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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얀 고무신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어린 시절 유난스러운 병치레로 부모님은 나로 인해 무던히 속을 썩였다 한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 하나는 아버지가 나를 무동 태우고,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걸어 한의원으로 가는 것이다. 초록색과 주황색 색실로 꿩을 수놓은 조끼를 입고, 하얀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은 젊은 아버지가 큼지막한 걸음걸이로 의원을 찾아가는 한겨울 풍경.그때 아버지는 스물아홉 청춘이었고, 발에는 하얀 고무신이 신겨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신발을 신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필시 양말 발이었을 것이다. 집에서 출발하여 경유지인 한의원을 거쳐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길을 걸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고작 만 세 살 전이었고, 폭설로 어른들마저 힘겹게 길을 걸어야 했던 사정이 있던 터였다.세월이 많이 흘러 내가 아버지 연배가 되었을 때,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하고, 박사과정에 다니고, 여름방학 특강을 할 때, 나도 아버지처럼 하얀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집에서 학교까지 편도 2시간 20분이 걸리는 장거리 통학생이었던 시절을 돌이키면 지금도 짠하다. 지하철 1호선에 냉방기 대신 선풍기가 돌아가던 시절이었으니, 두 발은 얼마나 뜨거웠을까?!언젠가 제기동에서 막차를 타려고 제기 천변(川邊)을 서둘러 지나갈 때 일이다. 밤 11시가 조금 지난 시각, 하얀 고무신 발아래 무엇인가 뭉클, 하는 느낌이 선연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게 뭐지, 하는 섬뜩함과 고약한 심사가 어우러져 말할 수 없는 낭패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설마?! 아니, 그랬다. 커다란 시궁쥐가 고무신 아래 밟힌 것이다. 아아!…녀석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기사식당이 즐비(櫛比)한 천변에서 야식을 만끽하고 여유롭게 야간산책을 나온 녀석에게 나의 고무신은 폭력에 가까웠을 터! 하지만, 나도 그랬고, 쥐도 마찬가지로 침묵하면서 상황을 끝까지 통찰하고 인내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상황은 평온하게 정리되었다. 하지만 그때의 충격적인 섬뜩함은 아직도 선명하다.그것이 두 번째 하얀 고무신의 소회다. 지난 2월 20일 시작한 ‘청도 인문학 강연’ 마지막 무렵부터 나는 하얀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두어 해 전 이서(以西)에 사는 양반 집에 다니러 갔다가, 그 집 안주인이 선물한 하얀 고무신이다. 안주인은 솜씨가 출중한 분이어서 고무신에 화사하게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아주 멋지고 우아한 하얀 고무신이다.오랜만에 신어보는 고무신은 여간 편리한 게 아니었다. 발에도 잘 맞고, 가벼운 데다가, 신고 벗기가 간명하여 마음에 쏙 드는 것이다. 급기야 그걸 신고 대구와 서울, 용인 나들이에도 나서는 형편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활개 치며 다닐라치면 눈치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냥 눈감아버리기로 한다. 남의 신발에 관심 가진 인간은 없는 법이기에!고무신은 이제 생필품처럼 느껴진다. 한여름 더위와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나와 동행하는 가까운 벗이 된 것이다. 도서관에서 거리에서 시장에서 동네 산책에서 나와 함께하는 하얀 고무신을 보며 추억에 잠기는 호사까지 누리는 행복이 이어지는 삼복염천이다. 신이여, 축복하소서!

2024-07-28

국뽕인가, 사실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벌써 한 달이 넘어가는 듯하다. 우연한 기회에 만난 유튜브 가운데 한국과 한국인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가득 찬 동영상 얘기다. 처음에는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자꾸만 보고 듣다 보니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요컨대 한류(韓流)의 세계적인 유행과 더불어 한국인과 한국을 찬양하는 국제적인 유튜버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오는 26일 개막되는 제33회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프랑스에서 건너온 여기자의 유튜브 방송이 그런 본보기 가운데 하나다. 그녀는 파리를 흐르는 센강에 입수(入水)하겠다고 공언한 파리 시장과 프랑스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한다. 지난 2년 동안 센강에 쏟아부은 3조 원 넘는 돈이 말짱 도루묵이었다고 위정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그녀는 36년 전인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맞이한 한국과 한국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심층 탐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한다. 거기서 그녀가 도달한 결론은 새삼 놀라운 것이었기에 잠시 소개한다. 한국인들은 당시 하나 되어 한강은 물론 낙후한 화장실을 말끔하게 손봄으로써 세계 최고 수준의 화장실 문화와 깨끗한 수질의 한강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반면에 거액을 투입했지만, 센강은 회복될 가능성이 현저히 낮고, 정치인들은 올림픽이 끝나고 난 다음 센강 입수를 고려해보겠다고 말을 바꾸었다고 한다. 파리 시민들은 여전히 노상방뇨(路上放尿)를 감행하여 곳곳에서 지린내가 등천하고, 오물이 강변을 뒤덮고 있다 한다. 이런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던 그녀에게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 이는 한국인이었다.국가와 공동체가 마주한 중대사를 위해 소중한 개인의 자유를 뒷전으로 미루고 사회-공공성 강화를 위해 한국인들은 손에 손을 맞잡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번 올림픽 개최에 부정적인 파리 시민 가운데 일부는 올림픽 보이콧까지 주장하며 노상방뇨와 쓰레기 투척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의식 차이가 결정적이라는 결론이 도출된 셈이다.이와 같은 결론은 두 가지 쟁점을 초래한다. 그 하나는 개인의 권리와 공공성의 충돌이 발생하면 어느 선까지 누가 물러설 것이냐, 하는 것이고, 그 둘은 그런 차이를 가져오게 만든 사회-정치-역사적인 맥락을 어떻게 수용할 것이냐, 하는 문제다. 따라서 간단명료하며 지극히 명쾌한 단답형 결론 도출은 불가능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공론장(公論場)은 이런 경우 꽤 유용하다. 하나의 의견을 제시하고 대중의 사유와 인식을 열린 토론 마당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정해진 결과를 향해 질주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과 견해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상호 이해와 인식의 교환을 일상화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실험장이자 건강한 시민의식의 발현 공간이다.뜻하지 않은 유튜브와 대면함으로써 나의 인식과 사유가 전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분명 기분 좋은 현상이지만, 혹여 빠뜨린 대목은 없는지, 주변 사람들과 토론하고 있다. 거기서 나오는 목소리가 우리 사회의 열린 공론장 형성에 작은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2024-07-21

밀양 여행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여행을 기획하면서 당신이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은 무엇인가?! 풍경, 고적, 역사, 먹을거리, 휴식, 문화와 예술. 이런 목록에서 눈길 가는 대상이 몇 가지는 있을 터! 지난주 초에 1박 2일 일정으로 밀양을 다녀왔다. 햇볕이 빽빽하게 내리쬐는 태양의 고장 밀양(密陽)은 흐리고 간간이 비를 뿌렸다. 장마철의 밀양은 여전히 매혹적이었다.광주와 대구, 청도에서 모인 8인의 중년 남녀가 함께하는 밀양 여행에서 내가 주안점을 둔 것은 문화와 역사였다. 1년에 두 번 정도 모여 만남의 기쁨을 나누고, 지나온 날들과 다가올 시간을 터놓는 것이 우리 ‘인문 여행’ 참가자들의 작은 목표기 때문이다. 나를 뺀 다른 사람들은 책상물림으로 밀양에 익숙하지 못한 까닭에 나 홀로 미리 답사도 했더랬다.표충사에서 시작하여 케이블카를 타보고, 호박소 일대를 거닌 연후에 각종 전(煎)과 밀가루 음식으로 저녁을 할 심사였다. 이튿날에는 울주의 가지산 석남사와 위양지를 돌아보고 고깃집에서 점심을 들고 해어질 요량으로 일정을 세웠다. 그러나 세상일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는 법이 얼마나 있던가?! 뜻하지 않게 저녁 자리가 바뀌면서 일정이 흐트러진다.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에 기대어 중지(衆智)를 모아 일정 변경에 착수한다. 그 와중에 나는 밀양의 대표 인물 세 분을 꼽는다. 1270만 관객을 불러 모은 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에 나오는 대사의 주인공,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백범 김구와 잠시 조우(遭遇)하는 의열단장 김원봉은 1946년 여름에 표충사에서 안온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임진왜란 당시 승군(僧軍)을 지휘했던 사명대사(1544∼1610)도 밀양의 인물이다. ‘선가귀감’의 저자 서산대사 휴정의 뛰어난 제자였던 사명은 전란 중에 숱한 전공을 세운다. 그는 선조의 명으로 1604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여 명과 함께 귀국한다. 표충사에는 사명대사를 기리는 사당(祠堂)이 자리한다.두 분과 함께 내가 꼽은 인물은 불후의 작곡가 박시춘(1913∼1996)이다. 밀양초교 중퇴로 가방끈이 짧은 그는 1938년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으로 1000여 곡을 작곡한 그를 기리는 아담한 공간이 ‘영남루’ 옆에 위치한다.범종루의 범종(梵鐘)과 법고(法鼓), 목어(木魚)와 운판(雲版)에 담긴 이야기와 탑에 관한 기초적인 상식을 일러준다. 세상에 존재하는 뭇 중생과 축생, 어류와 조류를 위해 스님들이 아침저녁으로 두드리는 네 가지 기물은 얼마나 아름답고 뜻깊은가! 상륜부, 탑신부, 기단부로 이뤄진 탑의 구조로 우리는 어렵지 않게 탑의 층수도 알 수 있다.차로 이동하다가 만난 한여름의 강렬한 빗줄기를 보면서 살아있음의 축복을 새삼 실감하는 것이다. 크고 작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우리의 가치 있는 생은 익어가는 법 아닌가?! 가을에 광주에서 재회할 것을 다짐하는 따사로운 눈길이 교차하며 인문 여행은 마무리됐다.

