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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각 이불을 보다가

김규종 경북대 교수 독자 여러분은 조각 이불을 좋아하시는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 무늬와 색깔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조각 이불이 마음에 드시는지 궁금하다. 조각 이불은 어린아이를 위한 이불로 사랑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록달록한 무늬와 기하학적인 질서로 배열돼있는 조각 이불은 따스함과 질서정연함을 동시에 선사할 수 있으니 말이다.언제부턴가 나를 만들어온 여러 요인(要因)을 생각하게 된다. 퇴임을 앞두고 사람들에게 인사말을 하라는 청을 들었을 때 그런 말을 했다. 지금의 나를 있도록 해준 여러분의 인내와 너그러움에 감사한다는 뜻의 말을 전한 것이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누구나 그를 낳고 길러준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친구와 친지가 있기 마련이다. 그 사람들 덕분에 어제와 오늘의 나와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게 아닌가?!요즘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가슴 아픈 사건은 단연 교사들의 자살 행렬이다. 지난 7월 19일 스물세 살 먹은 서이초교의 어린 여교사 자살로 학부모와 학교장들의 온갖 행악질과 갑질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세상 살기가 쉬운 일이기만 하랴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중대한 사명을 수행하는 교사들을 상대로 악행을 거듭한 자들에게 대를 이어 악운(惡運) 있기를?!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장편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에서 기인하는 ‘베르테르효과’로 간주하기에는 너무도 심각한 악행이 교사들에게 행해지고 있는 게 이 나라 현실이다. 학교폭력이라는 말이 학생들에게나 적용되는 게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들에게 행사하는 저급하고 막돼먹은 폭력이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밝혀지고 있다.어떻게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를 상대로 막말과 폭언과 폭행을 거리낌 없이 자행할 수 있단 말인가?! 학교를 약육강식의 정글로 만들어놓는 승냥이만도 못한 인간들은 학교를 떠나야 한다. 문제를 일으킨 학생과 학부모들은 마냥 의기양양(意氣揚揚) 득의만면(得意滿面)하기 그지없는데, 교육부는 서이초 교사의 49재에 참석하느라 수업에 임하지 못한 교사들을 처벌하겠노라고 엄포나 놓았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교육은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 삼주체(三主體)가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룰 때 성취될 수 있다. 교사의 권위와 교권을 무력화하는 학생과 학부모, 교단과 교권의 의미를 스스로 실추시키는 교사가 있는 한, 교육은 만년 공염불(空念佛)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사는 학생을, 학생과 학부모는 교사를 먼저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과 지구와 우주가 돌아간다는 소아병적인 사고와 인식을 버려야 한다.조각 이불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중심이 없다. 개개의 조각은 고유한 색깔과 무늬가 있지만, 내가 잘났으니 나를 따르라고 우기지 않는다.하나의 조각은 모두를 위하여, 모든 조각은 하나의 조각을 존중하고 어울려 조화로운 전체를 완성한다. 세상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은 홀로 잘나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조화롭게 공존할 때 비로소 존재의의가 환해진다는 사실을 곰곰이 돌이켜보면 좋겠다.

2023-09-10

노화와 죽음을 넘어선다면?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오브리 드 그레이의 ‘노화의 종말’(2007)에서 발원하여 데이비드 싱클레어와 매슈 러플랜트의 ‘노화의 종말’(2020)과 호세 코르데이로와 데이비드 우드의 ‘죽음의 죽음’(2023)으로 이어지는 노화의 종식과 불사(不死)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이런 논의 사이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2015)가 자리한다.‘사피엔스’에서 하라리가 제시한 것은 ‘길가메시 프로젝트’였다. 사피엔스의 가능 최대수명인 125세의 네 배에 이르는 500세 인생에 도전하는 기획이 길가메시 프로젝트다.그런 문장과 만났을 때 ‘농담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엔 ‘그럴 법도 하겠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현대의학과 약학, 여타 분야의 과학기술 발전이 눈부신 것이다.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눈과 귀를 가장 자주 자극한 네 글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일 것이다.인간에게 숙명처럼 내장된, 누구도 거역할 수 없고, 비켜 갈 수 없는 필멸과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불사의 신! 연역법과 귀납법의 단골 소재로도 쓰였던, 누구나 죽는다는 자명한 논리. 그런데 그것을 뒤집겠다는 과학적 도전이 진행되고 있다.죽음을 앞두고 10년 세월 병원을 들락거리고, 요양원과 요양병원 신세를 진 끝에 인생과 작별하는 요즘 세태에서 보면, 노화의 종말과 장수는 분명 축복이다. 40대에 찾아오는 노화의 첫 번째 제비를 20대나 30대로 돌려놓음으로써 건강과 활기를 유지하면서 노화와 작별하고, 마침내는 죽음을 망각하게 되리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2017년 가을학기에 디지스트에 출강하면서 만난 뇌 전공 대학원생과 이 문제를 생각해본 일이 있다. 20대 중반의 청춘인 그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500년은 살고 싶다는 것이다. 젊은 대학원생이 진지하게 제기하는 죽음의 공포에 나는 단출하게 대답했다. “그 장구한 세월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생각해봤니?!”근자에 만난 고교 동창생이나 선배 교수들과 노화의 역전(逆轉)과 영생불사 혹은 최소 150년 200년 살아가는 인생 문제를 다시 꺼내 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누구도 그렇게 긴 세월 살고자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아버지와 어머니는 150살, 아들딸은 120살, 손자는 90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었다.하지만 세태는 조변석개(朝變夕改)가 다반사(茶飯事) 아닌가?! 불과 한 세대 전에 남녀의 결혼 적령기는 모두 30살 이전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던 산아제한 포스터 문구가 ‘둘도 많다’로 바뀐 게 40년도 안 되었다. 그런데 지구촌 최악의 저출산 국가 운운하면서 나라 망할 것처럼 호들갑 떠는 시대 아닌가 말이다!그래서다. 우리가 잘 알지도 모르는 상황에 광속(光速)으로 다가오는 노화 역전과 무병장수 시대를 무작정 맞이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심사숙고(深思熟考)해보자는 게다.2천500년 전에 공자가 ‘인무원려(人無遠慮) 필유근우(必有近憂)’라 하지 않았던가?!

2023-09-03

‘오펜하이머’를 보는 하나의 시각

김규종 경북대 교수 관객이 한 편의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인상과 미학적 인식, 그리고 감수성은 천양지차(天壤之差)다. 호사가(好事家)는 그것을 취향(趣向)이라는 어휘 하나로 설명하고자 하지만, 실제로 그런 차이는 미학적 훈련의 결과에서 발원한다.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이고 계통적인 미학 훈련을 해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영화를 포함한 예술 전반을 수용하는 기본자세부터 다르다. 대상을 읽고 보고 느끼면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간파하는 능력 차이가 개인별로 크다.요즘 사람들의 입길에 자주 오르내리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생각할 거리가 풍성한 영화다.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의 일대기를 다룬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을 기저 텍스트로 삼은 영화가 ‘오펜하이머’다. 평전이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라 영화도 세 시간을 꽉 채운다.영화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원자력 위원회 의장인 루이스 스트라우스(1896∼1974) 제독과 관련된 청문회 장면이었다. 한편으로는 메카시 광풍에 휩쓸린 오펜하이머의 비공개 청문회가 진행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관직에 내정된 스트라우스 제독의 공개적인 청문회가 진행된다. 전자는 오펜하이머의 수상쩍은 과거 행적을 추적하여 ‘미국의 프로메테우스’ 자리에서 그를 끌어내리는 것이 목적이다. 후자는 스트라우스 제독이 과연 상무장관직을 수행할 능력의 여부를 검증하는 자리였다. 오펜하이머도 스트라우스도 패배자로 기록된다.오펜하이머가 1953년 12월 기소되어 그 이듬해부터 보안 청문회에 소환된 최고의 원인 제공자를 평전 작가들과 놀란 감독은 스트라우스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오펜하이머의 정적(政敵)으로 등장하는 스트라우스의 내면세계를 인도하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한다. 이를테면 오펜하이머가 원자력 위원회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스트라우스는 최대한 친절을 베풀지만, 자부심 넘치는 오펜하이머의 머릿속은 전혀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위원회 건물 바깥에 호수가 있고, 호숫가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이 서 있다. 아인슈타인을 향해 오펜하이머가 다가가서 몇 마디 말을 하고 난 다음에 아인슈타인은 오펜하이머를 뒤따라오는 스트라우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냉정하게 지나쳐 버린다.문제는 오펜하이머의 자유분방하고 공격적이며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듯한 정치적인 성향이 스트라우스와 지극히 대극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민주 선거로 집권한 에스파냐 좌파 정부를 전복하고자 1936년 7월 프랑코가 군부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에스파냐 내전이 발생한다. 3년에 걸친 내전으로 무려 60만의 안타까운 인명이 희생되기에 이른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을 통해서 내전으로 발생한 수많은 고아와 난민을 위해 거액을 송금한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의 이런 행적까지 추적하여 그를 청문회에 세운 것이다. 오해에서 시작된 불씨가 원한으로 발전하여 복수에까지 이르는 지점을 확인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기억하시기 바란다. 우리 의도와 무관하게 누군가는 우리를 오해하고 이를 갈며 음해한다는 사실을.

