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국뽕과 대한민국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지난 3월 초, ‘한국인이어서 미안합니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칼럼이 한 중앙 일간지에 실렸다. 칼럼의 필자인 기자는 미국 출장 후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미국인 승객이 마스크를 쓰고 주변을 소독하는 모습을 보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국인이어서 미안했다고 적었다. 이 칼럼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비난의 댓글들이 꼬리를 물었고, SNS에서는 칼럼에 비판적인 글들이 한동안 봇물 터지듯 했다.미안함을 느꼈다는데, 어쩌랴. 그의 미안한 감정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고 싶지 않다. 다만 합리적이지도 않고 논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개인적 감정의 글이 버젓이 실리는 신문에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다.이제 상황은 역전되었다. 3월 31일 코로나19 실시간 상황판(https://coronaboard.com/)에 따르면, 확진자가 발생한 203개 국가 중에서 미국은 16만4천253명으로 이탈리아의 10만1천739명을 훌쩍 뛰어넘어 확진자수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은 11위 네덜란드, 12위 터키에 이어 확진자 9천786명으로 13위이다. 14위 오스트리아나, 15위 캐나다의 확진자수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데 비하여 한국은 주춤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순위는 곧 더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완치율은 55.3%로 93.3%의 중국, 57.3%의 바레인에 이어 3위이고, 치명률(사망률)은 1.7%로 한참 뒤에서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낮은 순위인 82위이다.우리 의료진과 방역당국의 피땀을 보여주는 기록이다.상황이 이렇게 되니 코로나19를 독감바이러스보다 못한 것으로 가벼이 치부하던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지난 3월 24일 코로나 대응의 가장 모범국가인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하여 진단키트의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국내 프로 스포츠 경기에서 뛰던 외국인 선수들이 불안한 마음에 자신들의 나라로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는 오히려 외국에 있는 선수들이 안전한 나라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한다. SK와이번즈 소속의 외국인 선수 로맥은 캐나다에서 아내의 출산을 도운 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은 코로나19 확산을 성공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한국 국민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적극 실천하고 있고, 사재기도 없다”면서 한국의 안전함을 세계에 알렸다.국뽕이라는 말이 있다. 국가와 히로뽕을 합친 유행어로, 극단적인 민족주의 또는 자국우월주의의 행태에 대한 부정적인 뜻을 품고 있다. 통계 숫자를 나열하고 외국 언론의 찬사를 언급하며 한국의 코로나19 대처 상황을 미화하거나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과도하게 자랑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것이 멈춰 선 가운데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유초중고에서 대학까지의 교육도,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힘겹고 심각한데 굳이 국뽕처럼 굴 일은 아니다.그래도 나는 대한민국이 자랑스럽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좋다.혹시 기자의 옆자리에 탔던 그 미국인은 미국인이어서 미안하다는 생각을 지금 가지고 있을까? 아직도 기자는 자신이 한국인인 것이 미안할까?