2024-07-14

뺑뺑이 1회 경기 50년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인간은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외부의 폭풍우에 내몰리는 경우와 마주하기 마련이다.아무리 강력한 의지와 뛰어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 해도 어쩔 도리없이 끌려가는 지경에 이르는 수가 있는 법이다. 이것을 우리는 운명이나 천명이라 부른다. 그럴 때 인간은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의 실체에 전율하거나 절망하기 마련이다.지난 7월 3일 자동차를 몰고 서울로 떠난다. 나의 모교 경기고 73회 정기 동창회가 열리는 날이다. 50년 전인 1974년 나는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에 따라 뺑뺑이로 경기고에 입학한다. 공동학군 005로 시작한 남녀 고교는 경기여고와 경기고였다. 그날 나의 선친은 평소의 절반밖에 걸리지 않은 시간에 귀가하셔서 나의 경기고 입학을 축하하셨다.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고교 평준화 정책 덕분에 나는 일생일대의 행운을 꿰찬 인간이 된다. 오래도록 많은 사람이 내게 뺑뺑이 1회 경기 입학생의 비애와 원한 같은 것을 물어왔다. 아주 드물지만, 아직도 그때 감상을 묻는 자도 있다.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나는 뺑뺑이 1회 경기 입학생이자 졸업생으로 여러 가지 유쾌하고 행복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고1 담임 정휘민 국어 선생은 호된 글쓰기 훈련으로 나의 습관 하나를 결정하셨고, 고3 담임 안성도 영어 선생은 소시민의 작은 행복을 일깨워 주셨다. 두 분 모두 경기고 선배였다. 그런 경기고 입학 50주년 기념행사가 지난 수요일 구(舊) 우미관(優美館) 자리에서 열린 것이다.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1990)에 등장하는 명소가 우미관이다.17살 소년들이 50년을 살고 나서 60 중반 나이에 다시 만났으니, 그 감회가 어떠했을 것인지는 짐작 가능하리라. 입학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2004년에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40 중반의 혈기방장한 시절이었다. 거기에 다시 20년이 보태지니 그사이 세상 버린 친구나, 투병 중인 벗들도 적잖게 늘어나 있다. 세월에 장사 없다는 말은 반박불가(反駁不可)다.어쩐 일인지 모르지만, 나는 예나 지금이나 출신고를 묻는 말에 경기를 말하고, 거기에 뺑뺑이 1회라는 말을 반드시 보탠다.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이 연유를 물을라치면, 뺑뺑이 얘기를 하지 않으면, 밤잠을 설친다고 대답한다. 타고난 결벽증도 있거니와, 사실관계 진술을 얼버무리는 것은 기질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화동 1번지 경기고는 사전에도 없는 ‘정독(正讀) 도서관’이 되었고, 삼성동 91번지 경기고 앞은 왕복 2차로 도로가 16차로 도로가 되었으니,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다시 만난 벗들의 얼굴에 새겨진 깊은 주름살과 백발 혹은 성긴 머리털은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의 무겁고도 슬픈, 행복하고도 만만찮은 시공간과 인연을 웅변하는 것이었다.고타마 붓다는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과 여기를 열렬하게 살라는 뜻이다. 그것을 재삼재사 확인하는 뜻깊은 자리가 서늘하게 마무리되는 우미관의 밤은 실로 아름다웠다.

2024-07-07

어느 동승(童僧)의 경우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첫 머리에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을 깊게 행하실 때 오온(五蘊)이 모두 공함을 밝게 보시고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셨다”는 구절이 나온다.이 구절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반야심경’ 전문의 의미는 크게 줄어든다. 여기서 ‘오온’이라 함은 인간의 실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일컫는다.수삼 년 전부터 나는 이 문구에 붙들려 헤어 나오지 못했다. 여러 해설서와 강의에서도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리하여 대구 도심에 자리한 작은 사찰을 찾아 스님들의 강연을 듣기 시작했다.그러던 차에 이탈리아의 양자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의‘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2023)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그때 시작한 불교 공부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요즘엔 ‘천수경’ 강연을 청강하고 있다. 사찰 1층에 마련된 제법 큰 강의실 벽면에 인상적인 그림 한 점 걸려 있다.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하는 동자승이 징검다리 위에서 무엇인가 응시하고 있다. 그것은 커다란 바위 위에 누군가 정성스레 쌓아올린 돌무더기, 아니 돌탑이다.우리나라 산야에서 흔히 마주치는 돌무더기로 이뤄진, 소원을 기원하는 고졸한 탑이다. 그림의 동승은 간절한 눈으로 돌탑의 정수리를 쳐다본다.그의 표정과 눈빛은 진지함을 넘어서 무엇인가 깊이 원망하거나 혹은 갈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자승을 휘감고 있는 저녁 햇살이 따사롭지만, 그는 그것을 전연 느끼지 못한다.하얀 고무신에 자주색 바지 그리고 연푸른색 저고리를 입고 파르라니 깎은 작은 머리가 정갈하다. 어떻게 그는 이곳에 흘러들게 되었을까?! 그의 부모는 누구였으며, 왜 어린 그를 절에 맡겨두고 어디로 떠나간 것일까?! 동승이 희구하는 혹은 원망하는 대상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오래도록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나만 빼놓고 다 이상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 얼마 전이다.왜 그런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는 기초적인 문제 하나를 두고도 우리 모두는 완전히 다른 과정을 거쳐 각자 고유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을 단출하게 줄이는 방법은 독재와 전체주의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젊었던 시절에도,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나의 생각과 판단과 습속과 행위는 하나의 굳건한 표준이라고 확신했더랬다.그런데 이제는 그런 믿음이 신기루에 지나지 않으며, 설령 누군가 그것을 공인한다 해도 쓸모없음을 깨우치게 되었다.나의 눈에 비친 대상과 그것이 불러오는 느낌과, 그것에 기초한 생각과 행위, 그리고 그것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인식작용의 허망함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결국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실체를 파악하게 된 셈이다.오온의 작용에 담긴 무상과 상호관계, 거기서 파생하는 번뇌 망상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 같은 동승을 보면서 그가 하루속히 평정심과 무아에 도달하여 득도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4-06-30