2023-08-27

자제(自制)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며칠 전 밤늦도록 잠이 찾아오지 않아 전전반측(輾轉反側)하다 급기야 일어나 앉는다. 평소 같으면 잠자리에 든 지 1∼2분이면 곯아떨어지기 마련인데, 이런 불면(不眠)의 시간이 다가오기도 한다. 그럴 때 벗하라고 생겨난 것이 유튜브인 모양이다. 제법 오래전부터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혹은 ‘법성게(法性偈)’ 같은 불교 관련 경전이나 글을 찾아 읽곤 했다. 그러다 보니 유튜브도 자연 그런 쪽을 찾아서 듣게 되는 것이다.그날 설법의 요체는 ‘자제’에 관한 것이었다. 몸과 마음과 말의 세 가지를 자제하라는 게 요체였다. 몸과 마음과 말,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뭘까?! 모두가 자음인 미음으로 시작한다. 참으로 소략한 발음을 가진 세 단어가 몸, 마음, 말이다. 그런데 이들 세 가지는 인생살이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다.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가 형이하(形而下)의 몸이고, 거기서 마음과 말이 발원한다. 몸이 전제되지 않는 마음과 말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몸을 자제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적용해보면 의미가 자명해진다. 우리의 오감(五感)으로 작동되는 다섯 가지 감촉, 즉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그리고 감촉하는 것을 자제한다는 말이다. 오감을 작동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 예의와 법도를 벗어난 것들이 판치는 세상에 그와 같은 자제를 요구하거나 실천하는 일은 정녕 쉽지 않은 노릇이다.마음을 자제함은 무엇인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통제하지 못하는 유일자(唯一者)가 필시 마음이리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신출귀몰하는 게 마음이다. 잠시 좋았다가 즉시 흐려지고, 안도했다가 근심 걱정으로 휩싸인다. 관대했다가 옹졸해지며, 자신만만하다가 일시에 위축(萎縮)되기도 한다.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자유자재하게 손볼 수 있음은 가히 축복이리라.말을 자제한다는 것은 친숙한 표현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하고픈 말을 전부 쏟아낸다면 세상은 그야말로 폭망의 길로 접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지극한 수단이 말이지만, 말이 본령에서 어긋나면, 그 말은 인간을 죽이기까지 한다. 차라리 주먹으로 맞은 일은 잊을 수 있지만, 언어폭력은 대저 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극단의 양면성을 가진다.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대참사’ 이후 어떤 인간 말종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징글징글하게 해 처먹는다는 극악무도(極惡無道)한 말을 내질렀다. 나는 그것이 한국인이 한국인에게 한 말인가, 귀를 의심했다. 대체 유가족들이 무엇을 그렇게 많이 먹었길래 저런 막말을 해대는가, 다시 생각한 것이다. 더욱이 시체 장사한다는 말을 내갈긴 야차(夜叉) 같은 족속도 있었으니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세상인 것은 분명하다.요즘 아침저녁으로 들려오는 끔찍한 소식의 원인은 몸과 마음과 말의 자제가 사라진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말을 잠시나마 돌아보면 어떻겠는가?!

2023-08-20

‘시인의 저녁’, 종언을 고하다!

김규종 경북대 교수 금요일 점심 먹고 오는 길에 아, 그렇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경북대 교수회에서 퇴임의 변(辯)을 써달라는 시한이 그날이었기 때문이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길을 걷는 일은 그래서 유용하고 의미 있는 모양이다. 방송국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얼핏 두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지나간 세월을 차분하게 반추하여 글로 옮겨야 한다. 원고매수 제한은 없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차분하게 전하면 된다.수요일에는 젊은 가수 박창근씨를 초대하여 두 시간 특집방송을 진행했고, 목요일에는 학교 선생님 두 분과 함께 교육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짚어봤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음유시인이자 참여 가객(歌客) 정태춘-박은옥 부부를 초대하여 두 시간 특집방송을 하기로 했다. 대구 문화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시인의 저녁’이 청취자들과 작별 인사를 하는 중이다. 금요일 저녁 6시 5분부터 8시까지 두 시간 방송을 마치면 ‘시인의 저녁’은 종방이다.지난 2020년 10월 5일 저녁 6시 15분에 시작하여 2년 10개월 1주일 동안 진행된 ‘시인의 저녁’이 막을 내린다는 소식은 지난 5월 중순에 알려졌다. 처음에는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방송국의 의사결정과정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고 서운하기까지 했다. 손님인 나야 어쩔 도리가 없지만, 은퇴를 목전에 둔 연출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방송 중단 통보는 찜찜하고 아쉬운 것이었다.8월 11일 저녁 8시가 되면 2021년 ‘한국 방송 라디오 부문 대상’을 받은 전국 유일의 시사와 인문학 프로그램인 ‘시인의 저녁’이 끝난다. 그런 자명한 사실이 시간과 더불어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필연의 사실로 굳어진 방송 중단! 수요일 박창근 가수는 여러 차례 부당함을 강조한다. 이렇게 좋고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중단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그는 여러 차례 항변조로 말한다. 고마운 마음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세상의 모든 것은 생명이 있든 없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나의 교수질 30년 인생이 끝나가듯 ‘시인의 저녁’도 끝나는 것이다. 마지막 방송을 마치고 나오자 30명 정도의 방송국 관계자들이 잔칫상을 준비한다. 피디와 아나운서, 방송작가들이 십시일반 (十匙一飯) 정성스레 준비한 상이 펼쳐지고, 축하와 감사 인사가 이어진다. 여기저기 사진기가 소리를 내고, 환한 웃음과 예기치 못한 눈물이 터져 나온다.‘사랑에 관하여’에서 안톤 체호프는 모든 것은 가장 적절한 시간에 끝난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남녀 주인공 알료힌과 안나 알렉세예브나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마침내 종언(終焉)을 고할 때 작가가 남긴 말이다. ‘시인의 저녁’도 그러할지 모르지만, 나는 오히려 ‘시(始)는 종(終)이요, 종은 시다’라는 글을 남긴 윤동주 시인의 말에 더 동의하고 싶은 마음이다. 지난 1천일 동안 ‘시인의 저녁’에 관심과 애정을 쏟아준 대구경북 청취자들께 감사드린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그들과 만나고 싶다. 끝은 어차피 새로운 시작이기에!

