두를 애추라 불렀다. 애추를 따먹다 나무에서 미끄러져 발목을 가물탔다고 했다. 가물타다, 진짜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함께 일하는 선생님이 한쪽 발에 반깁스를 하고 출근했다. 발을 잘 못 디뎌 접질렸다며 한동안 절룩거려야 한다니 여름에 고생이라고 위로해 주었다.출근 전에 남편이 ‘가물탔다’라고 해서 웃었다고 했더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다. 발목 접질렸다는 말이라고 해도 듣느니 처음이라고 포항에서 나고 자란 사람조차 모른다고 했다. 고향 친구들 단톡방에 물어도 안 쓰는 말이라니 나만 아는 말이었나?저녁에 남편에게 가물탔다라는 말을 아무도 모르더라고 하니, 핸드폰을 펴서 한참을 찾더니 글 한 편을 보여주었다. 경상도 사투리를 모아 명사, 동사, 형용사로 나눠 뜻풀이를 자세히 해 놓았다. 한쪽 발로 뛰기는 깨금뛰기, 그저께는 아~레, 인지 가 온나는 지금 가져오라는 뜻이다. 도련님은 대렴, 빻은 가루는 채가 아니라 얼기미로 곱게 치고, 방문에 구멍이 나면 한지 대신 문조오를 발라야 한다. 많은 사투리 사이에 가물탔다도 껴 있다.옆에서 큰아이가 혼자 하기 제일 힘든 일이 갈비집에 가서 고기 구워 먹는 일이라니 누구든 ‘비우만 넙적하면 된다’고 남편이 답한다. 아들에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냐고 하니, 문맥상 얼굴에 철판 깔면 된다는 뜻 같은데 비우가 무엇인지 넓적하면 된다는 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단다. 그렇지, 뜻만 통하면 되지 정확한 의미까지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여름 방학 특강 마지막 날, 안도현 시인의 시를 주제로 수업을 했다. 안동 옆 동네인 예천에서 태어난 시인도 자두를 추리라고 불렀다고 썼다. 포항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문제로 내었더니 처음 듣는 말이라 전혀 떠올리지 못해 ㅊ, ㄹ 초성까지 힌트로 주어도 온갖 모음을 다 갖다 붙이고 나서야 정답을 맞혔다. 자두가 추리라니 신기하고 재밌단다.수업을 끝내고 핸드폰을 켜자 울릉도에 살러 간 친구의 문자가 당도해 있었다. 안도현 시인의 신간을 읽다가 ‘안동’이라는 제목의 시를 보자 내 생각이 났다며 시 전문을 꾹꾹 눌러 적어 보냈다. 시 속에 시인의 어머니는 매화로 피고, 누이에 대한 시를 적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하고 싶지만, 집 나간 아버지가 30년 넘게 돌아오지 않아 누이는 태어나지 못하고, 그래서 누이에 대한 시는 한 줄도 시인에게 오지 못 한 채 안동시 태화동 어머니 아파트로 저녁은 절룩거리며 오고 있다고 읊조렸다.문자를 읽으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포항에 어느 교실에서 내가 안도현의 시를 아이들 입에 떠먹이는 순간에 친구는 바다 건너 울릉도 학교 관사에 엎드려 같은 시인의 시를 읽다니, 그것도 많은 시 중에 안동을 읽다니. 혹시 우리 교실에 CCTV 달아 놓고 지켜본 것이냐고 농담을 건네니 친구도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고향 떠나와 포항에 산 지 40년이다. 안동에 살았던 시간은 겨우 14년, 그 안동이 이런 기적의 시간을 만들어 내게 보내준다. /김순희(수필가)