다시 하지(夏至)를 보내며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해마다 6월 20일이면 어김없이 서울로 방향을 잡는다. 벌서 3년째 그렇다. 어머니 기일이 6월 20일이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기일은 음력으로 정했으나, 날짜가 들쭉날쭉해서 어머니 기일은 양력으로 하기로 했다. 왕복 640km의 여정을 1박 2일에 진행해야 하기에 어느 땐 다소 고단하기도 하다. 무더위가 일찍 찾아든 올해가 그런 형국이다.21일 오후 햇살이 뜨겁게 내리비치는 마당에 들어오려니 잔디와 텃밭의 채소가 물을 갈구하는 듯하다. 이틀 전에 1시간 넘게 물을 듬뿍 주었으나, 땡볕과 바람으로 모두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일기예보가 내일 오전부터 강우를 알리고 있어서 물 주기는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이른 저녁을 마치고 부엌 창문 너머 동녘 하늘을 보노라니 붉은 보름달이 떠오른다.달력을 보다가 아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기일이 보름이었다. 그러니까 6월 21일은 2024년 하지이며 동시에 열엿샛날인 셈이다. 여름의 절정인 하지와 둥근 달이 떠오르는 시기가 교묘하게 겹치는 현상이 일어난 게다. 평상시와 달리 상당히 붉게 떠오른 달에서 어떤 상서로움과 기이한 천문현상을 확인함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언제부턴가 인간은 경이(驚異)로움과 경탄(驚歎)의 마음을 상실했다. 자연과학과 기술의 현저한 발달이 불러온 심각한 부작용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일상에 견고하게 자리하기 시작한 무한반복의 타성은 생의 건조함과 무의미성을 강화했다. 낯선 풍경과 사람과 인연이 매개하는 경탄과 경이의 순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계화된 회색의 일상이 들어선 것이다.살아가면서 무엇엔가에 놀라고 흥분하고 가슴 설레는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기막힌 순간들이 현대인들과 영원히 작별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날이 그날처럼 여겨지는, 따라서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나날들이 꾸역꾸역 채워져 1년 365일의 시간이 사라지는 양상이 아닌가 말이다.그런 인간들에게 작은 축복처럼 다가온 것이 이번 하짓날에 떠오른 붉은 달이다. 한두 시간 지나면 평상시처럼 하얀색으로 변모할 것이지만, 하늘을 올려다본 사람에게는 신비로움을 선사하기 충분하다. 하지만 현대인은 하늘을 보지 않으며, 특히 도회에 사는 사람은 24시간 환한 환경 때문에 달과 별을 마주할 계기가 없지 않은가?!잠시 담장 밖으로 나가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포장된 거리를 걷다가 하루살이와 모기 등쌀에 쫓기듯 돌아온다. 긴 한숨을 내쉬면서 ‘하짓날인데, 어떤 정취(情趣)도 없다니….’ 하며 혼자 혀를 끌끌 찬다. 1년의 절반 이상이 사라지는 시점에 앞으로 남은 시간을 생각한다. 지난 6개월을 뭣하며 살아온 것일까, 돌이키니 웃음과 함께 아쉬움도 손짓한다.작년 하짓날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돌이키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때도 분명 무엇인가 아쉽고 그립고 안타까운 것이 있었을 터! 이런 소소한 삶을 풍성하게 해줄 경이로움과 경탄의 순간들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작은 다짐을 하면서 2024년 붉은 달의 하짓날을 보낸다.

2024-06-23

문학의 저항과 위로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34∼5℃를 오르내리는 더위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면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다. “저항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겨라!”는 아주 신랄하고 노골적인 말도 있다. 더위를 포함한 자연의 섭리에 거부권을 행사함은 어리석고도 삿된 짓이다. 그런 까닭에 나약한 육신의 관심 영역을 외부세계로 이전함이 현명할 수 있다. 이것이 유튜브를 향한 나의 관심 시작점이다.며칠 전 텃밭과 잔디에 넉넉하게 물 주고, 여유롭게 아침 식사와 설거지를 마치고 안두(案頭)에 앉는다. 그 무렵 켜둔 유튜브에서 호소력 짙은 낭송자의 단편소설이 들려온다. 쌍둥이 남매의 애틋한 이야기가 끊일 듯 말 듯 이어진다. ‘반야심경’과 ‘도덕경’ 1장부터 15장까지 외워서 왼손 쓰기를 하던 나였지만, 마음과 귀가 자꾸 소설로 옮아가 어려움을 겪는다.고교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쌍둥이 오빠를 떠올리며 그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부터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여러 사건이 중첩되어 생겨난 깊은 상처와 안타까움이 내게도 전해진다. 소설은 어떤 때에는 지극히 이성적으로, 더러는 감상적으로, 혹은 서정적으로 나의 영혼과 육신을 후려갈긴다. 4·16 세월호 대참사와 관련된 소설이었으므로!….여성적인 서정과 다정다감함, 섬세함과 애틋함이 넘치는 오빠와 외려 남성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쌍둥이 누이의 유소년기와 어른이 되고 난 이후의 이야기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그래선지 ‘도덕경’과 ‘반야심경’보다 소설의 진척 양상과 여주인공의 황량(荒6DBC)한 내면 풍경의 변화가 훨씬 더 마음 깊숙하게 다가오는 것이다.‘참 잘 썼네! 저런 작가가 우리 옆에 있다니, 정말 운이 좋은 거지.’ 하는 혼잣말이 스르륵 하고 나온다. 우리 시대 문학은 많은 경우에 죽었거나 가사상태(假死狀態)에 있다. 시인과 소설가, 극작가를 찾지 않는 한국 독자들에게 문학의 위로 혹은 문학의 향수나 저항 따위의 어휘는 멸망을 자초한 조선왕조의 비루(鄙陋)한 골동품처럼 헛헛하고 무의미한 것이다.문학이 힘을 가지는 것은 1980년대 참혹한 군부독재 시절에도 저항의 붓을 놓지 않은 박노해와 김남주 같은 시인들 덕이었다. 60년대 김수영과 70년대 김지하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자유와 민주와 문학의 최전선에서 목숨 걸고 저항하며 투쟁했다. 그들의 헌신적인 싸움의 결과물을 우리는 물과 공기를 누리듯 공짜로 향수(享受)할 따름 아닌가?!시대의 어둠과 폭력과 야만이 절정으로 치달아갈 때 그들은 가장 위태로운 꼭짓점에 서 있었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수영’이 구차하고 남루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때, ‘애린’에서 이제는 담담하게 평안을 얻어낸 ‘지하’처럼 그들은 고요와 평정을 구하지 않고 좌충우돌(左衝右突)하며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공장에서 야학당에서 깃발을 들었다.오늘 들은 단편소설은 지난날 이야기를 그저 무심히 던지면서 절규하지도, 주장하지도, 평가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그리 가슴이 미어지는지 모르겠다. 문학의 저항과 위로가 어디서 오는지 자꾸만 생각하도록 한다. 우리 시대를 위한 문학의 힘은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다.