2023-08-13

새만금 잼버리 대회 난맥상

김규종 경북대 교수 보름 넘게 이어지는 폭염(暴炎)과 열대야가 시민들의 평온한 일상을 헤살놓고 있다. 강릉에서는 열대야도 모자라 초열대야까지 나타나는 걸 보니 지구 온난화가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절감하게 된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계속되는데, 새만금 잼버리 대회의 난맥상이 한국인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고 있다. 선진국 타령을 해대던 수많은 언론매체에 빨간불이 켜진다.세계 전역 159개국 4만여 명이 참가하는 1천억원 규모의 세계적인 행사를 ‘배추 장사’ 문서 처리하듯 주먹구구식으로 치르려 했던 인사들의 난맥상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새만금이 자리한 전북 부안을 지역구로 둔 이원택 민주당 의원의 1년 전 문제 제기가 사태의 핵심을 찌른다. 작년 국정감사에서 그는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잼버리 대회 준비상태를 디테일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보기 때문에 걱정돼서 말씀드리는데, 부처의 장관과 책임자가 혼선이 있는 조건에서 이 행사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폭염이나 폭우 대책, 비산(飛散)먼지 대책, 해충 방역과 감염대책, 관광객 편의시설 대책, 영내-외 프로그램을 다 점검하셔야 합니다. 이런 것을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세계의 청소년과 세계가 바라보는 이 대회가 어려운 역경에 처할 수 있다는 걸 장관님이 좀 인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이런 문제 제기와 우려에 대해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시종일관 “문제없다, 이미 모든 대책을 마련해 두었다,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답변을 되풀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아가 그녀는 “태풍이나 폭염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모두 준비해 두었다. 이에 대해 보고드리도록 하겠다”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1천명이 넘는 온열 환자가 발생하고, 영국과 미국, 싱가포르가 철수를 결정하는 등 잼버리 대회 난맥상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새만금 잼버리에 가장 큰 규모인 4천500명의 참가자를 보낸 영국이 철수를 시작하고, 서울의 호텔로 이동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여기에 1천200명의 참가자를 파견한 미국과 60명의 참가자를 보낸 싱가포르가 철수를 결정하여 퇴영(退營)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아울러 세계 스카우트 연맹은 잼버리 행사 중단을 권고하기에 이르렀다.새만금 잼버리 대회의 총체적 난맥상은 이미 예고된 바 있다. 대회 공동조직위원장에 김현숙 여가부 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강태선 한국 보이스카우트연맹 총재, 김윤덕 국회의원이 포진하고 있는데, 이원택 의원이 정곡을 찌른 것처럼, 부처 장관과 책임자가 이미 혼선에 빠진 형국(形局)이다. 잼버리 대회를 최종적으로 지휘하고 책임지는 제도적 장치가 삐걱거리고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다.예컨대 지난 6월 초 잼버리 조직위는 배수시설 설치와 포장 공사 비용 56억원, 재난·재해 발생 대비 예비비 14억원, 폭염 대비 물과 얼음 구입 예산 2억4천500만원의 추가예산을 여가부에 요청했다. 하지만 여가부는 20억원 정도를 지원함으로써 파국을 방조한 꼴이 됐다. 어쨌든 이번 대회가 더 이상의 파국 없이 무탈하게 끝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2023-08-06

젊은이 죽이는 나의 조국 자유대한!

김규종 경북대 교수 “월요일 출근 후 업무 폭탄과 아이 난리가 겹치면서 그냥 모든 게 다 버거워지고, 놓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숨이 막혔다. 밥을 먹는데 손이 떨리고 눈물이 흐를 뻔했다.”인용문은 서울 교사노동조합이 7월 24일 유족의 동의를 받아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초등교사의 일기장 일부다. 스물세 살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버려야 했던 교사의 깊은 한이 손에 잡히는 듯하다. 그녀를 머나먼 곳으로 떠나보낸 두 가지 근본 원인이 글에 담겨 있다.초등학교 담임교사에게 떨어지는 과중한 업무가 그 하나고, 아이로 인해 벌어진 난리 북새통이 그 둘이다.언제부턴가 대학에도 수많은 잡무가 부과되고 있다. 교육부가 강제하는 잡무 때문에 연구와 교육에 전념해야 할 젊은 교수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예컨대 지난 5년 동안 교육부에 신고하지 않고 참가한 회의나 외부강연 자료를 제출하라는 것이다.무슨 수로 그것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그런 자료가 필요하다면 해마다 자료 제출하라고 요구할 것이지, 이 시점에 무슨 이유로 교수들을 들볶는가?!국립대학이 이 모양 이 꼴이니 초등학교 초임 교사에게 떨어지는 불요불급(不要不急)한 업무가 얼마나 많을 것인지, 가늠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초등교사의 가장 큰 소명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일이지, 자잘하고 쓸모없는 잡무가 아니다.왜 그들에게 사무 관료의 사고방식을 강제하는가?! 아이 가르치는 것을 능가하는 숭고하고 중요한 일이 세상에 또 있는가.아이로 인해 생겨난 난리 때문에 경험도 없고 마음도 여린 교사는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오늘날 대한민국의 공교육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교육부 장관, 교육감, 학교장, 교사, 학생, 학부모 가운데 누구인가?! 왜 서이초 어린 교사는 극단적인 선택에 홀로 내몰린 것일까?!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며, 어디에도 손들어 저항하거나 안타까운 마음을 전할 길 없는 참혹한 현장으로 내몰린 것일까?!교육이란 미명(美名)으로 ‘사랑의 매’라는 허울로 포장된 폭력적인 교육을 받아온 나도 알 수 없는 게 학부모들의 온갖 분탕질이다.내 자식이 소중하면, 남의 자식 소중한 것쯤은 알아야 할 텐데, 요즘 학부모들 수준은 경이로운 지경이다.담임교사가 아이를 조금만 혼낼라치면 ‘아동학대’란 이름으로 협박하며 교사를 윽박지른다.이런 지경이니 교사가 마음 놓고 학생 지도에 나설 수 있겠느냐 말이다. ‘숨이 막혀 오고, 손이 떨리고, 눈물이 흐를 뻔한’ 상황까지 교사를 몰고 간 교육 당국과 학부모가 이번 참사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세월호 대참사와 이태원 참사도 모자라 이제는 교사마저 죽음으로 내모는 나라에서 왜 아이를 낳지 않느냐고 젊은이들을 비난하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참담하고 암담하며 또다시 참혹한 내 조국 자유대한이여!

2023-07-30

넘치는 자식 사랑, 그만 멈추라!

김규종 경북대 교수 20대 초반 여교사가 학교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죽음을 둘러싸고 숱한 소문과 의혹과 추측이 난무한다. 죽음을 둘러싼 진영 사이의 대결과 충돌도 점입가경이다. 하지만 그들 목소리의 교집합이 있으니,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다. 이런 주장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멀리는 4·16 세월호 대참사와 가까이는 10·29 이태원 참사가 있다. 그런데 결론은 무엇인가?! 유야무야(有耶無耶), 꼬리 자르기,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않았고, 책임자 처벌은 온데간데없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 겪는 일인가?! 반짝하며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이나, 절망과 좌절과 탄식의 파고(波高)를 인내하면, 은근슬쩍 지나가게 돼 있음을 원인 제공자들은 잘 알고 있다.1862년 출간된 ‘레미제라블‘에서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 시민들의 짧은 기억력을 한탄한다. 불과 180일, 여섯 달만 지나면 모든 것을 망각하는 프랑스인들의 어리석음을 오래도록 한탄한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20년대 대한민국 시민들의 기억력은 여전히 40일의 벽을 넘지 못한다. 불과 38일 지나면 그런 일이 있었나, 하며 조용히 손사래 치며, 그만하라고 목소리 높인다.기억은 힘이 있다. 특히 그것이 경술국치(庚戌國恥) 같은 국가 중대사이거나 제주 4·3이나 여순사건 같은 비극적인 참변이거나, 광주항쟁 같은 위대한 투쟁이거나, 87년 평화 대행진 같은 민주항쟁일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사람은 상실과 패배와 고난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일컬어 ‘고난 없이 영광 없다(No cross, no crown)’는 영어 속담도 있지 않은가?!그렇지만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우리 한국인은 비관과 부정에 휩싸인 과거를 서둘러 잊어버리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환향녀(還鄕女)와 호로자식(胡虜子息)이라는 비감하고 쓰라리며 절망적인 단어를 만들어낸 병자호란을 영화관에서 돌이켜보는 자세가 그것을 웅변한다. 어찌 됐든 작은 승리에 도취하고 행복해하는 작은 인간들이 너무도 많다.2011년 개봉된 김한민 감독의 ‘최종 병기 활’에 747만 관객이 들었다. 그들은 조선 신궁(神宮) 남이의 활에서 크나큰 위로와 활로를 찾는다. 작고 여린 남이와 그의 애깃살이 크고 무시무시한 쥬신타의 강궁 육량시(六兩矢)의 대결을 보면서 손에 땀을 쥐고 환호한다. 대국적인 견지의 처참을 극한 패배와 치욕은 사라지고, 남이의 작은 승리에 도취한 군중만 남는다.2017년 개봉된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은 385만의 관객을 모았다.‘최종 병기 활’의 절반 수준이다. 이조판서 최명길과 예조판서 김상헌의 치열한 논리 대결을 바탕으로 조선의 완벽한 패배를 조명하고 인조의 구차한 삼전도 굴욕을 재연한다. 시종일관 무겁고 출구 없는 조선의 암군(暗君) 인조와 그를 보필하는 신하들의 허망한 충성 대결. 그 고갱이를 들여다봐야 한다.낱낱이 파헤치고, 진실을 찾아야 한다. 진실이 밝혀지면 책임자를 법정에 세워야 한다. 죽은 자를 되살릴 수는 없지만, 그의 죽음은 기억해야 한다. 추락한 교권을 일으켜 세우고,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자식 사랑을 억압해야 한다. 당신 자식만큼 교사의 생명과 인권도 소중하니까!