2020-03-31

‘좋아요’를 누르고 싶다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2002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마크 주커버그는 2003년에 재학생들의 사진을 올려놓고 누가 더 매력적인지를 투표하도록 하는 ‘페이스매쉬’(facemash) 사이트를 만들었다. 그러나 사생활과 지적 재산권 침해라는 이유로 대학 당국은 곧바로 사이트 차단에 나섰고, 주커버그는 근신처분을 받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페이스북(Facebook)은 이렇게 장난처럼 시작되었다.2004년에 만들어진 페이스북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주커버그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고 지금은 세계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플랫폼이자 소셜 미디어가 되었다. 2020년 1월 통계자료에 따르면 페이스북의 월간 이용자는 전 세계적으로 2억4천여만 명에 이르고 미국 성인의 71%가 페이스북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최근 인스타그램 이용자가 많이 늘어나고 있지만, 모든 세대를 통틀어서 한국인이 가장 오래 사용한 SNS 앱은 페이스북이며 2019년 5월 한 달 간 총 46억분의 시간을 페이스북에 쏟아부었다고 한다.일상의 삶에서 우리말을 잘 가꾸어 쓰자는 생각을 가진 나는 2012년부터 얼굴(사진과 동영상)과 얼(정신과 생각)을 가지런히 정리해놓은 책장이라는 뜻에서 페이스북을 ‘얼책장’으로, 흔히들 ‘페친’이라고 부르는 페이스북 친구를 ‘얼벗’으로 뒤쳐 부르고 있다.얼책장을 통해 얼벗들의 밝은 얼굴을 보고 생각을 읽고 삶을 엿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얼벗들이 제공하는 자료들을 통해 지식을 쌓기도 하고 좋은 정보를 얻기도 하니 이로운 점도 상당하다. 그들이 올려주는 글과 사진 등을 보며 ‘좋아요’를 지긋이 눌러주는 것은 ‘소확행’의 하나이다. 내가 올린 글에 댓글이 많이 달리고 ‘좋아요’ 숫자가 늘어나면 ‘관종’(관심종자-타인의 관심과 이목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는 얼책장을 통해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좋아요’를 누름으로써 마음을 잇는다.하지만 슬프고 힘든 일, 나쁜 소식을 전하는 글이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은 마뜩잖은 일이었다. 2016년 2월부터 얼책장에는 ‘좋아요’ 외에 ‘최고예요’, ‘웃겨요’, ‘멋져요’, ‘슬퍼요’, ‘화나요’ 등 여섯 가지 그림기호가 생겼다. 공감 반응의 다양성이 확보되었지만, 가장 많이 누르는 것은 역시 ‘좋아요’이다.그런데 요즈음 ‘슬퍼요’나 ‘화나요’ 기호를 누르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삶의 현장에 힘겨워 하는 많은 이들의 글, 사람의 발자취가 사라진 썰렁한 거리를 보여주는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 그 내용이 아무리 공감이 되고 좋아도 ‘좋아요’보다는 ‘슬퍼요’에 손이 멈춘다. 슬픈 이야기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가짜 뉴스는 보고 싶지 않다. 이 와중에 거짓된 정보나 가짜 뉴스를 전하는 글을 보면 맨 구석에 있는 ‘화나요’ 기호를 굳이 찾아 누르게 된다.코로나19는 소셜 미디어에서의 감정 표현마저도 이렇게 바꾸어 놓고 있다. 다시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 ‘좋아요’를 마음껏 누르고 싶다. 그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소망한다.