2024-06-16

장의차를 보다가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퇴직 이후 융합 전공이나 교양 교과목을 강의하는 시간강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 배운 도둑질이 오직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여 글을 쓰고, 그것을 대중과 공유하는 한 가지였으니 그럴 법도 하다. 일주일에 두 번 출강하여 학생들과 대면함은 유쾌하기도 하고, 나의 청춘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 일석이조(一石二鳥)다. 고마울 따름이다.얼마 전 이른 아침에 가창 인근 사거리에서 장의차가 느릿느릿 장지(葬地)로 나아가는 장면이 눈에 밟힌다. 적절한 햇살과 바람과 기온을 보면서 ‘참 좋은 때 가셨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찾아든다. 지상에 오는 일과 마찬가지로 가는 일 또한 우리의 의지나 바람과 무관하다. 인연생(因緣生) 인연멸(因緣滅)이니 새삼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장의차가 달리는 거리에는 이팝나무의 화사한 꽃이 모두 떨어지고, 작은 열매가 앙증맞게 매달려 있다. 봄꽃은 다 사라져 천지에 자취 하나 찾을 수 없다. 하기야 청도 누옥(陋屋)의 마당에도 붓꽃과 작약, 튤립은 전부 사라지고, 낮분홍달맞이꽃과 자주달개비 정도가 한여름을 맞고 있다. 이 모든 게 시간의 유장한 흐름과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장의차를 보노라니 오래전에 맞이했던 친구 어머니의 죽음이 떠오른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속절없이 세상을 버려야 했던 황망한 죽음과 장지의 낯선 풍경이 환각처럼 다가온다. 그 후로 이런저런 죽음과 마주하면서 생의 허무함 혹은 느닷없음에 적잖게 괴로워했다. 그렇지만 시간은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 오늘에 이른 것이니, 아득한 세월이 지나간 셈이다.가로수의 녹음이 짙어지면 매미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한여름의 불청객(不請客) 모기가 인간의 혈액을 탐하게 되리라. 하지만 꽃이 진 자리에 하나둘 열매가 들어서고, 거기서 생명의 이어달리기가 진행될 터다. 하나의 소멸이 다른 생명의 문을 여는 것이니, 생과 사의 거리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열두 살 먹은 고타마 싯다르타는 ‘농경제’에 나갔다가 농부의 삽날에 반토막으로 잘린 벌레와 그것을 낚아채 가는 새와 그 새를 커다란 발톱으로 움켜잡고 날아가는 독수리를 보며 경악했다고 전한다. 다정다감한 소년 싯다르타는 비정한 ‘먹이 사슬 구조’에 전율하고 깊이 괴로워한다. 이것이 어쩌면 훗날 그의 출가를 결정하는 계기였는지 모른다.자연계의 순환구조를 약육강식의 인식으로 수용한 소년의 맑은 영혼이 손에 잡힐 듯하다. 우리가 항용(恒用) 일용할 양식으로 수용하는 온갖 먹을거리의 가혹한 운명을 돌이키면 유구무언이다. 30년 수명의 닭이 각종 항생제와 성장 호르몬으로 범벅되어 고작 3주 만에 식탁에 오르는 게 현실이고 보면 가공(可恐)할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셈이다.장의차에 실려 어딘가로 옮아가는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언젠가 나 역시 저 길을 따라간다고 생각하니 망연해진다. 고작 100년 인생을 천년만년 살 것처럼 갖가지 행악질하면서 권력과 돈에 탐닉하는 군상을 돌이키매 눈앞이 아득해진다. 하늘이여, 유한한 삶에 큰 빛을 내리소서!

2024-06-09

교육부와 고질라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의대 학생 증원을 둘러싼 사회·정치적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번에는 이른바 자유전공(무전공)학부 문제가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다. 의대 증원에 찬성하지만, 전체적인 상황과 미래기획을 입체적으로 조명하지 않은 채 정부가 힘으로 밀고 가는 상황이어서 씁쓸하다. 의견 대립과 충돌을 방지하면서 충분한 대화와 설득의 마당이 선행돼야 했다는 아쉬움이 크다.교육부는 자유전공학부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처럼 단칼에 대학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고전 그리스 비극에서 얽히고설킨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방안으로 고안된 것이 ‘기계 타고 오는 신’이었다. 쾌도난마식으로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소하고 표표하게 무대를 떠나가는 위대한 신을 경배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행복했을까?!자유전공학부는 새로운 제도가 결코 아니다. 지난 1977년 박정희 정권 시절 말기에 실시된 ‘실험대학’ 제도와 전혀 다르지 않다. 입학하기 전에 전공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1년의 대학 생활을 경험한 후에 전공을 결정한다는 취지로 도입된 것이 실험대학이었다. 하지만 실험은 끝내 실험으로 끝났고, 5년 만인 1982년부터 학과제로 환원되고 말았다.이유는 간단명료하다. 특정 학과 쏠림 현상이 우심(尤甚)한 까닭이었다. 나는 어문계열로 대학에 들어갔는데, 국문·영문·불문·독문·중문·노문학과의 여섯 개 학과가 어문계열 소속이었다. 어문계열 정원이 190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130명 이상이 영문과로, 30명 정도가 국문과로 진학했다. 따라서 30명을 가지고 4개 학과가 운영되는 기형적인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실험대학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김영삼 정권은 1996년부터 이른바 ‘학부제’라는 이름으로 ‘실험대학’을 부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학생과 교수들의 극심한 반발과 준비되지 못한 교육 현실의 벽에 막혀 불과 3년 만에 좌초하기에 이른다. 1999년부터 학과제로 돌아가는 대신 일부 국립대와 사립대에 ‘자유(자율)전공학부’가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문제는 내년 입시부터 전국 73개의 대학에서 3만 8천 명에 이르는 신입생을 무전공으로 선발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전체 입학생의 28.6%에 이르는 무전공 입학 인원이 작년의 6.6%에 비해 무려 5배 가깝게 늘어난 것이다. 무전공 인원을 대거 늘리면 한국 대학의 문제가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처럼 호도하는 교육부의 행태는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비인기학과 혹은 기초학문 영역에 속하는 단과대학과 학과 및 해당 대학과 전공 교수와 학생들의 반발과 우려는 불을 보듯 자명하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무시한 채 두 차례나 실패한 제도를 앞세워 재정지원을 빌미로 대학을 압박하고 협박하는 교육부 관료들의 두뇌 속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몇 년에 한 번씩 강남 8학군 학생들을 위한 대입제도 변화로 그나마 존립 근거를 찾아왔던 교육부가 이제는 대학 자체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유명무실한 국가교육위원회와 고질라처럼 괴물이 되어가는 교육부의 행태가 우려스럽기 짝이 없다. 아! 교육부여, 대학이여!

2024-06-02

어떤 화면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컴퓨터를 켤 때마다 바탕화면에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근경에 초록색으로 빛나는 텐트가 자리하고, 멀지 않은 곳에 침엽수 한 그루 삐죽이 솟아 있다. 날카로운 선(線)으로 무장한 산맥이 흐르고, 원경에는 한결 부드러워진 산이 붉은색 아래 침묵한다. 하늘에는 우유를 쏟아부은 것처럼 별들이 무리 지어 하얗게 빛난다. 은하수가 고요를 지배한다.게오르크 루카치(1885∼1971)가 ‘소설의 이론’(1916)에서 묘사한 고대의 나그네 행장을 밝히는 그 은하수일 것이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로 시작하는 ‘소설의 이론’ 첫 번째 문장은 압권이다. 고대의 나그네는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을 것이었다.하지만 초록색 텐트 안에 누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가 단수인지 복수인지, 복수라면 몇인지, 단수라면 성별은 어찌 되는지 알 수 없다. 더욱이 그나 그녀 혹은 그들의 행선지(行先地)에 관한 정보도 전연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텐트 안에는 불빛이 환하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흔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등장인물에 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21세기 현재의 차고 넘치는 인위적인 조명 하나 존재하지 않는 태곳적의 어둠을 밝히는 저녁놀과 일찍 떠올라 지상을 비추는 별들의 무리. 일몰로 검게 어두워진 근경의 사위와 여전히 붉은색을 유지하는 원경의 서녘 하늘이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하늘을 하얗게 뒤덮고 있는 수많은 별의 군집 아래 홀로 빛나는 초록색 텐트!나그네는 거기서 어떤 상념에 젖어 있을까. 지나온 길을 반추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일이나 모레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윤동주 ‘참회록’에서 인용) 가야 할 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만 24년 1개월을 살아온 청춘의 참회는 역시 낯설고 희유(稀有)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에게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원동력으로 작용해야 했기 때문이다.그런 까닭에 바탕화면을 보는 나는 양가감정에 빠져든다. 나고 자란 시간대를 생각하면 분명 지나온 길을 돌아봐야 할 텐데, 실상 내다보는 사유에도 인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특이점’의 원년이 2045년으로 앞당겨져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왕가위(王家衛)가 연출한 ‘2046’(2004)이 구현될 해가 20년 남짓 남았기 때문이리라.“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고 박인환(1926∼1956)은 ‘목마와 숙녀’(1955)에서 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인환을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그는 세월이 오고 간다고 썼을까?! 시간이 직선운동이 아니라 왕복 운동한다는 것일까?! 시간의 화살 대신 시계추의 진자운동을 세월로 치환한 까닭은 무엇인가?!글을 쓰는 동안 사위가 어둡고 무거워지고 있다. 어둠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간다. 인간의 시간이 천상의 시간을 앞지르기 때문이다. 하늘보다 먼저 희망하고 하늘보다 먼저 절망하는 인간의 시간이 깊어가는 봄날 저녁이다.