2021-08-22

친구가 보내온 사진 한 장, 이태리타올에 ‘다 때가 있다!’라는 글귀가 적혔다. 몸에 끼인 때와 삶에 걸쳐진 시간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말이라 슬쩍 웃음이 난다. 때는 때 맞춰 씻어내야 하니 더 적절한 표어 같다.시시때때로 꽃이 핀다. 대한민국은 꽃공화국이라고 할 만큼 일 년 내내 다른 도시에 뒤질세라 꽃축제가 이어지고, 카페도 커피 맛보다 정원에 핀 꽃이 더 손님을 불러들인다. 수국 맛집, 야생화 맛집, 해바라기 맛집에서 찍은 사진들이 sns를 통해 내게 당도한다. 꽃공화국 시민답게 보는 즉시 길을 나선다.꽃의 절정을 보러 갔다. 백일동안 붉은 꽃이라 백일홍이라 이름 붙여진 배롱나무 군락지 명옥헌에 가려고 새벽길을 나섰다. 포항에서 담양까지 이동 거리가 만만치 않다. 고속도로에 올라서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나선 길이니 가보자하고 대구를 지나 전라도 경계선에 들어서니 다행히 서서히 비의 양이 줄었다. 담양은 가로수조차 배롱나무라 길 양옆으로 마중 나와 붉게 손을 흔들며 우리를 맞았다. 명옥헌 주차장에 내리자 보슬비가 오락가락했다.비를 흠뻑 머금은 정원이 더 붉었다. 꽃잎에 물방울이 맺혀서 색을 더 진하게 만들었다. 정원 연못에 떨어진 꽃잎이 한가득 떠다녀 꽃무늬 카펫을 덮은 듯했다. 나무에 열린 꽃이 반, 세찬 비에 떨어진 꽃이 반이었다. 떨어진 꽃이 비 덕분에 오래 촉촉하니 제모습 그대로였다. 비가 와서 꽃의 절정을 보는 게 어려울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8월 중순의 강렬한 햇살을 비가 가려주어 꽃을 더 오래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좋은 풍경을 보러 매년 가자고 손가락 걸며 약속했다.벌써 4년 전 일이 되어버렸다. 3년 전에는 나서다가 어긋나 대구 화목정 백일홍을, 다음 해는 안동 병산서원 백일홍으로 대신했다. 지난해 이맘때의 백일홍이 절정이었으니 하고 찾아가면 한철이 이미 지난 끝물이다. 며칠 더 먼저 와보리라 하고 다음 해 오늘 찾아가면 봉오리가 미쳐 열리지 않기 일쑤다. 절정인 날에 걸음 하기가 내 마음처럼 쉽지 않다. 그나마 집에서 가까운 곳은 때를 맞추기 쉽다. 8월에 들어서면서 오며 가며 살펴볼 수 있어서다. 명옥헌의 경험으로 비가 오는 날이면 얼른 길을 나서리라 마음먹고 기다렸다.올해 점찍어 둔 곳은 종오정이다. 조선 영조 때 학자인 최치덕의 유적지이다. 영조 21년에 돌아가신 부모를 모시려고 일성재를 짓고 머무를 때, 학문을 배우려고 따라온 제자들이 글을 배우고 학문을 닦을 수 있도록 귀산서사(龜山書社)와 함께 건립한 것이다. 8월이면 연못에 연꽃이 한껏 꽃대를 올리고 둘레에 백일홍이 가지를 늘어뜨려서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소나기 예보가 있던 주말 오후, 비가 아직이지만 집을 나섰다. 천북쪽 하늘이 뿌옇게 보였다. 넓은 들에서는 소나기가 몰려오는 것이 보인다. 어릴 적엔 들 끝에서 달려오는 소나기보다 걸음이 느려 힘껏 달려가도 집에 다다르기 전에 몸이 흠뻑 젖곤 했다. 이젠 천리마 같은 차를 가졌으니 소나기를 따라잡기도 하고 비를 피할 수도 있다.천북 무궁화 가로수가 끝나는 지점에 길섶으로 들어서면 금방 종오정이 나타난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붉은 백일홍이 가득한 고택이 눈에 들어오고, 꽃소식을 들은 사람들로 작은 동네가 수런거렸다. 집 주변으로 보랏빛, 분홍빛의 어린 배롱나무도 색을 보태고 있었다. 연꽃은 아직 절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연못 옆에 까치발을 한 백일홍은 홍조 가득한 새색시처럼 바알갛게 가지를 물들였다. 그 아름다움에 화룡점정을 우리가 도착하기 직전에 소나기가 찍어두었다. 화라락 떨어진 꽃잎으로 꽃그늘이 가득 만들어졌다. 흠…. 깊은 호흡으로 잠시 꽃멍을 때렸다.돌아오는 길에 서산을 보니 언제 비가 왔나 싶게 노을이 진다. 시(時)를 맞춰 갔더니 때마침 뭉싯한 구름이 꽃처럼 붉어지는 하늘에 시(詩)를 적는다. 장관이다. 다 때가 있다. /김순희(수필가)