2023-07-23

표류하는 세계, 무너지는 한국

김규종 경북대 교수 인터넷 가상공간에서 내게 썩 쓸모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서적을 소개하는 지면이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로 무장한 수많은 신간 서적이 출간-유통되는 21세기 20년대는 그야말로 유토피아다. 그래서 일본 최고의 지식인이자 독서광 다치바나 다카시(1940∼2021) 평론가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살아생전에 그는 “이렇게 좋은 책들이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데, 죽어야 한다니 너무나 안타깝다”는 소회(所懷)를 밝힌 바 있다.얼마 전에 ‘표류하는 세계’에 나오는 구절을 보고 즉시 구매했다. “미국이라는 강력한 배는 정치 갈등과 부패, 이기주의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사회를 둘러싼 논쟁들은 폭력적이고, 젊은 사람들은 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며, 제일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나라를 희생해가면서 개인의 영광을 추구한다. 공동체는 쇠퇴하고 있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아니, 이게 대한민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인가?!하기야 세계에서 미국을 가장 열심히 추종하는 나라가 나의 조국이니까 동조성(同調性) 확인은 식은 죽 먹기일 터. 미국인들의 두 가지 금기(禁忌)가 정치와 종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친구나 가족 간에도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 하는 화제와 어떤 종교를 믿느냐 하는 이야기는 무조건 피한다고 한다. 그만큼 미국 사회는 정치와 종교 갈등을 심각하게 겪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 갈등 역시 미국 못지않다.이른바 제3 당의 출현을 기대하는 유권자들이 적지 않지만, 그들의 바람은 번번이 무산되었다. 정부 여당과 제1 야당의 갈등과 대결 양상이 연일(連日) 언론의 주제가 되지만, 적정한 선에서 마무리되는 타협과 해결방안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정치에 염증을 내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나이 먹은 축들만 열성적으로 투표장에 나간다. 선거는 미래권력을 선출하는 행위인데, 청년들은 놀러 가고, 노인들만 투표하는 이상한 행태가 되풀이된다.어린 시절부터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에 중독된 젊은 세대는 직접적인 대면이나, 전화 통화를 꺼리고, 문자 소통으로 대신하는 데 익숙하다. 사람을 만나든 전화로 통화하든 완결된 문장으로 이루어진 대화를 한다는 게 그들에겐 어려운 과제라고 한다. 이른바 ‘카카오톡’이라는 문명의 이기(利器)에 노예로 전락한 지 오래이기에 극히 짧은 의사소통 수단에 속수무책으로 길들여진 것이다. ‘ㅇㅋ, ㅇㅇ, ㅋㅋㅋ’ 같은 놀라운 신발명 표기를 보았을 터다.‘표류하는 세계’에 나오는 글 가운데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똑똑한 인간들의 지독한 개인주의와 영광 추구로 인해 공동체가 쇠퇴하고 있다는 대목이다. 미국은 처음부터 개인주의로 중무장한 상태에서 출발한 나라이니까 그렇다 쳐도, 나와 가족보다 이웃과 공동체를 중시했던 미풍양속이 우리 조상들의 전통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나와 가족이 조금 손해 보더라도 공동체를 위해서는 참아야 한다고 배운 세대가 속속 사라지고 있다.나의 결론은 단순하다. 잘난 사람들, 돈 많은 사람들, 배운 사람들, 권력 가진 사람들이 이제는 내려놓고 공동체를 돌보자는 것이다. 공동체 건설을 위해 함께 매진하면 어떻겠는가?!

2023-07-16

죽음의 죽음에 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태곳적부터 인간은 불멸을 꿈꾸었다. 인류의 가장 오랜 서사시로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주인공 길가메시는 친구인 엔키두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고통받는다. 필멸(必滅)해야 하는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을 모색하다가 그는 우트나피쉬팀에게 영생의 비법을 알아낸다. 하지만 우르크를 목전에 둔 지점에서 뱀에게 영생의 불로초를 도둑맞고 결국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대략 4,500년 전에 지어진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죽음은 중요한 주제였다. 죽음과 불멸에 가장 친숙한 사람은 진시황일 것이다. 죽고 싶지 않았던 그도 죽음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19가 횡행하면서 대략 680만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지구촌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일으키는 병은 결핵과 말라리아로 알려져 있다.그런데 결핵이나 말라리아 혹은 코로나19보다 훨씬 많은 사망자를 낳는 질병이 있다. 그것은 노화 관련 질병이다. 세계 전역에서 하루 평균 15만 명이 죽는데, 그 가운데 10만 명 이상이 암이나 심혈관-뇌혈관 질환 같은 노화 관련 질환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민주주의의 보급으로 전쟁과 기아, 테러로 인한 사망자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따라서 21세기 인류의 가장 큰 적은 전쟁이나 기아가 아니라 노화와 노화 관련 질병이다.몇몇 미래학자들은 인체의 노화를 되돌리고 노화를 예방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기회가 가시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공학자인 호세 코르데이로와 데이비드 우드는 노화는 질병이며,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공언한다. 그들은 2045년이면 ‘죽음’이 선택사항이 될 수 있다는 담대한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수천 년 전 20∼25세였던 인류의 평균수명은 오늘날 80세를 넘어서고 있으며, 100세 시대라는 말이 나도는 요즘 그들의 주장이 공허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히드라나 홍해파리 혹은 플라나리아 같은 불멸의 생명체에서 인류가 영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내고자 수많은 사람이 항노화(抗老化)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있다.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구글의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그들이 노화를 막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넘어서려는 생명공학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여기서 문제는 죽음이 오기 전까지, 그러니까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핵심적인 과제로 대두된다. 오래 사는 것도 부족해서 영생불사(永生不死)하는 존재로, 그러니까 인간이 신의 반열로 올라설 때 그 인간은 무엇을 지향하면서 기나긴 삶의 시간대를 보낼 것인지, 하는 문제가 급선무로 등장하는 것이다.1762년 출간된 장 자크 루소의 ‘에밀’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양심의 가책 (苛責)과 육체적 고통을 제외하면 인간의 여타 괴로움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육체가 문제없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정신, 즉 양심의 문제일 터, 그것만이 문제로다!