2024-05-26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찾아서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장면 하나둘은 있는 법이다. 망각의 강을 건너면서 전생의 기억을 송두리째 날리고 난 후에야 예닐곱 살을 먹는다는 얘기도 있다. 윤회를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엔 아주 생생하게 전생을 기억하는 인간도 많다고 한다. 세계 전역에 3000명이 넘는 사람이 전생을 낱낱이 기억한다는 기록도 있다.전생을 들먹이지 않아도 ‘메밀꽃 필 무렵’(1936)의 허생원처럼 가슴에 묻어두는 기억이 있기 마련이다. 오래전 서울 달동네에 살 때 보았던 장면이 어제처럼 선연하다. 무척이나 추웠던 어느 겨울날 아침 심부름을 나왔다가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청년이 길가에 있던 집의 열려 있는 대문 안으로 쑥 들어서는 것을 본다.그 집을 나오는 청년의 손아귀에는 붉은색 털실 스웨터가 들려 있었다. 아직 물기가 덜 빠져서 그런지 묵직하게 보이는 스웨터를 들고 그는 달리기 시작한다. 달리면서 그는 연방 좌우를 둘러본다. 이윽고 “도둑이야!” 하는 고함(高喊) 터져 나온다. 몇몇 사람들이 청년을 막아서거나 몸을 붙잡는다. 청년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그의 표정이 기억에 또렷하다. 붙잡혀서 잘 됐다는, 이제 됐다는 안도의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크게 만족하고 평안한 얼굴의 청년이 아홉 살 난 나를 당혹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실 도둑질한 청년은 필사적으로 달리지 않았다. 그저 빨리 달리는 시늉을 했을 뿐, 옷을 훔쳐야겠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던 게다.미당(未堂)은 ‘무등(無等)을 보며’에서 “가난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썼다. 한국동란이 끝난 이듬해에 시인이 통찰한 깨달음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지만, 나는 이것을 현실과 유리된 시인의 관념적 사유와 인식으로 수용한다. 우리가 항용 나직하게 속삭이는 가난이란 말은 뛰어넘기 어려운 장벽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19세기 중후반 유럽 문단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빈곤과 무지에서 오는 타락과 방종이다. 찰스 디킨스가 이 주제의 선구자인데, 그는 ‘올리버 트위스트’(1838), ‘크리스마스 캐럴’(1843), ‘어려운 시절’(1854), ‘막대한 유산’(1861) 등에서 19세기 초중반 영국 노동자들의 새빨간 가난과 가난이 몰고 오는 폐해를 그려낸다.빅토르 위고의 대작 ‘레미제라블’(1862)의 주제는 청춘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 아니라, 빈곤과 무지가 낳은 타락과 방종이다. 에밀 졸라가 1877년 출간한 ‘목로주점’에서 가난과 무지는 알코올중독과 무도병, 매춘으로 이어지면서 빈곤의 끝을 선연하게 보여준다. 이런 본보기를 우리는 김동인의 ‘감자’(1925)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요즘 언급되는 불평등과 상대적 빈곤은 관념적 사치가 극에 달한 자의 정치적 수사이거나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 빈곤 문제는 가난의 뿌리를 가장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구두선(口頭禪)이 될 수밖에 없는 뿌리 깊은 것이다.

2024-05-19

짧은 여행을 마치고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지난달 중순 몇몇 교수가 우리 집을 찾아 차를 마시며 한가로이 봄날 하오를 보냈다. 일행은 여기 머물지 아니하고 장소를 ‘각북’으로 옮긴다. 그곳은 작년 가을 대구에서 옮겨온 동료 교수가 새로이 터전을 마련한 멋진 장소였다. 바깥 공간은 입체적으로 꾸며져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했으며, 흙벽돌로 가꾸어진 내부공간은 소담하고 단아했다.저녁놀이 질 무렵 기타 반주에 노래 몇 곡 하고 인근 식당으로 이동한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 다음 달, 그러니까 신록과 녹음의 5월 구룡포 1박을 말하는 것이다.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구룡포에서 멀지 않은 포항 남구에 아담한 집을 가진 친구가 저녁 식사를 제공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1박 2일의 짧은 여행 계획이 속성으로 만들어졌다.요즘 주말이면 찾아오곤 하는 비바람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지난 금요일 하늘은 참으로 맑고 투명했다. 멀리 수평선 너머 포항제철의 굴뚝과 거대 콘크리트 건물이 붉은 저녁놀 속으로 하나둘씩 사라지고, 옥상에는 은성(殷盛)한 식탁과 환한 얼굴들과 약간의 열기로 달궈진 목소리가 허공을 날아다닌다. 그렇게 포항의 일몰과 초승달과 웃음이 엇갈린다.나는 기타 연주와 노래로 좌중의 흥을 돋운다. 이번에는 각자가 부를 노래를 미리 신청받았기로, 한 곡씩 순서대로 반주를 시작한다. 누군가는 소월의 시를 노래로 만든 ‘실버들’을 부르고, 또 다른 이는 최진희의 진한 음색으로 넘쳐나는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를 열창한다. 그렇게 ‘베사메 무초’와 ‘봄날은 간다’, ‘그때 그 사람’이 차례로 불려 나온다.여러 생선이 어우러진 회와 삼겹살이 소맥과 뒤섞인다. 그렇게 초저녁이 야음으로 질주하고, 웃음판도 커간다. 초면인 사람들도 허심탄회하게 어우러지는 열린 유희의 마당은 얼마나 우리의 팍팍한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 크고 작은 일상사와 잔잔한 걱정거리와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일순(一瞬) 밤의 대기 속으로 흩어져버린다.인생이란 항해 과정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가슴 졸이고, 넘치도록 근심 걱정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영원히 사라져버린 과거의 아픈 기억에 매달려 자학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걱정거리를 느닷없이 소환하며 살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다 거울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 뒷걸음치는 것이다. 저 얼굴이 분명 내 얼굴인가, 하는 장탄식의 순간!짧은 여행이 우리에게 필요한 까닭은 이것이다. 좀처럼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그래서 한사코 떨어지지 않는 소소한 생활상의 문제와 작별하고 상실의 감정을 생생하게 되살리려는 것이다. 격의 없는 대화와 환한 웃음과 열렬한 가창과 자연스러운 앙천(仰天)이 선사하는 가벼운 일탈의 환희가 우리를 축복하고 격려하며 다시 나아가라고 귓속말한다.다시 밝아온 구룡포 앞바다에 붉은 해가 장쾌하게 얼굴을 내밀고, 우리는 다시 바다와 작별한 채 도회로 귀환한다. 다소 지친 몸과 마음을 동반하되, 뭔가 많은 것을 비우고 버렸다는 홀가분함을 벗으로 삼고 단단한 일상과 재회한다. 짧은 여행의 선물에 감사하면서….

2024-05-12

인문학 강연 소회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언제부턴가 불어닥친 인문학 열풍이 요즘도 상당하여 곳곳에서 다채로운 강연이 펼쳐지고 있다. 수많은 사립대학이 앞장서서 인문대학을 폐하고, 인문학 전공 교수들을 저잣거리로 내몰고 있는 상황과 현저히 모순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인문학의 뿌리이자 근본인 인문대학이 사라지는 형국이니, 인문학 열풍도 머지않아 스러질 것이 자명하다.세계 곳곳에 이른바 ‘한류열풍’이 분다고들 입에 게거품을 물지만, 그것은 상업주의와 결탁한 부분적인 성공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에 몰아닥친 세계화 광풍이 신자유주의 바람을 후폭풍으로 동반한 결과가 물신-배금주의 풍조다. 물적(物的)으로 풍족하지 못한 시절에도 잊지 않았던 정신과 영적인 가치와 의미가 급속도로 퇴락의 길을 걷고 있다.그 무렵 전국 인문대학장들이 시대를 통탄하고, 인문학의 가치를 고양해야 한다는 선언문까지 작성하여 배포하지만, 상황은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걸어왔다.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유행하고, 전국의 철학과와 국문과가 간판을 내리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런 풍경이 요즘엔 일상사가 된 것이니, 새삼 돌이켜보면 가슴에 생채기만 깊어질 따름이다.그런 와중에도 전국적으로 시작된 인문학 열풍은 도회와 농어촌을 가리지 않고 불어와 곳곳에 강연회가 성행한다. 나 역시 2008년부터 지금까지 멀리는 경기도 오산부터 가까이는 창녕과 부산까지 강연하러 다니고 있다. 거기서 만나는 청중은 크게 두 부류로 갈린다. 호기심으로 들른 사람들과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참가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전자는 한두 번 강연회에 왔다가 ‘핫바지 방귀 새듯’ 사라진다. 삶과 일상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문학의 고담준론(高談峻論)에 아까운 시간과 정열을 낭비할 이유가 없어서다. “삶을 돌이키지 않는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설파한 소크라테스의 2400년 전 가르침이 여전히 유효하구나, 하는 깨달음을 불러오는 사람들이 그들이다.후자는 계 모임 하는 사람들처럼 무리 지어서 이곳저곳으로 사냥감을 찾듯 배회한다. 그들은 인문학 강연에 빠짐없이 출근한다. 그런 성실성과 근면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자 한다. 그것은 귀만 가지고 강연회에 오면 별로 남는 게 없다는 사실이다. 오직 듣기만 하여 그 자리와 작별하면 피와 살이 될 자양분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만일 고전 그리스의 서사시와 비극이 강연 주제라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야’, 그리고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미리 읽어봐야 한다는 얘기다. 강연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전제를 소화한 청중과 그냥 참여한 청중 사이의 거리는 측량 불가다. 특히 강연이 끝난 뒤 가슴이나 의식에 남은 기억은 현저히 다를 수밖에 없다.낯익은 청중과 만날 때면 그들에게 조용히 말한다. “강연을 듣는 것도 좋지만, 책을 꾸준히 읽고 기록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 훨씬 쓸모가 있습니다.” 강연을 듣는 일은 쉽지만, 책을 읽는 것은 굳은 의지의 소산이다. 독서와 청강의 양립이 인문학 소양 습득의 지름길이다.