2021-08-08

화장을 지우고

옛날 옛날에, 스님이 끼니때마다 바위에서 한 알씩 나오는 쌀을 받아서 모아 한 그릇의 밥을 지어서 먹었다고 한다. 어느 날, 욕심이 생긴 스님이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바위를 파 보았더니 쌀은 없고 물만 나왔다고 한다. 어머님이 남편 어릴 적에 들려주신 이야기(사실은 임중리의 국구암의 “쌀바위 전설”이다.)이다. 시댁 근처에 이 전설을 간직한 절이 있다. 그 절에 화장을 곱게 했던 부처님도 있다고 했다.화장은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한다. 립스틱 바르는 것이 화장의 시작이자 끝인 나는 뭐가 왜 중요한지 잘 모른다. 친구들은 썬크림이라도 발라야 한다고 만날 때마다 걱정을 하지만 나는 게으름이 몸에 익은 탓에 화장하는 것보다 저녁에 지우려고 씻는 일이 더 귀찮아서 화장을 하지 않는다. 기초화장품도 하도 여러 가지라 바르는 순서가 늘 헷갈려 세수하고 아이크림 한 가지만 바른지 오래다. 자연스럽게 늙어가고 싶은데 주위에서 늘 걱정을 해 준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가 보다.이런 나를 잘 아는 남편이 오늘은 화장을 지운 불상이 있다고 보러 가자고 앞장섰다. 시댁 근처인 포항시 남구 장기면 방산리에 자리한 고석사였다. 가는 동안 예전에 나와 이곳에 온 적이 있다고 기억을 떠올려보라는데 나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좁은 산길을 올라가는 진입로부터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런 나와 달리 남편은 초등학교 다니며 산을 넘어 소풍을 왔고, 대학 시절에는 탁본을 뜨려고 찾기도 했다니 익숙한 곳이었을 테다.고석사는 이름에 옛 고자를 넣은 만큼 오래된 역사를 지녔다. 신라 선덕여왕이 세웠다 하니 얼마나 긴 세월 그 자리에 있었는지 백 년도 겨우 사는 인간이 가늠하기 힘든 시간이다. 입구에 새겨놓은 입간판에 선덕이 왕좌에 오른 지 7년(638), 동쪽으로부터 세 줄기 서광이 3일 동안 궁전을 비추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그 빛의 발원지를 찾게 하니, 지금의 고석사 바위에서 발하는 빛이었다. 왕이 태사관에게 점을 치게 하니, 그 바위를 다듬어서 불상을 만들고 절을 지으면 길하다고 하여, 불상을 조각하고 이 석불을 모실 법당인 보광전(普光殿)을 지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미상이다. 지금은 보광전과 산신각, 극락전이 있다.천 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킨 절이다. 하얗게 덧칠했던 화장을 말끔히 지웠다는 불상이 궁금해 설명문도 대충 훑고 보광전에 올랐다. 종교는 다르지만, 절에 들어갈 때는 적은 금액이라도 시주를 하라기에 지폐 한 장 접어서 불전함에 넣었다. 절하는 건 생략하고 미륵불과 마주했다. 세 개의 산 모양을 등에 지고 부처님이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보광전 안에 위치해서 바람과 비를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두껍게 칠한 석고를 벗겨내며 상한 것인지 흘러내린 옷깃 여기저기 풍파를 한껏 맞은 모습이다. 다른 곳의 불상들은 앞면만 보여주지만, 고석사는 불상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감상할 수 있다.남편이 2007년 찍은 하얀 불상의 사진을 보여줬다. 다 벗겨낸 지금의 모습과 비교하니 전혀 다른 부처님이다. 친구들에게 두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같은 장소에서 찍은 것이라고 설명을 하니 놀란다. 옷부터 온몸이 하얗고 입술은 발갛다. 머리만 까맣게 칠을 해서 사진으로만 보니 모자를 씌운 듯한 느낌도 난다. 1923년경 석고로 치장한 것으로 추정하며, 2009년에 덧씌운 화장을 지웠다.신라 시대 사람들이 새긴 부처님을 일제시대에 누가 석고를 돌 표면에 발라 하얀 모습으로 억지 화장을 시켰을까, 무슨 이유였을까? 사람이 세월을 덧입고 나이 들어가듯 돌에 새긴 부처님도 천 년의 시간을 덧입어야 자연스러운데 말이다. 익산 미륵사지의 탑과 안동 법흥사지 7층 전탑을 수리한다고 바른 콘크리트와 무엇이 다른가. 미륵사지는 콘크리트를 걷어냈고, 법흥사지는 근처를 지나는 철길을 들어내는 중이다. 가부키 배우 같은 두꺼운 화장을 지운 부처님이 편안해 보였다. /김순희(수필가)