2023-07-09

대학생들의 글쓰기

김규종 경북대 교수 6월 30일까지 학생들의 성적을 처리해야 했기로 지난 며칠 답안지를 붙들고 씨름했다. 채점할 때마다 절감하지만, 요즘 대학생들의 글 쓰는 능력은 날이 갈수록 떨어진다. 어떤 경우에는 아, 이 정도까지 떨어질 수 있나, 하는 자괴감(自愧感)이 찾아오는 수도 있다. 대학생들이 쓴 답안지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오류가 곳곳에서 나를 급습한다.2023년 1학기 채점 답안지 가운데서 나를 웃기고 울렸던 몇몇 구절을 소개한다. 지난 학기 강의 제목은 ‘동서 고전의 만남’이었고, 강의 내용은 세계 4대 문명과 초원 문명에서 시작하여 야스퍼스의 ‘축의 시대’를 지나 육상제국과 해양제국, 유라시아와 한반도, 사마천의 ‘사기’와 김부식의 ‘삼국사기’, 일본의 ‘일본서기’를 살펴보고, 공자의 ‘논어’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한문 원본을 학생들에게 한 문장씩 쓰도록 하는 것이었다.인상적인 대목은 우즈베키스탄이나 베트남에서 온 유학생들에겐 한문 쓰기가 상당히 어렵지만, 한국이나 중국 학생들도 ‘논어’와 ‘도덕경’ 한문이 어렵게 다가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에서 고전 공부를 등한시한다는 자명한 결과와 이런 교육은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는 결론과 만난다. 최소한의 한자와 한문 교육이 필요한 본보기를 들겠다.답안지 원문과 수정된 문구를 보이겠다. “정책을 체택했다 - 정책을 채택했다”, “항일전쟁 발생이 발생하고 - 항일전쟁이 일어나고”, “중국을 부요케 한다면 - 중국을 부유하게 한다면”, “논-공업 경제정책 - 농공업 경제정책”, “학점을 매게로 - 학점을 매개로”, “모택동의 소련과 다른 중국식 공산주의를 대두하며 혁명 시작 - 소련과 다른 중국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모택동은 혁명을 시작했다”, “폐쇠적인 정책 - 폐쇄적인 정책”, “중국은 흰백묘, 하얀 쥐라도 상관없이 잡는다 - 등소평은 흑묘백묘론을 내세워 하얀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주장했다”이런 답안지를 채점하는 일은 고문에 가깝다. 대체 중고등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고 생각하며 글을 쓰게 했는지, 중고교 교사들에게 묻고 싶다. 아니, 학원의 일타 강사들에게 물어봐야 하나?! 이런 엉터리 말고도 우리말조차 제대로 못 쓰는 답지도 흔하다.“집권이 끊나고 - 집권이 끝나고”, “사사로운 일에 얽메이지 말고 -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지 말고”, “모안영도 포함이었으며 - 모안영도 포함되었으며”, “내새우고 있다 - 내세우고 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것이 낫다 -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메뚜기 때 - 메뚜기 떼”, “안좋은 되풀이만 발생했다 - 좋지 않은 일만 되풀이되었다”거점 국립대학교인 경북대 학생들의 글쓰기 수준이 이 정도라면, 다른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거론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2023년 대한민국의 대학은 위기에 봉착해 있다. 대학의 필요성을 다시 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지식 유튜브와 케이무크(KMOOC) 같은 열린 인터넷 강의가 수두룩하다. 결혼과 취직을 위한 대졸자 양성이 대학의 존립 근거인가, 묻는다.

2023-07-02

사라진 시간

김규종 경북대 교수 석면 제거공사를 한다고 대학원동 건물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방학 기간에 공사를 진행하겠다는 본부의 구상에 따라 연구실을 정리해야 했다. 이번 학기 시작 전부터 나는 연구실에 있는 책을 정리할 요량이었다. 러시아어, 영어, 도이치어, 한국어 그리고 기타 언어로 된 적잖은 분량의 책을 단번에 정리하는 것은 어리석은 노릇 아닌가?!나의 의도는 선량한 의지 때문에 관철되지 못했다. 몇 년 전 명예퇴직한 동료 교수가 인문학 카페를 열겠다는 뜻을 표명했고, 그곳에 다채로운 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 또한 퇴직 이후 인문학 카페의 고객이자 운영자로 자신을 설정했기에 서책 정리는 자연히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의지는 의지로 멈췄고, 정리해야 할 책만 그대로 쌓였다.혼돈의 와중에 찾아온 대상포진과 종강, 학기말 시험과 작은아들의 결혼, 어머니 기일과 시민자유대학 강연 등으로 연구실 정리는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동안 나는 여러 개의 책상 서랍을 조금씩 정리했다. 그러다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눈과 마음이 동시에 멈춘다. 오래전에 찍은 색바랜 사진과 예상치 못한 편지나 엽서가 곳곳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어떤 글의 주인은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고, 어떤 사진의 주인공은 아직도 내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연말에 받은 수많은 연하장과 단양 사인암 부근에서 찍은 사진을 모은 작은 사진첩이 인상적이다. 20년도 더 지난 사진 속의 나와 그들은 우리가 되어 환하게 웃고 있다. 그때 거기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와 사건을 경험했던 것일까?!현재는 과거의 누적이고, 미래는 현재의 누적이다. ‘시간의 화살’이 말하는 것처럼 시간은 언제나 과거에서 출발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날아간다. 그것의 역행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고, 미래는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현재는 과거로 쏜살같이 달아나기 때문에, 시간은 미래에서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과거로 질주한다.시간이 미래로 날아가든, 과거로 질주하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사라진 시간 속에서 망실(亡失)된 나의 지나간 사건과 인연과 관계가 아쉽고 안타까운 것이다. 어쩌다가 나는 그 모든 사건과 인연과 관계를 잃어버리고 지금과 여기, 우두망찰 홀로 서 있는 것일까. 사라져버린 시간을 나는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궁금하다.젊은 날, 빛처럼 찬란하고, 색처럼 아름답고, 꿈처럼 빛났으며, 아침이슬처럼 영롱했던 눈망울과 힘차게 작동했을 심장 박동 소리를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100세 시대를 말하는 세태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한 100세인지, 묻지 않는다. 그저 존재함으로써 100세를 채우는 현상 자체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장수하는 것이 자랑인가?!남들처럼 나 역시 인생 3막 초입에 서 있다. 앞으로 어떤 사건과 관계와 인연이 나와 함께 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예전처럼 궁금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저 물 흐르는 대로, 달빛 비추는 대로 살아갈 모양이다. 오늘 밤엔 뻐꾸기 울음소리도 없이 고요하다.

2023-06-25

결혼식 풍경

김규종 경북대 교수 아주 오랜만에 결혼식에 참석했다. 나는 장례식에는 자주 가는 편이지만, 결혼식에는 부조(扶助)만 하고 대개는 아니 간다. 쓸쓸하고 슬픈 장소에는 사람이 많이 갈수록 좋지만, 환하고 행복한 자리는 조금 허전해도 견딜 만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내가 결혼식에 간 이유는 나의 둘째 아들이 혼인(婚姻)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혼주(婚主) 자격으로 신랑과 신부를 위한 덕담(德談)을 하기로 했기에, 더욱 결혼식에 가야 했다. 붐비는 토요일 오후 서울 내부순환도로와 강변북로를 거쳐 강동(江東)의 결혼식장에 도달한 시각은 오후 2시 15분 무렵. 예식은 오후 3시 30분부터 시작한다. 여유 있게 도착한 나와 동생 둘, 그리고 조카 둘이 호기롭게 35층 예식장으로 들어선다.어린 시절부터 나는 고소 공포증에 시달렸다. 어디든 높은 곳에 올라가면 간담이 서늘해져서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35층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풍광(風光)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신선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필시 내 아들의 결혼식이 진행될 고층 건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며칠 전부터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재삼재사 생각하곤 했는데, 첫머리를 어떻게 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식을 앞두고 수많은 하객(賀客)이 찾아들고,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덕담 걱정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래, 닥쳐서 생각하면 되겠지, 하고 자신의 내면을 추스른다.활달한 성격의 신부와 씩씩한 거동의 신랑이 잘 어울린다. 젊음의 약동(躍動)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아름답고 유쾌한 노릇이다. 36년 전에 나도 저런 모습이었던가, 잠시 상념에 잠긴다. 그때 내 지도교수께서 주례하셨는데, 머리털 나고 그렇게 넘치는 칭찬을 들었던 기억은 없다. 얼마 전에 세상을 버리신 선생님의 명복을 새삼 빈다.이윽고 내가 말할 차례가 온다. 높은 단상에 올라가 신랑과 신부의 얼굴을 보면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린 시절 작은아들이 보여준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 내게 경험한 낯설고 아픈 추억을 잠시 더듬는다. 고집스럽고 공부하기 싫어하고, 삶을 향한 애착이 많지 않았던 아들이 어느새 장성하여 일가(一家)를 이룰 태세라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하다.며느리 되겠다고 자청한 젊은 신부 역시 환한 얼굴로 내 덕담에 귀를 기울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4~5분 정도 말하겠다고 해놓고, 7분 넘게 너스레를 떨었나 보다. 필시 제 이야기에 홀로 도취하여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모양이다. 장남(長男)을 미뤄두고 차남이 먼저 혼인하게 되었기로 적잖은 인사를 받는다. 큰아이 결혼식에서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생각한다.멀리 울산과 대구, 청주에서 올라온 벗들이 고마웠다. 이렇게 인생의 중요한 장면 하나가 스르륵 지나간다. 언젠가 세월이 흐르고 흘러 작은아들 내외가 오늘을 돌이켜보면서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 궁금하다. ‘얘들아, 행복하고 멋지게 살아가렴! 뒤돌아보지 말고, 당당하게!’