2024-04-28

아스팔트 위의 생명

김규종 경북대 교수 봄날의 변덕스러움은 짐작하기 어렵다. 곡우(穀雨)이자 혁명일이었던 4월 19일, 반팔과 반바지 차림의 청춘들이 길을 메우고, 하늘엔 옅은 황사가 찾아들었다. 창문 열고 질주하는 차량 행렬에서 가까이 다가온 여름 냄새가 짙어진다. 가슴과 등판을 서서히 적셔오는 땀방울이 교정(校庭)에 환하게 피어난 이팝나무 꽃망울과 엇박자로 교차한다.오후 7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다가오는 황혼이 하루해를 아득한 지평선 너머로 내보낸다. 거기서도 최소 30분 이상 기다려야 까만 어둠이 지상에 깔리기 시작하고, 옅은 어둠은 조금씩 짙어져 마침내 대기가 깊은 침묵에 휩싸인다. 그제야 밤이 시작된다. 불과 두 달 전엔 상상하기 어려웠던 풍경이 날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지는 경이로운 시간이 우리 곁에 있다.그렇게 화사하고 화려한 날들이 토요일 급변하더니 드디어 가느다란 이슬비가 내린다. 아주 느릿하고 가느다란 빗줄기가 서서히 대지를 적신다. 오는 듯 멈춘 듯 봄비는 오락가락 춤춘다. 탱고나 람바다 혹은 루뭄바가 아니라 우아한 왈츠로 봄의 정령(精靈)들을 적셔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 나그네는 우산을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것이다.늦은 하오 장을 보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 대문 근처에서 헉, 하는 소리가 폐부에서 절로 밀려 나온다. ‘아니, 저게 말이 되는 거야?!’ 혼잣말한다. 장에서 사들인 물품을 대충 내려놓고 사진기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온다. 대문의 좌우 담벼락에는 오래전부터 민들레며 지칭개, 광대나물 같은 봄풀 무리가 이리저리 뒤얽혀 살아왔다. 그런데, 이것은?!작년인가, 차고 넘치는 아스팔트를 대문까지 발라준 청도군의 선심 행정이 무색하게 뽀리뱅이가 돌연 얼굴을 내밀고 빗속에 우아하게 서 있다. 두툼하게 깔리는 아스팔트를 보면서 농촌에서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우점종(優占種)이 되다니, 하며 혀를 끌끌 찼더랬다. 그런데 저 여린 뽀리뱅이는 어떤 연고(緣故)로 아스팔트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단 말인가?!사람이든 동물이든 풀과 나무든, 모든 생명은 최적의 장소와 시기를 만나야 적절한 생장(生長)과 대물림을 할 수 있다. 이것을 불가(佛家)에서는 ‘시절(時節) 인연’이라 한다. 우연히 만나 인연을 엮는 것도 시절 인연이지만, 가장 적절한 시공간에 두 대상이 마음을 열고 화합함으로써 최상의 인연을 맺는 것을 ‘시절 인연’이라 부른다.그런데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아스팔트 위의 뽀리뱅이에서 시절 인연을 읽어내는 일은 어불성설이다. 생명의 놀라운 자생력과 놀라운 끈기와 투쟁력이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이런 식으로 계절이 바뀌고 다시 가을과 겨울이 지나면 녀석은 색깔과 형태와 향기를 잃고 스러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본디 목표 지점 가운데 하나인 종족 보존에는 성공할 것이다.아스팔트에서 솟아난 뽀리뱅이를 보면서 지구촌에서 살아가는 80억 호모사피엔스를 잠시 떠올린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시절 인연을 맞아 환하고 아름답게 나름의 운명과 우주와 만나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봄비 속의 상념이 깊어가는 봄날이 고요하게 지나가고 있다.

2024-04-21

10년 세월이 흘렀건만!…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이 있다. 유구하되 무상(無常)한 것이 자연이니 10년 세월에 변화가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요즘처럼 과학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대에 10년은 참으로 장구(長久)한 세월처럼 느껴진다.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이 불러온 변화를 생각할라치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다. 경천동지도 유만부동 아닌가?!내일이면 2024년 4월 16일이다. 그렇다! ‘세월호 대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많은 사람은 잊고 살아왔겠으나, 참사의 희생양이 된 가족을 둔 분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특히 단원고교 2학년생 250명 부모님이 그러하리라. 만일 그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올해 28세 나이의 꽃다운 청춘남녀로 성장했을 것이다.나는 내일도 조기(弔旗)를 걸어 그날 희생된 310명의 영령을 위로할 생각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고 답답하다. 다른 한편으로 돌이키면 2009년 일어난 ‘용산 참사’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했다. 재작년인 2022년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로 159명이 죽고, 195명이 다쳤다. 이 무슨 참괴(慙愧)한 일인가?!2차 대전 끝나고 독립한 나라들 가운데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쟁취한 유일한 국가로 자부하던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연이어 터져 나온 대형사고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무리한 공권력 남용으로 죽어야 했던 철거민들과 진도 팽목항 인근 해역에서 차가운 바닷물에 수장(水葬)되어야 했던 어린 고교생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저린다.그런 안타까운 죽음도 모자라서 다시 수백 명이 죽고 상하는 이태원 참사가 이어지는 재난 공화국이라니! 만일 우리가 사람의 생명을 가장 존귀하고 고귀한 대상으로 여긴다면, 이런 참사는 되풀이되지 않았을 것이다. 참사가 일어나면 잠시 경각심을 가지도록 인도하는 행사가 열리지만, 우리는 시간과 더불어 참사를 까맣게 잊어버린다.역사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 오직 그것이 아닐까 하는 참담한 생각마저 든다. 인간은 성공한 사례와 경험에서 배우는 것보다 실패한 사람과 이야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 마련이다. 우리가 위인전을 읽는 까닭은 그들이 숱한 패배와 좌절을 어떻게 극복하고 부도옹(不倒翁)처럼 일어설 수 있었는지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많은 돈과 넓은 평수의 아파트와 주식과 코인과 땅에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다. 차고 넘치는 재화와 풍요의 물결 속에서 허우적대며 욕망의 노예로 살아간다.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준 고귀한 영성(靈性)은 내팽개치고 저급한 물성(物性)의 하수인이 되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쳇바퀴를 열렬하게 돌리고 있는 형국이다.참다운 반성과 처절한 자기 혁신 그리고 따뜻한 미래기획과 젊은 세대를 위한 장쾌한 일정 마련이 시급하다. 이 나라 젊은이들을 더는 사지(死地)로 몰지 말고 그들에게 빛과 꿈과 웃음을 선사해야 할 역사적 책무가 나이 든 자들의 몫이라는 뼈아픈 인식이 새삼스러운 아침이다.