2021-08-01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블로그에 무궁화 꽃이 피었다. 3년 전, 7년 전 오늘 일기를 다시 보여주는 블로그의 서비스 덕분으로 같은 날에 쓴 대여섯 개의 오늘 일기가 떠올라 잊고 있던 그 날의 이야기에 또 한 번 웃을 수 있어서 좋다. 12년 전 이맘때도, 우리 동네에는 무궁화가 화려한 외출을 했다.2009년 7월 오늘, 안동에서 외할머니가 오셨다. 연세가 많으셔서인지 집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하셔서 겨우 모시고 온 길이었다. 손녀인 내가 꽃구경 가자니 이 나이에 꽃은 봐서 뭐하냐고 안 간다고 손사래 치신다. 힘드시면 업어드릴 테니 가자며 억지로 모시고 기청산수목원으로 향했다.입구의 키 큰 소나무를 보고 “야야, 이크러 좋다 야야.” 를 연발하신다. 입장료가 비싸다 하시다가 숲해설가가 따라다니며 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니, 또 “아이구, 야드래이.” 하시며 좋아하신다. 지팡이를 짚고서도 잘 따라 다니셨다. 증손자 규헌이가 부축해 드리려 해도 싫다셨다. 숲해설가가 우리 가족관계를 묻고는 친정엄마도 모시고 남편이 운전해 4대가 왔다니 신기하다며 웃었다. 꽃과 나무 그늘이라 이 더위에도 시원한 산책이었다.그날 기청산 수목원은 무궁화 축제 기간이었다. 꽃의 색깔도 여러 가지였고 모양도 다양했다. 무궁화의 종류는 200종 이상이 있는데 품종은 꽃잎의 형태에 따라 홑꽃, 반겹꽃, 겹꽃의 3종류로 구분하고, 꽃의 중심부에 단심(붉은색)이 없는 순백색의 흰 꽃은 배달계라 하며, 꽃잎에 무늬가 있는 종류는 아사달계라고 한다. 단심계는 꽃의 중심부에 붉은 무늬가 있는 것으로 백단심계, 홍단심계, 청단심계로 구분된다. 외할머니께 무궁화의 이름 하나하나를 읽어드렸다. 이렇게 여러 종류가 있는 줄 평생 모르고 사셨다며 한참을 무궁화동산에 머무셨다.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선정한 것은 1896년 독립문 주춧돌을 놓는 의식 때 애국가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을 넣으면서 민족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고 한다. 무궁화의 정신은 우리 겨레의 단결과 협동심으로 꽃잎이 떨어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꽃잎의 근원은 하나인 통꽃이며, 인내, 끈기를 나타내듯 여름철 100여 일간 한 그루에서 3천 송이 이상의 꽃을 피운다고 하니 무궁한 꽃이라 불리는 것이다.여름에 들면서 도시숲을 아침마다 걷는다. 오랜 시간 기차가 다니던 레일을 걷어낸 자리에 나무와 꽃을 심어 숲을 만들어 걷기에 좋은 산책로가 됐다. 유성여고 앞에서 시작해 걸으면 효자교회까지 연결되는 긴 숲이다. 내가 걷는 길은 우현사거리 부근이다. 메타세쿼이아가 늘씬한 키를 뽐내며 줄지어 서서 파란 하늘과 잘 어우러져 새소리가 함께 들려 숲속을 걷는 기분이 든다. 그 길로 머리도 덜 말린 채 출근하는 사람들, 교복을 입고 조잘거리며 학교로 향하는 여중생들, 어제도 만난 강아지가 할머니를 끌고 냄새 맡기에 열심이다. 시내 방향으로 걸으면 인공폭포가 나타나고 곧 수도산이 나타난다. 입구에 절이 세 개나 있어서 진짜일까 궁금한 마음에 다 올라가 보았다.오늘은 무궁화가 만발한 충혼탑을 오르기로 했다. 입구에서부터 길 양쪽에 무궁화가 가로수로 섰다. 분홍 꽃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꿀벌이 꽃술에 매달려 아침 준비로 한창인지 인기척에도 달아나지 않는다. 충혼탑이 어디 있는지 무궁화만 따라가면 알 수 있게 줄지어 심어놨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교문 앞에 키 낮은 무궁화가 담장을 대신이었다. 발밑에는 또르르 말린 꽃이 가득 떨어져 있어도 오늘 또 새로운 꽃이 활짝 펴 교실로 향하는 우리에게 함박웃음을 안겨주었다. 그때는 무궁화는 키가 작은 줄만 알았다. 수도산의 무궁화 가로수를 보니 이렇게 늘씬하게 자랄 수 있구나 싶다.매일 걸어도 매일 새로운 꽃을 피워 우리를 반긴다. 가까이 있어 별명도 십여 개인데, 그중 ‘일급(日及)’은, 아침에 햇빛을 받아 피었다가 저녁에 해와 함께 진다는 데서 주어진 이름이다. 무궁한 무궁화가 수도산 가득 피었다. /김순희(수필가)