2023-06-18

마지막 수업

김규종 경북대 교수 세상의 모든 것에는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 존재한다. 이것에는 예외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처음과 마지막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첫사랑이나 첫인상 혹은 마지막 잎새나 마지막 수업 같은 말이 생겨난다. 1871년 알퐁스 도데가 남긴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과 1907년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가 기억에 남아있다.내게도 그런 일이 있다. 지난 목요일 오전 9시, 10시 반 그리고 오후 3시에 마지막 수업을 한 것이다. ‘동서 고전의 만남’, ‘러시아 어문학의 세계’, ‘명저 읽기와 토론’ 세 과목을 종강한다. 대상포진으로 인해 한 주일을 순연(順延)한 결과다. 시간이 여유 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대단한 안타까움 같은 건 없었다.사람들의 질문이 오히려 낯설게 다가온다. “정년인데, 기분이 어떠세요?!” 그들이 기대하는 대답은 한결같이 “시원섭섭하시죠!”였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시원합니다!”. 섭섭한 것은 전연 없다. 섭섭할 것이 조금도 없는 종강이기 때문이다. 내가 냉정한 인간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수업을 향한 학생들의 자세가 뜨뜻미지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9년 전 선배 교수가 마지막 수업을 한다길래, 교수 휴게실에서 오후 6시 무렵 만나기로 했다. 그분은 오후 6시 반이 다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리 늦었냐?!”는 나의 지청구에 “마지막 수업이잖아!”하고 응수한다. 하지만 그것은 수업 이후 학생들의 일정을 고려하지 않은 교수의 일방적인 판단이다. 정년을 앞둔 교수의 마지막 열정을 이해하는 학생은 완전히 소멸했다. 그런 학생들을 대상으로 45분을 넘겨 진행한 종강이 어떤 인상을 불러왔을지, 모를 일이다.지난 세기 86년 가을 학기에 ‘19세기 러시아 소설’ 강의가 나의 첫 번째 수업이었다. 강의를 주면서 학과장 교수는 “자네 선배들은 전부 교양 수업을 했는데, 전공 수업은 자네가 처음이야!”하는 말씀을 하셨다. 박사과정생으로 처음 맡은 강의에 전력투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단편소설 ‘이발사’를 통독한 기억이 생생하다.1987년 봄 학기에는 학부 4학년 전공과목인 ‘러시아 희곡’을 맡아서 열강했다. 그런 세월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대학과 인연을 마감할 시기가 온 것이다. 누구나 크고 작은 인연과 관계 속에서 생애를 이어가지만,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많은 사람의 보살핌과 조바심 속에서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릴 것인지 궁금하다.한 가지 저어되는 사실이 있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현저하게 드러나는 사회적 수동성이다. 강의실에 들어갈라치면 군데군데 어둡다. 세 군데의 조명 가운데 두 군데의 조명이 꺼져 있기 일쑤다. 그런 어둠 속에서 학생들은 스마트폰 삼매경에 푹 빠져 있다. 강의가 끝난 강의실이 환하고 에어컨이 돌아간다. 요즘 학생들은 자기 이익과 관심 대상이 아니면, 눈감고 지나간다.학생들의 사회적 수동성을 지적해도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대학은 지금 마구 흔들리고 있다. 지적-정신적 수준보다 중요한 사회적-윤리적 책무가 사라진 대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2023-06-11

어떤 경험

김규종 경북대 교수 개인의 경험과 지식은 그가 지상에 머문 시간의 길이와 비례하지 않는다. 오래 살았다 해서 개인이 도달하는 지적·정신적 성취가 그 시간만큼 깊고 너르지 않다는 얘기다. 오히려 어떤 이는 짧은 생을 열렬하게 불태움으로써 경이로운 높이에 이르기도 한다. 식민지 조선의 시인 소월과 동주, 소설가 김해경과 김유정 같은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어떤 교수는 100살이 넘도록 살았다지만, 그가 도달하는 지평은 어느 지점에 멈춰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개인에게 허여된 사유와 인식의 근저를 근본적으로 혁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익숙하고 평판이 좋으며 어딜 가나 중간 정도 수준에 머무는 대중의 취향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는 인생이기 때문이다.세상은 넓고 고수는 도처(到處)에 있다는 명제를 수용한다면, 우리는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 먹은 인간들은 종종 이런 명제를 망각한다. 노인을 떠받드는 오랜 전통과 그것을 당연시하는 사회적 풍토가 철부지 노인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노인을 경시한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노인도 적잖다. 과연 그런지는 그들만이 알 것이다.논어 ‘계씨 편’에는 공자가 인간을 네 부류로 나누는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 공부해서 아는 사람, 곤경을 당한 끝에 배워서 아는 사람, 곤경을 당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백성 나부랭이들. (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공자는 자신을 공부해서 아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평생 학인을 자처했던 공자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대단한 자부심이다. ‘불치하문’ 네 글자에는 학문의 정점을 향해 치달려가는 학인 공자의 모습이 온전하게 담겨 있다. 그래서 그가 도달한 기막힌 경지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것이다. (朝聞道 夕死可矣.)얼마 전에 두피를 콕콕 찌르는 통증이 찾아왔다. 누구에게 물어도 뾰족한 대답은 없었다. 뭐 이런 걸로 병원에 가나, 하고 하루를 넘긴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오른쪽 눈썹에 상처가 나 있고, 두피 통증은 사라졌다. 아하, 염증이 눈썹 부위로 터져나가면서 통증도 사라졌네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 번째 날 아침에 통증이 불청객처럼 조용히 찾아왔다.통증의학과의 자상한 의사는 대상포진이라고 잘라 말한다. 어이쿠, 이런 일이?! 토요일 오전에 급히 처방을 받고 투약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병원에 입원하여 닷새 만에 퇴원한다. 은퇴를 앞두고 장거리 운전과 강연, 방송과 강의, 논문 발표. 학과 행사 참가 같은 강행군을 한 달 넘도록 이어왔다. 평소에도 하지 않던 일을 몰아서 해치운 것이다.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지는데, 길 서두는 나그네처럼 허둥지둥 살아온 게다. 그것의 결과가 대상포진이었다. 허망한 노릇이다. 하지만 하나 배웠다. 마음과 몸의 나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뻐꾸기가 보름달 환한 저녁에 구슬피 운다.