2024-04-14

경탄(驚歎)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이탈리아의 철학자 움베르토 에코와 리카르도 페드리가의 편저(編著)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 첫머리에 기억할 만한 구절이 나온다. 철학은 과학이 답하지 못하는 질문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그 하나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 가능한 명제이기에 논외로 한다. 그 둘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출발한다. “그리스인들의 철학은 경이로움에 대한 반응에서 비롯한다.”경이로움에서 시작한 고전 그리스 철학이 오늘날 서양철학의 기초가 되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은 무척 흥미롭다. 경이(驚異)로움은 놀랍고 낯설며 비일상적이고 신이(新異)하며 익숙하지 않은 대상에서 오는 감정을 일컫는다. 경이로움을 감촉할 때 우리는 경탄(驚歎)의 소리를 내지르거나 환호한다. 예기치 못한 장면이나 상황 혹은 풍경을 연상하시기 바란다.학창 시절 경춘선을 타고 강촌역에 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응어리져 풀리지 않은 채로 야간열차에 올라탄 것이다. 역전 부근에 있는 술집에 들어가 ‘경월 소주’와 간단한 안주를 시켜 독작(獨酌)하고 있는데, 생면부지의 사내가 맞은편에 앉는다. 나보다 너덧 살 많아 보이는, 수더분한 인상의 사내가 양해를 구하더니 자리를 잡는 것이다.몇 잔 소주를 나눠 마시고 났을 때 그가 내게 던진 질문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살면서 경탄해본 적 있어요?!” 아주 간단한 단문(短文)의 질문이었는데, 대답할 수 없었다. 스물두 살 나이의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경탄’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경탄’이란 말을 호명하는 그가 정말 경이롭고 그래서 나는 경탄했다.시를 쓰고 막노동을 하면서 세상을 떠돌고 있다는 그가 아주 낯설지만 경이로운 존재로 불쑥 다가왔다. 25도짜리 쓰디쓴 경월 소주와 더러 이해되지 않는 대화와 풀리지 않는 내부 인식의 혼란으로 그날 밤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문득 두툼한 철학책에서 ‘경이로움’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마주하니 만감이 교차하는 것이다.그랬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밤하늘을 보며 정신없이 걷다가 우물에 빠지는 바람에 하녀의 우스개가 되었다는 철학자 탈레스를 떠올리면 그런 생각이 든다. 자기는 물론이려니와 거의 모든 인간과 무관하게 빛나는 한밤중의 별을 보다가 우물에 빠진 철학자라니! 그런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자라고 플라톤은 탈레스를 극력(極力) 옹호했다 한다.탈레스가 올려다본 밤하늘의 경이로움은 어떤 것이었을까?! 별을 보고 길을 갔고, 가야만 했던 고대의 나그네를 부러워하던 낭만주의자 게오르크 루카치의 사유와 인식이 떠오르기도 한다. 혹은 ‘별 헤는 밤’의 시인이 멀리 북간도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며 오래전 이국 소녀들의 이름을 하나둘 소환하는 장면도 경이롭지 않은가.그리스 철학이 경이로움에 대한 반응에서 시작되어 연면부절(連綿不絶) 그 뿌리를 내려 오늘날 유럽의 철학적 사유의 원류가 되었다니, 경이롭기 그지없다.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경이로운 순간을 경험하고, 실로 경탄하는지 새삼 생각하도록 하는 문장을 돌이켜본다.

2024-04-07

어제와 다른 오늘

김규종 경북대 교수 하루가 다르게 태양이 일찍 떠올라 창천에서 오래 빛난다. 아침 여섯 시 무렵 동창은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고, 저녁 일곱 시가 지나야 사방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생명의 환희와 약동(躍動)이 찬란하게 작동하는 눈부신 시절이다. 이런 날이 이어지면 누구나 들뜨고 조금은 흥분되기 마련이다. 접촉사고에 조심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반면에 봄날은 아주 변덕스러워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이를테면 지난 목요일 내가 사는 고장 청도에는 온종일 비가 뿌렸다. 아침나절부터 오기 시작한 비가 한밤중까지 그칠 줄 모르는 것이다. 결국 그날 온종일 나는 잠과 벗하는 선택 말고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하되, 대체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렸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기상청도 민간 기상업체도 묵묵부답이다.그러다 금요일 아침나절에 피식, 하고 혼자 웃는다. 일일 누적 강수량 41.8mm라는 표기가 일기예보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정보가 차고 넘치는 때에 이토록 늦게 강수량 표기를 한다는 사실이 좀체 납득(納得)하기 어렵다. 나처럼 수량(數量)으로 현상을 이해하는 인간에게 가장 요긴한 것은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이기 때문이다.금요일 아침 경북대 교정에는 기다리던 반가운 손님이 단체로 몰려들었다. 하얗고 발그스레한 벚꽃이 무더기로 하늘을 향해 몸을 연 것이다. 그것도 맹렬한 봄바람의 기세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무더기 개화를 시작한 게다. 매몰차게 불어닥치는 바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화사하게 꽃잎을 열어젖힌 봄의 무수한 전령이 일제히 고함치는 장면은 실로 장관이다.온종일 비가 내려 두문불출(杜門不出)해야 했던 어제와 찬연(燦然)한 하늘과 드센 바람과 놀라운 개화가 공존하는 오늘의 차이를 현저하게 실감하는 실존의 봄날! 어쩌면 이런 까닭에 인간은 죽음을 경원하고, 생의 마지막 그날까지 살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삶을 향한 끈질긴 소망은 또 얼마나 처연한 것인가?!플라톤이 남긴 ‘소크라테스의 변론’ 말미(末尾)에 독배를 마셔야 하는 소크라테스의 소회가 눈길을 잡는다. “이제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나는 죽으러 가야 하고, 여러분은 살러 가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나 가운데 누가 더 축복받은 것인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 것입니다.” 이 대목은 대단한 무게로 우리를 덮쳐온다.누구나 삶이 죽음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달리 생각한다. 그는 신의 가호를 받는 인간에게는 삶도 죽음도 차이가 없다고 확언한다. 죽음은 아주 깊은 잠을 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1601년의 햄릿의 독백을 그는 기원전 399년에 이미 선취(先取)하고 있다.어제를 어제로 보내고, 오늘은 오늘로 맞이하는, 삶은 어제로 보내고, 오늘은 삶이 아닌 죽음과 대면하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아니하는 소크라테스. 그에게는 이토록 화려하고 눈물겨운 봄날이 북풍한설 몰아치는 겨울과 다르지 않은가 보다. 하되, 어쩔 것인가, 이 찬란한 봄날을!

2024-03-31

이호우의 ‘개화’를 생각하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 청도가 자랑하는 시조 시인 이호우(1912∼1979)와 이영도(1916∼1976)는 남매 사이다. 몇 년 전 여름 그들의 생가를 찾았다가 모기와 각다귀 패거리에 쫓기다시피 한 처참한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요즘 그분들 생가를 복원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처음 생가를 찾았을 당시엔 청도 군정(郡政)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약간의 인연만으로 문학관을 짓는 비용과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 지자체와 너무도 비교되는 나른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일례로 구상 시인은 서울에서 출생했으나, 본적이 칠곡군 왜관읍이고, 그곳에서 20년 시작(詩作) 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칠곡군은 2002년에 ‘구상 문학관’을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왜관에 갈 때마다 부러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요즘 여러 가지 풀과 나무에 꽃이 피어나고 있다. 사람들의 눈길은 오직 나무에 피어나는 꽃에 집중된다. 벌써 시들어가는 매화와 산수유, 이제 절정을 맞은 개나리와 진달래, 살구꽃, 명자꽃, 목련, 성급한 몇몇이 꽃망울을 터뜨린 벚꽃이 주요 대상이다. 하지만 눈을 내리뜨면 곳곳에 풀꽃이 앙증맞게 피어나고 있다.지난 2월부터 지치지 않고 얼굴을 내밀고 있는 봄까치풀, 요즘 한창인 광대나물, 민들레, 잔디꽃, 아슬아슬하게 피어나 여린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꽃다지, 꽃인 듯 아니듯 피어나는 머위꽃, 화사한 유채꽃, 흰색의 냉이꽃과 황새냉이꽃, 너무 작아서 색깔 먼저 보이는 제비꽃! 이 어린 중생 풀꽃들이 곳곳에서 피어나 들판을 화사하게 수놓고 있다.의상 대사가 ‘법성게(法性偈)’에서 갈파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의 세계가 우리 주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지는 경이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 작은 티끌 하나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는 ‘화엄경’의 정수를 불과 일곱 글자로 통찰한 선지식(善知識)의 탁견에 무릎을 칠 따름이다. 크고 작음의 경계를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겠는가?!이런 정황을 이호우 시조 시인은 ‘개화’(1940)에서 기막히게 그려낸다. 스물여덟 살의 패기 넘치는 청춘 이호우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심성과 기막힌 눈길이 포착하는 개화의 순간!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지막 남은 한 잎이 마침내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빛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하늘 향해 온몸을 열어젖히고 있는 여리고 작은 꽃송이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손에 땀을 쥐는 시인. 모든 꽃잎이 피어나고, 드디어 마지막 잎이 개화에 돌입하는 순간, 시인은 차마 눈을 감아버린다. 시인이 눈을 감기 전에 확인하는 정경은 시인과 함께 개화를 대면하는 바람과 햇빛마저 숨죽이는 것이다. 이런 도저한 시적 인식 혹은 감수성을 어쩔 것인가?!봄이 오면 꽃이 피는 게 당연하고, 여름엔 열매가 익어 가을에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게 당연하다 여긴다. 그러나 당연한 사이사이에 우리가 놓치는 숱한 고비와 난관이 있다. 북풍한설과 모진 강추위에 건조함까지 견디고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현대시조 ‘개화’를 떠올린다.