2020-03-17

입 막은 사람들의 도시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그런 말 마시오, 오늘은 당신이 이런 꼴을 당했지만, 내일은 내가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는 거 아니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요”199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Jos00E9 Saramago)가 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첫 장면에 나오는 대사이다. 운전을 하여 집으로 가는 도중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남자가, 자신의 차를 대신 운전하여 집으로 데려다 주는 남자에게 고마움을 표하려 하자 운전대를 잡은 남자가 한 말이다. 이렇듯 눈먼 자를 위로하며 친절하게 집에까지 데려다 준 남자는 눈먼 자의 차를 훔치는 도둑으로 전락하고, 머지않아 그도 눈이 멀고야 만다.이 장면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하나둘씩 실명하게 되고, 결국은 ‘의사의 아내’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도시 사람들 모두가 눈이 멀게 된다. 정부는 이 도시의 눈먼 사람들을 차례차례 정신병원으로 쓰던 건물에 격리 수용한다. 소설은 수용소 안에 일어나는 사람들의 야만적이고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참혹하면서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소설에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없다. ‘눈먼 자들’의 이름은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 어느 누구도 서로를 볼 수 없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자, 이성이 닫히고 윤리의식을 내팽개치는 사람들, 필부필부(匹夫匹婦) 바로 우리들의 본능적이고 추악한 자화상 노출이 있을 뿐이다.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잘못된 정보와 가짜 뉴스도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추악한 ‘눈먼 자들의 도시’가 아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눈을 크게 뜨고 사실을 보아야 한다. 귀를 바로 열고 진실을 들어야 한다.지금 대한민국은 마치 ‘입 막은 자들의 도시’와 같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는 집밖을 나설 수가 없다. 마스크 몇 장 구하러 수많은 시민들이 황망히 뛰어다니고, 마스크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정부와 지자체는 부단히 애쓰고 있다. 바이러스는 신분과 지위의 높고 낮음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도시와 농어촌을, 여와 야를, 국적을 따지지 않는다. 그러니, 바이러스의 위세가 잦아들 때까지는 코와 입을 잘 막고 있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도 내 이웃을 위해서도 마스크를 쓰는 것이 옳다.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써야 하지만, 과도한 비난과 비판의 제어를 위해서도 입을 가려야 한다. 중앙정부의 인식이 안이했다고 비난할 수 있다. 지자체의 부실하고 부적절한 대응을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전시 상황에 버금가는 엄혹한 시기이다. 내부의 다툼은 잠시 멈추어야 한다. 서로를 다독이고 하나된 우리를 세워나가야 할 때 아닌가.코로나19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자. 불안과 공포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도록 입을 함부로 벌리지 말자. 차별과 비난의 바이러스가 나에게서 새나가지 않도록 입은 꾹 닫고 마음은 활짝 열자.“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요.”차 도둑의 내일은 불행으로 귀결됐지만, 우리들 내일의 ‘무슨 일’은 부디 좋은 열매이기를!

2020-03-03

박쥐가 이중적이라고?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박쥐 때문에 세상이 뒤숭숭하다. 그것도 경자년 쥐띠 해에 말이다.동굴 등 음습하고 어두운 곳에서 살고 활동도 주로 밤에 하는 데에다가 검은 몸 색깔에 얼굴 모양도 흉측하기까지 하여 그리 호감이 가지는 않는 박쥐는 바이러스의 숙주라는 이유로 지금 불호가 더 심해졌다. 서양에서도 박쥐는 여전히 혐오스러운 동물로 대접받고 있다. 혹, 영화 ‘배트맨’ 덕에 조금은 나아졌을까?날다람쥐도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활공을 하는 것이라서, 스스로 날 수 있는 포유류는 박쥐가 유일하다고 한다. 박쥐는 설치류인 쥐와는 전혀 다른 포유류 종이다. 그렇지만 한자로도 비서(飛鼠), 선서(仙鼠), 천서(天鼠)이라 하여 날아다니는 쥐로 묘사하고 있으니 박쥐가 쥐처럼 인식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이솝은 새 무리에 붙었다가 짐승 무리에 붙었다가 결국은 양쪽 모두에게 버림받은 박쥐를 통해 ‘양다리 걸치기’를 꾸짖고 있다. 홍만종(洪萬宗)도 ‘순오지(旬五志)’에서 기회주의적인 사람의 행동을 편복지역(蝙蝠之役)이라 표현하고 있다. 편복(蝙蝠)은 박쥐의 또 다른 한자 이름으로, ‘편복지역’은 ‘박쥐같은 구실’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이소포스(이솝)가 지은 우화를 조선시대 홍만종이 읽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박쥐는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박쥐는 양다리 걸치기를 하지도 않고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하기야 사람 말고 이중적인 동물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더욱이 모기, 나방, 작물을 해치는 벌레들을 하루에도 수백 마리씩 잡아먹음으로써 인간에게는 이로운 동물이다. 중국에서는 ‘편복’의 ‘복’이 복(福)자와 소리가 같아 박쥐를 먹는 것이 복을 받아들이는 행위로 여겨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통 가구나 생활용품, 노리개의 장식에도 박쥐문양을 넣음으로써 복과 행복을 생활 속에 담고자 했다. 이처럼 박쥐가 사람들에게 부정적 인식과 함께 긍정적으로도 받아들여진 것이 박쥐의 이중성이라면 이중성이라고나 할까.뜬금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박쥐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 이육사는 시 ‘편복(蝙蝠)’에서 “가엾은 박쥐여! 영원한 보헤미안의 넋이여!”, “가엾은 박쥐여! 멸망하는 겨레여!”라고 노래하였다. 시인에게 일제 강점기 국권을 빼앗긴 조국은 어두운 동굴이었고, 그 동굴 속을 떠돌며 살아가는 신세가 된 우리 겨레는 가엾은 박쥐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가엾은 박쥐가 아니다. 일본은 크루즈 선을 바이러스의 배양 접시처럼 만듦으로써 많은 나라들에서 비난을 받고 있는 반면에 한국은 신속하고 적절한 대응으로 칭찬을 받고 있지 않은가!박쥐는 혐오스럽게 보일망정 이중적이지도 가엾지도 않은 동물이다. 복이라는 소리가 같다고 박쥐를 잡아먹는 인간이 어리석고, 어떻게 해서라도 복을 좇는 인간의 욕심이 비난받을 일이지 자연에 순응하여 살고 있는 박쥐는 죄도 잘못도 없다.억울한 박쥐를 자연에 놓아주고, 인간의 욕심을 탓하고 거둬들여야 할 것이다.