2021-07-25

별이 빛나는 밤에

영일대로 걸었다. 저녁을 먹고 나온 산책길, 북부 바닷가에는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붐볐다. 장미정원 가까이 무대에서 행사진행자의 마이크 소리에 따라 함성이 오르내렸다. 광장에는 농구공을 튕기는 아이들, 더운 날씨와 상관없이 다정하게 어깨를 맞댄 연인들, 강아지에게 이끌려 나온 이웃들, 부딪히지 않으려 애쓰며 걸어야 할 정도였다. 바다로 조금 더 가까이 나앉은 누각에 오르니 바람이 훨씬 시원하다. 누각은 네 방향으로 열려있어 동해로 이어진 바다 방향에서는 하얀 요트가 다가왔다가 멀어져가고 저 멀리 포스코 건물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공장에 불빛이 밤을 낮처럼 일하는 이들이 있다고 알려준다.환여동 카페촌으로 몸을 돌렸다. 가게들이 불빛을 환하게 바다에 쏟아붓는다. 영문을 모르고 몰려나온 그 불빛을 파도가 일렁이며 휘젓는다. 동행한 아들에게 이 풍경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냐고 물었다. 글쎄요 하더니 금방 ‘고흐’의 그림이 떠오른다고 했다. 맞다, 고흐가 그린 두 개의 ‘별이 빛나는 밤에’ 중 론강에 비친 별빛과 닮았다.빈센트 반 고흐는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죽기 전 1888년 9월에 그렸다. 그는 70~80도의 압생트를 즐겨 마셨다고 하는데, 독주 속에 테르펜이라는 물질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황시증이라는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일부에선 고흐가 이 병을 앓았을 거라 주장한다. 황시증에 걸리면 노란색이 유독 진하게 보이고, 빛을 볼 때 빛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 근거로, 고흐의 초기작과 후기 작품을 비교하며, 그림에 별빛과 햇빛이 무리지는 표현이 많다고 지적한다. 고흐가 밤하늘을 표현하는 나름의 방식이라기보다는 실제로 하늘과 별이 그림과 같이 보여서, 보이는 대로 그렸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자주 ‘어지럼증’을 호소했다는 내용이 있으니, 더 설득력 있게 들리기도 한다.그러나, 영일대 누각에서 이 풍경을 본다면 해석이 달라질 것이다. 론강 빛의 이지러짐이 포항 앞바다에 일렁이는 빛과 너무나 똑같으니 말이다. 카메라로 바다에 흐르는 별빛을 그려본다. 아들이 영일대의 불빛을 보고 바로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제목을 떠올릴 만큼 고흐는 사랑받는 화가이다. 많은 이가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의 제수씨인 요한나 덕분이다. 고흐가 3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고, 동생 테오도 몇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잠깐의 결혼 생활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잃은 요한나는 아들을 혼자 키우며 두 형제가 18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번역하는 일을 진행했다. 편지 속에 담겨진 형제애와 예술에 대한 사랑을 사람들에게 알려 무명의 화가로 세상을 떠난 고흐의 실력을 빛나는 별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빈센트(형의 이름을 따서 테오가 지어줌)는 어머니가 못다한 번역을 마무리하고, 고흐의 그림만을 위한 미술관 건립 하는 일에 힘썼다. 암스테르담에 지어진 고흐 미술관은 세계 사람들을 네덜란드로 향하게 만드는 스타가 됐다.‘고흐’ 하면 선명한 노랑이 떠오른다. 그의 해바라기가 좋아서 매일 덮고 만지는 무릎담요 디자인이 해바라기인 것으로 골랐다. 여름에는 화병에 해바라기 꽃을 꽂아두고 즐기기도 한다. 또 동생 테오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그린 아몬드꽃이 파란 배경에 가득한 그림은 우산에 담아 들고 다닌다.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고흐 그림을 좋은 친구와 보려고 갔는데 이틀 연속으로 보아도 좋았다. 퇴근길에 보니 누군가 나처럼 고흐를 좋아하는 이가 ‘별이 빛나는 포항’이라는 공연을 기획했는지 거리 곳곳에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이 여름, 포항을 여행하게 된다면 바리톤의 묵직한 음색과 재즈 콘서트를 날짜별로 찾아보아도 좋다. 그리고 밤이 깊으면 영일대 누각으로 나가 내가 발견한 고흐의 그림을 찾아보기 바란다. 고흐가 사랑했던 론강의 별들이 포항에 내려와 흔들리는 명작을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김순희(수필가)

2021-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