2023-06-04

잔디를 깎다가

김규종 경북대 교수 사람마다 좋아하는 냄새가 있다. 나는 바닷바람 냄새와 잔디 깎을 때 나는 냄새가 좋다.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 바다의 드넓은 인상도 좋았지만, 바다가 풍기는 냄새도 잊을 수 없다. 잔디 냄새가 좋다는 생각이 처음 든 것은 베를린 자유대학 동유럽연구소 앞에서였다. 1989년 4월 어느 맑은 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오던 잔디 냄새는 대단한 것이었다.어린 시절 큰집에 가면 잔디에서 온종일 뛰어놀 수 있었다. 일 년에 단 하루, 추석 당일에만 허락된 특별한 행사가 잔디에서 공놀이하는 일이었다. 가난했던 나의 아버지와 달리 집안의 기둥이셨던 둘째 큰아버지는 상당한 부를 축적하셨고, 잔디가 심어진 마당 있는 양옥집에서 사셨다. 부자는 부럽지 않았지만, 잔디만은 부럽기 그지없었다.오랜 세월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다가 몇 년 전 청도로 이사 온 후에 나도 잔디 깔린 집에서 살게 되었다. 전통 한옥에는 마당에 잔디를 심지 않는다. 잔디는 무덤에 심는 것이기에, 마당에는 작은 돌이나 흙으로 처리하는 게 관례였다고 한다. 하지만 양키 문화가 대거 이입되면서 잔디를 심는 집이 부쩍 늘었고, 나도 그 대열에 한몫 끼어든 셈이다.보기 좋지만 관리가 쉽지 않은 것이 잔디 있는 마당이다. 더욱이 농가에는 사시사철 곳곳에서 온갖 풀씨들이 날아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제멋대로 뿌리를 내린다. 일단 뿌리를 내리고 나면 그들은 수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끝도 없이 피고 지고 또 피어난다. 체면이고 염치고 없는 것들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풀이다.우리 집 마당에서 해마다 세력을 키워가는 상사화, 붓꽃(아이리스), 낮분홍달맞이꽃, 부추, 돌나물, 자주달개비, 민들레, 씀바귀, 들깨 같은 것들은 어디선가 날아와서 저희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생장한 것이다. 이런 녀석들이 잔디와 함께 자라더니, 급기야 괭이밥, 봄까치꽃(큰개불알풀), 벼룩이자리, 개망초, 달개비(닭의장풀), 개쑥갓 등속도 맹렬하게 세력을 키운다.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급습을 감행하는 풀을 ‘잡초’라 부르지만, 나는 ‘불원초(不願草)’라 부른다. 잡놈은 있어도 잡초는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내가 바라지 않았는데 생장하기로 불원초라 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강인한 생명력과 불굴의 의지로 언제나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결코 중간에 꺾이거나 사라지는 법이 없다.제초제를 뿌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손으로 뽑거나, 예초기로 기세를 제압한다. 오늘 저녁에도 잔디를 깎으면서 온갖 풀들의 얼굴과 대면하면서 옛일을 돌이키는 것이다. 그 많던 시공간과 풀과 인연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생각하면 잠시 아득해진다. 돌이킬 수 없이 사라져버린 인연과 사람과 순간과 풀과 꽃들의 행방이 궁금하다.34년 전 동서독 재통일 직전 흐뭇한 냄새를 선사했던 잔디 깎던 노동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에게도 봄날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궁금하다. 해마다 봄이 오고, 비가 내리면 잔디를 깎으면서 상념에 젖는 것이다. 아, 세월이여! 추억이여, 인생이여!

2023-05-21

서울행

김규종 경북대 교수 아침 아홉 시 반에 시작한 여정(旅程)이 자정 넘어서야 끝난다. 학회의 정례 학술논문 발표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것이다. 나는 학회 활동에 열렬한 연구자가 아니다. 공부를 혼자 해 버릇한 이유로 독야청청 독불장군의 길을 허위단신 달려온 세월이 30년 가까우니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청해서 발표를 결정하여 서울에 다녀왔다.정년을 불과 석 달 앞둔 백발의 연구자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희곡 ‘시골에서 한 달’ 연구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를 가진 것이다. 19세기 90년대 안톤 체호프의 극문학 성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극작가 투르게네프의 장막극을 여러 각도에서 천착하고 러시아 최초의 심리 드라마로 언급되는 ‘시골에서 한 달’을 곡진하게 들여다보았다.청도역에서 동대구역으로, 동대구역에서 다시 서울역으로, 서울역에서 지하철 1호선으로, 그리고 다시 6호선으로 갈아타고 도보로 학술논문 발표회장에 도착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봄날의 환희가 약동하는 토요일 한나절을 거리에서 거리로 떠돈 셈이다. 세대교체가 완연하게 느껴지는 자리에서 뭔가 아쉬움과 쓸쓸함 같은 게 감촉된다.불꽃처럼 뜨겁고 여름 햇살처럼 찬연(燦然)하게 빛났던 아름다운 시절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구나, 하는 아쉬움이 찾아들었다. 추석이고 설이고 연말연시고 다 팽개치고 연구실에 처박혀 논문과 작품을 읽으며 깊은 한숨과 탄식으로 늦도록 끙끙댔던 시절이 어느새 자취도 없이 스러져 버렸구나, 하는 깨달음에 문득 주변이 쓸쓸한 것이다.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곁을 영원히 사라져간 그 시공간은 학문 후속세대의 눈과 영혼과 가슴으로 다시 채워지고 있지 아니한가, 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리도 없이 그들은, 낯선 모습의 청년들은 각자에게 허여된 문학과 언어학과 연극학과 역사와 세상과 만나고 있었다. 서울에서 대구에서 러시아 곳곳에서!4시간의 긴 발표를 마치고 몰려간 뒤풀이 자리는 실로 은성(殷盛)하여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절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기실 나의 서울행은 그들에게 따스한 저녁을 대접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은퇴하고 나면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울 것 같은 연구자들에게 맛난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오던 참이다.대략 20여 명의 러시아 어문학 연구자들의 뒤풀이 자리에서 오가는 정담(情談)과 웃음소리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약동하는 곳이라는 확신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학회장의 권고에 따라 짧고 간명하게 인사말을 한다. 나는 그들에게 불운했지만, 불멸의 이름을 간직한 피렌체의 시인 알리기에리 단테가 남긴 말을 전했다.“사람들이 떠들게 내버려 두어라. 그리고 그대에게 주어진 길을 가라. 그리하면 그대는 영광의 항구에 다다를 것이니!”학문하는 자의 배포와 당당함을 촉구하고 싶었던 게다.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하게 빛난다.

2023-05-14

영남루와 위양지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오랜 가뭄 끝에 비가 온다. 마른 가뭄 아니련만 강우량이 미미하여 먼지가 풀풀 날리는 것이었다. 7년 대한(大旱)에 비 아니 오는 날 없고, 7년 홍수에 해 아니 드는 날 없다는 옛말이 떠오는 날이 이어졌다. 그래, 노는 사람이야 흥겨울 터이나, 농사짓는 사람들은 얼마나 속이 탈까, 하는 생각이 가시지 않는 나날이었다. 그러다 실로 오랜만에 풍족하게 비 내린다.지난달 중순에 큰아들과 약속한다. 5월 5일 어린이날에 우리 집에 모여서 일박(一泊)하기로 한 것이다. 모임 하루 전날에 나는 전남대 ‘김남주 기념홀’에서 ‘문학자가 바라보는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대중강연을 한다. 광주와 전남대가 자랑하는 1980년대 대표 저항시인 김남주(1946∼1994)를 기념하는 공간에서 강연하는 일은 가슴 벅찬 노릇이다.2019년 옹근 1년을 전남대 교환교수로 있던 때부터 ‘김남주 기념홀’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곳이다. 2019년 5월 3일 오후 5시에 열린 개관행사에 나는 1시간 일찍 도착하여 여러 상념에 젖어 들었다. 대학원 시절 김남주의 ‘조국은 하나다’ 시집을 읽고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던 추억이 생생하다. 그런 남주를 길러낸 전남대 인문대학에 들어선 추모공간!어린이날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오시더니 오후에 접어들어 빗줄기가 굵어지는 것이다. 서울에서 9시 무렵 출발한 아들의 승용차는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야 화양(華陽)에 도착한다. 장성한 남녀 4인을 태운 소형 승용차에 동승(同乘)하여 고깃집으로 간다. 은성(殷盛)한 불빛 아래 따사로운 정담(情談)이 오가고 환한 웃음과 대화가 꽃을 피운다.자리를 옮겨 ‘파안재(破顔齋)’에서 생선회로 함께하는 훈훈한 술자리는 늦은 시각까지 이어진다. 내일은 청춘들과 함께 우포늪에 가서 ‘따오기’ 비상하는 모습을 보리라 생각한다.하지만 이튿날 기상하여 채비를 마치고 나니 창녕 오가는 길이 너무 멀다. 행선지(行先地)를 밀양의 영남루와 위양지로 바꿔 우중(雨中)에 출발한다.밀양의 영남루는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한국의 3대 누각이라고 큰아들은 힘주어 말한다. 내리는 빗발 속에서 영남루 누각에는 오르지 못하고 아래에서 살펴볼 따름이다. 사명대사 동상과 무봉사(舞鳳寺)의 석조여래좌상을 뵙고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흉상과 생가를 구경하고 위양지로 옮아간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대구에서는 끝물인 이팝나무에 하얀 꽃송이가 탐스럽게 달릴 것이라 기대한 나는 ‘어이쿠’ 한다. 몇몇 작은 나무에만 꽃이 흐드러졌을 뿐, 거목에는 이제야 대궁이 얼굴을 내밀고 있던 터다. 저수지를 한 바퀴 돌면서 대화를 잇다가 길이 물에 잠긴 곳에 이른다. 황토물이 거리를 막아서는 바람에 다수가 걸음을 돌린다.이런 작은 곳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는 밀양시청의 둔감함을 생각한다. 노자는 이것을 ‘견소왈명(見小曰明) 수유왈강(守柔曰强)’이라 했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다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이쯤에서 여행을 마감한다. 남산 자락에 구름이 자꾸만 올라간다.