2020-02-18

태산(泰山)과 바이러스(病毒)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큰 사건이 터진 후 뒤처리가 어정쩡하고 미흡하게 보일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회자되는 이 말은 쥐띠해인 2020년 올해에는 더더욱 탐탁스럽지 않게 들린다. 그런데, 쥐와 비교할 수조차 없이 작은 바이러스가 새해 벽두부터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바이러스는 온전한 생명체가 아니다. 미생물인 박테리아의 측정 단위가 마이크로미터(1백만분의 1m)인데 비해 바이러스는 그 단위가 나노미터(10억분의 1m)이다.바이러스(病毒)에 태산명동(泰山鳴動)! 고성능 현미경으로 겨우 볼 수 있는 바이러스로 인해 지금 태산이 울고 있다. 중국 온 나라가 질병의 재난 속에 휩싸여 있다. 중국 우한(武漢)이라는 도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병의 확산은 세계를 불안과 공포로 떨게 하고 있다. ‘갈수록 태산’이고 ‘걱정이 태산’ 같다.우한의 834킬로미터 북동쪽에 태산이 있다. 중국에서는 옆 동네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다. 태산은 우리 산들과 비교해도 그리 높은 산이 아니다. 최고봉의 높이가 1천535미터로 지리산의 한 봉우리인 토끼봉과 얼추 비슷하다.(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 높이는 1천915미터이다.) 그런데도 태산은 중국 오악 중 하나로, 중국 최고의 산으로 대접받아 왔다. 공자도 ‘동산에 오르니 노나라가 작게 보이고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게 보인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고 하였다.이러한 태산의 위용을 앞세우고 ‘메이드 인 차이나’를 지구촌 구석구석에 전파하며, 자본주의로 무장한 미국과 더불어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며 세계화에 앞장서던 ‘큰나라’ 중국이 작디작은 바이러스로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것이다.1973년 독일의 경제학자 E. F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성장지상주의를 경계하였다. 경제 성장이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온다고 하여도 환경 파괴와 인간성의 파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면 성장지상주의는 맹목적인 수용의 대상이 아닌 성찰과 반성의 대상이라고 지적하였다. 성장보다는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을 통한 환경과 인간성의 회복을 주창하였다.그러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autiful)라는 말은 세계화의 거대한 파도에 밀려 그저 아름다운 한 문장으로 박제화 되다시피 하였다. 인터넷과 항공망에 의해 세계는 촘촘히 연결되어 있고, 물적 인적 교류는 슈마허의 지적을 비웃듯이 나날이 거대화되고 있다. 세계화, 거대화는 이미 부인의 단계를 넘어섰지만, 부작용 또한 어마어마하다. 연결된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바이러스 질병이라는 부정적인 면을 우리는 눈앞에서 보고 있다. 중국의 한 도시에서 시작된 병은 더 이상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성장과 세계화의 탄탄대로를 질주하는 듯이 보이던 인간의 모습은 얼마나 초라한가.작은 것이 두렵다(Small is Fearful)! 중국이, 한국이, 전 세계가 떨고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명제가 참이 되도록 만들 수는 없을까?마스크를 쓰며 옷깃을 여미고 겸허해질 시간, 지금이다.