2024-03-24

봄꽃 피어나다!

김규종 경북대 교수 20대 창창한 시절엔 여름이 제일 좋았다. 청년 시절 누구나 그렇듯 관념론에 빠져 있던 터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있는 ‘부패는 만상의 본질’이란 구절에 마음을 뺏긴 까닭이다. 열렬한 속도로 생장하는 것도 있지만, 그만큼의 빠르기로 부패와 소멸이 진행되는 계절이 여름인 까닭이다. 양극단의 두 얼굴의 계절, 여름을 찬양하라!중년에 접어들자 겨울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한여름의 눅진한 습기와 극복 불가능한 열기, 그것들이 자아내는 무기력과 타락의 분위기가 현저히 역겨워진 것이다. 그러나 겨울은 어떤가?! 피부를 뚫고 스며드는 한기(寒氣)가 내장을 서늘하게 인도하고, 이마를 때리는 설한풍은 영혼을 맑게 정화한다. 공부 좋아하는 학자들이여, 겨울을 찬미하라!다시 세월이 흐르고 귀밑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자 사정이 달라진다. 누가 뭐래도 봄을 기다리게 된 터다. 10년 전부터 촌으로 이주한 후에는 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부쩍 깊어진다. 10월 말 11월 초에 누렇게 변색한 잔디와 곳곳에 나부끼는 낙엽이 전하는 처연함과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초로의 인간이여, 봄을 목청껏 노래하라!지난 1월 초에 마주한 후배가 네덜란드 출신 알뿌리 서른 알을 넘겨준다. 봉투에는 튤립, 히아신스, 크로커스, 무스카리의 네 가지 이름이 적혀 있다. 매서운 칼바람 부는 시절에 땅을 파고 알뿌리 심는 일은 차일피일 미뤄진다. 그러다가 후배 전화를 받고 심는 작업에 착수한다. 물까지 듬뿍 준다. 그 이튿날부터 기온이 급강하한다.그때부터 2월 하순까지 달포 가까이 속앓이를 했다. 미숙한 주인 만나 유럽에서 건너온 네 종류의 어여쁜 구근(球根)이 얼어 죽은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몹시 괴로웠다. 그러던 차에 녀석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게다. ‘청도 인문학’을 시작한 2월 20일 무렵 일곱 개의 초록 초록한 얼굴이 나를 향해 웃는다.날이면 날마다 녀석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수효를 헤아리는 게 일상이 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환희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3월 14일 녀석들 전방에 자리한 수선화가 노란 꽃망울을 화사하게 터뜨리더니, 히아신스와 크로커스가 뒤를 따라 하늘로 몸을 연 것이다. 눅눅하던 마당의 분위기가 일신(一新)한다. 몇 송이 꽃의 개화가 전해주는 생동감과 환희라니!한겨울 추위를 겪지 않으면, 줄기는 자라나지만, 꽃은 피어나지 않는다 한다. 뉴질랜드에 사는 교민이 개나리가 그리워 옮겨 심었으나 결국 꽃은 보지 못했다 전한다. 그곳의 겨울이 우리의 겨울보다 온화한 까닭에 몸체는 생겨나 자라났지만, 꽃은 피우지 못했다는 얘길 듣고 생각나는 게 적잖았다. 가혹한 시련이 사람도 꽃도 만드는 모양이다.이번에 피어난 크로커스와 히아신스를 보면서 봄이 깊어지면, 튤립과 무스카리도 여기저기서 환하게 피어나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환해진다. 만상을 보는 계절 ‘봄’을 화려하고 은성(殷盛)한 축제로 만들어주는 봄꽃을 보면서 저런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시절이다.

2024-03-17

만남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살아가면서 우리는 만남과 별리(別離)를 경험한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중대한 일대사(一大事)다. 불가(佛家)에서는 그것을 인연생(因緣生) 인연멸(因緣滅)로 명쾌하게 풀이한다. 인연이 생겨나면 만나는 것이요,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는 것이다. 고로 만남과 헤어짐에 특별한 의미와 희로애락을 부여할 까닭도 없는 셈이다.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의 장편소설 ‘죄와 벌’(1866)에 등장하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은둔 생활자 혹은 러시아판 ‘히키코모리’다. 돈 때문에 휴학생으로 지내는 그는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돈은 많지만, 사회적 이(蝨)에 불과한 전당포 노파 알료나를 살해하고자 한다. 타인의 돈을 부당하게 갈취해 부를 축적한 노파를 죽여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려고 기획하는 그는 러시아판 홍길동이나 임꺽정처럼 보인다.라스콜리니코프가 그런 기괴하고 낯선 사유에 빠져드는 계기는 사회적 고립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노파를 살해할 동기를 부(富)의 사회적 불평등과 공정한 분배에서 구하지만, 실제로 그의 사유와 인식에는 초인의식이 자리한다. 나폴레옹은 수많은 인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그는 범죄자가 아니라, 영웅이라 불린다. 사회적 불의와 악행의 표본인 전당포 노파를 죽임으로써 초인의 대열에 합류해보자는 계산이 그의 흉중에 깊이 자리 잡는다.그가 부조리하고 흉악한 범죄를 꿈꾸고 실행하는 배경은 고립무원(孤立無援)한 처지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사회적 관계는 매우 협소하다. 오랜 친구 라주미힌과 여동생 두냐 그리고 어머니 정도가 고작이다. 그는 온종일 다락방에 틀어박혀 완전범죄를 실행할 계책과 구체적인 방도에 골몰한다. 미침내 그는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 리자베타를 무참하게 살해한다.여기서부터 우리는 주인공의 급변하는 내면세계와 만난다. 살인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죄의식이 어느샌가 그를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섬망(譫妄)의 형식으로 밤마다 그를 괴롭히는 잠재의식의 심연에서 그는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그가 대면하는 구원의 손길은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한다.여주인공 소냐가 살인자의 내면 깊은 곳으로 틈입한다. 혼자였던 그가 자신의 왜곡되고 굴절된, 억압받고 학대받은 영혼을 하나둘씩 털어놓을 대상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소냐에게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고, 자발적으로 예심판사 포르피리를 찾아간다.라스콜리니코프를 칠흑 같은 사회적 고립과 은산철벽(銀山鐵壁) 같은 견고한 격절(隔絶)에서 구해낸 것은 소냐였다. 의붓어미와 동생들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마르멜라도프의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위해 제 한 몸을 거리에서 팔아야 했던 소냐. 하지만 소냐는 그런 사회-경제적 모순과 침탈을 원망하지 않으며, 그 어떤 저항도 시도하지 않고 순응하는 인물이다.소냐와 만남으로써 라스콜리니코프는 회개하는 인간으로 거듭 태어난다.고립무원으로 파괴된 자아를 타자와 만남으로써 구원하려는 그의 행로는 우리에게 ‘만남’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2024-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