2023-05-07

아이를 죽이는 교육

김규종 경북대 교수 5월 5일은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날은 일 년에 단 하루 있는 어린이 ‘해방의 날’이다. 한국의 어린이들이 공부에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혹사당하고 있는지를 보다 못한 유엔이 나서서 어린이들에게 휴식과 놀이를 권고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지구촌에서 이토록 가혹하게 어린이들을 공부로 닦달하는 두 나라가 있으니, 인도와 한국이다.교육에 관한 대표 저서로 사람들은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꼽는다. 당연한 일이다. 1762년에 출간된 ‘에밀’은 260년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시의성과 설득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에밀’이 출간된 해에 조선의 영조는 27살 먹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굶겨 죽였다. 문명과 야만의 지극한 대비가 선연하다.‘에밀’이 출간되기 7년 전인 1755년에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기막힌 통찰을 선보인다. 학문은 무위에서 예술은 사치에서 나왔다고 일갈한 것이다. 그 문장을 읽던 순간 온몸을 관통(貫通)하는 전율에 잠시 눈을 감아야 했다. 농업혁명으로 촉발된 잉여(剩餘) 농산물이 불러온 계급과 문명 그리고 국가의 탄생이 얼마나 많은 것을 변화시켰던가!훗날 출간된 ‘사회계약론’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이론적 기반이 되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유럽 제국주의가 남미의 은을 약탈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유럽의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여 계몽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마침내 산업혁명과 정치혁명까지 일어나 유럽은 그야말로 근대를 일구는 첨병으로 세계사를 쥐락펴락하지 않았던가!‘에밀’을 읽다 보면 수능시험 하나로 귀결되는 우리의 초중등 교육의 야만적이고 살인적인 경쟁교육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어린이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참혹하고 처절한 교육 아닌 교육이 교육의 탈을 쓰고 주인 행세하는 나라! 어린이를 타고난 본성에 따라 교육해야 인간답게 아이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루소가 살아있다면 뭐라 할 것인가?!노예처럼 공부만 하는 아이는 불행하다고 외치면서 루소는 미래 행복을 위해 시작하는 교육은 야만이라 못 박는다. 대학입시 하나만 보고 초등에서부터 선행학습으로 달려가는 이 나라의 21세기 극성 엄마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하는 18세기 ‘에밀’. 어린이를 천재 혹은 수재로 만들고 싶어 안달 난 숱한 엄마들에게 경종을 울리면서 루소는 말한다.“어린 시절 지나친 독서는 아이에게 재앙이다. 호기심으로 글자를 익히게 하고, 아이의 어휘를 아이에게 맞는 수준으로 제한하라. 아이는 농부처럼 일하고, 철학자처럼 사고해야 한다.”공부 잘하는 자식을 선전하고 과시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힌 엄마의 과욕이 아이를 정신적·육체적 예비 장애인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참혹한 현실! 자기의 말을 노예처럼 순종해야 착하다고 머리 쓰다듬는 엄마는 미래에 자식이 남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루소는 질책한다. 당신이 아이를 위한다는 구실로 강요하는 살인적인 교육을 그만두지 않으면 아이는 평생 고통받을 것이다. 이제는 제발이지 멈출 때다.

2023-04-30

같은 것 달리 보기

김규종 경북대 교수 얼마 전 중간시험 감독을 하다가 손에 얻어걸린 작은 책자를 읽다가 생각에 잠긴다. 몇 년 전 우리 학과에서 초빙한 신임 교수의 글에 눈과 마음이 간 것이다. 그는 20년 전의 자신과 요즘 학생들을 비교하면서 아주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학생들을 평가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2020년대 대학생들이야말로 단군 이래 최고의 이력과 지적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이다.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수많은 지식과 정보에 노출되고, 체험을 통해서 예전 세대가 꿈도 꾸지 못한 것을 몸소 경험한 세대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어린 시절부터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과 친하기에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는 얘기도 덧붙인다. 그들만큼 뛰어난 지식과 정보를 가진 세대는 일찍이 우리에게 없었단 것이다.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화기에 백과사전이 내장돼 있기에 필요한 어휘나 골자만 써넣으면 언제 어디서든 정보가 얼굴을 내미는 세상 아닌가?! 따라서 그는 요즘 세대를 걱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지 말고, 외려 그들의 가능성과 미래를 믿는 편이 낫다고 결론 맺는다.나는 그에게 동조하기도 하지만, 생각은 다르다. 2020년대 청년들이 휴대전화로 지식과 정보 검색 능력이 탁월하다는 사실엔 동의한다. 빠른 손놀림으로 그들은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휴대전화에서 얻는다. ‘전광석화(電光石火)’라는 말은 이런 때 쓰라고 만들어진 ‘사자성어(四字成語)’다. 문제는 이런 사자성어나 고사성어를 청춘들이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있다.중고등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볼멘소리가 교수들 입에서 나온 지 한참 지났다. 세계사나 인문 지리를 공부하고 진학한 인문대나 사회대, 경상대 학생들이 거의 없다. 한국사는 물론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 역시 깜깜이다. 시험을 위한 시험 ‘수학능력시험’에 맞춰서 찍는 훈련만 한 것인지 속이 답답할 지경이다. 모든 면에 너무나 캄캄절벽이다.전화기에 들어있는 지식과 정보는 어떻게 쓰려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필요한 지식과 정보는 그때그때 주머니에서 머리에서 가슴에서 꺼내서 쓸 수 있어야 의미가 있다. 그런데 잠시만요, 하고 검색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가장 큰 문제는 독서량의 절대 부족과 기본적인 한자 혹은 한문 능력 부재에 있다.손가락 몇 번 두드려서 얻어내는 지식과 정보는 이내 잊힌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나가고 상실한다. 고금동서 막론하고 진리다. 여기저기 책을 읽고 어렵게 찾아가며 묻고 기록하고 생각하면서 얻어야 진정한 지식과 정보로 남는 법이다. 더욱이 우리는 중국과 일본, 대만과 함께 유구한 ‘한자문화권’에 속한다. 최소한의 한자나 한문은 지식 습득에 필수적이다.각고(刻苦)의 고생 끝에 대학에 온 것은 대견하고 환영할 일이지만, 수능을 대신할 근본적인 방안이 모색되어야 할 때다. 강제된 독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독서와 한문 공부도 절실하다. 봄이 깊어가는 시절에 새삼 젊은이들의 오늘과 내일을 생각한다. 곧 소쩍새 울 것이다.

2023-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