2020-02-04

문패, 말과 삶의 결을 새기다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문패가 사라졌다.1970~80년대만 하여도 집집마다 철문이나 나무문의 기둥에 문패가 걸려 있었다. 지방은 어땠는지 잘 모르지만 적어도 서울의 주택가 골목골목에는 집주인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문패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이웃하여 살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조선 말기 우편제도가 발달하고 편지의 내왕이 빈번해짐에 따라 문패는 꼭 있어야 할 필수품이 되었고 1897년경에는 집집마다 문패를 달도록 법으로 정하기까지 하였으며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하여도 가끔 문패달기를 사회계몽운동으로 벌이기도 하였다고 한다.골목길을 헤매다 지인의 이름이 적힌 문패를 찾아내었을 때, “잘 찾아 오셨네요. 나 여기 있어요.”하며 반기는 듯한 문패는 그 자체로 집주인의 대체물이었고, 찾은 이에겐 적잖은 기쁨이었다. 아주 드물게 두 개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문패를 발견하였을 때는, 그 집 부부의 애틋한 사랑이나 혈육의 돈독한 정을 엿보는 듯하여 마음 한 켠이 반짝, 환해지기도 하였다.그런데 동네 골목에서 언제부터인가 문패가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 대신 주소만 적힌 작은 양철판이 문기둥을 벗어나 대문 한 귀퉁이에 부착되었다. 그러다가 도시 농어촌을 가릴 것 없이 하늘을 찌르는 듯한 아파트가 솟아올라오면서부터는 주소를 적은 이 작은 판마저 떨어져 나갔고 여러 겹 안전장치로 무장한 아파트 현관문 밖에는 층수와 호수가 덩그마니 적힌 숫자판이 자리를 잡았다.우리는 이제 ‘이 아무개’씨라는 이름이 아닌 ‘190X호 사장님, 60X호 아기엄마’라는 호칭과 지칭으로 살아간다. 앞집, 아래윗집에 누가 사는지 몰라도 된다. 위층에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정겹다고? 퉁탕거림을 듣는 게 고역이다. 아랫집에 위대한 피아노 연주가가 산다는데 뿌듯하지 않냐고? 초저녁잠 방해받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층간 소음, 담배 연기로 다툴 일이 없다면 그걸로 족하다. 문패가 사라지자 이름이 없어지고, 얼굴이 가려지고, 인정이 증발하였다.‘달골말결’이라는 이름을 새겨 이 글자리 문패를 걸었다. 어렵단다. 뭔 말인지 머리에 쏙 들어오지 않는가 보다. 한자로는 ‘월곡언문’(月谷言紋)이 된다. ‘월곡’은 내가 나가는 대학이 있는 동네 이름이다. ‘글월’과 ‘무늬’라는 뜻을 가진 文을 써서 ‘言文’으로 적을까 하다가 무늬 紋을 써서 ‘言紋’이라 하였다. 이를 풀어쓴 게 ‘달골말결’이다. 내가 가르치는 ‘독서, 글쓰기, 말하기’ 등의 교과목은 인문학의 기초이자 세상 모든 학문의 기본이 되는 것들이다. 나는 인문학을 사람의 무늬, 사람의 결을 다루는 학문으로 여긴다. 많은 이들이 인문학을 배고픈 학문, 위기의 학문이라 하지만 사람의 결을 곱게 하고 가다듬는 학문이라는 사실이 배고픔을 잊게 하고, 위기 상황을 견뎌내게 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생활의 무늬, 삶의 결을 그려나가고 보여준다. 내 생활의 무늬는 아름다운지, 내 삶의 결은 가지런한지, 내 말과 글을 살펴본다.내 문패를 달고 나니, 결 고운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따뜻한 그 얼굴을 보고 싶다. 집집마다 걸려있던 문패가 새삼 그립다.

2020-01-21

고래와 쥐구멍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니는 평~생 미용해서 먹고살 팔자 같다.”칭찬처럼 들리는가? 어떤 이에게는 심드렁하니 들릴 수도 있는 이 말 한 마디가 경북 구미의 열일곱 살 고1 중퇴생의 삶을 바꿔 놓았다. 어쩌면 칭찬 같지도 않은 미용실 원장의 칭찬이 아버지의 매질에 소매치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소녀를, 척박한 삶을 살아가는 청소년 100여 명의 어머니이자 걸그룹 멤버의 ‘금수저’ 엄마로 만든 것이다. 유명 아이돌그룹 AOA의 멤버 찬미의 어머니 임천숙씨의 이야기이다. 열흘 전 쯤 어느 일간지 실린 임천숙씨의 인터뷰 기사는 팍팍한 연말연시를 환하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2002년에 미국에서 ‘Whale Done!’이라는 책이 출판됐다. ‘Whale Done!’을 우리말로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well done’(잘 했어)과 비슷하게 발음되는 이 책제목을 굳이 직역하면 ‘고래가 해냈어!’쯤 될까? 이 책은 2003년 1월에 한국에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니! 참 잘 지은 번역 제목이다. 이 문장은 마치 오래전부터 있던 속담처럼 퍼져나갔다. 책은 읽지 않았어도 이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우리는 칭찬에 목말라 한다. 나는 아니라고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땅에 칭찬이 귀하디 귀하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 오랜 달리기 끝에 물 한 모금을 구하듯, 칭찬을 찾아 헤매지만 나남 없이 칭찬을 듣기 어렵다. 반면에 갈등과 질시와 반목과 비방은 곳곳에 널려 있다. 건전한 비판을 잃어서는 안 되지만 내 편과 남의 편을 너무도 확연히 가르고, 있는 잘못 없는 죄 찾아 상대방을 발가벗기기에 애쓰는 것이 이즈음 대한민국의 세태요 현실이다. 여와 야가, 진보와 보수가, 경영진과 노동자가, 경상도와 전라도가, 남과 여가 칼날을 벼리고 주먹을 겨누고 등을 돌리고 있지 않은가. 잘잘못을 가리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은 밝히고 죄는 벌하되, 거기까지이다. 이제는 참회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경자년 쥐의 해가 밝았다. 하느님의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의 머리 위에 올라타 있다가 문 앞에 이르러 냉큼 뛰어내려 1등을 훔친 쥐의 행위를 약삭빠르다고 욕하고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쥐해가 되면 이것이 슬기로운 행동으로 해석된다. 쥐해가 되면 양식을 축내며 구멍 속으로 도망 다니는 쥐를 부지런하다고 칭찬하고, 그 번식력을 칭송한다. 뚱뚱하다고 게걸스럽다고 돼지를 욕하다가도 돼지해가 되면 다산의 상징으로 풍요의 모델로 추켜세워 주는 것이 해를 이어 열두 동물을 맞이하는 우리들 칭찬과 긍정의 모습 아닌가. 지난해도 그랬고 내년도 그럴 것이다.이 칼럼 집필 제의를 오랫동안 고사했다. 그러다 추천하시는 분의 칭찬과 격려에 결국은 손을 들면서 말했다. “저는 고래가 아니라 쥐과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칭찬에 숨을 구멍을 먼저 찾습니다.”상대방이 쥐구멍을 찾을지언정 올해는 열심히 칭찬거리를 찾아서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세워보면 어떨까.

2020-01-07